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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9) 본문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9)
나폴레옹 전쟁으로 멸망하다시피 했다가 간신히 되살아나 동인도로 돌아온 네덜란드는 과거의 기득권을 주장하며 족자 술탄국을 신속히 다시 손에 넣기 위해 이 시기에 전방위적으로 끄라톤 왕족들과 접촉을 시도했습니다. 자바땅을 잠시 영국에게 맡겨 놓았던 자기 보따리처럼 여기는 네덜란드의 행태가 디포네고로 왕자 눈에 곱게 보였을 리 없습니다.
그때 그들이 가장 공을 들여 회유하려 한 사람은 다누레죠 4세 재상이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가 그걸 모를 리 없었지만 영국 강점기 내내 섭정 빠꾸알람 1세를 끈질기게 견제해온 다누레죠 4세라면 분명 네덜란드의 유혹도 물리칠 것이라 내심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집요했고 거대한 이권이 걸리자 다누레죠 4세가 욕망 앞에 흔들리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었습니다. 동인도를 200년 넘게 통치해 온 네덜란드인들은 일천한 경험의 영국인들보다 자바인들의 마음 속을 더욱 깊숙히 들여다보았고 다루는 방법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끄라톤의 세력다툼은 이제 네덜란드 등에 올라탄 다누레죠 재상에게 급격히 기울어져 갔습니다.
“수마디뿌라공, 요즘 왕국의 영토를 네덜란드 총독부도 아니고 네덜란드인 개인 사업가들에게 임대해 주고 있다는 게 사실이오?”
뜨갈레죠의 저택에까지 들려온 소문에 디포네고로 왕자는 당장 끄라톤으로 달려가 다누레죠 재상을 만났습니다. 재상이 눈을 맞추지 못하는 모습에 왕자의 마음이 덜컥 내려 앉았습니다.
“아주 조그만 지역일 뿐입니다. 그곳 주민들에게도 충분한 보상을 했고요.”
“우리가 저들에게 조차해준 땅은 북쪽 해안으로 충분하고도 넘치지 않소? 어찌 왕국 한복판의 땅을 이민족에게 돈을 받고 넘겨준단 말이오?”
“네덜란드 지방총독의 간절한 부탁이 있었습니다. 저들 요구를 조금은 들어줘야 나중에 우리도 필요한 요구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땅에 대해서만은 그럴 수 없단 말이오! 당장 바로 잡으시오!”
재상 다누레죠 4세는 분명 조금씩 변하고 있었습니다. 재상이 네덜란드 기업들에게 국토를 임대하는 것은 그의 주장과 달리 술탄국 백성들의 고통으로 직접 귀결되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커피 같은 기호작물을 동인도에서 플랜테이션 방식으로 재배하는 유럽 사업가들이 아직 없었으므로 대규모 농장을 확보한 사업가들이 쉽게 큰 돈을 벌수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농민들은 네덜란드 사업가들의 농장일꾼이 되어 쥐꼬리 만한 급료에 종처럼 매어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다누레죠 4세는 예전 다누레죠 2세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 형제, 친인척들을 힘있는 자리에 앉히며 점점 더 전횡을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그는 빠꾸알람 1세가 끄라톤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려는 디포네고로 왕자의 신의 한 수였지만 1820년 1월 20일 16세가 된 하멩꾸부워노 4세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더 이상 섭정의 명분이 없어진 빠꾸알람 1세가 빠꾸알라만 봉국으로 돌아가자 이젠 거리낄 것 없이 권력을 과시하며 마구 폭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디포네고로 왕자밖에 없었으니 두 사람이 조만간 크게 충돌할 것임은 불보듯 뻔한 사실이었고 그것은 1820년 7월 20일 가르벡 샤왈(Garebeg Shawal) 행사에서 기어코 벌어졌습니다. 이둘피트리(Idul Fitri)를 기념하는 이슬람력 샤왈월(10월) 1일의 르바란(Lebaran) 축제행사에서 디포네고로 왕자는 레조위낭운(Rejowinangun)의 땅을 제멋대로 네덜란드에게 임대해 준 재상을 만조백관과 운집한 백성들이 보는 가운데 무섭게 몰아 붙었던 것입니다.
“재상! 이젠 도성의 땅까지 저자들에게 팔아치울 거요? 레조위낭운은 끄라톤의 지척이오! 뜨갈레죠도 내놓을 생각이오? 그러다가 끄라톤마저도 저자들에게 내놓을 것 아니오? “
디포네고로는 그날 행사에 참석해 있던 지방총독과 네덜란드 군인들을 가리키며 그렇게 언성을 높였습니다. 네덜란드군 앞에서 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이제 디포네고로 왕자 한 명뿐이었고 그의 그런 행동을 보면서 귀족들과 백성들은, 지금은 머나먼 타향에 유배당한 강직한 하멩꾸부워도 2세를 문득 떠올리며 한편으로는 속이 후련해짐을 느꼈습니다. 페낭섬에 유배된 노술탄은 재위시절 네덜란드군과 영국군들에게 깨지고 망가지면서도 끝내 고개를 꼿꼿이 들었죠.
“왕자 전하! 부디 용서를!”
다누레죠는 굴종하는 모습으로 급히 무릎을 꿇으며 그 상황을 모면하는 순발력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에겐 예전 처음 모조꺼르토에서 족자에 왔을 때의 순수함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도 그는 점점 더 노골적으로 더 많은 땅을 네덜란드 사업가들에게 내주며 디포네고로와 충돌을 빚었지만 그에겐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네덜란드가 그의 뒤를 봐주고 있었으므로 디포네고로 왕자라 할지라도 자길 쉽사리 실각시킬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거죠.
사실 디포네고로 왕자로서도 왕국을 원만히 경영하기 위해서는 네덜란드가 총애하는 다누레죠 재상을 파직시켜 네덜란드의 심기를 굳이 건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지척의 브레더부르크 요새에서 또 다시 화포를 쏘아댈 빌미를 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1822년에 더욱 심각한 충돌이 벌어집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하멩꾸부워노 3세 생전에 왕국의 깊은 산간 및 오지 촌락의 관리관 지정과 그들의 임무에 대한 법령을 제정한 바 있었는데 다누레죠 4세는 이를 무시하고 술탄의 동의도 없이 50명의 오지 관리관을 임의로 임명했고 그들의 급료를 충당하려고 징세관과 아전들까지 동원해 백성들을 무리하게 쥐어 짜 세금을 거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에 격노한 디포네고로 왕자는 어린 술탄을 대신해 문무백관이 모인 자리에서 다누레죠 4세에게 이 문제를 캐묻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모든 혐의를 부인하던 재상은 결국 왕자 앞에 무릎을 꿇고 조아리며 잘못을 실토했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너무나 자주 보아왔던 장면이었으므로 더욱 격분한 디포네고로 왕자는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네가 술탄과 신을 능멸했으니 오늘 내가 너를 심판하겠다!”
1811년 그랬던 것처럼 시티힝길 대전에서 다누레조 재상의 목이 날아갔던 사건이 또 다시 벌어질 판이었습니다. 칼을 뽑아들려는 디포네고로 왕자를 신하들이 극구 만류했고 왕좌에 앉은 하멩꾸부워노 4세조차 아연실색했으므로 그는 칼 대신, 신고 있던 가죽신을 벗어 재상의 뺨을 몇 차례 갈기고 말았습니다. 재상은 그 자리에서 꼼짝없이 맞으면서 연신 용서를 구했지만 그건 결코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디포네고로 왕자에게 매번, 끊임없이 공개적인 모욕을 당해 왔다고 생각했고 그 모욕감은 마음 속 깊은 원한이 되어, 언젠가 시골에서 도성으로 자신을 불러 재상으로 발탁했던 디포네고로에 대한 고마움을 완전히 잊고 이제 반드시 수모을 되갚아 주겠다며 복수의 칼날을 갈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 디포네고로가 끄라톤에 들어서는 것을 네덜란드군이 철통같이 막아섰으므로 술탄을 만날 기회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다누레죠가 오직 네덜란드의 눈치만 보며 국사를 자기 마음대로 운영하면서 왕국의 중대한 이권들이 속속 네덜란드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그날 다누레죠를 파직하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했습니다. 그로서는 뜨갈레죠로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끄라톤 궁전 안에서 네덜란드군들과 다누레죠 재상에게 둘러 쌓여 있는 하멩꾸부워노 4세는 이제 누구도 지켜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그로부터 1년 반쯤 지난 1823년 12월 6일에 벌어졌습니다.
하멩꾸부워노 4세는 당시 누가 보아도 의욕 잃은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왕국에서 가장 고귀한 사람이었지만 부모를 여윈 후 가장 의지하던 이복형 디포네고로 왕자와도 단절된 후 하루에 열 마디도 하지 않는 날이 많았습니다. 다누레죠 재상은 어린 술탄에게 거의 매년 새로운 왕후나 후궁과 혼례를 주선했습니다. 어린 술탄이 젊은 혈기를 주지육림 속에서 소비하며 정사에는 관심갖지 기를 원했던 것이죠.
그래서 19세에 이르렀을 때 술탄은 아홉 명의 처를 두었는데 디포네고로와 만나지 못하게 된 후 혼례의 빈도가 더욱 높아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열여덟 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그중 3분의 1정도가 어릴 때 사망했습니다. 즉 왕실은 매년 혼례뿐 아니라 상도 치러야 했던 것입니다. 그는 여러 번 디포네고로에게 인편으로 서한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것이 정말 뜨갈레죠의 형님에게 도달했는지 알 수 없었고 단 한번도 회신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가 열아홉살의 나이에 세상과의 단절을 느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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