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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매일의 삶

노트북이 흉기가 된 사연

beautician 2016. 8. 31. 10:00




 

98 5월 수하르토 전대통령을 하야시킨 인도네시아 군중의 힘은 수많은 도시빈민들의 가세로 인해 순식간에 유례없던 자카르타의 폭동사태로 비회되었고 자카르타 곳곳의 상업지역마저 초토화시키면서 화교중심의 인도네시아 중,상류 사회를 공포 속으로 몰고 갔었습니다. 그 충격이 채 가시지 않고 있던 그 해 11월의 일입니다.

 

그 해 줄곧 계속되고 있던 데모가 언제 다시 폭동으로 비화될까 전전긍긍하던 11월 어느날, 자카르타 시내 한복판의 스망기 거리에서 시내고속도로를 점거하고 국회의사당을 향하던 데모대에게 주변건물 옥상등으로부터 인도네시아 경찰들이 발포를 시작했고 그 사건으로 몇 명인가 총격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자카르타는 다시 공포에 휩싸였고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도심에서 벌어지던 대정부 항의 시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5월 폭동 당시 시민들의 대규모 단체행동은 정부도 어쩌지 못한다는 체험학습을 한 도시 빈민들이 상업지역인 스넨(Senen)에서 약탈과 방화를 시작한 것이 다음날 오전부터였습니다.

그 주에 먹을 음식거리를 사기 위해 자카르타 북부의 중심지역인 끌라빠가딩(Kelapa Gading)에 막 도착했을 때에는 폭도들이 다가온다는 소문이 이미 흉흉하게 돌고 있었고 아직 오후 두시인데도 상점들이 속속 철시하고 있었죠. 그 와중에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집념으로 거의 마하에 근접하는 속도로 차를 몰아 문닫기 직전에 들어간 고로(Goro)할인점에서 야채들을 챙기고 있던 나는 곧 문을 닫는다는 안내방송을 들으며 주말에 풀만 뜯을 수는 없다는 신념으로 묶어놓은 두판짜리 계란까지 집어드는 데 성공합니다..


우리동네인 따만 모데른(Taman Modern)에 돌아와 보니 많은 주민들이 모두 길에 나와 삼삼오오 이야기하며 모여있는 모습이 어수선했어요. 집에 차를 파킹하는데 통장격인 에르웨(RW)가 문앞에 서서 빠꼼히 차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습니다. 빈센트라는 이름의, 그러나 유럽 화가를 연상케 하는 그 이름과는 아무 상관없는 여드름 가득한 큰바위얼굴의 그는 그 무렵 매일 밤 줄기차게 내 귀가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리는 내게 덤벼들며 수첩이며 서류를 내밀곤 했습니다.


"
경비원들 보너스 주게 기부금 내세요
."
"
요 앞에 철조망치고 철문세우는데 바기바기(Bagi-bagi)로 좀 내셔야죠
." 

5
월 이후 열번도 넘게 작지도 않은 돈을 매번 그런 식으로 걷어가더니 어느새 주택단지 진입로에 경비소가 새로 생기고 단지 곳곳에 바리케이드가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5월 폭동 당시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매일 거금을 거두어 갔었는데 그 결과 어느 날 아침 우리 주택단지 앞에 장갑차 한대가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며 진입로 쪽으로 총구를 겨눈 채 버티고 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주택단지 앞쪽 큰 길가에 막 신축하여 개점을 마쳤던 백화점을 비롯해 200미터에 이르는 진입로의 상점들이 모조리 불타 버리고 진입로 정면에 있던 호화주택 세 채에 폭도들이 트럭까지 대놓고 약탈을 자행한 다음 날이었죠


요번에도 돈내면 되려니 하고 지갑에 손을 대는데 오늘따라 빈센트의 표정은 절박해 보입니다. 그게 아니고 오늘부터는 불침번을 서야 된다네요. 아닌 밤중에... 지켜야 될 조국 놔두고 인도네시아에서 불침번을 서야 되다니
...  게다가 군대 제대한 지가 언젠데...

주택단지 중앙공터에 최근 세운 통장(RT)들 회의장이 통제소 역할을 하고 있었죠. 회의장이라고 해야 기둥 세우고 지붕만 얹어 놓은 것이었는데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화교들이었습니다. 자카르타 남부에 비해 허름하고 싼 집들이 대부분인 우리 동네 화교들은 수하르토 일족들의 배후에 있었다는 내로라하는 화교들에 비하면 부자 축에 끼기 힘든 사람들이었지만 따만 모데른은 빈민들이 살고 있는 자카르타 북부, 공단 인근의 이 지역에서는 거의 유일한 현대식 주택단지였으므로  마치 빈곤의 바다에 떠있는 작은 파라다이스인 셈이었습니다.

 

그 해 5월 진입로의 상업지역이 몽땅 불타버린 지금, 폭동이 이곳까지 번진다면 이 주택단지가 유일한 타겟이 될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나름대로 대단한 무장을 하고 있었어요. 일부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끄리스(Keris) 같은 인도네시아 전통단검을 차고 온 반면 반면 화교들은 장비의 장팔사모를 위시해서 쌍절곤, 중국검 등을 들고 나와 마치 우슈나 태극권 시합장에 나온 기분이었고 쇠못을 박은 야구방망이며 일본도를 들고 나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한국사람은 나 혼자 뿐.... 이 단지에 꽤 많이 살고 있는 다른 한국사람들은 고국으로부터 직수입한 배짱과 반골기질을 토대로 한 오기에 가까운 신념을 발휘하며 아예 회의장에 얼굴도 내밀지 않았지만 회의장에서 10미터도 안되는 집에 살고 있던 죄로, 그리고 빈센트가 줄곧 내 집앞을 기웃거리는 정성 덕택에 어쩔수 없이 회의장에 나오지 않을 수 없었던 거지요.


공터 건너편 사는 통장이 씩씩거리며 회의장에 다가 오면서 궁시렁거립니다.


"
우리 골목에 한국놈들 둘 살잖아. 한놈은 벌써 몇 주 째 안보이고 그 옆 집은 집안에 뻔히 있는걸 아는데 문 두드려도 나오질 않아. , , 그 놈들
."
"
그래요? 우리 동네에도 한국놈들 꽤 있는데 도무지 협조가 안되요, 협조가."


화교 둘이 워낙 큰소리로 얘기하는 바람에 못들은 척 하기엔 너무 가까운 거리에 앉은 내가 몹시 불편한데 내 건너편에 앉아있던 빈센트도 편안한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빈센트가 내 눈치를 보면서 그들에게 다가가 저희들끼리 잠시 뭔가 속삭이자 갑자기 화제가 바뀝니다. 하하하, 그 장검 보기 좋네요, 날이 새파랗게 선 게 혹시 전설속에 그 상삼검...? 미스터르 배는 뭘 갖고 나오셨수?


, 화교들이나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그런 얘기한다고 뭐라 할 입장은 못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천박하고 화교들은 교활하다며 거품을 물고 비난하는 한국사람들도 적지 않았으니까요. 친구를 잘 사귀어 두지 못하면 씹히는 건 각오해야 하는 일입니다.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눈 나는 일단 하던 일이나 계속 하자 생각하고 집에서 가지고 나온 노트북을 다시 열심히 두드렸습니다. 서울에서는 현지에 나와 있는 사람들을 무쇠인간 마징가 제트 정도로 생각하는지 프로젝트 서류같은 걸 갑자기 부탁받아 날밤 까면서 만들어 본 게 이제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자카르타에 폭동이 나고 내가 불침번으로 불려나간다고 해서 미룰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지요.
 

웬 군인이 와서 통장들하고 하는 얘기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지금 군인들이 자티느가라(jatinegara)역에 와 있는데 곧 시내로 들어올 거라는 둥, 2개 분대만 이쪽 주택단지로 보내 달라는 둥, 뿔로가둥(Pulo Gadung)을 지나 오려면 폭도들하고 부딪혀야 되니 좀 어렵다는 둥 이러다가 봉투 하나가 슬그머니 군인 주머니에 들어가니 갑자기 군인이 무전기 들고 소리쳐 댑니다.

"수
금 완료. 2개 분대만 보내
."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회의장 사람들 사이에 안도의 한숨이 퍼지고요.

 

군인이 돌아가자고 한참 후 연장들을 들고 회의장을 나서는 한 무리의 사람들은 이젠 표정도 가벼워 보입니다. 이젠 순찰을 돌 차례인 거죠. 그러자 아까 5월에 풀장 어쩌고 했던 옆의 화교가 나한테 말을 겁니다.

"
우리도 나중에 론다(ronda) 돌아야 되는데 뭐, 무기는 안가져 오셨수
?" 

사실 나도 무기를 들고 올 생각 안해본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집에 있는 무기라는 게 식칼이나 포크, 뭐 이런거 밖에 없는데 고국에서 군복무 제대로 마친 한국인이 인도네시아에서 불침번 서는데 날이 시퍼렇게 선 식칼 들고 나오는 꼴을 상상해보면 너무 삭막하기 짝이 없습니다. 태권도가 좀 되니까... , 이런 식으로 뻥을 치려 해도 쌍절곤 들고 있는 아저씨들 앞에서는 아무래도 캥기고요. 그래서 준비물 못챙겨와 검사받는 초등학생처럼 대충 둘러댈 수밖에 없었습니다.

"
이게….이래봬도…꽤 무겁거든요…그래서….한방 맞으면….머리 깨지걸랑요
." 

당시 처음 나온 메모리 1기가 짜리 싱가폴산 노트북.

실제로 2년 가량 가져 다니는 동안 어깨가 빠질 정도의 육중한 무게를 과시하던것이 사실입니다. 그 노트북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더니 옆에 있던 다른 사람들까지 웃으면서 다 뒤집어지더군요. 그리고는 새벽 세시부터 순찰을 도는 동안에도 그들은 내 옆구리에 낀 노트북을 미더워 마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그 후로도 한동안 매주 같은 요일에 회의장에서 불침번을 서야 했습니다.

그러나 매번 노트북을 들고 나가기는 좀 미안했어요. 그래서 무기 얘기를 우리 가정부에게 지나가는 말로 했었는데 어느 날인가는 국기게양대로 쓰던 대나무봉을 반으로 잘라 시키지도 않은 죽창을 만들어 놓았더군요. 암만 그래도 한국인 자존심이 있지. 남들은 쌍절곤에 중국검인데 내가 옥쇄를 각오한 일본군처럼 죽창을 들고 나갈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시장에 가서 작은 일본도를 하나 샀어요. 길이 50cm, 2cm 정도인데 손잡이에 술까지 달려있는 예쁜 검이었죠. 당연히 날은 서 있지 않았습니다. 날을 세울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부엌에서 밤늦게 그윽~그윽~ 칼을 가는 내 모습을 상상하면 스스로 소름이 돋았어요.

 

자카르타의 상황이 진정된 얼마 후부터 그 칼은 샀을 때의 상태 그대로 지금도 장롱 위에 올려져 있지요. 그리고 그거 날 갈아야 하는 상황이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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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사회가 몹시도 혼란하던 1998년도 당시의 일이었지요.

 

당시 인도네시아 군은 부대의 전투력을 민간인에게 판매하는 상황이었고 실제로 98년도 5월 폭동 당시에 끌라빠가딩 지역에 폭도가 들어오지 못한 것은 각 진입로마다 배치된 중무장한 군인들의 서슬이 시퍼렇었기 때문이었죠. 당시  Jl Printis 쪽에서 진입하는 폭도들에게 군인들이 기관총을 난사하는 것을 보았다는 한 화교친구의 얘기를 들은 적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첫 불침번을 선 다음 날 저희 주택단지 진입로에는 A형 텐트들이 10개 정도 쳐져 있었고 소총을 든 군인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군인들은 돈을 버는 편인 하고 고급장교 중에는 그래서인지 가난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하다못해 이등병으로 입대하려 해도 시험이 까다로울 뿐더러 최종합격이 되기 위해서는 1인당 1 5백만 루피아( 150만원) 정도의 권리금을 주어야 합니다. 경찰이나 공무원의 경우에도 크게 다를 없고요. 그것이 인도네시아 공무원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철저한 부패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당시의 일은 한국에서는 도저히 경험할 없는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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