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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7) 본문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7)
디포네고로 왕자는 이후1826년 내내 네덜란드와 망꾸느가라안 봉국의 군대들을 맞아 승승장구했습니다. 바글렌에서도 농민군이 네덜란드군을 몰아냈고 끄지완(Kejiwan)에서도 베이 왕자(Pangeran Bei-조요꾸수모 왕자)가 승전보를 전해왔습니다. 족자 북동부 방면의 들랑구(Delanggu) 지역에서는 양쪽의 대군이 맞붙는 매우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전황이 디포네고로군에게 크게 유리해지면서 네덜란드군을 짓쳐나가 결과적으로 ‘들랑구 대첩’이라 불려 마땅할 큰 승리를 거둡니다. 여기서 디포네고로군은 수십 정의 소총과 12문의 화포를 노획했습니다.
그후 한동안 네덜란드군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자 디포네고로군 전략고문이 되어 있던 끼아이 모조의 제안에 따라 디포네고로 왕자는 수라카르타 지역에서 망꾸느가라안 봉국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조직했습니다. 네덜란드측에 가담해온 망꾸느가라 2세를 응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술탄 전하, 소문이 사실이었습니다. 노술탄께서 족자에 돌아오셨다는 것 말입니다.”
수라카르타 접경의 동쪽 지역으로 군대가 이동하던 중 알리바사(사령관) 센똣 쁘라위라꾸수마가 디포네고로 왕자의 말을 따라잡으며 우려섞인 표정으로 말을 꺼냈습니다. 일찍이 영국이 유배시킨 노술탄 하멩꾸부워노 2세를 네덜란드가 족자로 다시 불려들이기 위해 삐낭섬에 사람을 보냈다는 소문이 그 사이 자바 술탄국 전역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그가 실제로 1826년 9월 21일 족자에 도착해 다시 술탄으로 즉위한 것입니다.
“하멩꾸부워노 5세 폐하를 폐위하고 노술탄께서 다시 즉위하셨다는 소문에 귀족들 사이에 동요가 있습니다. 특히 망꾸디닝랏 왕자님은 끄라톤으로 돌아가시겠다는 말씀을 공공연히 하시는 모양이고요.”
노술탄과 삐낭섬에 함께 유배되던 중 탈출해 우여곡절 끝에 족자 술탄국에 돌아온 망꾸디닝랏 왕자는 디포네고로군의 정예부대 중 하나인 삼비로조 (Sambirojo)의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하멩꾸부워노 왕가의 상당한 위치에 있던 그의 동요는 디포네고로군 전체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분으로선 다시 뵐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아버님이 돌아오셨으니 만감이 교차하겠지.”
디포네고로 왕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렇게 대답했지만 그 역시 부담이 큰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네덜란드가 노술탄을 모셔온 네덜란드의 저의는 뻔했습니다. 영국에 의해 폐위당하기 전까지 노술탄은 관료들과 백성들의 전폭적 사랑을 받았을 뿐 아니라 디포네고로 왕자의 친조부였으니 디포네고로 왕자가 당장 찾아와 조부 앞에 무릎을 꿇지는 않을지라도 하멩꾸부워노 2세와 인연 깊은 디포네고로군 지휘관들을 심리적으로 흔들어 반란의 열기를 꺾겠다는 것이었죠.
대부분 귀족들과 병사들은 마음을 다잡으며 굳건히 흔들리지 않았지만 하멩꾸부워노 2세 시대에 끄라톤 생활을 했던 왕족들에겐 직격탄이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할아버지의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았던 디포네고로 왕자 역시 이제 족자 끄라톤에서 다시 술탄의 왕좌에 앉은 하멩꾸부워노 2세의 존재가 마음에 걸리지 않을 리 없었습니다.
1826년 10월 망꾸느가라안 봉국을 공격하려고 우선 수라카르타 서쪽 가웍(Gawok)에 모여 있던 디포네고로군을 네덜란드군이 먼저 공격해 왔습니다. 디포네고로군의 병력은 6천 명이었고 네덜란드군은 4천 명이었지만 네덜란드군은 기병대와 포병, 대비정규전 부대까지 포함해 압도적인 화력으로 무장했고 수라카르타 수난국, 망꾸느가라안 봉국 군대와 연합군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끼아이 모조가 주도한 게릴라전으로 시작한 이 전투는 이제 네덜란드군을 압도하면서 전면전으로 부딪히고 있었습니다.
한편 멀찍이 일단의 부대가 호위하는 언덕 위에서 전황을 바라보고 있던 디포네고로 왕자의 마음 속에선 번민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습니다.
‘어린 조카(하멩꾸부워노 5세)를 상대로 싸운 것도 부족해 이젠 할아버님과도 싸워야 한단 말인가? 할아버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네덜란드의 요구에 응하신 걸까? 연로하여 마음이 약해진 것일까? 아니면 자바 백성들 전체가 들고 일어난 이 전쟁을 반대하시는 걸까? 왕족 지휘관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난 내 할아버님마저 매도하고 비난해야만 할까?’
치열한 전장에서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망꾸느가라안 봉국군이 벌판에서 거의 궤멸되어가고 있었지만 용의주도한 네덜란드군이 몰래 안배한 기병대가 디포네고로군 사령진의 배후를 기습적으로 짓쳐 들어왔습니다. 호위부대의 한쪽 축이 무너지면서 네덜란드 기병들이 디포네고로 왕자가 있는 언덕 위로 쇄도해 혼전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위급한 상황을 멀리서 본 끼아이 모조와 망꾸부미 왕자가 각각 자기 부대를 이끌고 황급히 디포네고로 왕자를 지원하기 위해 달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이 호위부대를 수적으로 압도한 네덜란드 기병대를 상대로 디포네고로 왕자도 끄리스 단검을 빼들고 마상대결을 벌였죠. 그가 신비한 체술을 익혔고 신의 가호가 깃든 성물을 지녀 금강불괴의 신체를 가졌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네덜란드 기병들에게 둘러쌓인 그는 치명적 열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더욱이 그의 끄리스 단검은 네덜란드 기병들이 휘두르는 장검에 비해 너무 짧았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가 힘겹게 분투했지만 빠져나오기 힘든 수세로 몰리고 말았습니다.
꽝!
하지만 정작 그를 쓰러뜨린 것은 네덜란드 기병 지휘관의 손에서 불을 뿜은, 유려한 몸통의 화승권총이었습니다.
“술탄 전하!”
“디포네고로 왕자!”
끼아이 모조와 망꾸부미 왕자의 부대가 네덜란드 기병대를 몰아내며 이미 가까이 접근했지만 총탄에 맞은 가슴에서 선혈이 솟구치며 디포네고로 왕자는 말에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풀숲에 쓰러지는 디포네고로 왕자의 눈에 가웍의 파란 하늘이 한가득 들어왔습니다. (제5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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