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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6) 본문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6)
한편 영국군은 찌레본(Cirebon)에서 네덜란드군에게 잡혀 있던 노토꾸수모 왕자를 풀어주었는데 앞서 설명한 것처럼 그는 하멩꾸부워노 2세의 동생입니다. 그는 영국이 동인도 총독대행으로 보낸 토마스 스탬포드 빙글리 래플스(Thomas Stamford Bingley Raffles)를 만나 그가 가진 자바문화의 깊은 이해에 감탄하여 친분을 다졌고 그와 하멩꾸부워노 2세 사이의 소통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멩꾸부워노 2세는 네덜란드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영국에 대해서도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영국 총독대행에게 붙어 다니는 동생도 영 마뜩치 않았습니다. 처음엔 하멩꾸부워노 2세를 족자 술탄국의 지배자로, 라덴 마스 수로요를 아디빠티 아놈(태자)으로 순순히 승인해 주었던 래플스는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하멩꾸부워노 2세와 차갑게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멩꾸부워노 2세로서는 왕궁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이민족은, 그것이 네덜란드든 영국이든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모든 불화의 시작은 1811년 12월 28일 영국 래플스 총독대행의 일행이 족자를 방문했을 때 의전상의 문제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족자까지 오는 과정에서 방문한 자바의 다른 왕국에서 예전 네덜란드 댄덜스 총독이 세운 ‘장관에 대한 예우’를 받았던 그는 족자 술탄국에서도 같은 대우를 요구했다가 불같이 역정을 내는 하멩꾸부워노 2세의 호위병들과 충돌하며 칼부림까지 갈 뻔했던 것입니다.
“네덜란드놈들이나, 영국놈들이나!”
술탄은 전쟁광 유럽 야만민족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무례할 뿐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결국 래플스의 의자를 술탄의 의자보더 조금 낮춤으로서 그날 충돌위기를 살짝 비켜갈 수 있었지만 이 첫 대면에서 크게 빈정이 상한 두 사람은 폭주 기관차처럼 이내 충돌궤도로 들어섰습니다.
래플스는 영국측 족자 주지사 존 크로퍼드(John Crawfurd)를 시켜 아디빠티 아놈을 은밀히 접촉했습니다. 하멩꾸부워노 2세는 유약한 현재의 태자 대신, 보다 강단있는 망꾸디닝릿 왕자(Mangkudinigrat)에게 태자의 자리를 넘기려 마음먹고 있었는데 영국은 성품이 온순한 아디빠티 아놈을 이후 족자의 왕좌에 앉히려 했던 것입니다. 네덜란드가 그랬던 것처럼 영국도 그를 한없이 만만하게 보았던 것이죠. 지방총독 보고서에 따르면 태자는 아버지에게 안전을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폐위당한 것에 대한 억울함이나 왕좌를 되찾겠다는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술탄이 되기엔 너무 착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영국이 태자와 접촉한 사실을 알게 된 하멩꾸부워노 2세는 영국 총독부의 저의에 대한 증오를 더욱 불태웠고 아디빠티 아놈은 덩달아 부왕의 미움을 받게 됩니다.
그 즈음, 건국 이래 줄곧 서로 반목해왔던 족자와 수라카르타의 왕실은 영국군 진출을 맞아 함께 손잡고 조직적으로 저항하자는 밀약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뭔가 제대로 된 계획이 세워지기도 전에 그 시도가 모두 들통나버리고 맙니다. 그들 술탄과 수난 사이에 오고간 편지가 영국 총독부 손에 들어간 것입니다.
“족자를 쳐서 다른 왕국들에게 본보기를 삼겠다.”
래플스 총독대행은 자기가 직접 나서 족자에 본떼를 보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래동안 벼르던 기회였습니다. 첫 만남에서 시작된 하멩꾸부워노 2세와의 반목이 결국 전쟁으로 비화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래플스는 그 편지를 빌미로 족자 술탄국에 반역혐의를 걸어1812년 6월 19일 영국군대는 라덴 마스 사이드가 세운 망꾸느라가 봉국(Kadipaten Mangunegaran)과 손잡고 연합군을 편성해 족자로 처들어 갔습니다.
“왕자님, 저쪽을 보십시오!”
하긍 태후가 살았던 뜨갈레죠 저택에서 하인 한 명이 무스타하르 왕자에게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무스타하르가 고개를 들어보니 끄라톤 궁전 쪽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뜨갈레죠에 나와 살고 있었지만 당시 영국 총독부와 관련해 심상치 않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뜨갈레죠는 끄라톤에서 말을 타면 30분도 안되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고 하긍 태후가 생전에 뜨갈레죠에 방문하는 모든 손님들을 반갑게 맞던 전통을 무스타하르도 이어갔으므로 귀족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아 끄라톤의 소식을 늘 가깝게 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한 차례 끄라톤 궁전을 네덜란드군에게 유린당했던 하멩꾸부워노 2세는 지난 반년간 끄라톤을 경비를 크게 늘렸는데 그것은 오직 이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적군이 끄라톤에 다다른 것입니다.
“모두 무장하고 나를 따라 나오거라!”
그가 왕위계승서열이 높은 왕자였던 만큼 뜨갈레죠의 처소엔 궁에서 보낸 백여명의 시종들이 있었는데 무스타하르는 그들을 강한 사병(私兵)으로 조련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병장기를 갖춰 들고 이제 막 뜨갈레죠의 저택에서 출발하려는 참이었습니다. 끄라톤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면 그 역시 왕가의 남자로서 자신의 책임을 다해야만 했습니다. 무스타하르도 끄리스 단검을 품에 차고서 말에 오르려 했습니다.
“라덴 마스 온또위료(Raden Mas ontowiryo)여! 거기 멈추거라!”
그 순간 말을 탄 사람 여러 명이 저택 안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무스타하르 일행은 깜짝 놀라 칼을 뽑아 들었지만 그들은 이끌고 온 사람은 아버지 아디빠티 아놈의 형제인 머르타사나 왕자(Pangeran Mertasana)였습니다. 그는 그의 부친인 하멩꾸부워노 2세의 괄괄한 성격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전투복을 차려 입은 그들은 막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온 듯 먼지투성이였고 부상을 입어 피를 흘리고 있는 자도 있었습니다.
“이럴 줄 알고 술탄께서 날 보내셨다. 너희 아버님도 신신당부하셨으니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거라!”
얼굴 가득 수염을 기른 머르타사나 왕자는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빠른 말투로 술탄의 말을 전했습니다.
“술탄께서는 온또위료 네가 분명 군사를 끌고 올 것이라 하면서 반드시 막으라고 하셨다.”
라덴 마스 온또위료란 무스타하르가 20세에 첫 결혼을 할 때 하멩꾸부워노 2세가 내려준 칭호였으므로 궁전에서는 무스타하르 대신 온또위료라고 그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술탄 폐하와 아디빠티 아놈 태자께서는 모든 사태가 종료될 때까지 온또위료 왕자와 그 수하들이 뜨갈레죠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말라 명하셨다. 알라의 도움으로 끄라톤이 이민족을 물리친다면 위대한 신께 찬양하겠지만 설령 그렇지 못하더라도 오늘 죽는 것은 끄라톤 안에 있는 사람들만으로 족하다. 그러니 궁 밖의 왕자들은 자중자애하며 후일을 도모하라! 부왕과 태자께서 그렇게 전하라 하셨다!”
“숙부님, 끄라톤이 유린당하는 모습을 어찌 또 다시 보고만 있으라는 겁니까?”
“라덴 마스 온또위료는 술탄 폐하의 명령을 받들지 않을 셈이냐?”
머르타사나 왕자의 비감한 목소리는 마치 피를 토하는 듯했습니다. 무스타하르와 그 시종들이 어깨를 맞대고 북적이는 뜨갈레죠 저택의 마당은 마치 물을 뿌린 듯 조용해졌습니다. 그러고보니 저 멀리 끄라톤에서 사람들의 함성과 대포소리도 간간히 들려왔습니다. 무스타하르는 다시 말머리를 돌리려는 머르타사나 왕자의 말 고삐를 붙잡았습니다.
“숙부님은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영국군과 망꾸느라가군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내 부대의 거의 대부분을 잃으면서 여기까지 왔다 그들의 죽음을 절대 헛되이 만들지 말거라. 난, 당연히 끄라톤으로 돌아간다. 내가 이 전장에서 죽는다면 반드시 부왕을 지키다 죽을 것이다. 너희들 몫까지 내가 싸울 것이다. 적들이 이곳까지 닥칠지 모르니 너희들은 뜨갈레죠와 온또위료 왕자를 목숨을 다해 지켜야 한다!”
머르타사나 왕자 일행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저택을 빠져나가자 이제 시종들은 무스타하르를 겹겹이 둘러싸고서 무릎을 꿇었고 고개를 숙인 무스타하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1812년 6월 19일부터 20일 사이에 영국군이 족자 끄라톤궁을 공격해 벌인 이 사건을 스뻐히 전투(Geger Sepehi)라고 부릅니다. 스뻐히(Sepehi)란 당시 영국군이 운용했던 인디아인 용병 세포이(Sepoy)부대를 인도네시아식으로 표기한 것입니다.
1812년 6월 13일 세포이 부대가 전체 병력의 반쯤을 차지하는 영국군이 야음을 틈타 브레더부르크 요새(Benteng Vredeburg)에 은밀히 입성했고 래플스 총독대행은 며칠 후인 6월 17일 족자에 도착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5시경 영국과 손잡은 노토꾸수모 왕자의 가족들이 사람들 시선을 피해 몰래 끄라톤 궁전을 떠나 요새로 피신했고 그 추종자들은 영국군과 약속된 표시인 하얀 천을 왼쪽 팔에 묶고 영국군과 합류했습니다.
1810년 12월 네덜란드의 끄라톤 공격 당시 하멩꾸부워노 2세의 편에 서서 함께 저항했던 노토꾸수모 왕자가 불과 1년 반 후인 1812년 6월 이번엔 영국군 편에 서서 끄라톤 공격에 가담한 것입니다. 영국 기병대를 급습해 소기의 성과를 올린 라덴 하리야 시두레자(Raden Harya Sindureja)의 부대만이 이날 전투에서 끄라톤 궁전 측의 유일한 승전사례였습니다. 그외의 모든 방어선은 철저히 열세에 몰렸습니다.
레플스 총독대행이 왕위를 태자에게 양위하라는 최후통첩을 술탄에게 보낸 것은 요식행위일 뿐이었습니다. 하멩꾸부워노 2세가 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단지 래플스는 빌미가 필요했을 뿐입니다.
요구가 거절되자 6월 19일을 기해 영국군을 끄라톤 궁전에 경고포격을 가했습니다. 지척인 브레더부르크 요새에서의 포격은 위협적이기 짝이 없었지만 강경한 술탄은 이를 무시하고 결전의 칼날을 갈았습니다. 하지만 영국군의 본격적인 포격이 시작되자 끄라톤 동쪽 방어선에 설치된 끼아이 나가룬띵(Kyai Nagarunting)의 포대의 화약통이 맞아 폭발을 일으켰고 끄라톤 경비대의 스타벨 포대(Brigade Setabel) 병사들이 불덩어리가 되는가 하면 부기스 부대가 지키던 무기고도 포격에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더욱 치열해지던 전투는 다음날 절정에 이르러 결국 영국군의 승리로 굳어져 갔습니다.
그날 새벽 영국군은 족자 화교사회 우두머리 딴진싱(Tan jin Sing)이 준비한 대나무 사다리를 타고 끄라톤 궁안으로 쏟아져 들어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따루나수라(Tarunasura) 를 비롯한 빤짜수라(Pancasura-다섯 개의 관문)가 모두 파괴되고 그곳으로 영국군이 쇄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왕족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중엔 술탄의 사위로 끄라톤 경비대 총사령관이었던 깐젱 라덴 뚜먼궁 수마디닝랏(KRT Sumadiningrat)과, 아디빠티 아놈 태자의 어머니 끄다톤 왕후(Ratu Kedaton)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영국군이 끄라톤 중심부를 압박해 오자 술탄 하멩꾸부워노 2세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마치 입관을 앞둔 시체처럼 온통 흰색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나와 패배를 인정했고 왕과 왕족들은 무기는 물론 걸치고 있던 귀금속과 패물들을 영국군에게 압수당하는 치욕을 겪었습니다.
영국군은 끄라톤 궁전 안의 중요 문서들도 마구잡이로 압수하여 영국으로 가져갔는데 이때 약탈당한 문서들은 7,000 점에 달합니다. 이 외에도 국보급 보물들과 아름다운 끄리스 단검들, 악기들이 수레에 산더미처럼 담겨 네덜란드 주지사 저택으로 옮겨졌습니다. 영국군의 그런 야만적인 약탈행위를 족자 술탄국의 왕가와 백성들은 감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족자 술탄 하멩꾸부워노 2세는 차기 술탄으로 마음에 두었던 아들 망꾸디닝랏 왕자(Pangeran Mangkudiningrat), 영국군 포위망을 넘나들었던 머르타사나 왕자(Pangeran Mertasana)와 함께 스마랑으로 압송되었다가 머나먼 말레이 반도의 삐낭섬(Pulau Penang)으로 유배되고 맙니다. 지금은 페낭(penang)이라 불리는 말레이시아의 휴양지가 되어 있지만 당시엔 자바인으로서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타국의 오지였습니다.
전투가 끝나고 며칠 후 또 다시 대관식이 열렸습니다. 아디빠티 아놈로서도, 무스타하르로서도, 정말 가고 싶지 않은 대관식이었습니다. 두 번째 대관식을 갖게 되는 아디빠티 아놈으로서는 두 번 모두 자신의 아버지를 끌어내리고 그 빈 자리에 앉게 된 것이 결코 즐거울 리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 아버지와 믿음직스럽던 형제들은 모두,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오지로 유배를 떠나 돌아올 기약도 없게 되었고 스뻐히 전투 당시 영국군 포격에 어머니마저 잃고서 애도할 틈도 없이 이민족에게 등떠밀려 술탄이 되는 것은 견디기 힘든 모욕이기도 했습니다.
끄라톤에서 목숨을 잃은 많은 사람들 중 그가 얼굴이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흘린 피 위에서 자신이 다시 하멩꾸부워노 3세가 되어 술탄의 왕좌에 오르는 것은 그들의 죽음을 모독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게다가 그는 단 한번도 자신이 술탄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떠밀려 술탄이 되면 영국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게 될 것임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대관식 내내 얼굴에 웃음 한 점 띄우지 않았습니다.
라덴 마스 무스타하르, 아니 라덴 마스 온또위료 역시 더욱 큰 상실감에 빠진채 대관식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이틀 동안 끄라톤 궁전이 이민족들과 반역자들에게 철저히 유린당하는 동안 자신은 무력까지 동원해 만류하는 수하들에게 둘러싸여 꼼짝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치 할아버지 하멩꾸부워노 2세를 폐위시키는 데에 공이라도 세워 상을 받는 것처럼 아버지의 큰 아들로서 대관식에 참석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부끄러웠습니다.
대관식에 참석한 래플스 총독대행은 스뻐히 전투 승리에 지대한 공헌을 한 노토꾸수모 왕자에게 그 포상으로 족자 술탄국의 서남부 아디까르토(Adikarto) 군의 4,000짜짜(cacah)에 이르는 땅을 봉토로 떼어주었습니다. 이 지역은 빠꾸알라만 봉국(Kadipaten Pakualaman)이 되어 현대까지 이르게 되는데 노토꾸수모 왕자는 깐젱 구스티 빵에란 아디빠티 아리야 빠꾸 알람 1세(Kanjeng Gusti Pangeran Adipati Arya Paku Alam I), 줄여서 빠꾸알람 1세라는 봉건영주로 자리매김합니다. 그의 이름 앞에 붙은 요란한 칭호들은 분명 왕보다 아랫단계였지만 사실상 그 자치구를 배타적으로 통치하는 절대 영주가 된 것입니다.
중국인 우두머리 딴진싱(Tan Jin Sing)이란 자도 영국군을 도운 공으로 1,000짜짜의 땅을 받았습니다. 딴진싱은 꺼두(Kedu 1793-1803)와 족자(1803-1813)의 화교집단 우두머리였는데 하멩꾸부워노 2세를 폐위시키려는 영국군과 결탁해 미리 만들어놓은 대나무 사다리들을 공급해 끄라톤의 벽을 타고 넘을 수 있도록 도왔던 것입니다. 이듬해인 1813년 그는 래플스에게서 깐젱 라덴 뚜먼궁 쓰짜디닝랏(Kanjeng Raden Tumenggung Secadiningrat)이란 귀족의 칭호를 받아 나요꼬의 군수(Bupati Nayoko)가 되는데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딴진싱의 모습을 무스타하르 왕자가 지독히 혐오한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대관식에서 무스타하르 역시 번도로 아리오 디포네로고 왕자(Bendara Pangeran Ario Diponegoro)라는 새로운 호칭을 받습니다. 후세가 길이 기억하게 되는 ‘디포네고로 왕자’라는 이름은 이때 매우 모욕적인 상황에서 얻게 된 것입니다. 그때 그의 나이 27세였습니다. 왕족들은 물론 귀족들도 지위가 변할 때마다 호칭이 변했고 그 역시 훗날 또 다른 호칭을 갖게 되지만 무엇보다도 ‘압둘 하미드’란 아랍식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했던 그를 후세의 인도네시아인들은 ‘디포네고로 왕자’라는 이름으로 선택적인 기억을 하게 됩니다. (제2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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