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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근대사

[소설]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3)

beautician 2023. 9. 3. 11:57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3)

 

 

망꾸부미 왕자는1751년 보고원토 강(Sungai Bogowonto) 전투에서도 드 클럭(de Clerck) 대위가 이끄는 VOC 군을 크게 격파하며 승승장구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망꾸부미 왕자를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이번에도 주변에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사실 라덴 마스 사이드 자신도 그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망꾸부미의 조카이자 사위였지만 두 사람은 같은 편에 있으면서도 자바의 주도권을 서로 다투는 경쟁관계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21세기에 들어 인도네시아 정부에 의해 국가영웅으로 지정되지만 영화 어벤져스의 마블 영웅들과 달리 실제 역사 속에서 이들이 꼭 끈끈한 우정으로만 이어져 있던 것은 아닙니다. 1752년에 이르러 마침내 망꾸부미와 라덴 마스 사이드가 충돌했습니다. 원래 라덴 마스 사이드가 구축한 조직에 뒤늦게 합류했던 망꾸부미의 세력은 필연적인 수적 열세에 몰려 정치적으로 사이드를 상대하기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무력으로 정면돌파 하려 했지만 그마저 실패하고 말았어요. 무력에서조차 라덴 마스 사이드가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망꾸부미는 자기 사위에게 온전히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라덴 마스 사이드여, 내가 졌다. 이제 항복하니 내 수하들의 목숨만은 살려 주기 바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외견상으로만 고개를 숙인 것이었습니다.

 

야콥 모셀 VOC 총독 ( 출처 -  http://memorijakarta.blogspot.com/2015/04/jacob-mossel.html )

 

 

그는 그동안 적대시해왔던 VOC에게 몰래 손을 내밀어 함께 라덴 마스 사이드를 치자는 제안을 은밀히 넣었습니다. 그것은 까르타수라의 빠꾸부워노 3세와도 협력하겠다는 의미였습니다. 과연 망꾸부미 왕자에게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음을 웅변처럼 증명하는 행보였습니다.

 

VOC가 그 제안을 덥석 문 것이 1754년의 일입니다. 망꾸부미 왕자가 까르타수라를 떠난 지 8년만이었죠. 일전에 임호프 남작이 제안한 것처럼 자바 북부해안이 VOC에게 조차될 것을 전재로 그 북부해안 주지사로 내정되어 있던 니콜라스 하르팅(Nicolaas Hartingh)과 교섭한 망꾸부미는 빠꾸부워노 3세의 왕국 절반을 할양받는 대신 그동안 줄곧 반대해 왔던 VOC에 대한 자바 북쪽 해안 조차를 수용키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VOC가 지불하는 20,000레알을 망꾸부미와 빠꾸부워노 3세가 반씩 나누어 받는 데에도 합의했습니다. 이 합의를 구체화시킨 기얀티 조약(Treaty of Giyanti)17552 13일 망꾸부미 왕자와 네덜란드 총독 야콥 모셀(Jacob Mossel)이 서명했습니다.

 

이 조약의 결과로 망꾸부미는 빠꾸부워노 3세의 까르타수라 왕국 남쪽 절반을 넘겨받아 족자 술탄국을 세우고 자신이 술탄 하멩꾸부워노 1세로 등극합니다. 불가피한 일이었지만 족자 술탄국은 그렇게 네덜란드와의 협상을 통해 세워지면서 네덜란드의 입김에 이리저리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태생적 약점을 안게 됩니다. 기얀티 조약은 이 외에도 라덴 마스 사이드의 반군을 격멸시키기 위해 망꾸부미 왕자의 군대가 VOC 및 빠꾸부워노 3세의 군대와 손을 맞잡는다는 맹약도 담고 있었습니다.

 

기얀티 조약의 결과로서 까르타수라 왕국은 족자 술탄국과 수라카르타 수난국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1755년 당시에도 왕국의 동쪽은 이미 라덴 마스 사이드가 지배했고 이 지역은 나중에 망꾸느가라안 자치국으로 발전한다. 한편 1812년 영국이 자바를 지배하던 당시 족자 남서부가 빠꾸알라만 자치구로 독립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마타람-까르타수라 왕국은 두 개의 왕국과 두 개의 봉건 자치구로 나누어지게 된다.

 

 

기얀티 조약을 통해, 빠꾸부워노 3세는 자신이 수라카르타의 왕이란 사실을 재확인했을 뿐 영토의 반을 뺏기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처했고 이제 하멩꾸부워노 1세가 되어 족자 술탄국의 국왕으로 등극한 망꾸부미 왕자는 1756107일 왕국의 수도를 끄바나란에서 족자로 옮겼습니다 왕국의 원래 명칭은 응아욕갸라르타 하디닝랏(Ngayogyakarta Hadiningrat) 이지만 앞서 정한 바와 같이 여기서는 '족자 술탄국'(Kasultanan Yogyakarta)으로 줄여 부르기로 합니다.  

 

그렇게 다시 적으로 돌아선 하멩꾸부워노 1세와 라덴 마스 사이드는 그로부터 30여년 후인 1790년 다시 한번 손을 잡고, 1788년 즉위한 수라카르타의 빠꾸부워노 4세를 포위공격해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1755년 기얀티 조약과 함께 맺었던 족자 술탄국과 수라카르타 수난국의 평화조약은 한낱 종이장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때 라덴 마스 사이드가 자신의 점령지인 동쪽지역을 망꾸느가라 봉국(封國- Kadipaten Mangkunegaraan)이라 명명하고 자신은 스스로 망꾸네고로 1세가 되어 있던 시절입니다. VOC는 이번엔 하멩꾸부워노 1세의 편에 섰습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는 일이 불과 수십 년 사이에 수도 없이 반복된 것이죠. 연합군의 물리적 압박에 굴복한 빠꾸부워노 4세는 마침내 손을 들었고 VOC는 그의 주변에 모여든 종교 지도자들을 모두 쫓아내 버렸습니다. 강경한 이슬람 지도자들은 이제 수난의 귀에 이민족과 이교도의 축출을 속삭였늕데  그것은 태생적, 필연적으로 이민족이자 이교도일 수밖에 없는  VOC로서는 매우 불편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종교적 신념 앞에서 동맹이 또 다시 흔들렸습니다.

 

빠꾸부워노 4세

 

 

그럼 결국 우리 족자 술탄국이나 수라카르타 수난국, 망꾸느라가 봉국 모두 한 뿌리에서 나온 형제들이잖아요. 그런데 왜 화해하지 못하고 서로 대립하고 있는 거죠?”

 

무스타하르 왕자가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묻는 질문에 하긍 태후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형제들끼리만이라면 아주 오래 전에 화해했겠지. 그래서 마타람 왕국의 위대한 술탄 아궁(Sultan Agung)시대처럼 자바땅 전체를 다스리며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런데 왜요? 왜 화해하지 못했죠?”

꼼페니가 그걸 원치 않기 때문이란다.”

네덜란드 이교도들 말씀이시죠?”

 

하긍 태후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들은 마타람의 형제들이 서로 칼을 겨누길 바란단다. 그게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지. 그래서 그들은 지금도 끊임없이 족자와 수라카르타 사이를 이간질하는 거란다. 시조 술탄께서도 꼼페니를 몰아내지 못한 것을 천추의 한으로 여기셨단다.”

시조 술탄께선 술탄이 되시기 전에도 여러 번 꼼페니 군대를 무찌르셨는데 술탄이 되신 후에 왜 그들을 몰아내지 않은 거죠? 술탄께서 그들에게 물러나라 하시면 누가 그 말을 거스를 수 있겠어요?”

 

어린 무스타하르는 장군으로서 전투에 승리를 거두는 것과 술탄으로서 왕국을 경영하는 것이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란 것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장군들은 양손에 총칼을 들지만 술탄은 한 손엔 전쟁, 또 다른 한 손엔 강화를 들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요. 하긍 왕후는 무스타하르의 어깨를 쓰다듬었습니다.

 

그래, 그렇지. 그분도 그걸 늘 안타까워 하셨단다. 언젠가 네가 술탄이 되면, 꼭 그런 나라를 만들어 다오.”

 

뜨갈레죠의 밤은 그렇게 깊어 갔습니다.

 

오늘날의 브레더부르크 요새, 출처-http://vredeburg.id/wp-content/uploads/2015/08/13vredeburg.jpg

 

 

당시 망꾸부미 왕자와의 전쟁이 VOC가 존속하던 기간 중(1619~1799) 겪었던 전쟁들 중 가장 힘겨운 것이었다는 네덜란드 측 기록도 있습니다. 하지만 왕좌에 앉아 왕국을 다스리는 것은 전쟁을 벌이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고 결국 현실적 한계에 마주친 술탄 하멩꾸부워노 1세는 이민족들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무적과도 같던 VOC는 무스타하르가 15세가 되던 17991231일 누적된 적자를 이기지 못해 파산하고 맙니다.  1602년에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198년만에 문을 닫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동인도 지역을 포함한 VOC의 모든 식민지와 자산을 인수한 네덜란드 왕국은 정부 고위공무원들을 총독으로 파견하며 식민지를 더욱 옥죄어 갔습니다.

 

VOC란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즉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뜻하는 화란어의 약자 ( 출처 -  https://www.ma-shops.com/henzen/item.php?id=16383&lang=en )

 

 

그리고 무스타하르 왕자의 체스 놀이의 상대가 되어 주고 이슬람 문학에 깊은 지식을 바탕으로 역사와 문화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주었던 증조할머니 하긍후도 무스타하르가 18세가 되던 1803 10 17 세상을 떠났습니다. (1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