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영업직원 활약사

영업직원 활약사 - 에필로그

beautician 2013. 5. 9. 02:53

에필로그

 

1.

경쟁사 중엔 한국 ㈜언일무역의 글램팜(Glam Palm)이라는 아이언기를 수입판매하는 회사가 있습니다. 다안모곳(Daan Mogot)에 본사가 있고 자카르타에서 열리는 미용전시회에 매년 출품하는 회사죠. 이 회사의 영업직원들과도 우린 필드에서 자주 부딪혔어요. 하지만 별다른 이해관계가 없으니 싸우거나 협조하거나 할 일이 별로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회사의 영업팀 직원들이 대부분 여자로 바뀌더니 언젠가부터 거래처에서 우리 제품들과 메이를 마구 씹어대기 시작했습니다. 난 늘 있는 일이라 치부했지만 메이는 70년대 고대기처럼 잔뜩 열을 받았습니다. 한번은 그쪽 영업직원 중 인다(Indah)라는 젊은 아가씨와 한 거래선에서 마주쳤는데 한 번 해대려던 메이는 인다가 남산만큼 배가 부풀어 오른 임산부임을 보고 애써 참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잠시 얘기를 나누다가 친해져 수다를 떨었던 모양인데 그 회사의 3명의 여자 영업직원 중 인다 말고 또 다른 한명도 출산이 임박한 임산부란 얘기도 들었어요. 그들은 잔뜩 부른 배를 하고서 매일 매연을 마시며 커다란 제품가방을 든 채 오토바이 뒤에 매달려 자카르타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던 거지요. 그 말을 전해 들은 나도 마음이 좀 짠 했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두 달도 되지 않아 인다가 사고를 치고 도주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도주한 것은 인다 뿐 아니라 그 회사의 여직원 3명 모두라는 것도 곧 알게 되지요. 메이가 또 열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분명 우리 경쟁회사 직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메이의 부하라고 속이고 다니며 메이의 후광에 힘입어 제품판매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발생한 사고로 손해를 입은 거래선들이 메이에게 불같이 화내며 불평의 화살을 쏴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난 이번에도 별도 놀라지 않았어요. 메이 이름을 파는 경쟁사는 비단 그들만이 아니었거든요. 거의 모든 경쟁사들이 메이의 이름을 팔았습니다. 보이스피싱 오해를 받았던 그 경쟁사에서는 메이가 출산휴가로 거의 필드에 나가지 않게 되자 메이가 내 회사를 이미 그만 두고 자기 회사에서 일한다는 소문을 내기도 했고 심지어 메이가 죽었다고 소문을 내고 다니는 경쟁업체도 있었습니다. 그건 메이가 거래선들과 그만큼 돈독한 유기적 관계를 만들어 놓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메이는 거래선에서 이상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또 다른 임신한 영업직원이 들려 주었다는 고단한 인생사 얘기였어요. 메이가 고개를 갸우뚱 한 것은 가정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나 현재 미혼모가 되는 과정의 마음가짐 같은 게 너무나 메이 자신의 얘기와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가 그의 꼬스에서 다른 여자와 함께 자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 에피소드는 모든 디테일마저 똑같았습니다.

 

그 여자 이름이 뭐였어요?”

 

메이는 그 여자가 분명 자기 얘기를 들은 사람일 거라 확신했죠. 그렇지 않고서는 평행이론속에 존재하는 인물들처럼 그토록 똑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동시대에 살고 있을 리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듣고는 바로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글램팜에 있던 그 임신한 여자요, 인다 말고 또 다른 애. 걔가 엔티였어요.”

 

거래선에서 찾아준 그녀의 명함엔 띠아(Tya)라는 이름이 찍혀 있었어요. 메이가 살아온 얘기를 마치 자기가 겪은 양 하소연하면서 메이의 거래선마다 찾아가 메이의 이름을 팔아 판매하고 그 대금을 당겨받아 도주한 띠아라는 여자엔티가 아닐 수 없었어요.

 

엔티의 얘기는 나중에 반둥에서도 한 번 더 듣게 되는데 그가 전에 있었던 R7 이라는 미용실의 직원이 엔티가 만삭의 몸으로 부모님 집으로 돌아갔다는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자카르타에 나와 젊음을 불살랐던 엔티는 잘못된 선택을 했다가 결국 몸도 마음도 모두 망가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전히 짠한 마음이 들었어요.


 

2.

시내순환 고속도로에서 공항방면으로 가다가 앙케(Angke)톨에서 내려와 즐람바르(Jelambar) 거리로 들어서면 우측에 폭 20미터 정도의 하천이 있는데 그 건너편이 떨룩공(Teluk Gong)이라는 동네입니다.  그 길 끝에 호산나(Hosanna)라는 이름의 미용실이 있는데 아마도 주인이 기독교인인 모양이죠. 예전에 이완(Iwan)이나 띠따(Tita)가 한두번 판매한 적이 있었지만 워낙 구석이고 길이 막혀 자카르타 전역을 주름잡던 우리들도 웬만하면 가지 않으려 하던 곳이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어느 날 마케팅에 필 받은 메이가 그 구석까지 방문한 적이 있었어요. 아직 에코가 함께 일하던 시점이었죠.

 

거기서 제품들을 펼쳐 놓고 한참 얘기를 하던 메이는 안쪽 칸막이에서 빼꼼이 내다보다가 자기와 시선이 마주치자 급히 숨어버리는 얼굴을 발견합니다. 이상한 생각이 든 메이가 누군지 확인하려고 다가가자 그 여자는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카운터 매니저에게 급히 소리쳐 말하면서 허겁지겁 메이를 스쳐 지나 미용실 바깥으로 나가 버렸고 메이가 판매영업을 마치고 좌판을 걷을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답니다.

 

호산나에서 헤르니를 봤어요.”



헤르니 - Hany라는 가명을 사용합니다.

 

엔티와 함께 R7에서 마사지사로 있었던 헤르니가 우리 회사를 떠난 후 다시 미용실에서 일한다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미용실에 취직하려 했다면 보다 좋은 곳이 얼마든지 있었고 나에게 부탁했다면 보다 번듯한 곳에 더 좋은 조건을 받아 줄 수도 있었겠죠. 그러나 헤르니가 자카르타 가장 모퉁이에 있는 작고 허름한 미용실을 선택했던 것은 우리와 마주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크게 작용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온갖 사고가 벌어지는 와중에 그 모든 키를 쥐고서도 에도, 무하마드와의 야합을 선택했던 헤르니는 르바란 직전 도주한 후 자신이 저지른 모든 사고들이 궁극적으로는 표면 위로 떠오르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우리와 일할 당시 고론탈로의 고위 공무원과 원조교제를 하면서 그 남자가 자기에게 미용실을 차려 줄 것이라 말하곤 했어요. 원조교제란 말은 물론 좀 어패가 있습니다. 고론탈로의 공무원이 나이 지긋한 유부남인 것은 맞지만 헤르니 자신은 여학생이 아닌 딸 하나 딸린 20대 후반의 이혼녀였으니까요. 헤르니는 딸을 빨렘방(Palembang)의 부모에게 맡겨놓고 반둥과 자카르타에서 처녀처럼 행세하고 다녔는데 고론탈로의 공무원이 페이스북을 통해 얘기한 것처럼 곧 현재의 아내와 이혼하고 자기에게 올 것이라 철썩같이 믿고 있었어요. 비록 그녀는 우릴 속였지만 그녀 역시 그 남자에게 철저히 속고 있었던 것이죠. 심지어 그 남자가 정말 고론탈로 출신인지, 진짜 고위 공무원인지도 역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인터넷은 거짓과 사기가 횡행하는 곳이니까요.

 

그랬던 헤르니가 회사에서 파렴치한 사고를 치고 도주한 끝에 그 촌구석 미용실의 마사지사가 되어 메이와 마주쳤으니 얼마나 창피했을까요? 당연한 일이지만 그날 판매한 제품의 수금을 위해 메이가 한 달 후 호산나를 방문했을 때 헤르니는 이미 그곳을 그만 둔 후였습니다.

 

 

3.

모든 사건사고가 대충 마무리된 후 우린 에도와 무하마드를 보았다는 얘기를 거래선들로부터 종종 들었습니다. 무하마드를 보았다는 곳은 주로 버카시 지역이었는데 에도를 보았다는 곳은 데뽁(Depok)과 센티옹(Sentiong)은 물론 자카르타와 땅거랑 전역의 많은 지역에서 들려왔습니다. 그는 온동네를 빨빨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던 거에요. 앞서 기술한 것처럼 난 에도가 파푸아나 어디 먼 곳에 도망쳐 있기를 바랬는데 그런 얘기를 들으며 좀 실망스러웠던 것이 사실이었어요.

 

그러다가 일단의 미용사들이 에도를 TV 에서 보았다는 얘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난 믿지 않았습니다.

 

십중팔구 지금도 도망치고 다녀야 할 놈인데 TV에 나온다는 게 말이 돼? 비슷하게 생긴 놈이겠지.”

 

난 그렇게 일축했어요.

그런데 어느날 밤 메이가 밤늦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미스터르!  지금 TV 켜봐요!  SCTV 채널이에요. 지금 바로요. 에도가 나와요!!”

 

그럴 리 없는 일인데생각하며 TV 채널을 돌렸어요. 에도가 도대체 어디 있다는 거야….? 난 에도를 찾을 수 없었어요.

 

머스짓(Mesjid –회교사원)에서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었어요.”

맡은 역이 뭔데?”

그냥 카메라가 살짝 스쳐지나갔어요. 1초쯤?”

 

그런 걸 전화받고 채널 돌려서 순간포착 하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죠. 에도는 아마도 엑스트라였던 모양입니다.



에도 - 이 친구의 본명은 '이스칸다르 쥴카르나인'입니다.


 

이번엔 RT로 나왔어요! 꽤 오래 비쳤다구요.”

 

어느날 밤 또 메이가 급히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RT는 우리로 치면 통장쯤 되는 사람입니다. 당시 SCTV 채널에서는 Si Biang Kerok (시 비앙 케록)이라는 시트콤을 방영하고 있었는데 굳이 번역하자면 싸움유발자정도가 되겠죠. 그 시트콤에서 에도가 엑스트라로 출연하고 있다는 거였어요. 나중에 다른 거래선에서도 듣게 된 얘기에 따르면 에도는 그뿐 아니라 다른 시네트론 연속극에서도 엑스트라로 나왔다는 것이었고 심지어 다른 채널에서 나오는 것도 봤다는 거였어요. 인도네시아에서도 대부분의 드라마가 외주제작되는 모양이었는데 에도는 그 외주 프로덕션을 쫒아다니는 엑스트라였던 거에요. 그렇게 대략의 소재가 밝혀지자 당장 찾아가 멱살을 잡고 끌고 오겠다며 메이가 나선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바짝 힘이 들어간 메이의 콧김에서 불꽃이라도 뿜어져 나올 듯 했습니다.

 

좋은 생각 아닌 거 같은데….?”

 

메이는 에도를 사무치도록 증오하고 있었어요. 메이의 성격상 정말 에도를 만나면 손에 잡히는 데로 후려치고 찔러 댈 것이 뻔했습니다. 에도가 저항없이 그냥 당하다가 잘못 되어도 문제였고 에도가 저항하고 반격해서 메이가 다치게 되어도 문제였어요. 이건 결재 떼어 먹고 도망간 거래선 잡으러 가는 거랑 전혀 차원이 틀린 일이었어요. 메이가 극도의 흥분에 휘둘려 정서적 한계를 뛰어 넘어버리면 어떤 짓을 하게 될 지 모르는 일이었고 자칫 위험한 상황이 되기 쉬웠습니다.

 

그러다가 유튜브에 그 시트콤이 매회 게재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한동안 검색해 본 결과 에도의 얼굴이 비교적 선명하게 원샷으로 잡힌 한 장면을 포착할 수 있었습니다. 버스 안에서 소동이 벌어지자 주인공들만 남기고 다른 승객들 모두가 도망가는 장면이었는데 에도는 바보 같은 승객 역할을 하고 있었고 아이구, 이를 어쩌면 좋아? 어쩌면??” 이러는 대사도 있었습니다.

 

너 이거 봤어?”

 

난 에도의 얼굴을 가리켰어요. 메이도 고개를 끄덕였죠.

화질이 선명하지 못한 유튜브보다 비교적 선명한 TV에서 해당 에피소드를 봤던 메이가 더욱 분명히 보았겠죠. 비록 메이컵으로 좀 덮기는 했지만 에도의 양쪽 볼에는 유튜브 화질로도 보일만큼 담뱃불로 지진 듯한 화상이 여러 개 보였습니다.

 

관두자. 그 사이 얘도 충분히 고생한 거 같은데…., 넌 어떻게 생각해?”

 

그의 얼굴에 생긴 상처들은 우리와 함께 일할 당시엔 없던 것이었어요. 그는 당시 결국 도주하지 못하고 담뱃불을 그의 볼에 비벼 끄는 해결사들에게 잡혀 계속 돈을 뜯기며 고통을 당했던 건지도 모릅니다. 이제 다행히도 그게 다 끝나 모두가 보는 TV에 공개적으로 얼굴을 내밀어도 되는 상황이 된 거겠죠. 그게 아니라면 지금도 저 촬영장 근처엔 해결사들이 어슬렁거리고 있다가 에도가 받는 일당을 그 자리에서 채뜨려 가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에도는 절대 그냥 둘 수 없어요.”

어렵게 끝내고 잊은 일들이야. 저 놈 찾아가서 그 복잡했던 일들을 다시 꺼내서 어쩔 건데? 돈 갚으라고? 그럴 돈 있는 놈이 왜 저기서 엑스트라 하고 있겠어?”

 

메이와 아이들의 안전은 비싼 비용을 치르면서 유지되고 있는 거였어요. 그걸 스스로 파괴하면서까지 에도를 추격할만한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저 놈을 용서할 수 없다고요…..”

 

에도에 대한 메이의 깊은 증오를 다 헤아리진 못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차라리 에도를 찾아내지 못한 편이 더 나았을 거라고 난 생각했습니다. 메이는 여러 날 동안 잡으러 갈지를 놓고 고민하는 것 같았고 난 매일 만류했지요. 그리고 어느 날인가 결국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마침내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아니, 최소한 그런 것처럼 보였어요. 드디어 메이의 마음 한 구석에서도 치열한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4.

그런데 그 평화를 뒤흔드는 사건이 머지않아 또 터졌습니다. 참 다이내믹 하죠?

 

한 개인 구매자가 메이에게 전화하여 우리 제품을 구매하겠다고 해왔어요. 그것도 하필이면 일요일날 말이죠. 그런데 약속이 좀 삐걱거리더니 아침 일찍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 정오에 그 사람 다니는 교회 앞으로 바뀌었다가 급기야 버카시 띠무르의 블루 플라자(Blue Plaza)라는 곳으로 무대가 옮겨 갑니다. 다른 직원들 모두 쉬는 날 오토바이 태워줄 신입사원 도움도 없이 제품 하나 팔겠다고 그렇게 뺑뺑 돌아 멀리까지 앙꼿(Angkot) 타고 오젝(ojek) 타고 쫒아갔으니 메이도 이미 스팀을 뿜기 직전이었을 겁니다. 드디어 블루플라자의 푸드코트에서 구매자를 만나 물건 꺼내 놓고 판매하려는 순간 구매자 등 뒤쪽 테이블에서 메이는 아는 얼굴을 발견합니다. 무하마드가 거기 있었어요. 아마도 이 순간 마치 만화나 영화에서처럼 주변의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시간이 멈추면서 암전된 무대 위에서 메이와 무하마드 둘에게만 조명이 쏟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답니다.

 

판매고 뭐고 다 팽개치고 무하마드 앞에 나선 메이가 매섭게 노려보자 그때 누군가와 한참 얘기를 하고있던 무하마드는 당연히 질겁했겠죠.  하지만 이 방면에선 무하마드가 위키보다 훨씬 더 유들거렸어요. 무하마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딴청을 부렸습니다.

 

누구시더라….?”

누구시더라? 니가 날 잊어버렸다구? 무하마드, 이 자식아! 시간 좀 지났다고 회사에서 널 가만 둘 것 같아??”

아무래도 사람 잘못 보신 듯…?”

네가 무하마드가 아니라는 거야? 신분증 꺼내 봐!!”

무하마드는 흔한 이름이에요. 어떻게 때려 맞췄는지는 몰라도 난 당신이 아는 무하마드가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무하마드가 맞다는 얘기죠. 좀 전까지 함께 얘기했던 사람도 그를 무하마드로 알고 있었을 테니 자신이 무하마드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었던 겁니다.

 

뭘 그리 돌려 대? 여기 미용사 아무나 불러다가 물어 볼까? 네 부인이라도 불러다 줄까??”

내가 요즘 잘 기억나지 않는 일들이 많아서….”

 

무하마드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척 하려 했습니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일이지만 인도네시아에서 기억상실증을 가장해 곤란한 상황에서 모면해 보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적지 않고 나나 메이는 그런 사람들을 이전에도 몇 명 보았습니다. 주로 돈을 떼어 먹고 도망갔다가 길바닥에서 걸린 사람들이 그랬죠. 직장에서 동료들 앞에서였다면 절대 그런 말도 안되는 이유를 둘러대지 못했을 텐데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도망자들은 너무나 쉽게 기억상실증 코스프레를 했습니다. 그것도 시네트론의 영향이 컸다고밖엔 말할 수 없습니다. 주인공에겐 늘 출생의 비밀이 있고 비련의 여주인공 주변엔 까칠한 재벌 2세들만 드글거리는데 하필이면 여주인공은 발음도 어려운 희귀한 병에 걸리기 십상이고 중대한 비밀을 폭로하려는 순간 사고를 당한 주인공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상태로 의식을 되찾아  폭로해야 할 비밀을 까먹어 버리는 게 시네트론 드라마의 공식이지요. 개연성이 무척 낮음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을 밥먹듯 하는 사람들은 시네트론의 스토리를 너무 쉽게 모방하곤 했어요.



이 친구의 이름은 밑도끝도 없이 '무하마드'. 이게 본명인지 여부는 그 누구도 모릅니다.

 

거기서 메이가 언성을 높이기 시작한 것은 분명 패착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경비원들도 달려 왔지요, 무하마드는 허름한 옷이지만 말쑥하고 깨끗한 차림을 하고 있었고 소리를 질러대는 메이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닐 때 쓰곤 하는 다 떨어진 청자켓을 걸치고 있었어요. 외관만 봐서는 오히려 메이가 쁘레만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무하마드 역시 경비원들에게 엮이는 걸 좋아할 리 없었어요. 경비원들은 경찰 흉내를 내면서 몰에서 소란을 부리는 사람들을 함부로 억류하고 감금하기도 했는데 플라자 인도네시아나 간다리아시티 같은 고급몰에서는 오히려 그런 일이 덜 하지만 블루 플라자 같은 삼류 몰에선 경비원들의 위세가 하늘을 찌릅니다. 그러다가 수틀리면 경찰에 넘기는 경우도 있었으므로 그간 사고를 쳐 놓은 게 많은 무하마드로서는 뒷덜미가 캥겼던 거에요.

 

!! 거기 안 서??”

 

기억상실증을 내세우며 슬슬 뒷걸음질 치던 무하마드가 등을 돌려 푸드코트를 빠져 나가려 하는 순간 메이는 눈이 뒤집힐 정도로 흥분하고 말았던 모양입니다. 메이는 판매하려고 가지고 나갔던 미용가위를 무하마드의 등을 향해 힘껏 집어 던졌습니다. 미용가위가 보통 날카로운 물건이 아니어서 그걸 표창처럼 집어 던졌다면 보통 문제가 아닌 게 되는데 메이는 가위 두 자루가 든 케이스 채로 집어 던졌던 거에요. 그러나 그 행동은 메이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내던져진 케이스가 허공에서 열리며 가위들이 튀어 나갔는데 둘 다 무하마드를 맞추지 못했고 하나는 가까운 유리창에 맞아 유리창엔 거미줄처럼 금이 가 버렸고 또 다른 한 자루는 무하마드가 지나던 자리 옆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애먼 한 남자의 팔을 스치며 떨어졌어요. 남자의 팔에 긴 상처가 생기며 피가 스며 나왔습니다.

 

! !!”

 

푸드코드는 단번에 난리가 나고 말았어요. 상처를 입은 남자가 메이에게 소리를 질러대고 경비원들이 메이를 제지하면서 아수라장이 벌어졌고 그 틈을 타고 무하마드는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돈도 제품도 다 뺏기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메이는 내 앞에서 전날 사건을 보고하며 훌쩍거리고 있었습니다. 쫒던 무하마드는 도망가 버리고 이젠 메이가 상해범이 되어 팔을 다친 남자와 함께 경찰서까지 갔다는 거였어요. 푸드코트에서 집어 던진 제품들은 결국 회수하지 못했고 블루플라자까지 가는 동안 잠깐잠깐 짬을 내서 거래선을 들러 수금했던 돈은 팔을 다친 남자의 치료비로 다 주며 합의하고 나서야 경찰서에서 풀려 났다는 것이었어요.

 

으이구…, 이 놈아…!”

 

넌 어쩌면 요즘 걸렸다 하면 상해 폭행이냐? 라는 말이 목까지 치밀어 오르는 걸 간신히 꾹꾹 참았습니다. 얼마 전엔 돈 떼어먹은 거래선을 앰배서더 몰(Ambassador Mall)에서 잡아 안면에 달랑 스트레이트 한 방 먹였던 것뿐인데 하필 상대가 키 150cm도 될동말동한 작은 여자였고 그렇게 해서 터진 코피가 마치 머리에 총이라도 한 방 맞은 듯 엄청난 양이 끊임없이 흘러나와 오히려 메이가 폭행으로 경찰서에 끌려가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거든요. 하지만 휴일을 맞아 내가 푹 쉬고 있는 동안 일보러 나갔다가 그런 일들을 당한 것이고 행여 내게 방해가 될까봐 혼자 노심초사하며 최선을 대해 있는 재원을 활용해 합의 보고 다른 직원 불러 도움 받아 경찰서에서 돌아온 것이 기특하기도 했으므로 메이에게 화만 내기는 좀 애매했습니다. 제품과 돈을 잃기는 했지만 그게 그리 문제삼을 만한 금액도 아니었고 무하마드에게 제품을 집어 던진 것도 따지고 보면 회사에 손해를 끼친 사기꾼을 잡겠다는 노력의 일환이었으니까요.

 

이젠 에도도 무하마드도 좀 잊어라! 절대 그 놈들 잡으러 다닐 생각 하지 말란 말이야!!”

 

어차피 잡아 봐야 뭐 어쩌지도 못할 일인데 말입니다. 그 놈들이 죄송합니다. 여기 있습니다 하며 우리가 손해본 돈을 보상해 줄 리도 없고 우리가 그 놈들을 잡아 감금, 고문하거나 경찰서에 넘기거나 할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만 하라면 그만 좀 해!”

 

에도나 무하마드 뿐 아니라 도주한 다른 거래선들 잡으러 다니는 것 역시 차제에 함께 금지시켜 버렸어요. 떼인 돈이 아깝지 않은 건 아니지만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하지 말자는 것이었죠. 우리가 추격해서 잡으려 하는 만큼 도망가는 놈들은 우릴 떨쳐 내려 발버둥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도 있는 물리적 충돌을 메이가 혼자 감당하도록 놔 둘 수는 없는 일이었어요. 차라리 판매 당시부터 이런 저런 보안장치를 보수적으로 잘 걸어 두면 도주사고를 최대한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을 터였습니다.

 

어쨋거나 그 사건을 통해 우린 무하마드가 여전히 버카시를 떠돌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어요. 어설프게 사망을 가장해 아내와 아이를 버리고 떠난 자티브닝(Jati Bening)의 처가집으로부터 불과 10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을 무대로 다시 다양한 사기극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넌 지금 따우란(tauran-패싸움)이나 하고 다니는 학생이 아니라 책임져야 할 얘들 둘을 둔 엄마라는 사실 절대 잊지 마.”

 

물론 내가 이런 얘기를 해 봐야 메이는 들을 놈이 아닙니다. 언젠가 어떤 거래선이 또 돈 떼어먹고 도망가는 상황이 벌어지면 다시 온갖 방법을 동원해 잡아내고 떼인 돈을 받으러 자카르타 전역을 누비며 쫒아 다니겠죠.

 

 

5.

이 사건들을 겪으면서, 그리고 이 글을 쓰기 위해 이 사건들을 곱씹고 복기하면서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은 주변을 잘 둘러 보면 메이처럼 신의를 다 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무하마드처럼 존재 자체가 악한 놈도 있고 위키처럼 영악하게 살아가는 놈들도 있지민 그들 모두 영업직원이 되어 외근을 나가는 순간 난 현실적으로 그들에게 대한 더 이상의 긴밀한 통제를 할 수 없게 되고 영업직원들도 그 순간부터 회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철저히 자신 스스로를 위해 일하는 존재가 된다는 점이었어요. 단지 메이같은 경우엔 그렇게 스스로를 위해 일하는 것조차 회사에 대한 충분한 선의를 기저에 깔고 있는 한편 대개의 경우는 딴주머니를 차는 것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곤 한다는 것이 차이를 만들어 내죠.

 

영업직원을 여하히 관리하느냐에 대한 여러 각도의 기술적 부분들이 거론될 수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영업직원으로서 여하히 좋은 사람을 만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그 생겨먹은 대로의 기능과 역할을 다하는 데에 충실하니까요. 하지만 좋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면서도 가장 힘든 일입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끝)

'영업직원 활약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업직원 활약사 (20)  (0) 2013.05.09
영업직원 활약사 (19)  (0) 2013.05.03
영업직원 활약사 (18)  (0) 2013.04.16
영업직원 활약사 (17)  (0) 2013.04.10
영업직원 활약사 (16)  (0) 2013.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