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동포사회 속 숨은 보석들을 만나는 기쁨 본문
동포사회 속 숨은 보석들을 만나는 기쁨
고등학교 2학년 1학기였던 1980년 상반기 광화문과 정동 일대에 자욱하던 매캐한 최루탄 가스도 경희궁터를 둘러 심어진 미류나무 울타리를 넘어 교실까지 흘러 들어오진 못했다. 그리고 그해 2학기부터는 강남으로 등교했다. 학교가 이사한 것이다. 당시 복부인들 발길에 그 동네 집들 문턱이 이미 여럿 닳아 없어졌겠지만 요즘같이 세련된 불야성 분위기는 아직 아니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고교시절의 후반부를 시작하던 우리들에게 수학선생님은 콧잔등으로 흘러내리는 두꺼운 안경을 연신 밀어 올리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6.25때 서울 살다 시골 깡촌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게 여기 방배동이었어.” 교실은 단번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작년에 한인사 편찬위원회가 출범하고 나서 중반을 지날 즈음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편찬위가 이사간 건 아니지만 세상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완전히 바꿔버리며 창궐하던 감염병이 못지않은 파괴력을 발휘한 것이다. 모름지기 자신의 출현 전후로 세상과 시대에 경계선을 긋는 것은 예수님 정도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 코로나-19의 위력은 실로 가공할 만하다. “그래도 9월 20일 한인사 출판기념회 일정은 예정대로 가야 합니다.” 팬데믹 와중에 다들 마스크 쓰고 모인 편찬회의에서 위원장을 겸한 한인회장님의 조곤조곤한 말씀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나는 한인사에서 정부기관, 공기업과 민간단체들의 집필을 맡았다. 대부분 모기업으로부터 발령을 받아, 또는 창업이나 사업확장 목적으로 인도네시아에 돈 벌러, 일하러 온 우리들의 한인사회 역사가 기업진출사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지난 100년의 역사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기관-단체들을 새삼 다시 소개하고 설명하는 것은 다분히 보조적 성격이 강했다. 그건 내 성향에 딱 맞았고 교민사의 핵심은 가장 역량있는 다른 사람들이 맡았다. 돌이켜보면 난 늘 누군가, 무언가를 보완하고 지원하는 데에 능했고 확실히 조연이 체질이었던 것 같다. 내 인생인데 말이다.
수많은 기관-단체들과 연락하고 인터뷰하면서 새삼 느낀 것은 이 시기에 우리 모두 비슷한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식으로도 연락이 닿지 않아 직접 찾아가 본 사무실 입구에 ‘재택근무 중’이라는 안내문을 발견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대면 또는 서면으로 인터뷰한 모든 교회들이 온라인 예배를 드렸고 대부분의 모임과 행사들이 중단되거나 연기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내 딸 결혼식은 이 난리에 떠밀려 두 번 연기됐다.
하지만 멈추거나 미뤄지지 않는 것들도 있었다. 대부분 기업과 개인의 소득이 줄어 지갑을 닫고 지출을 줄이는 시점에 현지 구호활동 일선에 선 이들은 더욱 스스로를 한계에 밀어붙이며 빈민들과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더 이상 대면접촉이 허락되지 않아 배식 봉사를 나가지 못하게 된 끌라빠가딩의 해피밥퍼센터에는 오히려 빈민학교의 교사들이 픽업트럭을 몰고 와 준비된 물품들을 실어 각 가정에 전달했고 수라바야 한인교회도 매주 금요일 도시락 200개씩을 나누던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자 대신 라면을 나누었다. 일단의 땅그랑 주부들은 지난 14년간 한 주도 거르지 않았던 봉사활동을 지난 5월 모금부족으로 잠시 중단할 수밖에 없었지만 다시 힘을 내 한센촌 시타날라 마을에 6월부터 매달 거의 2톤에 달하는 쌀을 마련해 89개 가정에 나누고 있다. 이런 구호활동이 동포사회 구석구석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세태가 변하고 상황이 변해도 결코 변하지 않는 어떤 것들은 오히려 시련 속에서 보석처럼 더욱 빛을 발한다.
한인이주 100주년을 맞는 올해 코로나가 이렇게 우리 생활을 흔들어 놓을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고교 2학년 2학기 첫 날 낭만적인 경희궁터의 고즈넉한 교사를 떠나 처음 등교한 방배동 신축교사의 모든 게 낯설었던 것처럼, 코로나는 이 세상 많은 이들의 생명과 고통을 요구하면서, 한편 온몸에 돌기처럼 솟아난 팔을 내밀어 우리를 미지의 세계로 잡아 이끈다. 그 세계에서 우린 어쩌면 산소통 둘러 맨 우주인 복장으로 무대에 올라 형형색색 방호복을 입고 참석한 동포사회 인사들의 축하를 받으며 한인 100년사 출판기념회를 하게 될 지도 모른다.
예전에 단 한 번도 겪은 적 없던 격변의 시기에 한인진출 100년을 맞는 것은 그것대로 의미가 깊다. 한인사 집필을 위해 대규모 사회적 규제조치(PSBB)가 시행되던 시기에 취재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동포사회의 변화와 발전이 더욱 극적으로 대비될 뿐 아니라 그 와중에서 어려운 이웃을 품 안에 보듬은 이들에게서 코로나에도 결코 변치 않는 가치와 인류애의 여러 모습을 발견했다. 한결같이 나보다 남을 더 중히 여겨 스스로의 이익을 쫓기보다 오히려 이웃들을 위해 자기를 낮추고 희생하는 이들을 보면 지금 우리들이 겪는 하찮은 반목과 갈등 따위 뭐 그리 대수랴 싶은 생각이 자연스레 들게 된다. (끝)
'일반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객관적이라는 이들의 바보짓거리 (0) | 2020.09.23 |
---|---|
광복절, 독립기념일....하지만 아직 계속되는 코로나 강점상태 (0) | 2020.08.13 |
파푸아에 추가병력 투입 시사한 내무장관 (0) | 2020.08.02 |
인생의 평균치 (0) | 2020.07.18 |
두 개의 죽음 (0) | 2020.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