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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매일의 삶

애국심은 그런 게 아니다

beautician 2016. 9. 1. 10:00

 

 

애국심 사건

서울 모 교회의 최연소장로가 된 심사장은 거래선 사장들에게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전직장에 근무할 당시의 나에게는 자카르타에 올 때마다 밤거리의 홍등가를 주름잡의 밤의 황태자의 모습을 곧잘 보여 주었다. 그런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을 내게 모두 보여주었던 이유는 아마도 내가 그를 어떻게 할 수 없는 보잘것 없는 위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든지 아니면 거룩한 집안에서 태어나 완전 사이비 교인이 되어 있는 내게 비슷한 동류의식을 느껴서인지도 모른다.

내가 전직장을 그만두고 중소기업의 동업자 중 한명이 되었을 때 그의 태도는 많이 변해 있었다. 대기업이었던 전직장의 후임공장장 내정자였던 당시에는 모든 약속에 어김이 없었지만 내 직장이 바뀐 후부터는 여차하면 약속시간을 뒤흔들어 버리기 일쑤였다
.

심사장에게서 저녁식사 하자는 전화가 온 날, 마침 서울 본사에서 동업자들도 출장와 있었고 릴리의 생일파티도 겹쳐 있어 겸사겸사 끌라빠 가딩(Kelapa Gading)의 방콕 식당에서 연 파티에 거꾸로 그를 초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생일을 맞은 릴리나 직원 에피, 그녀들이 초대한 친구들 몇 명, 그리고 파티를 주최한 나와 본사친구들이 오래 기다린 끝에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 반이나 늦게 반바지 차림으로 나타난 그는 연습장에 공좀 치다 늦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었다. 릴리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는 것을 보았지만 다행히 그녀의 불같은 성격이 아직은 폭발하지 않았다. 문제는 조금 후에 벌어졌다
.

이미 늦은 저녁식사가 대충 끝나고 귀가시간에 쫒긴 에피가 먼저 일어서야겠다면 양해를 구할 때 이미 꽤 술을 마신 심사장이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내는 시늉을 하면 에피를 불렀다
.

"
이거 좀 볼래
?"

그러나 에피가 다가서자 심사장이 한 행동은 에피를 와락 껴안으며 입을 맞추는 것이었다. 그가 가라오케에서 늘상 하던 행동이었다. 인도네시아 여자들은 돈만 주면 언제나 안을 수 있다는 그의 시각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고 나나 우리 회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태도이기도 했다. 니들 정도한텐 내가 좀 이래도 괜찮지 않겠어…? 그는 자신이 우리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임을 드러내 보이려 골프장에서 일부러 시간을 죽이며 늦게 나타나면서도 더없이 당당했을 뿐 아니라 그 좌석에서 단연 눈에 띄게 아름다웠던 에피를 그렇게 술집여자 대하듯 한 것이다
.

놀란 에피가 허우적거리고 나 역시 눈알이 튀어 나올 듯 화가 치솟는 순간, 기대에 절대 어긋나지 않는 릴리의 회심의 반격은 가득찬 맥주잔을 심사장 바지에 쏟는 것이었다. 그녀다운 행동이었고 실수처럼 보이려 별로 애쓰지도 않았다. 펄쩍 뛰는 심사장의 얼굴은 시뻘겋게 일그러졌고 그날 밤 심사장과 우리의 거래는 종지부를 찍었다
.

"
그 일본넘이 내 옆 식탁에서 술먹고 있었거든요...호텔 카페에서
."

그런 일이 벌어지기 오래 전, 아직 내가 전직장의 No.2 이고 심사장은 아직 장로 서임을 눈앞에 두고 있을 당시의 일이다. ‘최연소 장로’ 가 된다는 사실만으로 한없는 존경심을 가지고 있던 우리 공장장은 심사장이 자카르타에 오기만 하면 거래가 없더라도 저녁식사를 대접하곤 했다. 그날도 그런 날 중의 하나였고 심사장은 그가 지난번 자카르타에서 일본사람 골탕먹인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


사실 내가 처음 입사했을 때만 해도 일본인 바이어들을 골탕먹이는 것이 곧잘 영웅적, 애국적인 행위로 간주되기도 하던 때였다. 대놓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술 좀 들어가고 나면 한국어를 못하는 바이어 뒤에서 쪽발이라고 소근거리는 것은 기본이었고 분위기가 허락하면 일부 튀려는 신입사원들 중에서는 태평양전쟁이나 일제학정, 종군위안부 문제를 거론하며 아무 상관도 없는 일본바이어에게 사과를 받아내는 것을 자랑삼기도 했다. 물론 심사장이 하려는 얘기는 그 정도 유치한 수준은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

그 자리가 그날 내게 좀 불편했던 것은 그날 원래 원단업체의 김부장과의 선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전 일차 자카르타 출장을 와 며칠간 가라오케에 출근부를 찍었다는 사실이 좁은 교민사회에 소문이 나면서 일을 떠나 우리 공장장과 창고장, 이 두 집사님들이 김부장을 바라보는 눈초리는 벌써 별로 곱지 않았고 그날 심사장에게만 싹싹하게 대하던 그들의 태도와 비교되면서 김부장이 내색은 안하지만 감정을 많이 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의 돈도 아니고 자기 돈으로 가라오케 간 건데 그날 원래 김부장과의 저녁식사에 예고도 없이 심사장을 합석시킨 것부터 그다지 예의에 합당한 일이 아니었고 집사님들 미움을 잔뜩 사고 있는 그의 이야기는 나오는 족족 무시당하고 있었다
.

물론 술이 좀 들어간 김부장의 혀가 조금씩 꼬이기 시작한 것도 또 다른 이유이긴 했다. 하지만 오늘 주객인 김부장 대신 두 집사님은 초저녁부터 심사장의 말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는 중이었다. 자꾸 말허리를 잘리는 김부장이 안쓰러워, 내가 듣고 있으니 계속 말씀 하시라고 하는 나한테마저 창고장은 심사장 말 좀 듣게 조용히 하라며 눈썹을 치켜 세웠던 것이다. 그때 심사장은 장로서임을 받기 위한 절차 중 하나로 일요일마다 교회에 몰려드는 차량들 주차관리 자원봉사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지만 하지만 나로서는 집사님들 환심을 얻으려는 그런 고상한 얘기들 보다는 김부장의 어눌하지만 솔직담백한 이야기에 좀 더 마음이 끌리고 있던 것이 사실이다. 자기가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김부장은 언젠가부터 입을 다물고 애꿎은 술만 들이키고 있었다
.

"
인도네시아 공장에서는 부자재가 어떻게 생산되어 공급되는지, 그 시스템을 전혀 이해 못하는 놈들이 많아서 그렇지않아도 일이 꼬이던 차에 옆에서 일본놈 껄떡거리는 꼴을 보니 한번 골려주고 싶어졌죠
." 

심사장이 사실은 자기들 뺨을 갈기고 있다는 것을 우리 두 집사님들은 깨닫지 못한다. 그 일은 심사장의 지난 출장 때 단추도금이 벗겨지는 문제로 우리 공장에서 클레임을 먹어 문제된 단추들을 교체해 주기로 한 일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날 밤 난 그를 호텔에 데려다 주고 바에서 그와 마주앉아 맥주를 마셨고 그러고 보니 옆 테이블에 한 중년 일본인 남자와 앉아있던 여자는 그전에도 심사장과 자주 같이 가곤 했던 일본인 클럽의 심사장 단골파트너 제니라는 롱다리 미인이었다. X, 아무한테나 벌려대는군...하며 흘겨보던 그의 눈길도 기억난다


계속되는 심사장의 이야기를 간추리면 이렇다


그날 그 일본인과 제니가 객실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그렇찮아도 상한 기분을 완전히 잡친 심사장은 나를 보낸 후 바에서 옆 테이블에 앉았던 일본인의 룸번호를 알아 내고 호텔 안에 설치된 공중전화로 프론트에 물어 그 일본인의 이름과 그가 이미 두 달 간 장기투숙하고 있음을 알아내는 수완을 발휘한다. 아마도 지사설치를 위한 사전작업을 위해 자카르타에 들어온 어떤 회사의 선발대원 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 일찍 용무를 마친 심사장은 빌린 핸드폰으로 인도네시아 보사부 직원을 사칭하며 그 일본인에게 영어로 전화를 건다. 인도네시아인이라면 영어가 유창하지 않아도 문제되지 않고 두 달 정도 체류한 일본인으로서 영어만으로는 인도네시아인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

"
여기 보건국인데...어제 '유끼'클럽에 있는 제니란 아가씨가 거기서 잤지요
?" 

심사장이 만들어낸 시나리오에는 그의 기지가 번득인다. 제니는 에이즈 감염자로 오늘 오전 보사부 단속반에게 검거되었는데 그 일본인이 어젯밤 같이 잤다는 것을 자백했다. 그러니 오늘 오후 5시까지 보건국에 자진 출두하지 않으면 보사부 직원들이 직접 그를 연행하러 호텔에 들이 닥칠 것이다. 호텔에는 좀 폐가 되겠지만 에이즈에 감염된 것이 확실한 외국인이 계속 다른 인도네시아 여자들에게 전염시키는 것을 방치해 둘 수는 없다. 일단 보사부에 동행하게 되면 보건국 시설에서 며칠간 억류된 상태로 검사를 받은 후 양성반응이 확인되면 강제 추방되는 것은 물론 일본 관계당국과 일본에 있는 가족들에게 동 사실을 통보해 주어야 한다
.

그 일본인이 기겁을 한 것은 당연하다. 심사장은 미리 주도면밀하게 확인해 둔 인도네시아 보사부 전화번호와 주소도 자세히 알려준다. 그 게임에서 그렇게 적을 완전히 속인 후 완벽한 승리로 치닫기 위해 그는 다음 단계로의 진행을 늦추지 않는다


물론 이 일이 당신에게 매우 불행한 사건인 것은 이해하지만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다. 단 하나 방법이 있다면 외국인을 억류하는 것이 보사부로서도 여러가지 문제가 있으니 24시간 내에 인도네시아를 떠나고 일본 관계당국에 자진 신고한다면 인도네시아 보사부에서는 불문에 붙일 수 있다. 하지만 24시간 내에 출국이 확인되지 않고 보사부에도 출두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이 공권력을 동원해 보사부 시설로 데리고 올 수 밖에 없다.... 그런 내용이었다
.

그렇게 전화를 마친 심사장은 다음날 용무를 본 후 저녁 무렵 넌지시 호텔에 전화하여 그 일본인을 바꿔 달라고 했다. 그 일본인이 그날 아침 체크아웃 했단다. 심사장은 시나리오가 완벽하게 먹혀 든 것이다. 간밤에 유끼클럽에 확인전화 한 통 했으면 될 것을 그 일본인은 너무 큰 충격에 휩싸여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 틀림없다. 이로서 한국 대 일본 1 0, 한국의 완승으로 끝난 이 이야기에 두 집사님은 일본놈들은 그런 꼴을 당해도 싸다며 심사장의 선전을 축하하였다. 연거푸 들이킨 소주에 이미 맛이 간 김부장만 별반 무반응일 뿐이었다
.

단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그것도 하필 단골 가라오케의 단골 아가씨가 같았다는 이유만으로 무자비한 심리적 테러를 당한 그 일본인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비록 사기이긴 하지만 사실상의 사형선고를 받고 두달간의 자카르타 체제를 허둥지둥 끝내고 인도네시아를 떠나는 비행기에 타고 만 그의 밀려드는 공포와 참담한 심경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만일 그가 일본에서 에이즈 테스트를 받았다면 모르되 심사장의 말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숨기기에만 급급했다면 그의 회사와 가정생활, 그리고 그의 인생 역시 파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심사장의 범죄에 가까운 그 행위가 누구보다 사려깊고 더 넓은 포용력을 가졌어야 할 두 집사님들 사이에서 오히려 영웅적이고 애국적인 행동으로 찬양되는 것은 더더욱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심사장은 그렇게 영웅이 된 후 지금도 자카르타행 비행기를 타면서 그때의 만족감에 미소를 띄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건 애국심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고 하다못해 민족감정이라는 말로써 표현하기도 적당치 않다. 그건 단지 한국에서는 위엄있게 행동하다가도 외국에 나와 보는 사람들만 없으면 뭐든지 해치우고야 마는 이중적 인격의 전형이고 남이야 맘 상하든 다치든 죽든 상관없이 자기만 즐겁고 통쾌하면 그만이라는 이기심의 발로에 다름 아니다


특히 그 피해를 입은 상대가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한국사람들끼리는 그렇게 얘기해도 비난받기는 커녕 애국심을 드높인 사례로 받아들여지곤 하는 것은 밴댕이 속만큼도 안되는 얕은 소갈머리의 소산일 것이다. 애국심, 애향심, 애교심, 그리고 이런 '
'가 들어가는 모든 단어들은 아무데나 꼴리는 데로 처붙이라는 엿이 아닌 것처럼 또한 그것이 우리 작은 집단 밖의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됨은 더욱 분명하다



야누스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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