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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26) - 완결 본문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26)
제8장 그가 남긴 것
북부 술라웨시의 마나도(Manado)는, 말하자면 동인도의 북쪽 끝이었지만 아주 오지는 아니었습니다. 마나도는 한국 참치잡이 원양어선이 자주 기항하면서 한국에도 제법 알려진 항구인데 대항해시대 당시에도 포르투갈 상선들을 위시해 그후 유럽 선박들의 출입이 잦은 지역이었죠. 디포네고로 왕자와 그들 일행을 마나도로 보낸 것은 그곳 미나하사(Minahasa) 지역을 네덜란드가 공고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네덜란드 디포네고로 왕자를 구출하러 올지도 모를 민중군을 두려워했으므로 마나도쯤이라면 설사 그런 구출시도가 있다 해도 충분히 격퇴할 만한 환경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네덜란드에게 여전히 가장 위험한 인물이었고 동인도 민중들에겐 변함없는 정신적 지주였으니까요.
하지만 미나하사인들은 자바인들과는 전혀 달랐고 거의 들어보지도 못했을 디포네고로 왕자에 대한 존경심도 희박할 터였습니다. 실제로 미나하사인들은 1945년부터 벌어지는 독립전쟁에서 여러 걸출한 영웅들을 낳았지만 전체적으로는 네덜란드 편인 총독부 산하 KNIL군 제복을 입고 수카르노의 공화국군과 싸웠던 전력이 있습니다.
먼저 체포된 끼아이 모조도 마나도의 포트 암스테르담에서 그리 멀지 않은 똔다노(Tondano)에 유배되어 있었지만 두 사람은 끝내 다시는 재회하지 못합니다.
디포네고로 왕자가 마나도에서 다시 마카사르의 포트 로테르담 요새로 이감된 것은 유럽의 정세변화 때문이었습니다. 1830년 하반기에 네덜란드 남부에서 일어난 반란이 1839년 벨기에의 분리독립으로 이어지게 되죠. 그 사건의 초창기는 디포네고로 왕자가 마나도로 유배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네덜란드는 벨기에 혁명을 틈타 프랑스와 영국의 개입을 우려했습니다 특히 영국해군이 동인도 북부를 공격해 오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습니다. 영국이 디포네고로 왕자를 손에 넣으면 그를 앞세워 동인도의 네덜란드 식민지를 흔들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디포네고로 왕자를 좀 더 방어가 유리한 마카사르의 포트 로테르담 요새(Fort Rotterdam)로 옮긴 것입니다.
수감 중인 디포네고로 왕자를 방문한 유명인들도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1837년 당시 16세였던 네덜란드의 헨리 왕자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쇄락한 왕국의 술탄 디포네고로 왕자가 감옥 속에서 시들어가는 모습을 식민지 종주국의 어린 왕자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디포네고로는 마나도 유배기간인 183~1832년 자신의 이야기인 ‘바바드 디포네고로’(Babad Diponegoro-디포네고로 이야기)라는 자서전을 썼는데 이는 생생한 자바의 역사서로 평가받았고 그후 각색되어 민중들의 연극무대에 오르고 있습니다. 바바드 디포네고로는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억유산으로 등재됩니다.
한편 디포네고로 왕자가 사로잡히면서 자바 전쟁이 마침내 끝난 족자 술탄국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소심하고 조심스러운 하멩꾸부워노 5세는 왕국의 주권 대부분을 네덜란드에게 위탁하는 정치적 밀약에 서명하게 됩니다. 그 치욕스러운 밀약은 1988년 술탄 하멩꾸부워노 9세가 공식폐기하게 되죠.
그리고 1830년부터 네덜란드 총독부는 동인도 전역에서 ‘강제경작제도’를 실행합니다. 이는 디포네고로 전쟁을 통해 바닥난 총독부와 네덜란드 본국의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동인도에서 쌀 대신 경제가치가 높은 커피와 차, 향료 등을 심도록 한 것이었죠. 이에 따라 쌀 수확이 급감하고 탐욕스러운 영주들의 수탈이 동시에 자행되면서 지구상 최대 곡창지대인 자바에 몇 번씩이나 대규모 기근이 찾아와 수많은 자바인들이 굶어죽게 됩니다. 이 강제경작제도는 1870년까지 유지되며 자바인들을 완전히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가 체포된 후에도 디포네고로 왕자의 또 다른 아들 끼소데워(Ki Sodewo)가 꿀론쁘로고(Kulon Progo)와 바글런(Bagelen)에서 네덜란드를 상대로 저항을 계속했습니다. 끼소데워는 바구스 싱론(Bagus Singlon) 또는 라덴 마스 싱론이라 불렸습니다. 그는 디포네고로가 마디운의 영주 라덴 롱고(Raden Ronggo)의 딸 라덴 아유 찌뜨로와티 (Raden Ayu Citrowati)에게서 낳은 아들입니다. 그의 흔적은 족자 왕실 족보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직 자바전쟁이 시작되기 전, 디포네고로 왕자는 끼소데워를 끄라톤에서 빼내 끼뗌삐(Ki Tempi)라는 이름의 절친에게 맡겼습니다. 네덜란드군이 끈질기게 저항했던 라덴 롱고 가문의 후손들 씨를 말리려 하였으므로 끼뗌삐는 위치를 들키지 않기 위해 늘 장소를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네 이름은 싱론이라 하마. 널 친구에게 맡기고 떠나야 하지만 내 마음 만은 항상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디포네고로는 아직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아이를 보듬어 안고 그렇게 속삭였습니다. 싱론이란 ‘도피’, ‘은신’의 의미를 담은 이름이었으니 당시 디포네고로 왕자의 처연한 마음을 살짝 엿보게 됩니다.
15살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전장에 나선 싱론은 놀라운 전투력을 발휘했고 훗날 한 전투에서 드콕 장군 바로 밑의 반드콜리르 장군(Jendral Van De Cohlir)를 죽이며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배신자의 밀고에 힘입은 네덜란드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그가 자바의 신비한 주술로 되살아날지도 모른다고 우려한 총독부는 그의 시체는 훼손해 와떼스 시내(Kota Wates)와 송오(Sunung Songgo)산에 나누어 매장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장면은 다시 마카사르의 포트 로테르담 요새로 돌아갑니다. 1830년 사로잡힌 후 26년간 그가 기나긴 유배생활 중 겪은 고초를 차마 모두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가 포트 로테르담에서만 겪은 21년간의 유배생활에 대해선 그리 많은 자료가 남아 있지 않거니와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이 전장에서 죽음을 맞지 못하고 철창 뒤에서 세월에 점점 시들어가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은 실로 가슴아픈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끝내 전향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1855년 1월 8일 유배지에서 70세를 일기로 마침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유해는 자바땅에 돌아가지 못하고 마카사르의 깜뿡 자바(Kampung Jawa)에 묻혔습니다. 마카사르 시내에서 북쪽으로 6킬로미터쯤 떨어진 와조면(Kecamatan Wajo), 멀라유 마을(Kelurahan Melayu), 지금은 디포네고로 거리라고 불리는 곳에 그의 무덤이 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죽기 전 자신을 멀라유 마을에 묻어 달라고 굳이 유언을 남겼는데 그곳은 중국인, 네덜란드인 주거지와 지척이었습니다. 점령자 네덜란드와 그 하수인들이었던 화교들을 자신이 죽은 후에도 끝내 감시하겠다는 의지였을까요?
네덜란드는 그의 유언을 존중해 1.5 헥타르의 땅을 내주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물론 태반은 세상의 발전과 힘있는 자들의 탐욕으로 인해 오늘날 550 평방미터 정도로 묘역이 크게 축소되어 있습니다. 그의 아내와, 함께 추방당했던 추종자들도 모두 같은 묘역에 안장되었고 오늘날에도 순례자들과 군인들, 정치가들이 그의 묘역을 찾아 그의 정신을 기리며 정기를 받아가고 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의 무덤
디포네고로 왕자가 후대에 끼친 영향은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자마자 시작된 인도네시아의 독립전쟁 당시에도 총을 든 자바인들은 디포네고로의 정신을 따랐고 초기 인도네시아 이슬람 정당이었던 마슈미당은 디포네고로를 인도네시아 저항사의 지하드 운동가이자 국가형성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묘사했습니다.
디포네고로가 속한 하멩꾸부워노 왕조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와 술탄 하멩꾸부워노 9세는 인도네시아 독립과 신생정부 수립에 커다란 기여를 했고 술탄 하멩꾸부워노 10세는 족자 특별시의 현직 주지사입니다. 족자 술탄국은 인도네시아 공화국으로부터 더없이 존중받고 있습니다.
1969년에는 군의 후원을 받아 디포네고로 전쟁의 첫 전투에서 불타 없어진 뜨갈레죠의 저택을 재건해 디포네고로 왕자의 기념관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중부 자바 출신 수하르토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인 1973년 11월 6일 대통령령 No.87/TK/1973으로 인도네시아 국가영웅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 정규군 TNI의 제4지방군 사령부 디포네고로 부대는 중부 자바를 방위하고 있고 인도네시아 해군도 그의 이름을 딴 군함 두 대를 보유하고 있는데 그 중 한 대인 디포네고로 전함(KRI Diponegoro)은 네덜란드로부터 사들인 시그마급 코르벳함입니다.
스마랑에는 디포네고로 대학이 있고 인도네시아 각 도시의 주요 도로가 그의 이름을 따라 불리고 있습니다. 자카르타 최중심지인 호텔인도네시아 로터리로 진입하는 도로들 중 이맘본졸 도로(Jl. Imam Bonjol)와 연결되는 빵에란 디포네고로 도로(jl. Pangeran Diponegoro)는 디포네고로 왕자를 기념하는 도로입니다.
네덜란드와 결탁한 술탄들과 영주들이 민중을 핍박하고 착취하던 시절, 디포네고로 왕자와 같이 네덜란드에게 끝내 저항하며 자신의 지위와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이들은 오늘날 인도네시아인들의 큰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제8장 끝)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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