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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근대사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8)

beautician 2023. 9. 18. 11:43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8)

 

 

 

6장 네덜란드의 반격스텔셀 요새 작전

 

슬라미라(Selamira) 출발해

쁘라기(Pragi) 동편에 도착해서

슨자티(Senjati) 지나

적들이 올라온다.

수많은 이교도와 변절자들이

패로 나뉘어져 달려드는데

하나도 무섭지 않구나

 

이것은 디포네고로 왕자 자신이 마카사르의 포트 로테르담 요새에서 썼다고 알려진 디포네고로 이야기(Babad Diponegoro) 등장하는 여러 시들 하나입니다. 불굴의 호연지기가 빛납니다.

 

그가 네덜란드와 동맹들을 대항해 벌인 전쟁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이슬람 성전인 지하드(Jihad)였고 지하드의 대상은 이교도들과 변절자들이었죠. 이교도란 이슬람 성도들을 공격하고 지배하려는 비무슬림, 네덜란드인들과 중국인들이었고 변절자란 네덜란드군을 도와 디포네고로군과 대적하는 무슬림들, 민중들을 억압하는 영주들을 칭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바 전쟁이 한창이던 족자 술탄국의 전황 (https://m.kiblat.net/files/2014/07/Syamina_Lapsus_XII_Juni-2014.pdf)

 

이제 성전을 수행해 가던 , 가웍 전투에서 디포네고로 왕자가 총격을 당하자 끼아이 모조와 망꾸부미 왕자의 부대가 중상을 입은 디포네고로 왕자를 급히 머라삐산 기슭으로 후송해야 했습니다. 가웍 전투의 후반이 엉망진창의 혼전이 되어버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용한 의사들이 달려들어 치료했지만 디포네고로 왕자는 한동안 사경을 헤매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의식을 되찾고 회복하기 시작합니다. 1826년 동인도의 역사와 운명이 그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은 것입니다.

 

자바의 모든 이들이 그만 바라보고 있던 시절, 디포네고로 왕자는 마냥 누워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가웍 전투로부터 한달이 좀 넘은 1826 11 17 아직 성치 않은 몸을 억지로 일으켜 전선으로 돌아갔고 족자 서쪽의 뻥아시(Pengasih) 본진을 설치하고 전쟁을 속개했습니다.

 

그해 12 1 삼비로조 부대장 망꾸디닝랏 왕자(Pangeran Mangkudiningrat) 기어이 네덜란드 총독부 꺼두(Kedu) 지역 부지사 반발크(van Valck)에게 항복한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항복조건을 네덜란드군이 수용하지 않았으므로 망꾸디닝랏 왕자가 사실상 무조건 항복하며 투항한  사건으로 네덜란드군은 크게 고무되었고 아예 디포네고로군 지휘관들 모두에게 전향을 권하며 회유해 왔습니다.

 

디포네고로군에는 망꾸디닝랏 왕자 말고도 하멩구부워노 2세의 왕자들, 디포네고로의 삼촌뻘 왕족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었고, 전쟁 시작 당시부터 디포네고로 왕자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망꾸부미 왕자도 그중 사람이었죠. 당장은 이상 디포네고로군을 이탈하는 귀족들이 나오지 않았고 특히 농민군으로 참전한 백성들은 디포네고로 왕자에 대한 충성을 거두지 않았지만 노술탄 하멩꾸부워노 2세를 이용한 네덜란드의 심리전 공세는 왕족 지휘관들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흔들었으므로 백성들 사이에선 지휘관들에 대한 일말의 불신이 트고 있었습니다.

 

한편 네덜란드군 진영에서는 드콕 장군이 자바 전쟁 초기부터 다음과 같은 전술을 통해 전쟁을 수행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1. 망꾸느가라안 봉국과의 동맹을 통해 디포네고로를 고립시킨다. 군사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반란 나쁜 짓이라는 인상을 대중들에게 각인 시킨다.

2.  디포네고로의 적들을 하나의 연대로 묶는다. 디포네고로의 적이란 다누레조 4 재상과 그의 편에 끄라톤의 신료들, 술탄 하멩꾸부워노 5세를 비롯해 끄라톤에 남은 왕족들, 역내 중국인들, 망꾸느가라안과 빠꾸알라만 봉국, 그리고 네덜란드 편에 왕족과 귀족들을 말한다. 또한 족자 술탄국의 왕자들이 디포네고로 지원을 포기하거나 지원요청에 최소한 비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만든다.

3.  디포네고로군이 점령한 족자 인근지역을 탈환해 세금을 다시 걷기 시작한다.

4.  반군들을 섬멸지역 쁘로고 (Sungai Progo) 보고원토(Bogowonto) 사이의 지역으로 몰어 넣는다.

5.  반군의 최고지도자 디포네고로를 생포한다.

 

하지만 반란 세력이 지금과 같은 조직력과 기동력을 가지고 있는한 저들을 진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오. 노술탄을 데려와 그의 왕자들과 일부 영주들을 전향시켰다 한들 그들이 있던 자리를 다른 지휘관들이 채워버리니 저들의 기세가 꺾이지 않소. 그러니 디포네고로군의 조직력과 기동력을 여하히 무너뜨리느냐 하는 것이 전쟁의 관건인 것이오.”

 

드콕 장군의 또다른 초상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9/9b/Hendrik_Merkus_Baron_de_Kock_by_Cornelis_Kruseman.jpg)

 

이러한 맥락에서 1827 드콕 장군은 작전회의에서 이렇게 말하며 변칙적 요새전 전략을 수립했습니다. 이것이 훗날 벤뗑 스텔셀(Benteng Stelsell), 또는 스텔셀 요새작전이라 불리게 되는 전술입니다. 네덜란드군이 디포네고로군 지역을 탈취하면 즉시 그곳에 신속하게 간이요새를 세우고 가시철조망을 둘러쳐 방어력을 높였는데 요새들을 계속 개축해 강화하고 요새들간의 거리를 촘촘하게 유지하면서 요새간의 통신로에 병력을 수시로 기동시켜 신속한 연락과 도로경계를 강화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서 이제까지 어느 지점에 한정된 지역적 개념이었던 요새 보다 역동적인 개념으로 변모했고 작전으로 디포네고로군의 병력이 어느 지점에 집결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을 제한하려 했습니다.

 

우리가 (요새) (통신로) 강력히 방어하면 (지역) 갖힌 반란군은 다른 지역과 연계하기 어려워질 것이오. 그렇게 되면 저들의 조직력엔 균열이 생길 것이고 비로소 승기가 우리에게 넘어올 것이오. “

 

결과 선택의 여지가 줄어든 디포네고로군은 요새간 거리가 쁘로고 강과 보고원토 사이의 지역으로 밀려날 텐데 네덜란드군은 그곳을 디포네고로군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할 섬멸지역으로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스텔셀 요새 작전. 삼각형은 1827-1830년 사이에 만든 네덜란드군 요새들. 수직금 지역은 수라카르타 수난국과 족자 술탄국에서 이미 요새화된 지역들.

 

드콕 장군이 설명하는 동안 턱수염을 매만지거나 콧수염을 비틀며 우려섞인 표정을 짓던 지휘관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네덜란드는 디포네고로와의 전쟁에 이미 엄청난 전비를 쏟아넣어 총독부의 금고가 바닥난 상태였고 때로는 병사들 급여조차 주지 못할 정도로 쪼달렸는데 이제 사람과 물자를 몇 배  동원해 다수의 요새를 자바 전역에 짓고 요새 전부에 병력을 배치해 운영해야 하는 스텔셀 요새작전은 출혈적 지출을 강요하는 것이었습니다. 네덜란드군 고위 지휘관들이 작전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반란지역들이 수복되고 자바의 백성들이 농사일로 돌아와야만 비로소 세금이 다시 걷히게 것이오. 그러니 디포네고로군을 압박하기 위한 작전이 비록 당장은 비용을 소모한다 해도 장기적으로는 분명 경제적 보상을 가져오게 것이오.”

 

드콕 장군은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촘촘한 요새망이 강력한 포위망 역할을 하여 디포네고로군 주력의 이동을 지속적으로 방해하면 결과적으로 그들을 약화시켜 언젠가 완전히 섬멸할 기회가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작전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주민들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오. 그러니 반란군과 일반 주민들을 철저히 구별하여 달리 대하고 병사들의 행패와 약탈을 일절 금지해야 하오. 주민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모든 방법을 강구하시오.”

 

네덜란드로서는 백성들이 디포네고로군을 돕거나 내통하지 못하도록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택과 창고, 사원에 대한 약탈을 금지하고 곡식을 빼앗거나 재산을 파괴하지 않도록 병사들을 철저히 교육시켰습니다. 약탈과 행패는 주민들의 증오와 저항만 것이고 결과적으로 민심이 디포네고로군에게 기우는 결과로 이어질 터였습니다. 그래서 군은 문화적, 심리적, 경제적 선무작업을 통해 네덜란드군이 주민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 했습니다.

 

하지만 비협조자들에 대한 무거운 처벌은 필수적이오. 단지 네덜란드군이 직접 나서지 말고 현지 영주들 손에 피를 묻히도록 하란 말이오!”

 

네덜란드는 일환으로 전쟁지역에 영지를 가진 귀족들을 압박해 해당지역 민중들의 불법행위 통제하려 했습니다. 네덜란드에게 협조하지 않는 사람이 적발될 경우 주민들 전체에게 집단적 책임을 물어 마을을 통째로 불사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네덜란드군이 피아를 냉정히 구분해 일반 자바인들을 보호하며 오직 디포네고로군과 지지자들만을 대적한다는 인상을 주려 했습니다. 작전은 적잖은 효과를 보여 디포네고로군에 대한 일반 백성들의 지원이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자바복식 (https://kumparan.com/potongan-nostalgia/gambaran-pakaian-masyarakat-di-pulau-jawa-abad-ke-19)

 

이러한 벤뎅 스텔셀 작전이 주효해 움직임이 제한된 디포네고로군은 수세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기동력을 최우선으로 하는 디포네고로군의 게릴라 전술에 제동이 걸린 것입니다. 이제 드콕 장군의 부대는 더 이상 디포네고로군을 추격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경과하며 자바 전역에 200개의 요새가 건설되어 통신로가 거미줄처럼 연결되자 통신로를 넘으려는 디포네고로군 부대들의 시도가 쉽게 발각되고 좌절되기도 하면서 그간 유기적이었던 디포네고로군 부대간 통신과 연계가 깨졌고 정보력도 극히 제한되기 시작했습니다. 결과 그동안의 강점을 잃게 디포네고로군은 웅아란(Ungaran) 시작으로 스마랑의 지방총독청 전투에서도 패전을 겪으며 많은 병력과 지휘관들을 잃게 됩니다.

 

한편 네덜란드로서도 요새 건설로 인해 엄청난 전비가 들며 총독부는 물론 네덜란드 본국의 국고까지 텅텅 비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양쪽 모두, 이 전쟁을 빨리 끝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