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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삶

살사카페 습격사건

beautician 2016. 9. 4. 02:45



자카르타에는 서구식 카페들이 많아 나는 서울에서 오는 손님들의 하드코어 가라오케 취향에도 불구하고 이들 카페들을 많이 모시고 다녔다.

 

예전에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총독부로 쓰였다는 건물의 바타비아(Batavia) 카페는 고풍스러운 건물에 높은 품격과 식민지 시대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했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BNI Kota 46 건물 1층에는 당시 수하르토 대통령의 서자라고 알려졌던 한 연예인 소유의 패션카페 (Fashion Café)가 있어 가끔 패션쇼도 볼 수 있었고 화려한 내부장식과 꽤 실력있는 밴드, 그리고 Anker Stout 흑맥주의 맛이 독특했다.

 

이외에도 수디르먄(Jl. Jend. Sudirman) 거리의 사리나(Sarinah)백화점에서 최근 EX 몰로 장소를 옮긴 하드록카페나 특급호텔에 딸린 이름있는 카페들, 말하자면 물리아(Mulia) 호텔의 CJ 클럽, 판 파시픽 사리나(Pan Pacific Sarinah) 호텔의 핏스탑(Pit Stop) 등이 즐비하지만 꺼망(Kemang) 지역으로 들어서며 카페들의 수는 점점 더 많아지고 모두 나름대로의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

 

밴드가 열정적인 음악을 쏟아내며 항상 손님들로 북적대는 짐바니(Jimbani), 아미고스(Amigos) 같은 곳이 있는가 하면 보통은 파리를 날리지만 라자냐가 꽤 맛있는 뉴스까페,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월드컵 당시 한국학생들이 모여 대~한민국!을 외치며 응원했던 맥도날드 옆 챔피온(Champion), 매일 밤 킬러게임(Killer Game)이라 부르는 포켓볼 당구대회를 하던 호주인들의 카페 더 비트(The Beat), 주말이면 틴에지저들로 만원을 이루는 물좋은 누차이나(Nu China) , 꺼망 라야(Kemang Raya)의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좌우에 수많은 카페들이 불야성을 이룬다.

이중에 내가 가장 즐겨 가던 살사(Salsa)까페는 라틴음악 전문의 라이브 카페였고 그곳의 이색적인 음악과 분위기에 난 흠뻑 매료됐었다.

 

맥도날드 꺼망점 바로 옆에 있던 살사카페는 좀 길쭉한 구조였고 입구를 들어서 테이블이 놓인 통로를 따라 약간 밑으로 내려가면 밴드가 있는 무대 앞에 꽤 큰 플로어가 있어 음악에 맞춰 손님들이 나와 차차차나 탱고 같은 춤을 추었다. 이 까페 전속의 라틴댄스 선생(선수?)들도 있어 저녁이면 화려하고 섹시한 옷을 입고 쌍을 이루어 나와 라틴댄스의 진수를 시범 보이곤 했다. 시내 꾸닝안(Kuningan) 어딘가에 있다는 라틴댄스스쿨의 학생들도 단체로 오곤 했는데 가끔은 카페의 댄서들이 손님을 끌고 나가 춤을 추기도 했고 단골들은 서로 잘 아는 듯 눈인사로 시작하여 좀 지나면 어느새 플로어에서 멋지게 함께 허리를 돌리고 스텝을 밟으며 춤을 추고 있었다.

테이블 단위로 경계를 짓는 다른 카페들과 달리 모든 테이블의 손님들이 함께 플로어에 어우러져 서로 만나고 알게 되고 사귀게 되는 분위기의 살사카페에는 그래서 서양인 손님들로 들끓었고, 일반적으로 인도네시아인 밴드가 주류를 이루는 다른 카페들과 달리 당시 살사에서는 정통 콜롬비아인들로 구성된 품격 높은 밴드가 공연을 하고 있었다. 라틴음악을 하는 다른 밴드들이 이들의 연주나 느낌을 따라오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이들이 본토 음악을 곧바로 공수해 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2~13명 정도인 밴드는 밴드 맨 앞에서 인형 같은 외모와 아담한 키에 간단한 타악기를 연주하며 간간이 노래도 부르던 미모의 홍일점 여자 단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부진 체격의 남자들이었는데 그들이 연주하던 타악기의 강렬한 비트와 트럼펫, 트럼본, 테너섹소폰이 이루어진 관악기 연주자들의 열정적인 표정과 신들린 듯한 연주가 아직도 눈에 보일 듯 귀에 들리는 듯 하다
.

이 살사까페가 라스카르 지하드(Laskar Jihad)의 청년 하부조직인 FPI(Front Pembela Islam ; 이슬람 수호전선)습격을 받은 것이 금식기간이 시작된 2000 12월 초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쩨(Aceh) 등 일부 이슬람 근본주의가 우세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무늬만 이슬람인 인도네시아에서 1998년 폭동직후 정부 주도로 구성되어, 당초 당시 대통령인 하비비 대통령의 반대데모를 하는 대학생 집단에 대항하면서 부각되기 시작한 라스카르 지하드(Laskar Jihad)는 ‘Jihad’ 라는 심상찮은 단어가 말해 주듯 무척 전투적인 준군사집단으로 발전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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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5월 폭동 후 모든 것이 예전과는 사뭇 다르게 변해버린 인도네시아에서 종족간, 종교간 분쟁이 비화되면서 암본(Ambon)과 말루꾸(Maluku) 지역의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유혈충돌이 발생했을 때 라스카르 지하드는 ‘성전’을 위해 민병대를 말루꾸에 파견하여 신의 뜻에 따라 기독교인들을 처단하겠다며 극단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실제로 적잖은 사람들을 보내 종교분쟁에 적극 가담하였고 수 천 명의 자원병들을 모아 자카르타 인근 모처에서 군사훈련을 시켰는데 당시 흰색 무슬림 전투복장에 빈 탄띠까지 두르고 십 수 대의 트럭에 분승하여 자카르타와 보고르를 잇는 자고라위(Jagorawi) 톨을 이동하는 이들의 모습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이슬람 수호를 위해 미국에 대항하여 아프간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독려하며 지원병을 모집한 단체도 이들이다. 최근 라스카르 지하드의 사령관이 살인교사 등의 혐의로 체포, 구금되었을 때 이 사람을 메가와티 대통령의 양해도 없이 함자하스 부통령이 독단으로 감옥까지 방문하여 위로함으로써 인도네시아 권력 상층부의 반목과 균열을 세상이 다 알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들은 실제로 일부 병력을 어떤 루트를 통해 아프가니스탄에 보내는 데에 성공하여 그들은 탈레반 측에서 서서 참전했으며 그들이 후일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졌던 일부 폭탄 테러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라스카르 지하드는 1999년부터 이미 심상찮은 조짐을 보이며 라마단의 금식기간(Puasa)에 문을 열고 있고 ‘인도네시아의 무슬림을 타락시키고 있는’ 야간 유흥업소들을 위협하는가 하면 시정부가 나서서 이들 업소들을 영업을 금지시켜야 한다며 시청에서 격렬한 대정부 시위를 벌여 시장의 호의적인 약속을 받아 내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 다음해 2000년의 금식기간이 시작되면서 이들은 직접 무리를 이루어 유흥업소를 물리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이러한 공격적인 성향과 극단적인 행동은 후일 인도네시아의 이슬람지도자들로부터도 비난을 받게 되지만 지금도 금식기간이 되면 빠사르 밍구(Pasar Minggu)등 자카르타 도처에서 부까 뿌아사(Buka Puasa – 일몰 후 식사)를 하고 나서 떼를 지어 무슬림 복장으로 출동준비를 하고 있는 수십대의 오토바이 부대를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처음엔 자카르타 변두리에서 시작된 이들의 공격은 갑자기 나타난 수백 명의 사람들이 가라오케나 카페에 난입하여 기물을 파괴하고 손님과 종업원을 폭행한 후 순식간에 사라지는 식이었는데 처음엔 이슬람에 대한 열정으로 시작되었을 이 무력행위에 경찰은 미온적으로 대처했고 대개의 경우 출동조차 하지 않았으므로 라스카르 지하드와 FPI는 이에 고무되어 이들의 활동은 급속도와 확산되어 나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라스카르 지하드 회원들이 카페 손님들의 지갑을 빼았고 업소의 물건을 훔치기도 하고 FPI의 두목급들이 카페나 가라오케의 주인들을 협박하여 보호비 또는 이슬람 성금 명목의 돈을 뜯는 사건들이 알려지면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고 결국 처음엔 이들의 행동과 주장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눈치였던 이슬람 울라마(Ulama)들이 이들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입장을 분명히 하며 라스카르 지하드에 대한 엄중한 단속을 정부에 요구하는 등 상황은 반전되기 시작했다.


살사 까페 습격사건이 벌어진 것은 이런 혼란한 상황이 전개되던 와중이었다. 이 사건이 경찰 당국 뿐만 아니라 자카르타 외국인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던지게 된 이유는 부유한 외국인들이 모여 살고 수영장이 딸린 호화저택이 즐비한 부유한 꺼망 지역에서 이 사건이 발생했다는 지역적인 문제 뿐 아니라 비록 인구의 대부분이 이슬람이지만 헌법상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고 있는 인도네시아에서 외국인, 특히 서양인들이 손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살사카페를 라스카르 지하드가 초토화 시킴으로써 인도네시아에 발을 디딘 모든 사람들은 그 국적이나 종교나 신념에 관계없이 이슬람의 율법을 따르지 않으면 FPI가 신의 심판을 대행할 것이라는 선전포고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었다.

FPI
에 대한 경찰의 단속이 좀더 적극적으로 변한 것도 이 사건이 계기가 되었고 살사카페 습격사건이 일어난 지 이틀 후 라스카르 지하드가 서부 자카르타의 한 도박장을 습격하여 도박기계들을 파괴하고 에어컨을 떼어 훔쳐가고 있을 때 또다시 고질적으로 뒤늦게 도착한 경찰관들이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는 철수하는 라스카르 지하드의 벤 바퀴를 향해 총을 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날은 물론 금식기간 내내 수십 개의 유흥업소와 카페가 파괴되고 약탈당했음에도 경찰은 단 한 명의 라스카르 지하드 대원도 체포하지 못했다. 오히려 총격사건이 있었던 다음날 라스카르 지하드의 대변인은 ‘니들이 감히 신의 전사들에게 총질을 하느냐?’는 취지의 격앙된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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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살사 까페는 그 후 오랜 보수공사가 시작되었고 그 해 금식기간동안 꺼망의 밤은 예전과 같은 활기를 잃고 말았다. 살사 까페의 콜롬비아 밴드가 귀국해 버린 것도 두말할 나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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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년부터는 뿌아사가 시작면서 인도네시아 정부는 모든 유흥업소의 한 달 간 휴업을 명했다. 종교적 충돌을 막기 위한 조치였겠지만 ‘종업원 월급은 주되 한 달 간 영업을 할 수 없다’ 는 이 일방적인 명령은 인도네시아가 아니면 나오기 힘든 정책일 것이고 한달동안 수입원이 봉쇄된 업주의 입장은 황당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해 모든 사우나, 디스코텍, 마사지 팔러들이 문을 닫아야만 했지만 한가지 아이러니컬한 것은 정부가 내놓은 휴무해당업체의 정의가 모호하여 정작 대부분의 시내 가라오케들은 유리한 유권해석을 근거로 이 금식기간 동안 오히려 더없는 호황을 누렸다는 점이다. 땅거랑 등 외곽지역의 가라오케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해에도 어김없이 자행되고 있던 라스카르 지하드의 예기치 못한 습격을 우려해 자진해서 문을 닫았지만…


그 살사까페에 다시 간 것은 습격사건이 있은 지 1년이 좀 더 넘어서였다. 예전 그 자리에 여전히 그 모습이었지만 바뀐 인도네시아인 밴드는 같은 라틴음악이지만 예전 콜롬비아 밴드의 박력에는 전혀 비할 바 못되었고 곧 그 건물이 해체되고 새 건물이 들어서면서 살사는 5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KFC 가까운 곳(지금은 LUVAZE, ZIMBALIST 미용실이 있는 곳)으로 이전했다. 그러나 새로운 장소와 분위기는 인근의 뉴스카페(News café)와 별반 차이가 없었고 넓었던 플로어가 대폭 줄어들었으므로 원래의 분위기를 살리지 못했던 살사카페는 그 후 한동안 파리를 날리다가 흐지부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기 시작하던 시절에는 뿔로마스(Pulo Mas)에서 짜왕(Cawang) 쪽을 향해 톨을 탈 때 톨게이트 앞에 이슬람 전사복장을 한 라스카르 지하드 청년들이 흰 모금함을 들고 있는 모습을 매일 보곤 했다. 과격하고 폭력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순박하고 착해 보이는 이 청년들은 어쩌면 그날 살사를 공격했던 수백 명 중에 섞여 기물들을 깨뜨리며 종업원들을 짓밟았던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오늘도 뿔로마스의 톨게이트 뿐 아니라 내 이웃집에, 내가 매일 지나치는 거리에, 아니면 내 사무실이 입주한 건물의 어느 사무실에서 착해 보이는 얼굴을 한 직원으로서, 청소를 하고 차를 내오는 오피스 보이로서, 또는 주차원이나 차를 유턴시켜주는 거리의 프리랜서로 일면서 언젠가의 재소집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올해도 어김없이 라마단 금식기간은 다가 올 것이고 라스카르 지하드의 FPI는 오히려 더욱 치열하게 준동할 것이 분명하지만 이제 지방자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오래인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 주정부의 대안이란 예년과 마찬가지로 FPI의 표적이 될만한 유흥업소들의 한 달 간 휴업을 명하는 것뿐일 것이고 그에 응하지 않고 문을 여는 유흥업소들에게 FPI는 수금원들을 보내 협박과 공갈을 칠 것이고 이슬람이 아닌 우리들은 무척 줄어든 운신의 폭을 그 한 달 간 또 다시 체감해야 할 것이다.

 

그 살사 카페, 그 콜롬비아 밴드의 강렬한 비트와 그 선율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