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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근대사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8)

beautician 2023. 9. 8. 11:26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8)

 

 

디포네고로 왕자의 어린 이복동생 입누쟈롯 왕자는 10살의 나이로 하멩꾸부워노 4세가 되어 술탄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가 성인이 때까지 디포네고로 왕자가 국사를 도울 섭정이 것임을 누구도 의심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결코 자기 편이 되지 않을 것임을 일찌감치 간파한 래플스 총독은 영국에게 가장 유리한 선택을 합니다. 영국과 깊은 교분을 나누고 있던 빠꾸알람 1세를 섭정으로 지정한 것입니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스뻐히 전투에서 영국이 끄라톤을 함락시킨 영국에 협조한 공을 인정받아 자치구인 빠꾸알라만 봉국을 할양받고 그곳의 영주가 빠꾸알람 1세는 말레이 반도 삐낭섬으로 유배된 하멩꾸부워노 2세의 동생입니다. 그가 어린 하멩꾸부워노 4세를 대신해 족자 술탄국의 모든 국사를 영국 총독부의 입맛에 맞게 결정할 것임은 너무나도 뻔한 일이었지만 감히 누구도 총독부의 결정에 이의를 달지 못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로서는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지만요.

 

빠꾸알람 1세의 초상,출처  -  https://www.flickr.com/photos/125605764@N04/22639770464

 

 

수마디뿌라공(), 당신의 어깨가 매우 무겁다는 명심하시오. 내가 끄라톤을 멀리 떠나 있진 않겠지만 이젠 당신이 술탄 전하와 섭정전하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해야 하오.”

 

디포네고로 왕자는 재상 다누레죠 4세에게 그렇게 신신당부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아버지 술탄 하멩꾸부워노 3세의 장례식을 위해 빠꾸알라만 봉국에서 왔다가 돌아가지 않은 곧바로 술탄의 섭정이 빠꾸알람 1세의 견제를 벌써부터 받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 하멩꾸부워노 2세와 함께 당시 어린 무스타하르 왕자를 흐뭇한 눈으로 지켜보던 노토꾸수모 왕자는 여전히 혈색좋은 얼굴로 재치있게 대화를 이끌었지만 왕실에서 영향력을 키워 나가던 디포네고로 왕자를 이상 흐뭇하게만 여기 않았던 것입니다.

 

노토꾸수모공이 해야 가장 중요한 일은 하멩꾸부워노 4세가 성인이 되기 전에 끄라톤에 공의 사람들을 심어 족자 술탄국이 우리 총독부에 더욱 협조하도록 하는 것이오. 그것이 우리와 보조를 맞추고 있는 빠꾸알라만 봉국을 위해서도 좋을 아니오?”

 

래플스 총독은 서신을 통해 빠꾸알람 1세에게 그렇게 속삭였죠. 그러기 위해선 왕가와 귀족들의 구심점이 되어 있던 디포네고로 왕자의 힘을 줄이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리하여 빠꾸알람 1세가 섭정이 끄라톤 궁에서 디포네고로의 행동은 크게 제한되기 시작했고 많은 회의와 행사들이 그에게 알려지지 않은 열렸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가 하멩꾸부워노 4세를 만나는 것은 다행히 여전히 자유로왔지만 그것은 어린 술탄에게 아무런 실권이 없다는 반증이기도  했습니다.

 

수마디뿌라공만 믿겠소.”

 

디포네고로 왕자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다누레죠 재상에게 그렇게 여러번 다짐을 받았고 정기적으로 술탄을 만나러 오는 일을 빼고는 대부분 뜨갈레죠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그가 거기서 목가적인 생활을 즐긴 것은 아닙니다. 족자와 수라카르타는 물론 자바 전역의 이슬람 사회와 인편과 서신으로 끊임없이 대화하며 백성들의 목소리와 지방동향을 파악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뜨갈레죠에는 귀족들과 이슬람 학자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어 시종들을 제외하고도 식솔들만 수백 명이 넘을 때도 있었는데 그들 중엔 학문과 종교를 가르치는 이들도 있었고 일단의 젊은이들은 부기스 부대 장교출신 무관들로부터 무술과 창검술을 배웠으므로 하긍후의 저택은 물론 뜨갈레죠 일대가 학교나 병영처럼 기능하면서 한껏 활기에 넘쳤습니다.

 

고모님, 어서 오세요.”

 

뜨갈레죠를 방문한 라덴 아유 무르실라(Raden Ayu Mursilla) 돌아가신 술탄 하멩꾸부워노 3세의 여동생으로 이모기리의 묘소를 돌아보고 수라까르타 가까이의 빠장(Pajang)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녀는 남짓한 아들과 동행하고 있었어요. 작은 몸집에 초롱초롱한 눈을 가진 아이의 이름은 무슬림 모하마드 칼리파(Muslim Mochammad Khalifah)라고 했습니다.

 

좋은 이름을 가졌구나.”

 

선지자의 이름을 아이의 이름은 이미 그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슬람에 빠져 살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무슬림이란 알라를 따르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모하마드는 선지자의 이름을 것이었고요.  

 

무슬림은 쁘산트렌의 우즈탓(Uztad -이슬람 선생)들도 이상 가르칠 없다고 정도로 똑똑한 아이란다.”

그렇군요. 나도 언젠가 칼리파가 되려 하는데 무슬림은 벌써부터 칼리파라니 부럽습니다, 고모님.”

 

무슬림의 이름에 들어간 칼리파란 단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칼리파란 이슬람 공동체의 지도자를 부르는 호칭이었으니까요. 훗날 디포네고로는 자바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자신은 술탄이 지배하는 자유국가에서 칼리파로서 자바를 통치할 것임을 네덜란드군의 헨드리끄 머르쿠스 드콕 장군에게 천명하는데 뜨갈레죠 시절부터 이미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뜨갈레죠에 머무는 며칠동안 무슬림은 디포네고로의 식솔들 이슬람 학자들과 이야기하고 공부하면서 어른들을 뛰어넘는, 종교와 신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었으므로 디포네고로는 깊은 인상을 받습니다. 하지만 고모 모자 사람의 빠장 가는 길을 배웅하면서도 10여년 젊은 이슬람 지도자가 무슬림을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는 아직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무슬림은 모조(Mojo) 지역의 바더란(Baderan)이라는 곳에서 이슬람을 깊이 연구하면서 신비주의에 심취하여 훗날 끼아이 모조(Kyai Mojo)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디포네고로의 오른팔 끼아이 모조, 출처 - https://tirto.id/pecah-kongsi-pangeran-diponegoro-dan-kyai-mojo-cwyp

 

 

한편 하멩꾸부워노 4세는 1815 3 22 할례식을 가졌습니다. 할례란 이슬람을 믿는 남자가 성기의 표피 끝을 조금 잘라내는 종교의식입니다. 방식면에서는 본질적으로 포경수술과 다를 없는 것입니다. 성인이 되어 이슬람에 입교하는 남자들도 할례의식을 거쳐야 하고 이슬람세계의 소년들은 대개 10 전후에 의식을 갖는데 그것은 술탄이라고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할례를 행하는 장비들은 오늘날에 비해 더욱 무시무시했죠.

 

할례 ( 수나딴 ) –  출처   http://nulis.co.id/?p=44882

 

 

전통적   이슬람식   할례의식 ( 좌 ) 와   전통적   할례도구들 ( 우 ) http://klinikjakartapusat.net/andrologi/118-metode-sunat-dari-sunat-tradisional-hingga-dokter-sunat.html http://bangka.tribunnews.com/2012/08/26/alat-tradisional-ini-untuk-khitanan-massal

 

 

 

삼촌! 무서워요!”

 

이제 열한 살이 술탄이 디포네고로 왕자의 소매를 잡고 늘어졌습니다.

 

전하, 술탄은 백성들과 만조백관에게 모범을 보여야 해요.”

술탄은 예외가 되면 안됩니까?”

안된다고 말씀드렸죠!”

 

집도할 울라마들이 침전으로 들어오자 술탄을 더욱 웅크려 들었습니다.

 

전하, 제가 알바카라 (Surah Al Baqarah) 암송해 드리죠. 알라께서 아픔을 다스려 주실 거에요. 제가 암송하는 소리에 집중하세요.”

 

디포네고로는 술탄의 눈을 양손으로 가리고 알꾸란(Al Qur’an) 알바카라 편을 암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즈음 디포네고로 왕자는 알꾸란의 거의 대부분을 아랍어로 외고 있었습니다. 할례가 진행되는 동안 술탄은 디포네고로 왕자 양손의 소매를 잡고 있었습니다. 모습을 보는 왕자의 마음 속엔 어린 술탄에 대한 애정이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하는 동생 입누쟈롯만은 선대 술탄들의 고통스러운 운명을 되풀이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란 다짐을 하며 그는 술탄의 귀에 나즈막히 알꾸란의 귀절들을 계속 읖조렸습니다.

 

족자 끄라톤 궁전 구조 (출처 - https://destinasiwisatadomestik.blogspot.com/2016/05/kompleks-keraton-jogjakarta.html)

 

 

그는 술탄의 교육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자주 끄라톤을 찾아와 파타 알무크 경전(kitab Fatah Al-Mulk) 아랍, 시리아의 왕들 이야기를 해주었고 많은 책들을 읽어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술탄의 어머니 끈쪼노 왕후는 영국에게 밉보인 디포네고로 왕자가 술탄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 부담스럽기만 했습니다.

 

왕자, 술탄의 교육은 끄라톤에 맡겨 주시오. 술탄은 왕국을 다스릴 몸인데 뜨갈레죠 민가에서 배운 학문은 턱없이 부족할  아니오?”

 

끈쪼노 왕후는 디포네고로에게도 어머니와 다름없었으므로 그말을 거스를 없었습니다. 사실 그녀로서도 언젠가 술탄이 성인이 되어 섭정이 끝나면 술탄의 어머니로서 권력을 누리려는 정치적 야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디포네고로 왕자가 술탄에게 너무 영향력을 갖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후 왕후는 끄라톤의 수로나딴 경비대 부대장 끼아이 아흐맛 응우스만(Kyai Ahmad Ngusman)에게 알꾸란을, 세포이 부대장교 아바스 중위에게는 말레이어 필기법을 술탄에게 가르치게 했습니다.

 

그러던 유럽의 나폴레옹 전쟁이 마침내 끝나면서 자바섬의 식민정권이 1816 영국에게서 다시 네덜란드로 넘어가는 과도기가 찾아왔습니다. 제대로 군대를 가지고 있지 못한 족자는 전환기를 전혀 기회로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끄라톤을 이미 번씩이나 이민족에게 짓밟혔던 트라우마를 갖게 족자의 왕실은 군대가 있었더라도 네덜란드와 대적할 용기를 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네덜란드는 순식간에 자바땅 전역을 다시 장악했습니다. 빠꾸알람 1세는 술탄이 16세가 되던 1820년까지 여전히 섭정의 자리를 지켰지만 자신의 뒷배경이 되었던 영국이 물러나면서 크게 힘을 잃었고 끈쪼노 왕후와 다누레죠 4 재상이 적극적으로 정사의 결정에 관여하는 형국이 계속되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로서는 자신을 정적으로 여기는 빠꾸알람 1세가 기염을 토하던 끄라톤에 발디딜 여지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끈쪼노 왕후가 1816년에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술탄 하멩꾸부워노 4세는 이제 부모를 모두 잃은 천애고아가 되고 것입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끄라톤 가운데에서 홀로 고립되어 버린 어린 술탄으로 인해 애가 탔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