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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 부록 (2) 본문
제2장 : 토마스 스탬포드 빙글리 래플스 영국 총독대행
토마스 스템포드 빙글리 래플스 경(1781. 7. 6~ 1826. 7. 5)은 영국령 자바의 총독대행(1817–1822), 벤쿨렌(지금의 벙꿀루) 주지사(1817~1822)를 역임했고 그 후 싱가폴과 영국령 말레이시아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쌓았습니다.
그는 말레이어에 능했고 자바에 주재하던 기간동안 보로부드르와 쁘람바난 등 고대 유적들의 발굴을 시작하는가 하면 오늘날 보고르 식물원 (Kebon Raya)의 전신인 국립식물원의 조경공사를 하는 등 문화적 업적을 남겼습니다.
또한 싱가포르 총독으로서 오늘날 싱가포르가 있도록 한 초석을 닦아 싱가포르의 도로, 건물, 학교 등이 그의 이름을 따르고 있으니 어딘가 온건한 행정가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것이 사실이지만 전체적으로는 강력한 군사활동을 선호했던 무골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는 동남아 여러 곳에서 많은 활동을 했지만 여기선 그의 자바 총독대행 시절만을 조명해 보기로 합니다.
그는 1781년 7월 6일 자메이카의 모랜드 항(Port Morant) 연안의 선상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벤자민 래플스는 선장이었거든요. 하지만 신대륙과의 무역사업이 미국의 독립으로 파산하여 집안은 빚더미에 앉았고 기숙학교에 다니던 토마스는 14살인 1795년부터 영국 동인도회사의 점원으로서 일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당시 영국 동인도회사는 활발하게 해외로 진출하던 중이었어요.
그는 1805년 24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동남아시아와 인연을 맺습니다. 그는 말레이 반도 뻬낭(Penang)의 주지사 필립 던더스(Philip Dundas)의 눈에 띄어 보조비서관으로 발탁되면서 출세길을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는 그보다 앞선 1804년 자기보다 10살 연상인 과부 올리비아 마라암느 데베니시(Olivia Mariamne Devenish)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1800년에 외과의 조수였던 남편과 사별한 상태였죠. 적잖은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올리비아를 무척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향후 20년간 단짝이 되는 토마스 오토 트레버스(Thomas Otho Travers)도 만나 사귀게 됩니다.
그는 말레이어에 능했을 뿐 아니라 재치와 능력을 인정받아 인디아 총독 민토경(Lord Minto)의 명령으로 말라카로 보내졌습니다. 말라카 해협은 오늘날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와 싱가포르, 말레이반도 사이의 물길이니 그가 처음부터 곧장 자바땅에 보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다가 1811년 네덜란드 왕국이 나폴레옹 전쟁에 패해 프랑스에 합병되자 그는 자바에서 네덜란드군, 프랑스군을 상대로 점령전을 펼쳤습니다. 역사적 숙적인 프랑스가 네덜란드의 해외 식민지들을 차지하기 전 영국이 선수를 치려는 것이었죠. 그는 로퍼트 스톱포드 제독, 프레드릭 오거스투스 웨더롤 장군, 롤로 질레스피 대령 등 영국군 고위 지휘관들의 도움을 받아 당시 지휘체계가 취약한 현지의 프랑스 부대들을 밀어붙였습니다.
바타비아에서는 전임 네덜란드 총독 헤르만 빌렘 댄덜스 장군이 현재의 자티느가라(Jatinegara) 지역인 메이스터 코르넬리스(Meester Cornelis)를 견고하게 요새화해 놓은 상태였는데 당시 총독 얀 빌렘 얀센스(Jan Willem Janssens)는 용감하지만 무모한 방식의 방어전을 펼치다가 결국 질레스피 대령의 공격을 맞아 불과 3시간 만에 요새를 함락당하고 맙니다. 얀센스 총독은 도주를 시도했지만 곧 영국군에게 체포되고 말죠.
래플스가 자바 전역을 접수하는 데에는 45일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인디아의 민토 총독은 래플스를 자바의 총독대행에 임명했고 래플스는 부이텐조그(Buitenzorg – 지금의 보고르)에 관저를 정하고 영국인들을 일부 고위직에 등용하면서 하부조직엔 네덜라드 공무원들을 그대로 유임시켜 총독부를 운영했습니다. 그는 분명 수완좋은 행정가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러 면에서 무골 정신을 보여주는데 그 증거로서 영국의 비교적 짧은 점령기간 동안 제법 많은 동인도의 왕국들을 영국의 통제권 앞에 무릎 꿇린 것입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이 책 본문에서 소개한 1812년 6월 21일 족자 공격이었습니다. 당시 족자는 자바에서 가장 강력한 두 개의 왕국 중 하나였습니다. 이 공격으로 인해 족자의 끄라톤은 복구하기 어려울 정도의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영국군의 무도한 약탈이 장기간 지속되었습니다. 래플스 자신도 왕실의 서류들 상당수를 무작정 압수했는데 당시 약탈당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많은 사료들이 아직도 인도네시아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끄라톤이 외국군에게 파괴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어서 자바 왕실과 귀족들은 심각한 모멸감을 느꼈습니다. 그후 자바엔 잠시 평화가 찾아왔지만 이 사건을 통해 래플스가 자바인들 마음 속에 심은 유럽인들에 대한 적개심은 1820년대 디포네고로 왕자의 자바 전쟁에 불씨를 제공한 셈입니다.
래플스는 그 후에도 수마트라 빨렘방을 공격해 현지 술탄 마흐무드 바다루딘 2세(Mahmud Badaruddin II)를 폐위시키고 방카섬을 점령해 영국의 영구기지로 삼는 등 동인도에서 점령전쟁을 통해 영국 식민지를 확장했습니다.
래플스는 영국법을 적용해 동인도에서 노예거래를 제한하려 했지만 노예거래는 더욱 성행했고 래플스 스스로도 관저에 많은 노예들을 고용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자바의 고대유적들이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등재되었는데 콜린 메켄지(Collin Mekenzie)가 쁘람바난(Prambanan) 발굴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H.C.코르넬리우스가 보로부드르(Borobudur) 발굴을 위해 지상의 정글을 밀어냈습니다. 그는 네덜란드의 강제경작방식을 바꾸어 현금을 주고 토지를 임대하는 방식을 추진했는데 이는 1761-1822기간에 살았던 더크 반 호겐도프(Dirk van Hogendorp)의 저서에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들 하죠.
한편 그의 아내 올리비아가 1814년 11월 26일 풍토병으로 사망하자 래플스는 모든 의욕을 잃고 실의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다시 마음을 추스린 그는 1744년에 세워진 지금의 보고르 식물원(현지 이름은 꺼분라야 - Kebun Raya)에 아내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고 차제에 전반적인 조경공사를 다시 했습니다. 지금도 보고르 식물원에 가보면 그때 닿은 래플스의 손길이 어딘가에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폴레옹이 패망하고 네덜란드 왕국이 부활하면서 자바는 다시 네덜란드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정식으로 이양이 진행되기 전 래플스는 후임자 죤 펜돌(John Fendall)에게 자바에서의 직책을 모두 넘겨주고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그가 관장하던 총독부 회계에 적자가 넘쳐났고 그의 개인적 자금상황이 관계되었을 것이라는 의혹때문이었습니다.
그와 자바땅과의 인연은 거기까지입니다.
그는 영국에 머물면서 1817년 ‘자바의 역사’(The History of Java)라는 책을 집필해 출간하죠.
그는 1818년 3월 19일 오늘날의 벙꿀루(Bengkulu)인 벤쿨렌(Bencoolen)에 다시 부임하여 동남아에서의 경력을 재개했고 그후 벤쿨렌과 싱가포르 사이를 오가며 당시 말레이 반도 끝의 쓸모없는 습지 포구였던 싱가포르를 체계적으로 개발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토마스 스탬포드 빙글리 래플스는 싱가포르의 초석을 놓은 선구자로서 영국과 싱가포르인들에게 기억되고 기념되고 있지만 자바 총독대행시절의 그는 이 책의 본문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꼭 존경하고 기념할 만한 일만 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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