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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21) 본문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21)
끼아이 모조가 사로잡힌 지 얼마되지 않아 디포네고로군의 총사령관 센똣 알리바샤(Sentot Alibasya)가 1829년 10월 17일 네덜란드에게 항복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제 막 스물 두 살의 아직 어린 나이였던 센똣은 전장에서 사자와 같이 용맹을 떨쳤지만 군대를 유지할 비용이 쪼들리자 네덜란드의 회유에 쉽게 넘어가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센똣을 회유하기 위해 네덜란드는 센똣의 형인 마디운 군수 쁘라위로디닝랏(Prawirodiningrat)을 이용했습니다. 그러자 센똣은 항복의 첫 번째 조건으로 10,000굴덴이란 거금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전쟁 초창기부터 거느렸던 삐닐리(Pinilih) 부족으로 이루어진 1,000명 규모의 직속부대를 계속 지휘하고 소총 500정을 추가해 그들의 무장을 강화해 줄 것을 요청했죠. 삐닐리 부족은 북부 술라웨시 미나하사(Minahasa) 민족의 일파로 1826년 슬라롱을 네덜란드와 뺏고 뺏길 당시 탈환전 선봉에서 용맹을 과시한 바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용맹은 더 이상 디포네고로의 편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항복한다고 해서 우리가 이슬람을 배교한다는 것은 아니오. 우린 더욱 철저히 알라의 가르침을 따를 것이오.”
센똣은 이렇게 말하며 소르반(Sorban)이라 불리는 아랍식 두건용 천을 계속 사용하고 네덜란드군과의 회식 때 위스키를 마시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그건 투항하는 마당에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는 모양새였으므로 어떤 이들은 안쓰러움을, 어떤 이들을 가소롭다는 표정을 애써 감춰야 했습니다.
센똣은 항복한지 일주일 후인 10월 24일 마치 개선 장군처럼 족자에 들어서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는 매월 100굴덴의 급여를 받는 조건으로 네덜란드 기병대 소령 계급장을 달았습니다.
센똣의 항복은 디포네고로군의 사기를 결정적으로 떨어뜨렸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디포네고로 왕자를 따르는 많은 귀족들 역시 남기고 온 가족들이 네덜란드로부터 가혹한 처우를 받고 있어 고민하던 터였습니다. 센똣의 투항 이후 마치 금기가 풀리기라도 한 듯 그들 역시 앞다투어 속속 네덜란드에 투항하였으므로 디포네고로군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제 전쟁이 더 이상 길어진다면 디포네고로는 점점 더 불리한 상황에 처할 터였습니다.
그 바로 직전인 1829년 10월 14일 디포네고로 왕자의 부인 라덴 아유 렛나닝시와 자녀들이 네덜란드군에게 사로잡히는 사건도 벌어졌습니다. 디포네고로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 네덜란드군과의 협상은 거의 불가피한 듯 보엿습니다.
네덜란드 역시 전쟁을 빨리 끝내야만 할 상황이었습니다. 엄청난 전쟁비용을 치르느라 식민지 운영이 파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네덜란드군은 디포네고로를 사로잡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고 중상모략과 감언이설도 사용했는데 디포네고로의 목엔 5만 굴덴의 현상금도 나붙었습니다. 하지만 자바 민중들은 누구도 디포네고로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네덜란드군은 그 위세가 크게 축소된 디포네고로군의 동선을 대체로 파악되고 있었지만 이제 드콕 장군은 디포네고로 왕자를 함부로 죽여 순교자를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가 죽는다면 자바 민중들은 더욱 더 적개심을 불태우며 네덜란드에게 악에 받쳐 달려들 터였습니다. 그것은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었습니다.
자바전쟁 초기인 1825-1827년 기간에 네덜란드 측이 겪어야 했던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병력부족의 문제였고 더욱 심각한 것은 비용문제였습니다. 나중의 일이지만 디포네고로 전쟁을 통틀어 네덜란드령 동인도 식민정부가 지출해야 했던 전쟁비용은 모두 2,500만 굴덴(약 1,270억 루피아)으로 당시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천문학적 금액이었습니다.
더욱이 나중에 스텔셀 요새작전을 수행하면서 더욱 촘촘한 요새건설과 부대의 기민한 기동력을 담보하는 데에도 과중한 비용이 소모되었으므로 네덜란드 본국에서는 디포네고로 전쟁을 식민정부의 그루트 온헤일렌(groote onheilen – 대재앙)이라 부를 정도였습니다. 재정적자는 1,800만 굴덴(약 920억 루피아)에 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1827년 한 해 동안 유럽인 병사 3천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는 디포네고로군의 사상자 수에 못지 않은 수치였습니다. 1828년 초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총독과 군사령관이 모두 교체된 것은 이 대재앙에 대한 문책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동인도군 총사령관에 복귀한 드콕 장군은 1828년부터 1829년 두 해 동안 이 대재앙을 하루 속히 끝내라는 본국의 강력한 압박을 받고 있었죠.
그래서 드콕 장군은 급기야 회합을 미끼로 디포네고로 왕자를 방어선 밖으로 끌어내 사로잡으려 했습니다. 그를 잡으면 전쟁은 자동적으로 끝날 터였습니다. 자바의 귀족들이 일단 뱉은 말을 지키지 못하면 큰 수치로 여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드콕 장군은 클레이런스 대령(Kolonel Cleerens)를 독려해 디포네고로 왕자가 스스로 협상을 약속하도록 부추겼습니다.
이러한 네덜란드 측 꼼수의 일환으로 이미 투항한 센똣 알리바사 같은 이들이 디포네고로 왕자를 회유하기 위해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1830년 디포네고로 왕자는 그와 자신의 군대가 입은 심각한 내상을 숨긴 채 네덜란드의 협상에 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제6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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