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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통해 보는 인도네시아 현대사 본문
영화를 통해 보는 인도네시아 현대사
인도네시아 영화발전은 경제발전의 수치로 표시되기보다 당대 최고 영화인들의 헌신과 기여와 함께 진화해 왔다고 하겠다.
‘인도네시아 영화의 문화적 특수성: 통일성 속의 다양성’이란 책(Cultural Specificity in Indonesian Film: Diversity in Unity -David Hanan 저)의 한 챕터를 할애해 지난 70년간 인도네시아 영화사에 가장 혁신적이고 문화적으로 중요한 영화들과 감독들이 열거되어 있다. 독립 이후 인도네시아 역사는 수카르노 시절, 수하르토 시절, 사회개혁 시대 이렇게 세 개의 시대로 대분하는데 영화산업도 이 시대 변화의 궤를 따라 부침을 거듭했다.
현대 인도네시아 영화의 태동
1949년 인도네시아 건국이 세계의 인정을 받을 무렵 뻐르피니(Perfini)라는 회사가 만들어져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시기에 제기되었던 이슈들을 다루었다. 이 회사는 우스마르 이스마일이 운영했는데 그는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당시 인도네시아 영화산업의 가장 중요한 선구자 중 한 명이다.
뻐르피니의 첫 영화는 <피와 기도>(Darah dan Do’a – 영문명은 The Long March 대행군, 1950), 그 다음이 <통행금지시간을 넘겨>(Lewat Djam Malam – 영문명 After the Curfew, 1954) 같은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는 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 같은 1940년대 이태리 네오 리얼리즘 작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로셀리니의 네오 리얼리즘 영화들은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이태리에 들어온 나찌 독일군과 이후로도 지속되던 파스트스 정권에 대한 항쟁을 묘사했다.
그러나 우스마르 이스마일은 이를 넘어서 독립전쟁 시기에 벌어진 도덕적 모호성과 인권유린을 조명했다. 예를 들어 <통행금지 시간을 넘겨>에서는 주인공 이스칸다르가 독립투사로서 범했던 전쟁범죄로 인해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스마르 이스마일의 첫 영화는 더욱 높이 평가받고 있어 독립전쟁 이후 그가 첫 촬영을 한 3월 30일은 현재 인도네시아의 ‘국가 영화의 날’로 기념되고 있다.
1955년 뻐르피니는 인도네시아의 첫 정치풍자영화인 <고귀한 손님>(Tamu Agung -영문명 Exalted Guest)을 찍었다. 이 영화는 수카르노의 개인적 신성화를 꼬집으며 카리스마로 무장한 정치 지도자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부각했다.
이후 인도네시아 영화산업은 부침을 거듭했다. 예를 들어 수카르노 시절 공산당 친위 쿠데타가 벌어진 1965년 9월 이후 공산당 숙청이 인도네시아 대학살로 비화된 후 1968년엔 일년 내내 불과 일곱 편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신질서시대 사회비판기능
1970년부터 1988년까지 대형스크린과 컬러영화기술에 힘입어 매년 평균 70편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1970년대에는 모스크바에서 영화 훈련을 받은 쥬만 자야(Sjuman Djaya) 같은 신진 감독들이 등장했다. 떠구 까르야(Teguh Karya) 감독은 띠아떠르 뽀뿔러르 그룹(Teater Populer Group)과 함께 1970년부터 1988년 사이에 13편의 영화를 찍었다.
이 중 역사적으로 의미깊은 역사서사영화 <1828년 11월>(November 1828)이 1979년 완성되었다. 이 영화는 네덜란드 식민정권에 저항하며 발발한 자바전쟁 기간인 1825년~1830년 기간 동안 일반 주민의 시각에서 당시 사건을 조명하는데 이외에도 당시 자바와 서구 식민세력의 문화적 가치를 크게 대조시킨다. <1828년 11월>은 인도네시아 영화가 처음으로 유럽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어 런던과 베를린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떠구 감독은 1985년 그의 영화경력 상 가장 혁신적인 영화 <한 잔의 커피>(Secangkir Kopi Pahit – 영어제목 Bitter Coffee)를 찍었다. 독창적인 회상방식을 사용한 이 영화는 인도네시아 각지의 촌에서 도시로 상경한 사람들의 운명을 조망한다.
쥬만 자야 감독은 보다 폭넒은 사회비판을 영화에 담는 등 인도네시아 영화사에 중대한 기여를 했다. 그의 영화 <마맛>(Si Mamad,1973)에서 그는 관료사회의 부정부패를 풍자하면서 영화를 통한 사회비판 전통의 첫 번째 사례를 보였다.
<뾰족한 자갈>(Kerikil Kerikil Tajam – 영문제목 Sharp Gravel, 1984)은 시골마을에서 가장 우수한 여인이 거기선 얻을 수 없는 직업을 구하기 위해 자카르타에 상격하여 겪는 위기상황들을 따라갔다.
쥬만 자야 감독의 다른 영화들 중엔 <버따위 출신 둘>(Si Doel Anak Betawi – 영문명 Doel the Betawi Child, 1973)이 있다. 벤야민 수엡 (Benyamin Sueb)의 수많은 B급 영화들과 함께 이 영화는 버따위(자카르타 토박이)의 생활방식을 필두로 인도네시아 사회상을 영화의 중요한 정체성으로 자리매김하도록 도왔다. 자카르타 토박이로 알려진 버따위 사람들의 일반 문화는 이후 40년 이상 인도네시아 대중문화의 중요한 소재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쥬만 자야는 인도네시아 역사 속에서 종교와 가부장제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주요 문학 작품들을 각색해 영화를 만들었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서는 아크디앗 까르타미하자(Achdiat Kartamihardja)의 소설을 각색한 <무신론자>(Atheis ,1974)와 R.A 까르티니의 편지들을 각색해 만든 인도네시아 여성해방가의 전기영화 <라덴 아젱 까르티니(Raden Ajeng Kartini, 1982) 등이 있다.
1990년대에는 영화제작편수가 극적으로 감소했는데 이는 당시 새롭게 구축된 상업 TV 산업과의 경쟁 때문이었다. 그래서 1998년엔 고작 네 편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사회개혁시대: 국제사회 진출과 여성 영화제작자들의 등장
난 아흐나스(Nan Achnas)와 미라 레스마나(Mira Lesmana)같이 자카르타 예술대학교(IKJ)에서 공부한 재능있는 여성들이 영화계에 배출되어 여성들의 영화산업 진출의 물꼬를 텄다. 또 다른 작가 겸 감독으로는 니아 디나타(Nia Dinata), 몰리 수리아(Mouly Surya), 제나르 마에사 아유(Djenar Maesa Ayu), 카밀라 안디니(Kamila Andini) 등이 있다. 니아 디나타는 <여러 남편>(Berbagi Suami – 영문제목 Sharing Husbands, 2006)에서 일부다처제의 한계와 같은 새로운 주제를 다루며 매우 혁신적인 영화들을 찍었다.
사회개혁시대의 또 다른 측면은 국제적인 각광을 받는 영화인들을 지속적으로 배출했다는 점이다.
가린 누그로호 감독은 1991년 그의 첫 번째 영화 <빵 한 조각에 담긴 사랑>( Cinta Dalam Sepotong Roti – 영문제목 Love on A Slice of Bread)를 찍은 후 사회개혁시대에 들어 영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여러가지 방식으로 문제의식을 표출했다. 2002년 그는 <한번만 너에게 키스하고 싶어>(Aku Ingin Menciummu Sekali Saja – 영문제목 Bird-Man Tale)에서 토착 파푸아인들을 통제하려는 인도네시아 군의 태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의 최근작 <내 아름다운 몸을 찬양>(Kucumbu Tubuh Indahku – 영문제목 Memories of My Body, 2018)은 젊은 렝거르(Lengger – 중부자바 전통무용에서 여성역할을 맡아 여성복장을 하는 남성 무용수)의 경험을 드라마로 보여주며 인도네시아 사회의 젠더 이슈를 건드렸다. 이 영화는 인도네시아 전통의 양성애 및 동성애 문제, 그리고 이에 대한 갖게 된 편견을 정교하게 그려내 관객들의 가치관에 도전한다.
최근 떠오르는 이파 이스판샤(Ifa Isfansyah) 감독의 <무용수>(Sang Penari – 영문제목 The Dancer, 2009)는 1965년 9월 30일 공산당 쿠데타 이후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벌어진 숙청작업의 피해자가 된 일단의 자바 소재 좌파 무용단 그룹들을 그렸다.
까밀라 안디니 감독은 특별한 지역공동체의 젊은이들의 모습을 영화에 담았다. 그 대표적인 작품들 중에는 <거울 같은 바다>(Laut Bercermin - 영문제목The Mirror Never Lies, 2011)은 남부 술라웨시 해상 부족인 바자우(Bajau)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고 <스깔라 니스깔라>(Sekala Niskala – 영문제목 The Seen and Unseen, 2018)은 발리에서 촬영했다.
뻐르피니사의 초기작들은 민족주의 영화라는 측면에서 지금도 가끔 상영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영화들은 막 건국된 국가의 부정적인 측면들을 부가하는 ‘위험한 민족주의 영화’의 형태를 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들 영화들은 당시 독립투사들의 인권유린, 군대 내의 부패, 카리스마를 가진 정치 지도자의 위험성 등을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뻐르피니 초창기 영화들에서 분명히 보이는 것처럼 사회적 참여적 영화를 만들려던 노력은 이후 세대의 인도네시아 영화인들에게 새롭고 보다 창의적인 방식으로 발전해 나갔다.
출처; 자카르타 포스트
DAVID HANAN / August 1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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