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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4) 본문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4)
제2장 뜨갈레죠 시절의 청년기
라덴 마스 무스타하르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궁전에서 나와 머스짓(Mesjid – 이슬람 사원, 모스크)과 쁘산트렌 (Pesantren) 이슬람 기숙학교를 옮겨 다니며 공부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서부 수마트라 출신인 끼아이 땁토자니(Kyai Taptojani)같은 명망 높은 끼아이(Kyai)나 울라마(Ulama)를 스승으로 모실 기회를 가지며 이슬람 사회와 깊은 교분을 쌓았습니다. 1805년 족자 지역 주지사 보고서에 따르면 땁토자니는 자바어로 학문을 가르쳤고 당시 종교교육의 본산인 수라까르타로 학생들을 유학시켰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족자의 왕자인 무스타하르가 사실상 적국이나 다름없었던 수라까르타로 유학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죠.
쁘산트렌은 주로 아랍어 알꾸란 경전을 공부하는 곳이지만 예전에는 호신술과 명상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평소 출중한 영력을 보인 무스타하르 왕자가 이 시기에 모종의 신비한 체술(體術)을 익혀 나중에 네덜란드와 싸울 때 그 초월적 능력을 발휘했다는 야사도 전해집니다.
무스타하르는 이슬람 연구자들의 사회를 전전하며 종교와 역사를 연구했고 신과 선지자, 그리고 민중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립하면서 당시 자바의 상황이 이슬람의 가르침이 전파되기 전 아랍 민중들의 삶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릅니다.
“그래, 자바땅의 백성들을 진정으로 돕는 길은 알꾸란의 가르침을 그들에게 가르치고 선지자가 가르쳐 주신 신의 뜻에 따라 왕국을 다스리는 것이야!”
그는 자신이 자바의 무슬림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훗날 네덜란드와 맞서 싸우며 이슬람 왕국 건설을 위해 역설했던 그의 사상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형성된 것입니다.
이슬람에 입각한 종교적 가치관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 그는 자바의 전통 복장을 버리고 온통 흰색인 긴 상의와 아랍식 터번을 쓰면서 자신의 사상을 생활 속에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후세들이 그린 초상 속에서 자바인이라기보다는 아랍인처럼 보이는 복장을 하고 있고 자바전쟁 내내 그를 따랐던 추종자들 역시 대부분 아랍 복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압둘 하미드(Ngabdul Khamid)라고 불렀는데 이 이름은 훗날 그가 자바의 술탄으로 추대될 때 붙여진 긴 호칭 속에도 녹아들게 됩니다.
시조 술탄인 하멩꾸부워노 1세가 세상을 떠난 1792년 왕위에 오른, 라덴 마스 무스타하르의 할아버지 하멩꾸부워노 2세는 당시 아직도 이 세상에 자신의 이상을 펼쳐 보려던 42세의 열혈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권력투쟁을 일삼는 귀족들과, 이권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던 네덜란드 앞에서 그의 찬란한 꿈이 잔혹한 현실 앞에 가차없이 무너지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1799년 12월 31일, 앞서 말한 것처럼 VOC가 과도한 식민지 관리비용과 누적적자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파산하고 말았습니다. 영리를 추구하는 일개 회사가 식민지 정복전쟁 비용을 감담한다는 것이 애당초 가당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VOC의 식민지들이 독립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이제 네덜란드 왕국이 정규 관료와 군대를 파견해 직접 관리하게 되면서 네덜란드의 동인도 지배는 오히려 더욱 강고해졌습니다.
한편 선대 술탄의 가장 가까운 인물이자 족자 술탄국의 첫 번째 재상으로 하멩꾸부워노 2세의 재위 초창기를 그림자처럼 보좌했던 재상 다누레죠 1세가 VOC 파산 직전인 1799년 8월 19일 세상을 떠나자 술탄의 상실감이 컸습니다. 술탄은 고인의 충정을 기리며 그의 손자 라덴 뚜먼궁 마르타느가라(Raden Tumenggung Mertanegara)에게 조부의 재상 지위를 잇게 하면서 다누레죠 2세(Danurejo II)라는 칭호를 하사해 주었습니다. 뚜먼궁이란 고위귀족을 뜻하는 호칭이죠. 그런데 다누레죠 2세는 공과 사가 분명했던 조부와 달리 이권을 위해서라면 네덜란드와의 결탁도 마다하지 않는 속물이었습니다.
“술탄 전하, 다누레죠 재상이 백성들의 토지와 임야를 네덜란드인 사업가들에게 임대하는 것을 막아 주소서! 왕국의 영토를 이민족들이 좀먹지 못하게 하소서!!”
“전하! 어찌하여 저 재상이란 자가 끄라톤의 관료들을 자기 사람들로 모두 갈아치우고 있는 걸 두고 보기만 하십니까? 이 나라가 하멩꾸부워노 왕가의 나라입니까? 아니면 다누레죠 재상의 것입니까?”
조부의 공로를 참작해 몇 년 동안 어려 모로 애써 참으며 어지간해서는 좀 더 두고 보려 하였으나 다누레죠 2세 재상의 전횡으로 왕국의 기강이 무너지고 술탄의 정치적 입장마저 불리해지자 하멩꾸부워노 2세는 더 이상 참지 않고 문무백관이 보는 앞에서 재상을 단칼에 파직시키고 말았습니다. 누가 봐도 사필귀정이었지만 다누레죠는 이를 갈며 네덜란드 지방총독에게 쪼르륵 달려가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네덜란드 역시 이 상황에 심기가 편할 리 없었습니다. 비록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애당초 네덜란드에 대한 하멩꾸부워노 2세의 혐오는 그의 말과 행동에 늘 묻어나고 있었는데 다누레죠를 실각시킨 것이 그를 통해 네덜란드가 끄라톤 궁전에서 행사하던 영향력을 현저히 약화시키려는 시도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 즈음이던 1808년 헤르만 빌렘 댄덜스(Herman Willem Daendels)가 동인도 총독으로 부임해 온 것은 자바의 모든 왕국들에게는 재앙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아버님, 저도 이제 궁전에 돌아가 고군분투하시는 할아버님과 아버님을 돕겠습니다.”
이제 23세가 된 무스타하르가 정기 안부인사를 위해 뜨갈레죠를 떠나 궁전에 돌아올 때마다 더욱 깊어진 주름에 어두운 안색을 한 할아버지 하멩꾸부워노 2세의 모습에 자신이 무언가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어두운 표정은 아버지 라덴 마스 수로요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들에게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마침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니 기특하구나.”
“이번에 총독으로 부임한 댄덜스란 자가 술탄께 함부로 굴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자는 네덜란드에서도 강경파로 악명이 자자한 사람이라 하던데 그런 자를 상대해야 한다면 미약하나마 저라도 힘이 되어 드리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잠시 눈을 지긋이 감고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무스타하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습니다. 그는 정색하고 있었지만 그 눈빛 속의 자애로움만은 여전했습니다.
“스스로 미약하다면서 어찌 술탄의 힘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무스타하르는 말문이 턱 막혔습니다.
“그 자는 왕자가 말한 대로 무척 무례한 인간이었다. 내가 명색이 태자이다 보니 그 자가 술탄을 알현하러 왔던 자리에 나도 있어야 했지. 하지만 그건 알현이 아니라 마치 승전국이 패전국을 점령하러 온 것처럼 오만방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실제로 댄덜스는 네덜란드에서도두 번씩이나 쿠데타를 성공시킨 매파 군인이었습니다. 그는 동인도 총독으로 재임하던 기간에 역사상 처음으로 자바섬의 서쪽 끝 안여르(Anyer)로부터 동부자바의 빠나루깐(Panarukan)이라는 곳까지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대우편도로(The Great Post Road)라는 전략도로를 건설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지만 그렇다고 자바인들의 입장에서도 꼭 바람직한 인물이라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수탈을 위해 한반도 전역에 철도를 깔았던 일본 총독부를 우리가 존경할 리 없는 것처럼요.
그런 그가 네덜란드 왕실로부터 동인도 총독의 임명장을 받고 오랜 항해 끝에 1808년 1월 5일 바타비아에 도착하자마자 자바의 왕국들을 막무가내로 압박하면서 왕실과 자바인들의 빈축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정한 규정에 자바의 모든 술탄들을 굴복시키려 했는데 그 오만무쌍함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는 자바의 모든 왕들이 네덜란드 국왕을 받들며 공개적으로 네덜란드의 보호를 요청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네덜란드와 자바 왕국들 사이의 상하관계, 주종관계를 분명히 하겠다는 것이었죠. 댄덜스가 먼저 도착한 수라카르타에서 눈치빠른 수난 빠꾸부워노 4세는 순순히 그 요구를 받아들였지만 불 같은 성격인 족자의 하멩꾸부워노 2세가 이를 수용할 리 없었습니다.
“술탄께서 화를 내는 걸 한 두 번 본 것이 아니지만 그날처럼 분노를 터뜨리는 건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난 그 분이 끄리스(Kris) 단검이라도 뽑아들까봐 걱정했단다.”
댄덜스는 노발대발하는 하멩꾸부워노 2세 앞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이번엔 네덜란드를 대표하던, 주지사 격인 지방총독의 지위를 ‘장관’으로 승격시키겠다고 천명했습니다. VOC 시절 지방총독이란 기본적으로 동인도회사의 일개 사업가였으므로 끄라톤 궁전의 신하로서 단 아래에서 술탄을 우러러보며 경의의 표시로 시리(Sirih) 나뭇잎을 뿌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댄덜스는 ‘장관’이 네덜란드 국왕의 대리인이자 총독부가 지배하는 모든 자바 왕실의 대리인이므로 모든 면에서 술탄과 동등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족자의 술탄은 물론 자바의 모든 왕들은 이제부터 내가 정한 ‘장관을 대하는 규범’을 따라야만 할 것이오! 장관은 술탄과 똑같은 높이에서 같은 의자에 앉고 술탄이 쓰는 산(傘)과 똑같은 산을 쓰며 왕을 만나도 모자를 벗거나 시리 나뭇잎을 뿌리며 신하의 예를 취하지 않을 것이오.”
댄덜스가 단 위에 올라가 왕좌에 앉은 술탄을 한껏 내려다보며 언성을 높이자 하멩꾸부워노 2세가 벌떡 일어서 마주 노려보면서 궁전의 왕족들과 귀족들이 크게 술렁거렸습니다.
“아직 더 있소! 앞으로 장관이 끄라톤 궁전에 입장할 때면 술탄은 반드시 왕좌에서 일어나 그를 공손히 맞아야 할 것이오! 길에서 왕의 행차와 마주쳐도 장관은 마차에서 내릴 필요없이 창문을 살짝 열고 지나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예를 갖춘 걸로 간주될 것이오!”
“그게 말이나 될 소리란 말이오?”
하멩꾸부워노 2세가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언성을 높였지만 댄덜스 총독은 아랑곳없이 술탄에게 도전적으로 아래턱을 내밀며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러니 총독부의 ‘장관’은 모든 면에서 술탄과 동일한 지위를 갖게 될 것이오. 그리고….”
댄덜스는 단 위에서 극적으로 방향을 돌려 그 옆에 선 태자 라덴 마스 수로요와, 파직당한 다누레죠 2세 재상 대신 직무대행으로 세운 술탄의 동생 노토꾸수모(Pangeran Notokusumo), 노토디닝랏(Pangeran Notodiningrat), 두 왕자 앞을 거만한 표정으로 천천히 지나치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나. 총독 헤르만 빌렘 댄덜스가 그 장관의 상관이란 걸 잊지 말시오! 난 그 위에 있단 말이오!”
댄덜스 총독의 그 오만불손한 말을 전해 듣던 무스타하르는 분한 마음에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그 자가 왜 그렇게 오만할 수 있었는지 왕자는 아느냐?”
“저들이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 맞았다. 끄라톤 궁의 코 앞에 세운 브레더부르크 요새(Benteng Vredeburg)가 끄라톤을 적군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라 저들은 말하지만 실제로는 우리 술탄국의 심장을 겨눈 가장 큰 위협이지. 저기서 포를 쏘면 끄라톤 궁전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어.”
라덴 마스 수로요는 한숨을 쉬었고 무스타하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습니다.
“하나 더 묻겠다. 나의 태자 지위를 네덜란드 총독부가 왜 승인했는지 아느냐?”
무스타하르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내가 힘이 없기 때문이야. 그래야만 네덜란드가 꼭두각시처럼 부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 말에 무스타하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의 솔직한 말이 비수처럼 가슴을 찔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라덴 마스 수로요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아들아, 잘 듣거라. 네가 힘이 없다면 넌 누구도 도울 수 없어. 네게 힘이 없으면 네가 술탄이 되더라도 이 나라를 구원할 수 없다. 그러니 힘을 키울 수만 있다면 그곳이 궁전이든, 뜨갈레죠든 상관없는 일이란다. 아무런 힘 없이 말로만 떠드는 용기란 저 브레더부르크 요새의 화포들이 한번 불을 뿜으면 아침녁 안개처럼 금방 사라지고 말, 부질없는 것이란다.”
라덴 마스 수로요는 분노와 절망으로 흐느끼는 아들의 들썩이는 어깨에 손을 얹었습니다.
“그러니 왕국에 도움이 되려면 먼저 힘을 기르거라. 궁전에 돌아오는 것은 그 다음 일이야. 난 네가 진정 힘있는 술탄이 되어 이민족들의 손에서 이 나라와 백성들을 구원하길 바란다.”
라덴 마스 수로요는 이제 곧 궁전에 변란이 닥칠 것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스타하르가 안전한 곳에 가있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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