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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5) 본문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5)
한편 뜨갈레죠 사건을 보고받은 바타비아의 네덜란드 총독 반더 채펄런(Van der Cepellen)은 디포네고로 왕자를 상대할 야전사령관으로 헨드리끄 머르쿠스 드콕 장군을 선임합니다. 그는 당시 40대 중반 활달한 성격의 군인으로 원래 해군에 입대해 1807년부터 동인도 근무를 시작했지만 1821년에는 수마트라의 빨렘방(Palembang)에서 육전으로 현지 반란진압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전력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동인도 전역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반란들이 한 두 개가 아니오. 족자에서 벌어진 저 반란을 신속히 진압하고 돌아와 주시오. 장군이 할 일이 많소.”
채펄런 총독이 이렇게 말할 때까지만 해도 드콕 장군은 미개한 자바 내지에서 한 두 달 안에 반란을 진압하고 당시 바타비아에 상륙해 있던 유럽 문명사회로 속히 돌아와 안락한 생활을 즐기려 했습니다. 하지만 일단의 부대가 호위하는 마차를 타고 중부 자바로 향하는 동안, 역에 도착할 때마다 날아드는 현지 전황보고서는 사뭇 심상치 않았습니다.
“족자 왕실의 귀족들이 대거 저쪽에 붙은 건 그럴 수 있다 쳐도 왜 자바 민중들마저 대부분 반란군을 지지하는 거요? 민중들이 술탄에게 등을 돌렸단 말이오? 이곳 동인도에서?”
술탄이 버젓이 존재하는데 술탄의 반대편에 선 반란군의 수괴를 족자 술탄국 백성 대다수가 따른다는 동향보고를 드콕장군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동인도에서 지냈던 지난 18년 동안 그는 이런 현상을 처음 보았던 것입니다. 동인도인들은 최소한 술탄에게만은 절대적으로 순종했으니까요.
그가 스마랑까지 도착한 것은 1825년 7월 29일이었고 다음날 수라카르타를 먼저 방문했습니다. 그의 강권에 수난 빠꾸부워노 6세는 내키지 않지만 디포네고로 반란 평정을 위해 네덜란드를 돕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드콕 장군은 같은 요청을 하기 위해 망꾸느가라안 봉국으로 떠나기 앞서 부관에게 먼저 명령을 내렸습니다.
“우리 연합세력 지원군들이 다 모이기도 전에 끄라톤을 뺏긴다면 큰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저 느릿느릿한 인간들을 믿을 수 없으니 우리 스마랑 주둔군 일부를 빼서 신속히 족자로 보내게.”
이 명령에 따라 크엠시우스 대위(kapten Keemsius)의 부대가 즉시 스마랑을 출발해 최고 속도로 끄라톤을 향해 행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족자로 가던 길목인 로그록(Logrok) 강가에 도착하자 무시오센티카(Musyisentika)가 지휘하는 디포네고로군이 벼락같이 기습을 가해 왔습니다. 습격을 예상치 못했던 네덜란드군은 지리멸렬하며 200여 명이 몰살당했고 족자 주지사에게 전달하려고 운반해 가던 5만 굴덴의 군자금도 탈취당하고 맙니다.
뜨갈레죠 사건 불과 며칠 후인 1825년 7월 말에 벌어진 이 전투는 디포네고로군이 거둔 첫 승리였고 이 소식이 퍼져 나가자 입대지원자들이 몰려들면서 디포네고로군 병력은 더욱 증강되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칼을 들고 덤비는 반란군들에게 총든 군대가 어떻게 패배한단 말인가?”
망꾸느가라안 봉국에서 망꾸느가라 2세를 만나고 있던 드콕 장군은 네덜란드군이 로그록에서 대패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자기 귀를 의심했습니다.
“장군, 걱정 마시오. 내가 우리 군대를 보내 손을 좀 봐 주겠소.”
혀를 쯧쯧 차던 망꾸느가라 2세가 그렇게 장담했습니다. 그는 자기 사위인 라덴 마스 수웡소(Raden Mas Suwongso)에게 여단 규모의 보병과 기마대를 주어 족자 술탄국으로 들어가 네덜란드군을 돕게 했습니다. 그러나 족자 시내로 접어들기 직전 끄라톤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깔라산(Kalasan) 지역 란두군띵(Randugunting)이라는 곳에서 그들도 디포네고로군의 기습공격을 받았습니다. 허를 찔린 망꾸느가라안의 대군이 거의 전멸당하다시피 했고 지휘관 라덴 마스 수웡소는 사로잡혀 슬라롱의 디포네고로군 본진에 끌려갔습니다.
“당신 장인어른께 전하시오. 계속 알라의 뜻을 거스려 네덜란드를 돕는다면 망꾸느가라안 봉국 역시 가만 두지 않을 거라고 말이오.”
디포네고로 왕자는 벌벌 떨던 수웡소에게 잔뜩 겁을 준 후 풀어주었습니다. 망꾸느가라안 봉국 왕실의 인사를 처형해 굳이 철천지 원수를 지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로그록과 란두군띵을 비롯해 여러 전투에서 디포네고로군이 모두 이겼다는 소식에 족자 끄라톤의 왕족들은 끄라톤 침공이 임박했다며 두려움에 떨었고 급기야 브레더부르크 요새로 들어가 신변보호를 요청할 정도였습니다. 반면 일반 백성들은 크게 고무되어 디포네고로군의 군세는 더욱 증강되었고 저항전쟁은 자바 전역으로 번져나갔습니다. 끄라톤 왕궁 안에 머물던 고위 울라마들도 급히 태세전환하여 궁을 나와 디포네고로군에 속속 합류했습니다.
족자 끄라톤 왕족들의 우려와 같이 디포네고로군은 이윽고 끄라톤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뜨갈레죠 전투로부터 3주만의 일입니다. 이 작전에 동원된 디포네고로군 병력은 6천 명에 달했습니다.
그들 중 아부바까르 왕자(Pangeran Abu Bakar)가 이끄는 제1대는 빠꾸알라만 봉국을 동쪽으로부터 치고 들어갔습니다. 아부바까르 왕자는 술탄 하멩꾸부워노 3세의 아들로 디포네고로 왕자와 형제관계였죠. 그는 쪼데 강(Kali Code)의 다리를 파괴해 빠꾸알라만 봉국의 군대가 족자 술탄국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봉쇄하고 그곳의 중국인들, 유럽인들의 거주지역을 불살랐습니다.
한편 아디네고로 왕자(Pangeran Adinegoro)가 이끄는 제2대는 족자-마글랑-수라카르타를 잇는 도로와 통행세 수금을 위해 설치된 관문들을 모두 점거해 지원군들 길목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블리타르 왕자(Pangeran Blitar)가 이끄는 제3대가 족자 끄라톤을 빼앗기 위해 남쪽으로부터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디포네고로군에 항거하는 군수들의 도성내 주택들은 모두 파괴되거나 불태워졌고 곡물창고들을 공격해 탈취한 곡물을 도성 밖으로 빼냈습니다. 이로 인해 족자 침공이 끝난 후 도성 주민들은 심각한 식량난을 겪게 됩니다.
어린 술탄 하멩꾸부워노 5세는 궁전의 신료들과 함께 브레더부르크 요새로 피신했고 끄라톤 경비대장이자 네덜란드군의 소령 계급장을 단 위로네고로 왕자(Pengeran Wironegoro)가 디포네고로군을 맞아 힙겹게 끄라톤을 수비해 함락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끄라톤 점령에 실패한 디포네고로군은 도성 밖으로 일단 물러났으나 도심으로 통하는 모든 도로를 점거하고 봉쇄작전을 실행했습니다. 이로 인해 족자는 한동안 마치 죽음의 도시처럼 스산했고 지나는 사람들마저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위력을 보였으니 적 지원군들을 회피하면서 전역에서 철수하시오.”
디포네고로 왕자의 명령에 따라 그의 군대는 족자 봉쇄를 7일만에 풀고 포로들과 노획물자를 가지고 슬라롱으로 돌아갔습니다. 족자 침공에는 수많은 뚜먼궁, 드망(Demang) 등 높고 낮은 지위의 영주들이 협조하여 인력과 물자를 신속하게 움직이면서 디포네고로군의 조직력을 과시했으나 정작 가장 의미가 컸을 끄라톤 점령을 달성하지 못한 것이 디포네고로 왕자에게는 천추의 한으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디포네고로군은 이제 한껏 겁먹은 네덜란드군을 줄기차게 밀어붙이며 승승장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꺼두에서 있었던 치열한 전투에서 불키요(Bulkio)라고 이름붙인 농민군은 하지 우사만 알리바사(Haji Usaman Alibasah)와 하지 압둘까비르(Haji Abdulkabir)의 지휘 아래, 마글랑(Magelang) 군수인 뚜먼궁 하디닝랏(Tumenggung Hadiningrat)과 손잡은 네덜란드군을 격파하고 군수의 목을 쳤습니다. 머노레(Menoreh)에서도 네덜란드군을 쳐부수고 머노레 군수 아리오 수모딜로고(Ario Sumodilogo)를 죽였고요.
전세는 디포네고로군 쪽으로 크게 기울고 있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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