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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0) 본문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0)
“전하, 끄라톤 생활이 무료하시면 모처럼 선선한 날씨온데 바깥바람을 좀 쐬시지요.”
어쩐 일인지 다누레죠 재상이 그날 아침 일찍 도성 외곽 소풍을 제안했습니다. 술탄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마침 끄라톤 궁전 안의 모든 것에 숨이 막힐 듯하던 차였으니까요. 물론 마차 두 대와 시종, 하녀들 수백 명씩을 거느리고 길을 나서는 것이 얼마나 번거롭고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인지엔 생각이 미치지 않았습니다. 왕실과 귀족들에게 그런 것은 그저 당연히 누리는 권리였으니까요. 그래서 수백 미터씩 늘어진 왕실의 행차가 장관을 이루었고 인근 백성들은 그 행차 앞에 하던 일을 멈추고 무릎을 꿇어 경의를 표해야 했습니다.
그 행차의 앞 뒤를 소규모 끄라톤 경비대가 호위했고 멀찍이 뒤편에선 브레더부르크 요새에서 출발한 네덜란드 기병대가 뒤따라오고 있었습니다. 명색은 술탄의 경호였지만 요주의 인사들과의 접촉을 예방하는 감시의 기능도 있었죠. 그들이 도착한 끄라톤 서남쪽 암바르위낭운(Ambarwinganun) 지역의 울창한 숲 앞에 펼쳐진 초지에서 술탄은 조금 마음이 풀어진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재상, 여기 쁘상그라한(Pesanggrahan)을 짓는다면 어떨 것 같소? 참으로 쾌적하지 않소?”
“높은 안목이십니다.”
쁘상그라한이란 끄라톤의 외궁이나 중요한 손님, 사절들을 위한 초대소 같은 용도로 사용하는 왕가의 숙박시설을 말합니다. 하멩꾸부워노1세와 2세 시대에 여러 개의 쁘상그라한이 건설되었는데 끄라톤 궁전 바로 남쪽에 지금도 남아있는 따만사리(Taman Sari)가 가장 대표적인 곳이죠.
술탄 일행은 거기서 얼마간 시간을 보낸 후 오후 3시경 마지막으로 간단한 다과를 즐긴 후 환궁하기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마차에 오르려던 술탄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습니다.
“아아악!”
하멩꾸부워노 4세가 비명을 지르며 무너지듯 쓰러졌고 놀란 시종들이 달려들어 부축하려 했지만 술탄을 격렬한 경련을 일으키며 숨이 넘어갈 듯 고통에 찬 비명을 연거퍼 질렀습니다.
“전하! 왜 그러십니까? 어디가 아프십니까”
“술탄 전하를 어서 눕혀라! 어의는 어디 있느냐?”
암바르위낭운이 발칵 뒤집혔고 재상과 어의, 신료들은 물론 경비대장과 네덜란드 기병대장까지 술탄의 주변엔 몰려들었으나 그들은 술탄을 구할 재간이 없었습니다. 삽시간 새파랗게 질린 채 몸이 무섭게 부어오른 술탄은 간헐적으로 단발마 같은 비명을 지르더니 마침내 피를 토하며 숨이 끊어지고 말았니다. 그의 나이 불과 19세였고 역사에는 소풍을 다녀오던 길에 급사한 것으로 기록되었지만 술탄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도성에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아직 술탄의 죽음이 공식적으로 공표되지 않았는데도 그 충격적인 소식이 뜨갈레죠에 닿았습니다. 아직 해가 지기도 전, 디포네고로 왕자가 일행들을 이끌고 급히 끄라톤 궁전으로 달려왔습니다. 그 기세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끄라톤 경비대도, 네덜란드 군인들도 끄라톤에 달려 들어가는 그들을 막지 못했습니다.
신료들과 시종들이 가득한 앞마당을 지나 들어간 술탄의 침전엔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부풀어 오른 하멩구부워노 4세의 새파란 시신이 누워 있었고 그곳에 왕후와 후궁들, 그리고 재상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던 동생의 참혹한 시신 앞에 디포네고로의 무릎이 꺾였습니다. 그 순간 그의 마음 속에서도 뭔가가 큰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끄라톤을 중심으로 왕국이 다시 일어서게 될 것이라는 오랜 믿음이 마침내 무너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린 동생이 끄라톤의 구중궁궐 안에 고립되어 있는데도 그건 어쩔 수 없이 술탄이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근거없는 믿음은 결국 어린 술탄이 저렇게 고통스러운 죽음을 홀로 감당해야하는 잔인한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동생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눈물을 뿌렸습니다.
하멩꾸부워노 4세는 ‘시누훈 자롯, 스다 버시야르(Sinuhun Jarot, Seda Besiyar)’라는 시호를 받고 마타람 왕국 술탄들의 영원한 쉼터인 이모기리(Imogiri)의 빠지마탄(Pajumatan)에 묻혔으며 그의 묘역은 아스타나 버시야란(Astana Besiyaran)이라 불렸습니다.
누구나 독살을 의심했지만 공식적으로는 미스터리로 남습니다.
독살 가능성을 처음 제기한 사람이 다누레조 4세 재상이라는 것은 의외의 일입니다. 그는 디포네고로 왕자가 왕위를 찬탈할 목적으로 모종의 방법을 통해 술탄을 독살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감히 서슬퍼런 디포네고로 왕자에게 칼끝을 겨누며 동조하지 못했지만 네덜란드를 등에 업은 재상은 바득바득 디포네고로 왕자에게 덤벼들었습니다.
포네고로 왕자 역시 술탄이 급사한 사건 뒤에 다누레죠 재상이 중대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하멩꾸부워노 4세는 시종이 가져다준 음식을 먹은 후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두 사람은 끄라톤에서 공개적으로 격돌했고 다누레죠 재상은 예전과 달리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끝까지 디포네고로 왕자의 혐의를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게 주장일 뿐, 양쪽 모두 어떤 물증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관료들과 네덜란드 총독부가 두 사람 모두의 혐의를 각하하면서 술탄의 죽음은 영구미제로 남게 되었지만 그렇게 물증이 없는 사건인데도 그날 암바르위낭운에 동행하여 음식을 바친 시종들과 그 음식을 궁에서부터 준비해간 수라청 궁인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후세들은 이 사건이 다누레조 재상이 기획한 독살사건이라는 쪽에 무게를 두는 이유는 결과적으로 다누레조 재상의 권력이 더욱 강화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멩꾸부워노 4세가 승하한 후 다누레조 재상의 장악력이 더욱 공고해지면서 디포네고로 왕자는 완전히 궁 밖으로 밀려나는 쪽으로 역사가 전개되어 갑니다.
만약 하멩꾸부워노 4세가 정말 독살당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빠꾸알람 1세와 끈쪼노 왕후, 다누레죠 재상, 그리고 영국과 네덜란드 등 이민족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술탄국의 국왕이라는 것이 한낱 꼭두각시 놀음에 지나지 않고 자신이 왕좌에 앉아 있는한 그 운명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닫고 만 열아홉 살의 술탄을 왜 그토록 표시 나는 방법으로 급히 살해하지 않으면 안되었을까요?
자신의 왕자들이 아직 너무 어려 그들에게 양위조차 할 수 없었던 하멩꾸부워노 4세가 그 누구보다도 왕국을 잘 이끌어 갈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던 형님, 디포네고로 왕자에게 술탄의 자리를 양위하려 했던 건 아니었을까요? 은밀했어야만 할 그 계획을 다누레죠 재상이 미리 알아차렸다면요? 양위에 대한 디포네고로 왕자와 의견을 나누려고 인편을 통해 보냈던 서한이 다누레죠 재상이나 네덜란드 총독부의 손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을까요? 어쩌면 네덜란드 측이 디포네고로 왕자와 술탄의 자리를 놓고 뭔가 거래를 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 다누레조 재상은 디포네고로 왕자가 술탄이 될 경우 목숨마저 위태로워질 처지였으므로 먼저 손을 써 급히 술탄을 죽이고 자기가 쉽게 가지고 놀 수 있는, 더욱 만만한 술탄을 세우려 했던 것은 아닐까요?
밝혀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은 누구도 예단할 수 없는 법이지만 최소한 그런 가설들을 세워볼 수는 있습니다.
실제로 형제의 죽음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디포네고로 왕자에게 네덜란드 지방총독 드 살리스 남작(Residen Baron de Salis)이 술탄의 왕좌를 제안하며 회유한 것을 거절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술탄국의 왕위를 이민족들이 거래하듯 그렇게 쉽게 입에 올리는 것이 역겨웠고 그렇게 해서 술탄으로 즉위한다 해도 네덜란드 총독부가 뒤에서 약점을 잡아 꼭두각시처럼 부리겠다는 의도가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저들의 거래에 응한다면 족자의 술탄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 말로는 너무나 뻔한 것이다. 할아버지인 하멩꾸부워노 2세, 내 아버지 하멩꾸부워노 3세, 그리고 내 동생 입누쟈롯의 말로를 이미 보지 않았던가? 술탄인데도 불구하고 땅끝으로 유배당하거나 홧병과 독살로 죽고 마는 것이다. 네덜란드에게 아부하는 인간들로 넘쳐나는 족자 끄라톤에서 술탄이 된들 이민족과 싸우긴커녕 손발이 먼저 묶이게 될 뿐이다. 신에게 이미 굳게 맹세한 바, 저 네덜란드인들을 자바땅에서 몰아내려면 족자 술탄국의 국왕이 되는 것만으론 결단코 부족하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자 네덜란드와 다누레조 4세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부왕이 죽은지 2주도 채 되지 않던 1823년 12월 19일 하멩꾸부워노 4세의 세 살박이 왕자 구스티 라덴 마스 가톳 메놀(Gusti Raden Mas Gatot Menol)을 하멩꾸부워노 5세로 즉위시켰고 다누레조 재상은 그 뒤에서 왕국의 모든 실권을 자기 손에 틀어쥡니다. (제3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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