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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영업직원 활약사

영업직원 활약사 (18)

beautician 2013. 4. 16. 04:56

 

차를 도난당하고 경찰에 신고하면서 벌어진 경찰들과의 골때리는 얘기들은 재작년말에 연재했던  ‘경찰이 더 문제편에서 한번 기술한 적이 있었어요.

 

차를 도난해 간 방식이 주목을 끌었습니다.

당시 운전사로 위장취업한 강도가 근무 첫날 바로 차를 들고 튀어 버리는 사건이 심심찮게 벌어져 적잖은 한국인들의 피해가 속출하던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이런 식의 차량도난사건은 비단 한국인들에게만 벌어진 것은 아니고 인도네시아 전역, 특히 자카르타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벌어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요즘 자카르타 도로에 크게 늘어난 현지인 여성운전자의 숫자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어요. 더 이상 운전사를 쓰지 않으려는 추세를 반영하는 거죠.

 

그런데 내 차는 그런 식으로 도난당한 것이 아니었어요. 내 아반자는 루꼬 앞에 세워져 있었고 비록 난 건물 안에 있었지만 창문 바로 앞에 내 자리에서 차까지의 직선거리는 10미터도 되지 않았습니다. 센트럴록을 걸어 놓았으니 문을 강제로 열 때 분명 소리가 났을 텐데 난 그 소리를 듣지 못했어요. 어쩌면 아예 소리를 내지 않고 문을 여는 모종의 방법이 있었든가 아니면 그 소리가 미처 내 주목을 끌기 전에 알람을 순식간에 꺼버릴 만큼 손이 빠른 전문가의 소행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 하나는 차량이 없어진 시간이었어요. 내 사무실은 앞 우전방에 무궁화유통 끌라빠가딩점이 있었는데 오후 8시에 문을 닫아요. 그 루꼬단지의 출구엔 과일가게인 올프레시(All Fresh)가 있는데 그 가게가 10시에 문을 닫으면 루꼬단지는 출구를 차단해 버리고 루꼬단지 전체의 출입구는 단 한 개로 통일됩니다. 낮에는 입구로 쓰이는 통로가 출구로 쓰이게 되고 그곳에 설치된 검문소에서 야간경비가 근무하고 있었죠. 그 시간쯤엔 모든 가게와 회사들이 문을 닫고 난 후여서 자연히 출입하는 차량 수가 줄어들고 특히 그 시간에 나가려는 차량은 경비원들의 주목을 끌게 되지요. 내가 사무실을 나서다가 차량이 도난당했음을 안 것은 9시 반 경이었어요. 우리 사무실 앞을 그나마 밝혀 주던 무궁화수퍼의 불이 꺼지고 루꼬 단지가 전반적으로 한산해졌지만 출구의 올프레시 상점은 아직 문을 열고 있어 차량이 상점 손님들과 섞여 루꼬에서 나가는 것이 아직 용이한 시점이었던 거죠. 도난사건은 바로 그 때 벌어진 거였어요. 뿐만 아니라 그는 내 차가 주차된 위치도 교묘하게 이용했어요. 무궁화수퍼가 문을 닫으면 전방을 향해 주차한 내 차의 왼쪽은 아직 루꼬 입구 가까이까지 시야가 터져 있지만 운전석이 있는 우측은 대부분의 조명이 꺼져 어둠속에 휩싸이지요. 범인은 무궁화수퍼가 문을 닫고 그곳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기를 기다란 후 그 그림자 속에서 여유롭게 내 운전석 문을 땄던 것입니다. 범인은 이 루꼬단지의 시스템을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내 사무실과 내 차량의 주차위치, 특성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운전사 쓰시나요? 경찰서에 데려가서 조서를 꾸며야 할 텐데…”

 

사무실에 실사를 나온 경찰관이 그렇게 말할 때 난 잠시 망설여야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이런 일이 벌어지면 대개 운전사나 루꼬 경비원이 연루되어 있을 확률이 매우 높지요.

 

하지만 경비원들은 현행범이 아닌 이상 대개의 경우 경찰의 사법권을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갑니다. 왜냐하면 경비원들은 비록 내가 월급 주고 채용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상관은 내가 아니라 경찰이라 생각하거든요. 그러니 경비원 복장의 우측 어깨엔 POLDA라는 글씨와 함께 경찰청 마크가 붙어있는 거에요. 자기들이 준경찰이라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은 스스로 경비원임을 그토록 자랑스러워 하고 근무교대 후 유니폼을 벗고 퇴근할 때에도 군용워커나 얼룩무늬 티셔츠 등 가능한한 경찰이나 군인임을 암시하는 복식을 착용하는 거지요. 경비원들의 왼쪽 어깨엔 자체 경비회사 마크가 붙어있는 경우가 많지만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경우엔 JAKARTA라는 글씨와 함께 자카르타 주정부 마크가 붙어 있곤 합니다. 스스로 준공무원이라고도 생각하는 거지요.

 

그래서 경찰관이 나타나면 마치 직속상관이 왕림하기라도 한 듯 호들갑을 떨며 수행하면서 보스라는 호칭을 아끼지 않다가 루꼬를 오가는 행상들에겐 경찰 행세를 하며 자리세나 권리금을 뜯고 음식이나 담배 상납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경찰도 경비원들을 자기 하부 조직 정도로 생각한다는 것이죠. 경비원 수준의 SATPOL PP라는 준경찰조직이 실제로 있는데도 말입니다. SATPOL PP는 경찰업무의 허드렛일을 도우며 경찰들보다 더욱 지독하게 거리의 행상들과 포장마차들에게 돈을 쥐어 짭니다. 경찰들이 경비원들에게 상납을 받고 그들을 부하처럼 부리는 건 그런 상황에서 전혀 놀랄 일도 아닙니다. 그러니 손은 안으로 굽습니다. 도난당한 내 차가 루꼬를 빠져나갈 때 경비원들은 티켓을 검사하지도 않고 운전자를 확인하지도 않았는데 그건 분명 근무태망이었지만 그들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고 스티커를 붙인 입주사 차량은 입주사 편의를 위해 티켓확인을 하지 않는다는 이상한 설명을 하는 것으로 모든 혐의와 책임을 면제받았지요.

 

그러나 운전사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에코가 원래 운전사로 채용된 사람이고 종종 내 차를 운전해 메이를 태우고 반둥을 오갔다고 말한다면 에코는 당장 경찰서에 끌려가 엄청난 폭력적 압박을 받으며 모종의 자백을 강요받을 것이 틀림없었어요. 난 어쩌면 그렇게 하도록 놔뒀어야 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당시 끌라빠가딩의 모이 아파트나 팔라디안 아파트 일대와 인근 주택가에서도 자동차 절도단들이 활개치고 있었는데 물론 이들이 꼭 한국인들만 노린 것은 아니었어요. 이들 중엔 전직 운전사 출신으로 현재 그 아파트들에서 일하는 운전사들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조직원으로 거느리고 있기도 했고 그들은 옛 운전사 동료들에게 은밀한 거래를 제의하곤 했습니다. 차량 열쇠를 잠시 빌리는 대신 돈이나 담배 같은 댓가가 지불되었죠. 그들은 그렇게 빌린 열쇠를 복사한 후 운전사에게 열쇠를 돌려 주었고 그날 밤 아파트 주차장이나 주택가 집 앞에서 보다 손쉽게 차량을 훔쳐 달아나곤 했어요. 차량의 오리지널 키와 STNK등 차량 등록증이 망실되지 않은 상태에서 차량만 도난당하는 경우 운전사는 경찰서에서 비교적 모진 취조를 당하긴 해도 모든 것을 실토하지 않는 이상 결국 무혐의로 풀려 나왔죠. 그렇게 사건이 일단락 되고 나면 해당 운전사에게 절도단의 친구가 일정 수고비를 따로 지불했던 것을 나중에 검거된 절도단들의 자백이 보도되면서 알게 되었어요.

 

난 당시 에코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는 차량 키를 복사할 만한 충분한 시간도 있었고 그럴 의지나 이유도 있어 보였습니다. 에도나 무하마드의 사건사고에 절대 연루되지 않았을 리도 없고, 그래서 막대한 횡령액의 일부를 어떤 식으로든 수고비나 입막음으로 챙겼을 그가 그 시절을 그리워했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었어요. 이제는 완전히 없어져 버린 그 꿀맛 같은 수입원을 스스로 다시 만들고 싶어 했을지도 모르죠. 사실 난 에코가 그때 누군가에게 차량 키를 복사해 준 것이라고 지금도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경찰이 에코를 취조하고 고문하는 것이 꼭 바람직한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내가 경험한 인도네시아의 경찰은 결코 내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어떤 경우에도 그들 스스로의 편이었고 그들이 에코를 털어 얻게 되는 수사결과는 피해자인 나를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 하기 위해 사용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에코를 털다가 결국은 회사를 털고 급기야 나를 털 것이었으므로 그 결과 어찌어찌 차를 움쳐간 범인을 잡게 될 가능성은 있다 하더라도 나는 차를 도난당한 것 훨씬 이상의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더욱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 같았어요. 도난신고를 하기 위해 경찰서를 오가는 동안 담당 경찰관들의 대책없는 반응과 언행을 보며 결국 그렇게 되고 말 것임을 난 더욱 확신하기에 이릅니다.

 

운전사 없어요. 늘 내가 직접 운전해요.”

 

그렇게 대답했기 때문에 결국 범인을 잡지 못한 것일까요? 아니면 경찰은 이미 범인도 잡고 차량도 회수했는데 오직 나 혼자만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일까요? 아무튼 난 그렇게 또 다시 추가적인 손해를 감수하면서 에코를 그 사건에서 애써 빼주었습니다. 그러나 에코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별로 고마워하는 눈치도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에코는 에도와 무하마드가 있던 당시 그의 역할에 대해 내가 모종의 의구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낌새는 느끼고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나를 완전히 바보로 봤다는 얘기가 되니까요. 하지만 어쩌면 그것조차 그에겐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굳이 인도네시아 사람들만의 특징이라 할 수는 없지만 에코를 비롯해 내가 경험해 보았던 대부분의 직원들은 자신이 중요한 직책을 맡거나, 어느 정도 인정받는 위치까지 왔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이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불가결한 인력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깜짝 놀랄만한 고자세로 위세를 떨곤 했습니다. 사장이나 상사의 총애를 받는다는 생각하는 현지 여직원들이 회사동료들 앞에서 콧대를 높이 세우고 온갖 웃기고 자빠라진 행태를 벌이는 것처럼 말이죠. 특히 에코의 경우처럼 갑자기 전직원이 도주하거나 해고된 상황에서 과도한 업무량을 처리하게 된 거의 유일한 직원이 되어 있는 경우라면 두 말할 나위 없는 거였죠. 사실 나 역시 속으로는 아무리 에코에게 이를 갈고 있었다 하더라도 근 20명이 하던 일을 달랑 셋이서 하게 된 숨가쁜 상황에 그 그런 에코라도 매우 아쉬웠었고 그래서 해가 바뀌어 정부가 새로운 최저임금을 발표했을 때 나도 그의 급여를 인상해 주기까지 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운전사를 써 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내용이지만 일반 직원들에 비해 운전사는 좀 더 복잡한 급여체계를 사용하곤 합니다. 본봉과 연 100%의 르바란 보너스 외에 교통비, 점심식대, 시간외 근무수당 등등 여러 종류의 수당이 줄줄이 붙는 게 보통입니다. 그걸 다 합치면 대충 다른 일반 직원들보다 좀 많거나 좀 적은 수준이 되는 거죠. 에코 역시 그런 시스템을 적용하고 있었는데 다른 직장 운전사들보다 훨씬 많은 급여를 주고 있던 사황에서 그 해엔 수당 부분을 대폭 올려 주었고, 그런 후에도 그의 근태가 너무 좋지 않아 괜히 올려줬다고 생각하던 차에 에코가 불만을 입에 달고 산다는 것을 제 3자를 통해 듣는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어요. 그는 내가 월급을 올려 주지 않았다며 주차장의 다른 운전사들에게 불만을 토로한다는 거였어요. 나로서는 그가 그로스(gross)로 받아가는 전체 금액을 기준으로 대폭 인상을 해준 것인데 그는 급여의 각 항목 중 내가 수당부분만 올려주고 본봉부분을 올려주지 않았으니 급여인상을 받지 못한 셈이라 주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수당을 다시 내리고 그만큼 본봉을 대신 올려 줄까도 생각했습니다. 원숭이들의 조삼모사처럼 말이죠. 그는 그런 불만을 메이에게도 토로할 정도로 간이 부어 있었지만 내 앞에서는 아무 소리도 못했으므로 나 역시 못들은 척 시치미를 떼기로 했습니다.

 

게다가 차량을 도난당한 건 그의 급여를 인상해 주기 한달 반쯤 전의 일이었어요. 회사가 직원들의 횡령사건으로 골머리를 썪고 급기야 차량까지 도난당하는 우환을 겪은 상태인데 그 모든 상황에 일말의 책임감이라도 느껴야 할 에코는 철저히 이기적일 뿐이었어요. 하지만 그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은 내가 감수해야만 할 것들이었고 에코로서는 어차피 남의 일이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정작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몇 바퀴 돌아 내 귀에 들려오는 그의 언행이었어요.

 

미스터르는 건망증이 심해요. 그래서 차문을 잠그는 걸 종종 잊어 버린다구요. 차를 잃어버린 것도 십중팔구 그날 밤 미스터르가 잊고 차문을 잠그지 않은 걸 발견한 도둑이 횡재한 게 틀림없어요. 미스터르 책임이죠. 난 아무런 관계도 없다구요.”

 

그는 어느 날 시내로 나가는 내 아내의 끼장 이노바를 운전하면서 그렇게 얘기했다는 거였어요.

 

그 차는 미스터르가 100% 운전하던 차야. 난 그 아반자 키를 만져 본 적도 없다구.”

 

다른 운전사들에게는 그렇게 거짓말까지 섞어 자신의 결백을 강변하곤 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난 그를 차량도난사건에 연루되지 않도록 완전히 빼주었으므로 그는 경찰들로부터 질문 한 마디도 받을 필요가 없었어요. 또한 인도네시아 생활 십수년을 한 사람이 차를 도난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 너무나 창피스러워 몇 개월 후 새로 차를 사기 전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철저히 그 사실을 함구했어요. 심지어 아내를 제외하고는 싱가폴과 호주에서 공부하고 있던 아이들에게도 괜한 걱정을 하게 할까봐 그 사실을 철저히 숨겼으므로 아이들은 오늘까지도 내가 그 사이 차를 바꾼 것으로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에코는 경사라도 난 듯 나의 차량도난사건을 동네방네 떠벌이고 다녔으므로 끌라빠가딩 일대의 운전사들은 사건 발생 후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대부분 그 사실을 알게 된 것 같았습니다. 에코는 필요 이상으로 입을 놀렸는데 내가 이미 그의 무혐의를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왜 나를 건망증환자로 철저히 몰아가면서까지 그토록 기를 쓰며 자신을 방어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야~, , 얘기 들었다. 너 차 잃어 버렸다면서? 자초지종이 어떻게 된 거야?”

 

어쩔 수 몇일동안 없이 걸어다녀야만 했는데 도난사건이 있은지 이틀 후 아파트 단지에서 우연히 마주친 한 선배가 그렇게 물어 왔어요. 부끄러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그 사건을 어떻게 알고서 선배가 조곤조곤 물어오는데 그 상황에 절대 적절치 않았던 그의 미소가 마치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여 난 혈압이 올라 대답을 쏘아 붙이고 말았습니다.

 

헛소문이에요!”

 

지금 생각해 보면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 화풀이한 셈인데 그때는 그 선배가 그런 질문을 해오는 것 자체가 차를 잃어버린 것보다 더 화가 나고 약이 올랐어요. 내가 피해를 당한 사건이고 비록 내가 떠벌려 대는 대신 입을 꾹 다물고 있다 해서 속상하지 않다는 뜻이 절대 아닌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꼬치꼬치 캐물어 오는 상황에 왠지 분통이 터졌던 거에요. 경찰에 차량도난신고를 하면서 진이 다 빠진 상태에서 어차피 도움도 줄 리 없는 선배의 호기심에 답하려고 생각하기도 싫은 그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복기하는 것이 너무 싫었습니다. 그 차량도난사건을 겪은 나는 잔펀치에 시달리던 격투기 선수가 불시에 들어온 돌려차기에 제대로 걸려 아주 꼴불견으로 고꾸라져 있는 상태나 다름 없었어요. 너무 꼴불견이라 부끄러웠고 그래서 그때는 차라리 누구도 날 아는 척도 하지 말고 말도 걸지 않았으면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엔 시간만큼 좋은 약이 없어요.

그 후 몇 개월동안 차량을 렌트해 다녔던 나는 속상한 마음이 어느 정도 사그러든 후에서야 다시 아반자 자동차를 할부로 샀습니다.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렸던 이유는 만약 내가 여전히 속상한 상태에서 차를 사면 앞으로도 줄곧 그 차를 볼 때마다 마음 속 상처가 되살아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다시 사무실이 떠나가라 큰 웃음을 웃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새로 산 회색 아반자는 희망이자 활력으로 다가왔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새 차의 키를, 난 에코에게 단 한 번도 맡기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도 오랫동안 회사에서 버티던 에코는, 인생이 언제나 그렇듯, 예기치 않은 일로 회사를 그만 두게 됩니다.

 

그 사이에도 난 계속 직원모집광고를 냈고 인턴사원들이 수시로 사무실을 드나들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업무는 나와 메이, 에코, 그렇게 달랑 셋이 처리해야만 했고 그 업무라는 것은 이제 많이 정리되었지만 그래도 아직 500군데가 넘는 거래선들을 쫒아 다니는 거였어요. 판매는 하다 안되면 말면 되지만 수금이란 건 안되면 될 때까지 쫒아 다녀야 되는 거에요. 그러니 거래선은 500군데이지만 우린 1,000, 1,500번의 방문을 해야만 했습니다. 한 달 내에 세 명이서 그런 방문을 한다는 게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으므로 한 달에 해야 할 일이 두 달, 석달로 늘어지곤 했지만 우린 매일 수백킬로씩 자카르타와 인근도시들을 내달렸고 대개는 나와 메이가 한팀이 되어 아반자로 움직이고 에코는 혼자서 오토바이로 자카르타 외곽을 누볐어요. 하지만 그 당시의 에코는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업무 효율도 점점 떨어지더니 급기야 바닥을 뚫고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했어요. 지역별로 목적지를 묶어 10군데 정도를 방문하도록 해놓으면 실제로는 하루 종일 외근하며 겨우 3-4군데를 설렁설렁 방문할 뿐이었고 그 중 달랑 한 두 군데에서만 수금에 성공하곤 했어요. 건성의 극치였죠. 이제 그를 내보내야 될 때가 온 것인데 기회를 잡기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그나마 그렇게라도 일하는 게 일정부분 도움이 되었으므로 없다면 아쉬워질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었고요.

 

그래서 그 당시엔 밤 9, 10시가 되어 나와 메이가 사무실에 돌아오면 에코는 오후 5-6시 경에 이미 사무실에 돌아와 빈둥거리고 있거나 미리 퇴근하겠다며 허락을 요청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에코의 보고서를 찾던 나는 꼬깃꼬깃 뭉쳐서 버려진 메모지들이 그의 책상 위에 가득 굴러다니고 있는 것들을 보고서 아무 생각없이 그 중 하나를 펴보았습니다. 거기엔 이런 메모가 써갈겨져 있었어요.

 

[, X발 너 한국새끼야! 넌 뒈지지도 않냐?]

 

난 눈을 가늘게 뜨고서 또 다른 메모지들을 펼쳐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 인색한 놈아! 월급 올려줘!! 넌 내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먹고사는 놈이잖아???]

[무슨 수를 써야 이 새끼를 망하게 할 수 있을까???]

[메이, 넌 다 망한 회사에서 뭘 더 빨아 먹겠다고 한국새끼한테 붙어 먹는 거야? 창녀같은 년!!]

 

헛웃음이 나왔어요. 내 앞에선 찍소리도 못하던 녀석이 사무실에서 빈둥거리는 동안 온갖 희안한 메모들을 끄적이고 있었던 거에요. 하지만 그게 그의 속마음이었겠죠.

 

난 그런 메모를 처음 보는 게 아니었어요. 예전에 잠시 남부 자카르타의 르박불르스(Lebak Bulus)에 살 당시 뻠반뚜(Pembantu) 가정부들이 그런 짓을 많이 했어요. 개중엔 온갖 욕설을 써놓은 편지를 거실 탁자 위에 당당히 올려 놓고 새벽 3, 4시에 집을 나서 도주하는 귀여운(?) 친구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렇게 노골적이진 않았지요. 그런데 다음 가정부들을 받기 위해 뒷방을 정리하다 보면 달력 모서리나 잡지 뒷면에 온갖 불평불만을 낙서처럼 끄적거린 것들을 쉽게 발견하곤 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고용주 앞에선 감히 큰 소리도 내지 못했던 나이어린 십대 가정부들로서는 그런 낙서가 그들의 스트레스를 푸는 유일한 방편이었겠지요. 그런데 십대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뻠반뚜도 아닌 30대 후반의 에코가 그런 짓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난 그 메모지들을 보며 에코에게 화를 내야 할지, 뭐라 얘기를 해야 할지 잠시 생각해야만 했습니다.

 

, 그런 생각들 하면서 어떻게 지금까지 버텼어? 그 정도 불만이면 이미 사표 내고 나갔어야 할 상황인데…, 너도 참 대단하다.”

 

다음 날 아침 난 에코를 내 방 책상 앞에 불러 앉혀 놓고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동석한 메이에겐 에코의 메모에 대해 전날 밤 이미 전화통화하며 얘기했던 차였어요.

 

내가 아마 너한테 너무 부담을 줬던 모양이군., 회사가 손이 딸려 정신없는 상황이라 너도 얘기 꺼낼 타이밍을 놓쳤던 모양인데…, 그 정도로 불만이 많았다면 그만 두고 싶은 게 당연해. 그래, 놔 줄게. 괜찮아. 나 빠지면 회사가 더 힘들어질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네 마음이 그렇게 힘들어서는 안되는 거지. 내일부터 출근하지 않아도 돼. 푹 쉬다가 내달 월급날에 나오면 그날 남은 월급이랑 퇴직금이랑 다 정산해 줄게.”

 

부드럽고 화기애애하게 얘기하면서 에코가 다른 말 할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에코가 나가면 우린 당장 더욱 일손이 딸리게 될 상황이었지만 에코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된 이상 더 데리고 있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어요. 게다가 에도와 무하마드의 사건을 겪으면서 이미 오래전부터 에코에게도 환멸을 느낀 상태였으므로 언제고 기회가 오면 반드시 해고해 버리고 말겠다 마음 속으로 다짐해 오던 터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기회가 온 것이죠. 여기서 마음 약해지면 또 몇 개월을 어정쩡하게 월급 주며 더 데리고 있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책상위에 꼬깃꼬깃 뭉쳐둔 쓰레기들을 내가 펼쳐 보리라 상상조차 못했던 에코는 겸연쩍어 하는 눈치가 역력했고, 비록 메모의 내용이 좀 과격했지만 아직 회사를 그만 둘 생각까진 없었던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까지 얘기하니 사실은 그게 아니라고 얘기할 수는 없는 상황까지 떠밀려 갔던 것 같습니다. 그는 순순히 다음날부터 출근하지 않았고 난 그를 성공적으로 해고하며 쾌재를 불렀지만 이제 회사의 모든 업무가 나와 메이의 어깨 위로 떨어져 내렸으므로 그 과중한 부하를 오직 우리 둘이서 견뎌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죠.

우린 그런 상황에 금새 익숙해졌고 몇 개월 후에도 우린 여전히 대부분의 거래선들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직원모집은 계속 하고 있었지만 그걸 크게 기대하지도 않게 되었어요. 좋은 직원이란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그간 절실히 느꼈기 때문입니다. 우린 시간이 걸리더라도 계속적인 직원모집을 통해 결국에는 우리와 맞는 좋은 직원이 들어와 일하게 되기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한 시대가 막을 내린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어요. 특히 에도가 떠났다는 사실은 회사로서도 한 시대의 마감을 알리는 신호였지만 메이의 개인으로서도 그랬습니다. 에도는 꽤 오랫동안 그녀의 곁에서 결혼을 약속한 연인으로서의 자리매김을 하고 있던 사람이었으니까요. 회사가 새로운 직원들을 들여 분위기를 일신하고자 하는 동안 메이 역시 회사 일에 치여 등한시 되었던 신변정리를 할 때가 도래해 있었습니다.

 

난 잊으려 했지만 그동안 수십번, 수백번 당시 1년간의 온갖 사건사고들을 마음 속으로 복기하고 재구성하곤 했어요. 그간의 사건들로 인해 적잖은 손해를 봤다면 최소한 거기서 뭔가 배운 거라도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게 경험이 되어 다음에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면 보다 지혜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에도는 왜 그토록 절박하게 돈이 필요했던 것일까? 온 천지에서 돈을 빌리고 벤쫑들에게 몸을 팔고 찔레둑 엄마의 집문서를 빼돌리려 할 정도까지 에도를 밀어 붙였던 그 절박함은 어디에서 유래했던 것이었을까?

 

입사가 늦어 에도의 지시를 받아야 마땅했던 무하마드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에도의 상관이라도 되듯 행동하며 어떻게 에도를 꼭둑각시처럼 컨트롤할 수 있었을까? 에도는 무하마드의 무엇이었고 무하마드는 에도의 무엇이었던 것일까?

 

에도가 도주하기 몇 주 전부터 거래선마다 쫒아가 문 앞에 버티고서 에도를 공포의 극단으로 몰아 넣어 거래선들에게 터무니없는 헐값으로라도 물건을 팔아 현금을 만들도록 무언의 강요를 했다던 그 두 명의 사내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무하마드는 그런 사람들을 부릴 입장이 아니었으니 그들을 보낸 사람의 진면목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 배경엔 정말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마약이나 도박의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반둥에서 데려왔던 헤르니와 엔티는 왜 그리도 간단히 변절하고 에도와 무하마드 편에 붙어버렸던 것일까? 자의에서였을까? 아니면 강요나 위협이 있었던 것일까? 그들은 매번 사건이 터질 때마다 왜 그토록 적극적으로 내게 거짓말을 시도하며 상황을 은폐하려 했을까?

 

엔티는 별개로 치더라도 에도, 무하마드, 헤르니가 도주한 것은 사전에 약정된 일정한 순서가 있었던 것 같은데 만약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디자인하고 연출해낸 주모자는 과연 누구였을까? 에도나 무하마드가 그 정도의 기획력이 있었다고는 절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인데….?

 

아반자를 도난당한 것은 그냥 별개의 도난사건일 뿐이었을까? 아니면 그것도 에도와 무하마드 사건의 연장선에서 봐야만 하는 것일까?

 

그 해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가지 경우의 수를 적용하면서 많은 가설들을 세워 봤지만 그건 모두 구멍투성이들이었어요. 이 모든 것을 앞뒤가 맞도록 설명해줄 만한 결정적인 단서가 빠져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그게 무엇인지 찾아 보려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난 그런 과거사의 복기보다는 사업의 새로운 전개에 전력을 기울여야만 했으므로 결국 그런 부질없는 질문들은 저절로 공중에 흩어지도록 방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결정적 단서가 벼락치듯 눈앞에 닥쳐오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메이와 함께 다안모곳 플라자(Daan Mogot Plaza) 인근 루코의 거래선에 수금하러 갔던 때였어요. 난 그때 직접 보지 못했지만 날 먼저 발견한 어떤 남자가 내 차 뒤로 돌아 몰래 지나치려 하다가 거래선에서 나오던 메이와 문 앞에서 맞닥뜨리자 기겁을 하고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00킬로그램이 넘는 거구를 뒤뚱거리며 자기 오토바이를 향해 달렸지만 달리기가 빠른 메이에게 곧 덜미를 잡히고 말았어요.

 

오랜만에 봤으면 인사를 해야지? 왜 도망가?

…, 그건…, 미스터르 보기 미안해서….”

무슨 소리야? 인사하러 가자?”

아냐, 나중에….”

 

메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일단 거기서 그 남자와 한참을 얘기했어요.

 

미스터르, 내가 좀 전에 누굴 봤는지 알아요?”

누구?”

 

메이는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는 듯 눈웃음을 쳤어요.

 

위키를 만났어요. 매트릭스에서 수퍼바이져로 일하고 있다는데 걔도 여기 거래선 담당이래요.”

위키?”

 

위키는 이 에피소드의 맨 앞에 등장했던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이에요.  BSD에 외근하다가 도난사건에 연루되어 1년간 교도소에서 복역하고 나온 친구죠. 매트릭스(Matrix)는 미국산 모발미용재료 브랜드인데 인도네시아에선 로레알(L’oreal)이 관장하는 휘하의 한 사업본부였고요.

 

미스터르한테 안부 전해 달라 했어요.”

데려오지 그랬어? 시간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할 걸.”

미스터르 보기 미안하데요. , 그리고 차 잃어버린 거 들었는데 힘내시라고….’

, 그래? 근데 그거 뭐하러 얘기했어?”

내가 얘기한 게 아니에요. 위키가 먼저 말하던데요. 그거 얘기 들었다고…?”

“……..?”

 

내가 누구한테도 얘기하지 않았던 건데도요? 가까운 한국사람들도 모르는 내 차량도난사건을 지난 2년도 넘는 동안 단 한번 만나지도, 전화통화하지도 않았던 위키가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걸까요?

 

무하마드 잡았냐고 물어 보길래 좀 수소문 해서 잡는 거 도와달라 부탁했어요.”

그게…?”

 

심각해지는 내 표정을 보는 메이의 미간도 갑자기 일그러집니다.

 

그런데 걔가 무하마드 도망간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 아까 위키랑 무슨 얘기했는지 쭉 한 번 얘기해 봐.”

 

위키는 그가 절대 알고 있을 리 없어야 할, 그간 우리 회사에서 벌어진 모든 사건들을 소상히 알고 있었어요.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지요. 메이가 아까 20-30분 동안 위키와 했던 얘기를 기억해 내 옮기는 것을 들으며 난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것 같았습니다. 그동안 풀리지 않고 있던 모든 수수께기들이 터진 실타래처럼 갑자기 풀리기 시작했고 그간의 모든 상황들이 앞뒤가 맞기 시작했어요.

 

그동안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 배후에 위키가 감쪽같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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