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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근대사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7)

beautician 2023. 9. 7. 11:14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7)

 

3 왕위를 포기하다

 

하멩꾸부워노 3세는 술탄이 아직도 뒤숭숭한 왕궁의 상황을 수습하기는커녕 매번 식사를 물리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육체적 정신적 건강문제를 노출시키며 국사에 대해 아무런 의욕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저에는 그가 어떤 의지와 목적을 가지고 있든 영국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결코 성취할 없으리라는 절망감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지난 사이 왕국에서 일어난 사건들로 인한 충격과 이제 술탄으로서 왕국을 위하기보다는 이민족들에게 휘둘려야만 한다는 현실은 중압감으로 다가왔고 정신적 부담을 견디지 못한 그의 육체는 날로 쇄잔해 꼬챙이처럼 말라갔습니다.

 

 이럴 왕자님이 계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술탄 전하의 힘이 되어 주십시오.”

 

이번만은 궁전에 남아 아버지와 왕실을 지키겠다고 마음먹은 디포네고로 왕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왕가의 친척인 반유마스(Banyumas) 군수 출신 마스 뚜먼궁 신두네고로(Mas Tumengung Sindunegoro)입니다. 그는 시티힝길 대전에서 목이 날아간 다누레죠 2세의 후임 재상으로 하멩꾸부워노 2세를 도와 정사를 돌보며 끄라톤의 경비병력을 강화하는 모든 일에 비범한 수완을 보였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현저한 전력 차이로 처음부터 승패가 뻔했던 스뻐히 전투 초반에 바로 옆에 떨어진 영국군 포격으로 부상을 입고 며칠 사경을 헤맨 끝에 결국 다리를 절게 되었죠. 끄라톤이 함락되는 것을 맨정신으로 보았다면 당장 칼을 입에 물고 자결했을 사람이었으니 당시 정신을 잃고 있던 것이 어쩌면 다행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그를 다누레죠 3 재상이라 불렀습니다.

 

몸도 불편하신 재상께서 궂은 일을 모두 맡아주시니 술탄 전하를 대신해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신두네고로는 디포네고로의 대답에 헛헛한 웃음을 웃었습니다.

 

선왕을 지키지 못한 신료들은 모두 죽어 마땅한 자들인데 부끄럽게 살아남은 제가 이런 하는 정도, 대수겠습니까?”

 

재상이 하멩꾸부워노 2세와 같은 강경파임을 영국도 모르는 아니었지만 영국으로서도 족자 술탄국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끄라톤이 기능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그의 성향을 문제삼으며 신두네고로를 족자 술탄국의 재상으로 인정할 없다는 공식입장을 세우고 있었지만 병상에서 일어난 그가 재상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굳이 막지 않았습니다. 그의 유능함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영국이 끄라톤을 무릎 꿀린 족자 술탄국 정치지형의 변화로 처리해야 행정업무들이 산더미 같았는데 신두네고로는 일을 묵묵히 감당해냈습니다.

 

우선 족자 술탄국이 형식적으로나마 매년 100,000 레알의 임대료를 받는 조건으로 꺼두(Kedu), 빠찌딴(Paciran) 일부, 야빤(Japan), 지빵(Jipang), 그로봉안(Grobongan) 지역을 네덜란드에게 조차하는 계약은 물론, 끄라톤 직할지인 아디까르토(Adikarto) 지역을 영국의 총애를 입은 노토꾸수모 왕자에게 이양한다는 증서 등을 만드는 한편 관련 지역의 영주들에게도 필요한 조치를 해야 했습니다. 왕국에겐 치욕적인 일이었지만 어쨌든 누군가 관련 행정처리를 매듭지어야 했습니다.

 

정말 곤혹스러운 부분은 족자 술탄국의 군대를 궁전경호 정도만 가능한 수준으로 축소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끄라톤 경비대의 강력한 저항을 경험했던 영국은 총독부가 용인하는 규모 이상의 군대를 술탄이 가질 없도록 했습니다. 그대신 영국군과 세포이 부대가 궁전 경비대의 주축을 구성했죠.

 

물론 그들은 경비대를 빙자했지만 그것은 왕실 턱밑에 칼끝을 밀어넣는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과정에서 당초 왕궁경비를 담당했던 부기스족 경비대, 발리 기병대를 비롯한 9,000명의 끄라톤 경비대 병사들이 일자리를 잃고 말았습니다.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한 병사들을 등떠밀어 내모는 낯부끄러운 일까지도 모두 신두네고로 재상의 일이었습니다. 강제 퇴역당한 병사들 상당수가 자바섬 바깥, 식민정부가 소유한 외곽 농장에서 천덕꾸러기처럼 구박받으며 막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군대의 해산과 축소는 끄라톤뿐 아니라 족자 술탄국 전역에서 네덜란드군의 감시 아래 진행되었습니다.

 

족자의 부기스 부대 복장 (오늘날 축제행진) https://www.flickr.com/photos/pra-yudi/12116870673, https://www.flickr.com/photos/agusyr/4215790206 수라카르타와   족자의   병사들   https://hiveminer.com/Tags/soldier%2Cyogyakarta   참조

 

 

한편 디포네고로 왕자는 끄라톤에서 술탄 하멩꾸부워노 3세의 정무고문이자 권한 대리인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디포네고로의 행동을 눈여겨 본 네덜란드의 족자 주지사 존 크로퍼드가 1812년 말경 디포네고로 왕자가 유능하고 협조적이니 차기 술탄으로 적합할 것 같다는 추천의견을 바타비아에 보냈고 며칠 후 레플스 총독대행이 직접 디포네고로에게 족자 술탄국의 태자 지위를 제안해 왔습니다.

 

엄연히 왕위를 지키고 있는 부왕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태자며 차기 술탄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이었을 뿐 아니라 수백 년간 자바땅을 좀먹어 들어오던 네덜란드 못지 않게 왕국을 유린하고 술탄 왕가를 그토록 가볍게 여기는 영국을 디포네고로는 괘씸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들키지 않도록 안으로 갈무리하며 그는 총독대행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저는 후궁의 아들입니다. 족자 술탄국은 더 훌륭한 태자가 필요한 나라고요.”

 

하지만 어린 시절 그의 마음을 괴롭혔던 후궁의 자식이라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고민거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민족들이 내미는 선물엔 반드시 독이 묻어 있다는 사실을 이미 간파했고 이를 완곡히 거절할 수 있는 납득할 만한 핑계가 필요했던 것뿐이었죠. 영국 측은 인품도 있고 왕실 장악력이나 백성들에 대한 영향력에서 손색이 없는 디포네고로 왕자가 자기들 편이 되어준다면 금상첨화였겠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20대 후반에 접어든 디포네고로는 깊은 이슬람 신앙 위에, 궁밖에서 살면서 접하게 된 백성들의 고단한 삶과 두 번씩이나 끄라톤을 유린한 이민족의 만행을 보면서 누구를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깊이 생각했고 그 결과 이미 굳건한 가치관을 가지고 되었던 것입니다.

 

영국 총독부는 다른 왕자들에게 눈을 돌렸습니다. 술탄이 평생 열 명 가까운 왕후와 후궁을 들이는 왕가에서 왕자들은 얼마든지 넘쳐났습니다. 나중의 일이지만 디포네고로 왕자 자신도 평생 아홉 명의 아내를 가지게 되죠. 하멩꾸부워노 3세의 아들들 중 총독부의 눈에 든 것은 여덟 번째 왕자인 구스티 라덴 마스 입누쟈롯(Gusti Raden Mas Ibnu Jarot)이었습니다. 그는 구스티 깐젱 라투 끈쪼노 (Gusti Kanjeng Ratu Kencono) 왕비에게서1804 4 3 태어났고 스뻐히 전투가 있던 1812년엔 겨우 여덞 살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 전통 와양 인형극에 등장하는 아르쥬나(좌)와 크레슈나(우) 출처-  https://wayang.wordpress.com/2010/03/07/jatidiri-dan-sikap-hidup-kresna-27-kedudukan-dan-sikap-kresna-dalam-masyarakat/

 

 

디포네고로 왕자와 입누쟈롯 왕자의 사이는 마치 인디아 라마야나(Ramayana) 전설에 나오는 크레슈나(Kresna) 아르쥬나(Arjuna) 같은 관계였다고 전해집니다. 크레슈나는 힌두신 비슈누의 화신으로 대서사시 마하바라타(Mahabarata)에서는 아르쥬나의 절친으로 등장하고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주인공 아르쥬나의 조언자이자 정신적 지주인 비슈누신의 모습으로 화해 친족과의 전쟁을 거부하는 아르쥬나를 다시 전쟁터에 나서도록 설득하죠. 디포네고로가 많은 이복형제들 스무 가까이 차이지는 입누쟈롯 왕자을 각별하게 여긴 것은 그의 온순한 성품이 아버지 하멩꾸부워노 3세를 너무나 빼어닮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랬기에 영국 총독부 역시 입누쟈롯 왕자에게 눈도장을 찍어 두었던 것이고요.

 

재상 신두네고로는 날로 악화되던 하멩꾸부워노 3세의 건강을 걱정하했지만 정작 자신이 스뻐히 전투 당시 입은 부상이 도져 1813 어느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얼마 남지도 않은 왕궁의 충신들이 하나 그렇게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1813 12 2 임명된 후임 재상은 야빤(Japan – 지금의 모조꺼르토 (Mojokerto)) 군수였던 마스 뚜먼궁 수마디뿌라(Mas Tumengung Sumadipura)였습니다. 그는 아직 30 초반의 젊은 영주였어요. 대개는 전임 재상의 자식이나 피붙이 명을 선택해 다음 재상을 대물림시켰지만 디포네고로 왕자는 당시 모조꺼르토를 동부자바에서 가장 사는 지역으로 만드는 수완을 발휘한 수마디뿌라를 족자 술탄국 내정을 관장할 재상으로 직접 발탁한 것입니다. 그에게는 다누레죠 4 재상이라는 칭호가 붙었습니다.

 

그러나 일천한 가문과 배경을 가진 그를 왕도의 고위 귀족들이 순순히 재상으로 떠받들었을 없습니다. 기득권 귀족들의 시기를 한몸에 받은 재상은 한껏 풀이 죽어 처음엔 크고 작은 실수를 저지르며 대전에서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으므로 디포네고로 왕자가 곁에서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했습니다. 결과 마침내 다누레죠 4 재상도 끄라톤에서 비로소 자리를 잡게 되었죠.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그가 재상의 자리에서 37년간이나 머물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에측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디포네고로 왕자와 평생의 원수가 되리란 사실도 말입니다.

 

하멩꾸부워노 3세의 건강은 날로 더욱 악화되어 갔습니다. 그는 스스로 선대 술탄들이 가졌던 용기와 배포를 전혀 닮지 않았음을 누구보다도 알았고 자식들 대부분이 자신의 유약함을 그대로 빼어박은 것을 한탄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병상에 눕게 되었을 매일 문안오는 디포네고로를 만나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낙이었습니다. 깊은 신앙심을 바탕으로 굳은 심지를 가진 아들이 자신을 닮지 않았다는 사실을 너무나 다행스럽고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입니다.

 

아들아, 아직도 술탄이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느냐?”

 

디포네고로 왕자는 부왕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습니다.

 

, 아버님. 술탄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왕국의 술탄이 아니라 이민족들을 모두 몰아낸 자바땅 전체의 술탄이 되겠습니다.”

 

말은 족자 술탄국의 왕좌를 거절한다는 의미였죠. 하지만 그의 말속에 담긴 원대한 포부에 하멩꾸부워노 3세는 마음이 푸근해짐을 느꼈습니다. 사실 하멩꾸부워노 3세도, 디포네고로 왕자도, 아무리 그들이 원한다 해서 디포네고로가 술탄이 되는 것을 영국이 승인할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디포네고로 왕자가 어떤 식으로든 왕국의 미래를 일정 부분 좌우할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멩꾸부워노 3세는 마주 잡은 아들의 손을 쥐며 엷은 미소를 떠올렸습니다.

 

하멩꾸부워노 3세는 번째 즉위 불과 2 만인 1814 11 3,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술탄으로 재위한 것은 번의 재위기간을 모두 합쳐 865일에 불과했으니 2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성대한 왕실 장례의식이 치러진 그의 유해는 이모기리 빠지마딴(Pajimatan) 묻혔고 그의 묘역은 아스타나 까수와르간(Astana Kasuwargan) 이라 불렸습니다. 시대가 그렇게 빨리 저물고 있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