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2) 본문

인도네시아 근대사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2)

beautician 2023. 9. 2. 02:11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2)

 

하멩꾸부워노 1세는 171786일 마타람 왕국 후신인 까르타수라 수난국(Kasunanan Kartasura) 아망꾸랏 4(Amangkurat IV)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이 무스타하르 왕자가 일곱 살 때였으니 증조 할아버지 시조 술탄의 아우라와 카리즈마를 무스타하르 왕자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어요. 용맹스러운 시조 술탄도 아망꾸랏 4세의 후궁 라덴 아유 떼자와티(Raden Ayu tejawati)를 어머니로 두었던 것입니다. 하멩꾸부워노 1세의 본명은 라덴 마스 수자나(Raden Mas Sujana)였고 성인이 된 후엔 망꾸부미 왕자(Pangeran Mangkubumi)라고 불렸습니다. ‘망꾸부미란 이름이 아니라 그의 위상을 상징하는 칭호였는데 왕의 동생, 또는 태자의 동생이란 뜻으로 자바의 역사상 망꾸부미 왕자란 명칭을 가진 사람들은 왕국의 총리나, 병권을 쥔 군사령관의 역할을 하곤 했습니다.

 

1740 10월 바타비아(Batavia – 지금의 자카르타)에서 벌어진 중국인들의 반란이 자바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까르타수라에까지 번졌습니다. 1741 화교부대가 까르타수라를 포위공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빠꾸부워노 2세(출처 - https://id.wikipedia.org/wiki/Pakubuwana_II)

 

 

화교부대들은 당시 노란 수난 폐하(Sunan Kuning)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까르타수라의 왕족 라덴 마스 가렌디(Raden Mas Garendi) 중심으로 모여들었는데 그들은 1742 6 30 까르타수라를 공격해 급기야 궁전 요새 4미터 높이의 벽을 무너뜨리기에 이릅니다. 귀족들은 서로 앞다투어 까르타수라의 끄라톤 궁전에서 탈출했고 빠꾸부워노 2세조차 인근 뽀노로고(Ponorogo)지역으로 대피해야 할 만큼 상황이 험악해지자 망꾸부미 왕자는 화교군대를 몰아내기 위해 부득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이후 VOC 줄여 칭함) 군대의 힘을 빌려 와야 했습니다.

 

라덴 마스 사이드의 초상. 그는 ‘목숨을 앗아가는 왕자’라고도 불렸다 출처 :  https://myrepro.files.wordpress.com/2017/07/picsart_07-01-06-26-32.jpg, https://i2.wp.com/ranji.sarkub.com/wp-content/uploads/2015/05/pangeran-sambernyawa.jpg

 

 

이때 라덴 마스 가렌디 편에 있던 라덴 마스 사이드(Raden Mas Said)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있어 수라카르타 북쪽의 란둘라왕(Randulawang) 요새를 만들고 VOC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망꾸랏 4(빠꾸부워노 1)의 큰 아들 망꾸느가라 왕자(Pangeran Mangkunegara)의 아들이었습니다. 즉 빠꾸부워노 2세와 망꾸부미 왕자 두 사람 모두의 조카였던 겁니다. 이 세 사람은 오랜 기간에 걸쳐 때로는 힘을 합치고 때로는 서로 대적하면서 세력을 키워갔는데 이들의 대립으로 가장 큰 혜택을 입은 것은 이들 세 개 세력의 분열을 더욱 조장하며 그들 모두로부터 이권을 챙기려던 VOC였습니다.

 

라덴 마스 사이드의 군대가 수꼬와티(Sukowati)를 점령하자 빠꾸부워노 2세는 누구든 수꼬와티를 탈환하는 자에게 거대한 영지를 상으로 내리겠다고 공표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망꾸부미 왕자가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가 1746년 라덴 마스 사이드를 수꼬와티에서 몰아낸 것입니다.

 

망꾸부미 왕자. 훗날의 하멩꾸부워노 1세.  출처 - https://bio.izaygadget.com/2016/10/biografi-pangeran-mangkubumi.html

 

 

하지만 재상 쁘링갈라야(Patih Pringgalaya)는 수난을 꼬드겨 애당초의 포상 약속을 철회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왕조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달린 상황에서도 권력의 암투는 그림자 속에서 여전히 치열하게 벌어졌고 왕국의 권력이 망꾸부미 왕자에게 집중되는 것을 원치 않는 일단의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였던 것입니다. 망꾸부미 왕자는 혁혁한 공을 세우고서도 왕족과 고위관료들의 시기의 대상이 되고 오히려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했으니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거기에 더해, VOC 총독 임호프 남작(Baron van Imhoff)은 빠꾸부워노 2세가 자바섬의 북부 해안지역을 네덜란드에게 조차해 준다면 까르타수라가 네덜란드에 빚지고 있던 20,000 레알을 상쇄해 주겠노라 제안하며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수난 전하!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민족에게 땅을 내주다니요!”

 

수난(Sunan)이란 수수후난(Susuhunan)의 줄임말로 이슬람의 왕 술탄(Sultan)과 거의 같은 위상입니다. 국토를 돈에 팔아 넘기라는 제안에 망꾸부미 왕자가 격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수난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했습니다.

 

망꾸부미. 그건 수난인 내가 결정할 일이다. 그깟 전투에서 몇 번 이겼다고 수난의 결정까지 대신하려 드는가?”

 

비단 왕가와 귀족들뿐 아니라 수난조차도 망꾸부미 왕자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망꾸부미 왕자는 강력한 반대의사를 거두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을 네덜란드 측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습니다. VOC의 식민지 총독부 입장에서는 자바의 왕가와 민중들이 분열하면 분열할 수록 그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기 더욱 쉬워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왕국의 동쪽지역으로 철수한 라덴 마스 사이드의 군대를 섬멸하기 위해 소집한 작전회의에도 임호프 남작이 나타나 망꾸부미 왕자와 대립각을 세운 것은 매우 의도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임호프 남작(Gustaaf Willem van Imhoff) ( 출처 -  http://fortuner.id/wilhelm-gustav-van-imhoff-gubernur-batavia-jakarta-asal-jerman/ )

 

우리 꼼페니(Kompeni)의 군대 없이 까르타수라 군대만으로 라덴 마스 사이드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오?”

 

꼼페니회사’(company)란 뜻입니다. VOC,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뜻하는 말로 18세기 말까지 마치 총독부와 같은 의미로 쓰였고 VOC가 파산한 후에도 동인도 사람들은 네덜란드 총독부를 말할 때 습관적으로 꼼페니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망꾸부미 왕자는 매번 네덜란드 측이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는 참견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정말 당신들 도움이 필요하게 되면 그때 우리가 도움을 청할 것이요. 끄라톤에서 갖는 이 작전회의는 극비사안이요. 그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나가 주시오!”

하핫!”

 

임호프 남작은 모두 다 들으라는 듯 코웃음을 쳤습니다.

 

망꾸부미 왕자. 당신은 생각을 고쳐먹어야 해요. 꼼페니는 까르타수라 왕국이 금전적으로 갚을 수 없을 만큼 막대한 군사적 지원을 해왔소. 이 왕국이 이렇게 지탱되고 있는 것도 우리 덕분이란 말이오. 당신이 전쟁에서 거둔 승리도 우리 꼼페니 지원 없이 가능했을 거라 생각하오? 그런데 우릴 빼놓고 라덴 마스 사이드를 치겠다고요? 이제부터 우리 총 한 자루, 병사 한 명이라도 빌리려면 왕국의 병권(兵權)을 우리에게 넘겨야 할 거요!”

말씀이 지나치오! 수난 전하 앞에서 무슨 망발이시오?”

망꾸부미 왕자, 당신이야말로 꼼페니의 호의를 거절하고 까르타수라 왕국이 거대한 부채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을 막고 있으니 꼼페니와 까르타수라 왕국 모두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걸 모르시오?”

해안지대 조차를 말하는 거요? 왕국의 영토를 돈을 받고 넘기라고? 그리고 이젠 병권까지 달라는 거요? 수난 전하! 우리 왕국이 이런 수모를 당하는 걸 어찌 두고 보십니까?”

 

왕좌에 앉은 빠꾸부워노 2세는 언짢은 표정으로 망꾸부미 왕자의 시선을 피했습니다.

 

수난 전하, 저희 꼼페니는 까르타수라 왕국과 절대적인 우호관계를 지켜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여기 망꾸부미 왕자는 저희와 협조할 의사가 없는 것 같으니 군대장관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주시길 요청합니다!”

 

이와 같은 임호프 남작의 말에 빠꾸부워노 2세는 왕좌에서 벌떡 일어섰습니다.

 

수난 전하!”

 

망꾸부미 왕자는 빠꾸부워노 2세가 임호프 남작에게 따금한 경고를 주길 바랬습니다. 하지만 수난의 반응은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남작의 요구에 대해서는 재상과 관료들의 의견을 들어 보겠소. 망꾸부미, 너도 잘한 게 없어! 한편끼리 그렇게 으르렁거릴 필요가 뭐냔 말이다.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파하고, 망꾸부미, 너는 근신하고 있도록 하라!”

 

어이없는 일이었습니다. 망꾸부미 왕자는 까르타수라 왕국에서 수난 다음으로 높은 사람이었지만 그렇게 관료들과 장수들 앞에서 수난과 임호프 남작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임호프 남작의 오만방자함은 네덜란드 측이 얼마나 까르타수라 왕국을 깔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왕가와 귀족들은 네덜란드와 한 목소리를 내며 가혹한 비난을 해왔으므로 망꾸부미 왕자는 결국 군대장관의 직도 벗어 던지고 말았습니다. 마음을 다친 망꾸부미 왕자는 17465월 자신의 수하들을 이끌고 마침내 수라카르타의 끄라톤 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심사숙고한 끝에 조카 라덴 마스 사이드의 반군 사령부를 찾아갑니다. 망꾸부미 왕자는 이제 영토를 이민족에게 팔아 넘기려는 형제를 적으로 삼고 어제의 적이자 반역자라고 여겨왔던 조카의 편에 서기로 한 것입니다.

 

삼촌, 어서 오세요!”

 

전장에서 망꾸부미 왕자와 서로 여러 번 치명적인 공격을 주고받았던 라덴 마스 사이드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두 팔을 활짝 벌려 망꾸부미 왕자와 그의 일행을 맞으면서 대인배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전장에서 서로의 피를 뿌렸던 사이드 측의 병사들은 버거운 적이었던 망꾸부미와 그 부하들이 내심 반갑지만은 않았습니다. 망꾸부미 왕자는 조카와 그쪽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좀 더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구스티 라투 번도로(Gusti Ratu Bendoro)라고 불리게 되는 그의 딸 라라 인텐(Rara Inten)을 라덴 마스 사이드와 혼인시키며 혼맥을 쌓습니다.

 

드막(왼쪽), 그로보간(오른쪽) – 출처: 구글맵

 

이제 상황은 망꾸부미 왕자와 라덴 마스 사이드가 힘을 합쳐, VOC를 등에 업은 빠꾸부워노 2세와 대립하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이들 사이의 전쟁을 역사가들은 제3차 자바 계승전쟁(Perang Suksesi Jawa III)이라 부릅니다. 1747년에 이르러 망꾸부미 왕자는 약 13,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드막(Demak)과 그로보간(Grobogan) 등지의 전투에서 VOC군대와 카르타수라 왕국군을 상대로 승승장구했습니다.

 

한편 17491211일 병이 깊은 수라카르타의 빠꾸부워노 2세는 눈을 감기 직전 까르타수라 수난국의 전권을 VOC에게 이양했습니다. 차기 수난 결정권을 네덜란드에게 맡기는, 그야말로 주권국의 면모라고는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결정이었죠. 이 소식을 듣고서 혀를 찬 망꾸부미 왕자는 라덴 마스 사이드 진영 본진에서 1212일 까르타수라의 차기 수난 빠꾸부워노 3세로 즉위식을 올립니다. 그러나 VOC는 이를 무시하고 1215일 빠꾸부워노 2세의 아들을 빠꾸부워노 3세로 즉위시켰죠. 이제 까르타수라 수난국엔 두 명의 빠꾸부워노 3세가 존재하게 된 겁니다. 이때 망꾸부미는 끄바나란의 수수후난 (Susuhunan Kebanaran)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그의 부대 본진이 마타람 지역 끄바나란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끄바나란

 

빠꾸부워노 3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