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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5) 본문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5)
아니나 다를까, 네덜란드는 왕궁이 하는 모든 일을 참견하며 온갖 이권을 요구해 왔습니다. 왕실과 귀족들이 네덜란드에게 강력히 반발하던 중 응으벨(Ngebel)과 스끄독(Sekedok)에서 티크나무 숲을 뺴앗으려는 네덜란드 총독부를 상대로 현지 백성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네덜란드는 그 책임을 라덴 롱고 쁘라위로디르죠 3세(Raden Ronggo Prawirodirjo III)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폭동지역 관할인 마디운의 군수이면서 술탄의 사위이자 고문이었고 무스타하르 왕자의 장인이기도 했습니다. 주로 끄라톤궁에서 지냈던 인물이었는데 댄덜스 총독은 그에게 폭동을 사주했다는 증거가 있다며 보고르(Bogor)로 소환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장인인 술탄을 압박하려는 수단이었고 그 소환에 응한다면 라덴 롱고는 십중팔구 누명을 쓰고 댄덜스의 손에 죽게 될 판이었습니다. 이에 라덴 롱고는 소환에 불복하고 차제에 마디운에 돌아가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는 자바땅에서 네덜란드인들의 묵은 떼를 씻어낸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자바인들과 화교들의 권익을 위해 네덜란드와 맞섰습니다.
“알라의 가호가 라덴 롱고와 마디운의 백성들에게 함께 하기를!!”
라덴 롱고 토벌을 위해 족자 술탄국의 군대도 네덜란드에게 차출되었지만 하멩꾸부워노 2세는 공개적으로 이 반란을 축복하며 네달란드에 대한 반감을 숨기려 들지 않았습니다. 귀족들은 물론 백성들도 그러한 술탄의 언행에 통쾌함을 느꼈겠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정치적 자해행위가 되었습니다. 댄덜스가 매사에 비협조적인 하멩꾸부워노 2세를 어떻게 해서든 라덴 롱고의 반란과 엮어 폐위시키려 들었으니까요.
네덜란드가 중심이 된 수라카르타, 족자, 네덜란드 연합군이 마침내 반란을 진압했을 때 전사한 라덴 롱고의 시신에서 한 통의 서신이 발견됩니다. 거기엔 족자 술탄국 문장이 찍혀 있었는데 댄덜스는 술탄이 라덴 롱고와 공모한 증거라며 하멩꾸부워노 2세를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양측의 첨예한 갈등이 벌어졌지만 술탄은 모든 혐의를 전면 부인했죠.
하지만 댄덜스는 이를 문제삼아 1810년 12월 기어이 군대를 동원해 끄라톤 궁전을 공격해 왔습니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끄라톤을 굴복시킨 댄덜스는 하멩꾸부워노 2세를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그의 아들 라덴 마스 수로요를 술탄 하멩꾸부워노 3세로 즉위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위상이란 말만 국왕이지 실제로는 왕의 권한대행 또는 큰 성의 태수 정도로 권한이 대폭 낮춰진 것이었습니다.
댄덜스는 찌레본(Cirebon)에서 노토꾸수모 왕자와 노토디닝랏 왕자도 체포하고 재상의 지위를 다누레죠 2세에게 다시 돌려주었습니다. 천하의 속물 다누레죠 2세의 세상이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그가 실권없는 술탄을 한없이 깔보며 어떤 전횡을 저질렀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폐위된 하멩꾸부워노 2세는 끄라톤의 한 전각에 연금되어 다누레죠 2세에게 말할 수 없는 수모를 당했고 백성들은 그를 술탄 세뿌(Sultan Sepuh – 老술탄)라 부르며 마음아파 했습니다.
“아들아, 아직은 때가 아니니 뜨갈레죠를 떠나지 말거라.”
네덜란드가 부왕을 끌어내린 자리에 올라야 했던, 그래서 결코 내키지 않았던 대관식이 끝난 후 하멩꾸부워노 3세는 무스타하르를 따로 불러 그렇게 말했습니다. 끄라톤 궁전에는 얼마전 난입했던 네덜란드 군인들이 여전히 곳곳에 잔뜩 깔려있어 흉흉한 분위기였습니다.
“내가 전에 했던 말, 잊지 않았지?”
“네, 아버님.”
“그래. 이 아비가 지금 하지 못하는 일을 넌 꼭 해낼 수 있어야 한다.”
비장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던 하멩꾸부워노 3세는 네덜란드 지방총독과 귀족들이 다가오자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그들을 맞았고 무스타하르는 그날로 뜨갈레죠에 돌아갔습니다. 폐위된 할아버지가 유폐된 전각은 네덜란드 군인들이 겹겹이 지키고 있어 만날 엄두도 낼 수 없었습니다. 그런 경직된 왕궁 분위기를 보면서 그는 왕국이 힘을 잃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는지를 끊임없이 곱씹었습니다.
‘힘 없는 왕국은 철저히 짓밟히다가 결국 멸망할 뿐이다. 싸우기 위해선 적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적이 얼마가 강한지 알기 위해선 내가 얼마나 약한지, 이 왕국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힘을 키우려면, 먼저 이 왕국의 구석구석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
그의 선택은 이슬람 사회에 더욱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슬람 연구자들은 공부를 마치면 포교활동을 위해 고향을 떠나 지방으로 떠돌곤 했는데 무스타하르는 그들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족자 술탄국은 물론 자바땅 전역에 대한 정보를 차근차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811년 영국군이 자바에 들어와 네덜란드 점령지를 빼앗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네덜란드 본국이 나폴레옹 전쟁으로 프랑스에 합병되는 바람에 더 이상 해외 식민지를 관리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네덜란드가 사실상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린 것이죠.
그런 예기치 않았던 사변을 맞아 네덜란드 총독부는 선택의 여지없이 영국에게 식민지의 모든 권리를 이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원래 네덜란드군 장군이었던 댄덜스 총독은 유럽으로 돌아가 러시아군을 상대하는 프랑스 나폴레옹군의 동부전선 사령관이 됩니다. 댄덜스는 지옥에 떨어져도 살아돌아올 만큼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네덜란드에게서 영국으로 권력이 넘어가면서 동인도에 힘의 공백기가 찾아오자 연금되어 있던 하멩꾸부워노 2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를 가두어 둘 네덜란드군이 끄라톤 궁전에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신이 유폐되어 있던 전각 앞에 무장을 갖추고 나선 하멩꾸부워노 2세는 거기 모여든 자신의 아들 하멩꾸부워노 3세를 위시한 신료들과 군인들에게 첫 명령을 내렸습니다.
“다누레죠, 그 놈을 잡아오거라!”
외세와 결탁한 적폐의 숙청작업은 당연히 술탄과 댄덜스 사이에서 끝없이 불화의 불씨를 제공했던 다누레죠 2세를 끌어내리는 것이 국권회복의 첫 걸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지금까지 저지른 전횡과 방자함은 고작 파직 정도로 상쇄할 수 없을 만큼 엄중한 것이었습니다.
다누레죠라고 해서 바보가 아닌 이상 이제 영국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네덜란드에게 그래 왔듯이 이제부터 영국의 비위를 살살 맞추면 여전히 족자 술탄국의 재상으로서 떵떵거리며 살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벌써부터 끄라톤 궁 앞의 텅 빈 브레더부르크 요새에서 환영식을 준비하며 영국군을 기다리는 정성을 보였고 영국군이 이미 진주한 멀리 바타비아에도 인편으로 선물을 보내며 영국 편에 줄을 서던 중이었습니다. 그날 아침 그는 궁전회의가 소집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영국과 이미 모든 거래를 끝내 놓았다고 큰소리를 칠 요량으로 끄라톤 궁전에 들어서던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던 것은 부기스(Bugis)족 경비부대의 날카로운 창 끝이었습니다. 포박당한 다누레죠 2세는 시티힝길(Sitihinggil) 대전의 단 위에 하멩꾸부워노 2세가 무서운 얼굴을 하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제서야 자신이 죽을 곳에 들어섰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오금이 저려 대전 초입에서부터 엉거주춤 앉은 채 경비병들에게 질질 끌려 들어왔고 오줌과 똥까지 지려 바닥이 흥건했습니다.
“술탄 전하! 제가 그동안 뭔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결단코 마음을 고쳐 먹겠사오니!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옵소서!”
다누레죠는 그렇게 울부짖으며 목숨을 구걸했지만 하멩꾸부워노 2세는 말없이 왕좌에 앉아 신료들이 속속 대전에 모여들기를 기다렸습니다. 신료들 중 많은 수가 나타나지 않았는데 지난 1년 동안 다누레죠의 위세를 업고서 마치 자기 세상이라도 온 듯 끄라톤을 어지럽혔던 그의 친인척들이 상황을 눈치채고 도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 대전에는 모든 왕자들과 왕족들, 귀족들까지 도착했고 뜨갈레죠에서 불려온 무스타하르 역시 거기 있었습니다. 그러자 하멩꾸부워노 2세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오늘 너희들은 왕국과 정사를 농단한 자의 최후를 보게 될 것이다. 다누레죠, 저 자의 악행은 뼈마디 하나하나를 자근자근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으나 오늘 저 자의 목을 베어 무너진 왕국의 기강을 다시 세우겠노라!”
그와 동시에 건장한 부기스 무사가 장검을 들고 나와 살려달라 울부짖는 다누레죠의 목을 단칼에 날려 버렸습니다. 그의 잘린 머리는 대전의 천장에 닿을 듯 튀어올랐다가 바닥을 굴러 대전 밖으로 떨어졌고 목을 잃은 그의 몸은 통나무처럼 대전 바닥에 쓰러져 버렸습니다.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은 자들은 다누레죠 저 자와 함께 국사를 농단한 자들이니 끝까지 추적해 반드시 주살하라!”
끄라톤 궁전의 외곽을 지키던 발리(Bali) 경비대는 이 명령에 따라 척살할 자들의 명단을 나누어 받고서 곧바로 말을 달려 나갔습니다. 숙청작업은 그후로도 한동안 철저하게 이루어졌고 끄라톤 궁엔 피비릿내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에 가장 난처한 입장에 있던 것은 무스타하르의 아버지 하멩꾸부워노 3세였습니다. 그는 네덜란드 총독부에 등떠밀렸을 뿐이지만 본의 아니게 살아계신 선대 술탄을 끌어내리고 성급하게 왕좌에 오른 천하의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입장을 부왕도 모를 리 없었지만 그를 바라보는 노술탄의 눈매엔 찬바람이 쌩쌩 불었으므로 대대적인 숙청이 벌어지는 가운데 자칫 하멩꾸부워노 3세조차도 목숨 보전이 쉽지 않을 듯했습니다.
“이렇게 된 게 아버님 잘못이 아닌 걸 할아버님이 누구보다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할아버님께 말씀드려 오해를 풀도록 하겠습니다.”
1년 전에 비해 몰라보게 수척해진 하멩꾸부워노 3세는 그렇게 말하는 아들에게 차분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습니다.
“유폐되어 있던 동안 전각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하셨으니 그분의 사무친 한을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누가 이해해 준단 말이냐? 그러니 너는 마음 쓸 것 없다.”
“하지만 아버님조차 목숨이 위험하다는 얘기가 들려옵니다.”
“부왕께서는 내가 미덥지 못할 뿐이야.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 나 자신이 오히려 부끄러울 뿐이다. 그러니 너도 당분간 나와 조금 거리를 두는 것이 좋겠다. 내 옆에 있다가 너까지 불벼락을 맞아서는 안될 일이지.”
그렇게 농담하듯 말하던 아버지의 웃음이 어딘가 슬퍼보인다고 무스타하르는 생각했습니다. 결국 노술탄은 아들을 폐위해 태자로 내려 앉히고 자신이 다시 술탄의 자리에 오르는 것으로 상황을 매듭지었습니다. 유약한 아들이 미덥지 못했던 것이죠.
그리하여 1811년 11월 5일 하멩꾸부워노 2세의 두 번째 대관식이 거행되었고 하멩꾸부워노 3세는 태자로 강등되어 아디빠티 아놈(Adipati Anom)의 칭호를 받습니다. 그 이름 자체가 ‘태자’라는 뜻을 담고 있었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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