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판데르베익호의 침몰

반더베익호의 침몰 - 목하 번역 중

beautician 2020. 9. 7. 11:53

 

<반더베익호의 침몰>(Tenggelamnya Kapal van der Wuijk)

 

 

한창 <반더베익호의 침몰>(Tenggelamnya Kapal van der Wuijk)이란 책을 번역 중이다.

 

원래는 2월 말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5월까지 3개월간 밀린 글쓰기를 완료하고 6월 늦어도 7월엔 술라웨시 니켈광산에 들어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회사를 2월 말에 그만 두는 건 그 모양새가 내 원래 생각과는 좀 달랐지만 시간만은 기가 막히게 맞췄다.

그런 다음 밀린 글을 쓰는 건데, 그걸 3개월 내에 끝내는 게 사실은 좀 문제 있어 보였다.

밀린 글이라는 게, 

 

1. 재인도네시아 한인이주 100년사 - 내가 맡은 기관 및 단체 편

2. 그라메디아와 계약한 만화 10권 - 나는 스토리작가로서 호러만화 5권 에피소드 100개와 인도네시아 위인 5명(수카르노, 하타, 수디르만, 디포네고로, 까르티니)의 스토리를 쓰기로 했다.

3. <반더베익호의 침몰> 번역

 

이었다.

 

시간을 가장 많이 잡아 먹었을 2번은 이후 코로나 사태가 벌어져 호러만화 세 권까지만 하고 나머지는 무기 연기되면서, 보통 때 같았으면 불운을 탓했겠지만 이번만은 엄청나게 시간 부족한 상황에서 큰 부담을 덜었음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하지만 1번 한인사 집필은 원래 3월말까지 마감하고 끝냈어야 하지만 여러번 내홍이 벌어지고 편집 쪽과 충돌하면서 시간이 한없이 늘어져 5월까지 가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도 아직까지(8월이 되도록) 발목을 잡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사실은 상정범위 안이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기 마련인 것이니.

 

그래서 가기로 했던 술라웨시 니켈 광산행을 서둘러야 했지만 코로나가 술라웨시 동남부의 끈다리와 꼬나웨까지 들어가면서 그쪽으로 가는 것도, 그리로 가기 위해 비자를 새로 내는 것도, 일단 국내선 비행기를 타는 것조차 모두 쉽지 않게 만들어버렸다. 본의아니게 자카르타에서 좀 더 시간을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늦어도 4월엔 시작했어야 할 <반더베익호의 침몰> 번역은 한인사 집필을 대충 마친 6월이 다 되어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내가 평소 하는 속도라면 한 달이면 충분히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내가 그렇게 속도를 낼 수 있는 건 영어 번역이지 인도네시아어 번역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인도네시아어 번역을 여러 번 해보았지만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단어를 쓰는 사람들이 왜 그리도 많은지(표준어 사전엔 안나오지만 그들이 쓰는 단어는 구어체이거나 젊은이들이 쓰는 슬랭, 또는 자바어나 순다어, 바딱어, 꼴라키어 같은 지방 방언일 터이니 백방으로 노력해 조사하다 보면 어떻게 알 수는 있게 된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게다가 이 책은 소설. 난독증을 일으키는 문학적인 번역을 찰떡같이 알아먹고 이번엔 문학적인 한국어로 번역해야 써내려가야 한다. 직역만으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선을 많이 넘어가야만 하는 일이다.

 

당연히 번역은 속도가 나지 않고 7월에 들어서면서 6월 초에 생각했던 7월말 번역완료는 택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Pepe 라는 현지인을 한 명 고용했다. 

한국어를 기가 막히게 하고 중앙대에 연수까지 다녀온 이 친구는 엄마라 람뿡 사람이어서 이 책의 배경이 되는 빠당 지역에 대해 직접 알지는 못해도 지인들 통해 문화 부분에 대한 조사가 가능한 친구여서 7월 초에 채용해 문화, 슬랭, 방언에 대한 조사를 시켰다. 이 친구의 활약은 그 이후 기대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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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dang Hayati seorang anak bangsawan, turunan penghulu-penghulu pucuk bulat urat tuggang yang berpendam perkuburan, bersasap berjerami di dalam negeri Batipuh itu.

 

한참동안 번역이 이 부분에서 막혀 있었다.

도대체 뭐란 소린질 모르겠는데 대충 번역하자면 "한편 하야티는 귀족집안의 딸이자 이 바띠뿌 지역에 묘지와 논밭을 영지로 가진 penghulu-penghulu pucuk bulat urat tuggang 집안의 자손이었다" 정도가 될 듯 했다. 그런데 저 번역 안된 부분을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이지. 관련 맥락과 배경 확인하고 적절한 한국어로 옮기는 건 불과 여섯 단어지만 때로는 몇 시간, 때로는 며칠씩 걸리기도 한다. 

 

그런데 Pepe 이 친구가 미리 참고하라고 이메일로 보내놓은 자료가 있었다.

 

Note

Sedang Hayati seorang anak bangsawan, turunan penghulu-penghulu pucuk bulat urat tunggang yang berpendam perkuburan, bersasap berjerami di dalam negeri Batipuh itu.

·       

- Penghulu pucuk bulat urat tunggang: Penghulu yang setara kedudukannya dengan seorang raja dalam sebuah nagari. 미낭까바우의 지역 원주민(nagari)에서 왕과 동등한 위치에 있었던 족장

 

Ø  Penghulu(쁭훌루): pemimpin dalam suku (종족의 지도자)
    Penghulu biasanya dipanggil datuk. Kumpulan para penghulu disebut ninik mamak.

 

Ø  Nagari(나가리): bentuk khusus wilayah pemerintahan menurut sistem hukum adat Minangkabau 미낭까바우 관습법 시스템에 따른 특별한 형태의 정부지역

 

Ø  pucuk bulat: pohon berpucuk bulat (contoh: pohon kelapa) 동근 꼭대기의 나무 (예: 코코넛트리);
urat tunggang: pohon berakar tunggang (contoh: pohon mangga atau beringin) 주요 뿌리가 씨앗과 가지에서 자라는 나무 (예: 망고 나무 또 벤자민고무나무)

 

   -  Orang Minang sering menyimbolkan sistem adatnya bagai sebuah pohon. Pohon berpucuk bulat karena dipimpin oleh seorang raja dan pohon berakar tunggang dan berdaun rindang menganut sistem demokrasi, suara bersama. Jadi, artinya di sini semuanya harus mufakat para penghulu bersama kaumnya bukan berdasarkan titah raja. 미낭 사람들은 종종 나무처럼 그들의 관습시스템을 상징한다. 동근 꼭대기 나무는 왕에 의해 이끌리기 때문이고, 뿌리와  잎이 무성한 나무는 공동의 목소리, 민주주의 시스템을 상징한다. 즉, 여기서 모든 것이 왕의 명령이 아닌 그의 시민들이 족장들과 함꼐 동의 해야 한다는 뜻이다.

 

 

- Pendam Perkuburan artinya suatu nagari di Minangkabau yang memiliki tempat pemakaman umum dan pepatah ini termasuk dalam peraturan nagari. 쁜담 쁘르꾸부란은 미낭까바우에서 공공묘지가 있는 나가리를 뜻하며, 이 속담은 나라의 규칙에 포함되어 있다.

 

- Bersasap jerami artinya mempunyai ladang sawah. 브르사삽 즈라미는 논밭을 소유하는 뜻하다.

 

아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Pepe 이 친구 내가 주는 월급값을 충분히 하고 있다. 아니 그 이상일까?

불과 여섯 단어 번역을 제대로 하기 위해 이 친구는 나름 리서치를 해서 미리 보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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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지만 사공 둘이서 보조를 맞추며 좌우로 노를 저으면 배가 제대로, 빨리 나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번역 모두 마치면 이번엔 정말 술라웨시에 가게 될지 아니면 자카르타에서 한국노동연구원 설문조사와 서적수출 에이전시를 하게 될지, 영화와 출판산업을 한없이 파고 들어갈지, 통신원과 칼럼니스트가 되어 한국신문 지면을 수놓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우선 이 친구한테 거하게 밥부터 쏘는 게 먼저일 듯 하다.

 

 

2020. 8.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