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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꽃놀이패

beautician 2020. 11. 29. 12:16

 

 

 

 

아침부터 전 직장 대표가 쳐놓은 사고들을 처리했다.

회사 운전사 와스디로부터 부재 중 전화가 열 통 가까이 온 상태.  무슨 일인지는 불보듯 뻔하다.

 

내가 그의 회사를 떠난 것은 지난 2월 말의 일. 그러니 벌써 9개월도 넘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직 그의 이런저런 일들을 봐주고 있는 이유는 그간 퇴직금 정산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고 내가 도움을 거절하면 그는 온갖 이유로 퇴직금 정산을 미루었을 것이다. 그래서 찔끔찔끔 주던 퇴직금은 아직도 완전히 정산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과 차량 등에 걸린 문제들을 내가 해결해 주려 애쓰는 것은 내가 돕지 않으면 아무도 그를 돕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차량담보로 대출을 받으면서 자기 운전사의 명의를 빌렸고 내게도 알리지 않고 몰래 한국에 들어간 후 모든 대출금 상황이 3개월 이상 늦어지자 콜렉터들이 운전사를 가만 놔둘 리 없었다. 해결사들이 며칠 째운전사 와스디 집 거실을 차고 앉아 회사 대표가 빌린 돈을 갚으라며 강짜를 놓던 상황. 와스디는 내게 아침 내내 도와달라고 전화를 걸어왔던 것이다.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방기하고 그로 인해 직원이 모든 고통을 대신 감내하도록 만든 그를 내가 왜 더 도와야 하는지 스스로도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에게 돈을 빌려 아직 십 수만 불에 달하는 돈을 갚지 못한 사람도 자카르타에 있다. 왜 J대표는 그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할까? 그는 왜 자신이 이런 상황알 잘 알면서도 스스로 나서 J대표의 문제를 해결해 주려 하지 않을끼?

 

이런 와중에서도 매달 J대표을 쥐어 짜 적잖은 진행비를 월급처럼 타내는 일단의 사람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정대표의 대출상황문제, 그래서 운전사와 그의 가족들이 해결사들로 인해 겪는 어려움을 나몰라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문제조차 해결해 주지 못하는 이들이 J대표에게 수억 불짜리 입찰을 낙찰시켜 줄 거라 진심으로 믿고 있는 것일까?

 

사실 나는 이 그림에 없어야 하고 J대표의 차량 두 대는 이미 대출업체들이 끌고 갔어야 마땅한 상태다.

그걸 운전사가 온 몸으로 막고 있는 중이고 내가 행정적으로 후방 지원을 하며 해결방법을 찾는 중이다. 쓸데 없는 오지랍이란 걸 잘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래 알고 지냈던 와스디는 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J대표는 이런 나의 성격을 잘 아는 사람. 그에게 있어 내 존재란 것은 언제든 잘 구슬러 써먹을 수 있는 공짜 서비스. 호구. 꽃놀이패인 것이다.

 

대출업체 두 군데 각각에게 차량을 넘겨줄 경우 이후 정산시기와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들어 한국 J대표에게 문자를 넣었다. 어차피 그가 결정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그게 내 호구 짓의 마지막 챕터다. 그는 자신에게 지난 몇 년 간 수십 억을 투자해 주었던 부산의 한 재력가에 대해, 만약 그가 나에게 무슨 도움을 요청하면 절대 들어주지 말라고 한다. 들어줄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의 요청만은 내가 당연히 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때로는 강요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손을 들 수밖에 없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 편에 서서 곤란한 일들을 처리해 주는 것은 그 지점에서 이미 바보짓인데 그걸 오래동안 할 수는 없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누구는 도와도 되고 누군 도와선 안된다고 자기가 결정하려는 그 패기가 놀랍다.

그는 부인하고 싶겠지만 현재의 상황은 그가 자카르타에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빚을 피해 한국으로 야반도주한 모양새다. 그가 다음 주까지도 자카르타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될 테지만 투자를 받아 돈을 손에 쥐지 못한다면 돌아오는 게 아무 의미도 없다. 그리고 수십 억을 투자했던 사람에게 등을 돌리는 이에게 선뜻 큰 돈을 투자할 사람이 나설 리 없을 것 아닌가.

 

교만은 멸망의 앞잡이인데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멸망을 향해 직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람들을 가지고 노는 사람들이 반드시 조심해야 할 것은 그 속마음을 들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바닥이 드러나는 순간 더 이상 예전의 존중을 받을 수 없게 된다.

 

한정된 지면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 예전 몇 배의 원고투고자들을 모집하는 매체도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따로 투고자들에게 일정 급여를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지면을 채울 원고들에게 일정 원고비를 지급하는 방식이 변치 않는 한 투고자가 한 명이든, 백 명이든 매체가 지불하는 비용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 여러 투고자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원고를 보내온다면 매체로서는 정말 꽃놀이패를 손에 쥐는 셈이다. 

 

별다른 추가비용을 치르지 않고 그 상태를 유지하는 방법은 바로 립서비스다. 공개된 공간에서 특정 투고자들에게 잘한다, 훌륭하다 칭찬하며 다독이고 궁극적으로 서로 경쟁적으로 더 잘하려 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그게 절대 사악하거나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게 바로 매니징(managing)이라는 것이니까. 결국 비대해진 휘하 조직을, 수고료보다는 우선 사탕발림으로 돌리는 것이다.

 

담당자는 단 한푼도 추가비용을 치르지 않고도 해당 지면의 내용을 다채롭고 풍성하게 만드는 수완을 보인다. 조직관리를 잘 하는 거다. 그래서 공개된 공간에서는 칭찬 일변도의 사탕발림으로 조직의 사기를 끌어올리고 개인적인 접촉에서는 쿨하게 지적하고 때로는 비판하기도 한다. 공적 공간에서 칭찬 일변도이던 사람이 개인접촉에서 쉽게 냉정한 모습을 드러내는 건 상대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고 또 얼마든지 대타를 채워넣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꽃놀이패란 그런 것이다.

 

단지 사탕발림은 그 효과가 뛰어난 대신 수명이 짧아 금방 바닥이 드러나기 쉽다.

 

 

사탕발림 개요도

 

 

하지만 매체가 원고투고자 집단을 그렇게 관리하는 것은 일견 당연하고도 합리적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 역시 정상적인 조직관리의 한 방편이니 말이다

 

J대표 역시 자신이 매우 능수능란하게 사람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할 지 모른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이 틀렸다. 내가 그 조직을 나온지 이미 1년이 다 되어 간다는 사실과, 그래서 내가 일말의 선의, 일말의 아쉬움이 없었다면 이미 1년 전에 우린 모든 관계가 끊어졌어야 하고 지금 당면한 이 모든 문제들을 그가 스스로 감당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선의를, 때로는 상대방의 무지를 자신의 꽃놀이패로 사용하는 것.

 

우린 그렇게 살아가야 할까?

 

사탕발림하는 입들의 혓바닥 전시회

 

 

2020. 1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