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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영업직원 활약사

영업직원 활약사 (17)

beautician 2013. 4. 10. 01:13

그의 처가 식구들과 머리를 맞대고 무하마드를 잡으려 작전을 짠 대로 그의 처가 무수히 통화를 시도한 끝에 무하마드를 버카시(Bekasi)의 한 몰로 유인해 낼 수 있었습니다. 무하마드는 뭔가 낌새를 맡고 캥기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가족의 존재란 대개의 경우 만유인력보다 잡아당기는 힘이 더 큰 법이죠. 그러니 쉽게 돈 벌려는 악당들이 가족들을 납치하고 아이들을 유괴하는 것이겠죠. 무하마드의 경우에도 그가 가족들을 일면식도 없는 수카부미의 한 남자 집에 막무가내로 맡겨 놓고 떠났던 것은 특별히 경비도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그렇게 대책없이 타지에 유기하려 했다는 정황이 뻔했지만 아내의 끈질긴 호소에 못이겨 결국 자카르타까지 도로 데려다 놓은 전력도 있었으니 이번에도 잘하면 성공적으로 그를 함정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하마드를 방심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는데 이미 2년 넘게 가족들을 속여넘겼던 그가 아내나 처가식구들의 인지력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는 상황이 유리하게 작용했지요.

 

결전의 날 아침, 내가 우리 직원 대부분을 자티브닝에 보내 무하마드의 처가 식구들과 합류시켰을 때 약속한 것도 아닌데 빠사르밍구에서도 무하마드가 팔아먹은 오토바이 배상을 독촉하러 온 일단의 사람들이 마침 들이닥쳤어요. 그들은 그날 상황을 보더니 무하마드 체포작전에 적극 동참키로 했습니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조력자들이 늘어나면서 더욱 튼튼한 덫을 놓고 더 큰 그물을 던질 수 있는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정말 이해가 안돼요. 상황이 좋았는데 에코가 거기서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말이죠.”

 

운전사 에코는 회사에서 위키나 에도, 무하마드 등 직원들이 무슨 사고를 쳐도 한발 뒤로 물러서 자긴 아무 관련 없다는 듯 방관자적 입장을 취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도 평소와 같이 메이 일행을 따라 조용히 사무실을 나섰던 그가 자티브닝에서부터 마치 자신이 무하마드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이라도 되는 듯 도를 넘어 광분하기 시작했어요 그건 매우 이상한 현상이었는데 어쨌든 메이는 에코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온다면 무하마드 포획에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절박함까지 엿보이던 그의 광분은 어딘가 수상쩍은 부분이 있었고 마치 자기가 금방이라도 무하마드를 모두들 앞에 잡아다 놓기라도 할 듯 기염을 토하던 에코는 오히려 어이없는 돌출행동으로 그날의 합동작전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무하마드가 굉장히 조심스럽게 굴었어요. 그 녀석은 분명히 아내가 나올 거라고 믿는 눈치였지만 만나기로 했던 장소를 몰 옆 주유소 앞 길가에서 갑지가 몰 안으로 바꿨어요. 혹시라도 자길 잡으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혼선을 주려는 의도였던 것 같아요. 사실 길가였다면 더 쉽게 잡았을 텐데…. 아무튼 팀을 나눠서 출구마다 사람들을 세워놓으려 했는데 에코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아내와 문자메시지를 교환하면서 결정된, 무하마드가 나오기로 한 정확한 장소는 보안상의 이유로 처의 오빠와 메이만이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 에코나 빠사르밍구팀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장소가 몰 안으로 바뀌었다는 것만 들은 상태에서 일단 몰의 출입구를 막아 서려는데 뒷문을 맡은 에코가 갑자기 1층 옷가게들 사이를 누비며 뛰어다니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무하마드!! 무하마드!!”

 

이렇게 소리를 지르면서 말이죠.

원래는 에코나 메이, 처가식구들은 몰이꾼의 역할이었으므로 무하마드를 발견하면 그를 비교적 안면이 적은 빠사르밍구팀이 지키는 서쪽이나 남쪽 문으로 몰고가 잡으려는 계획이었고 메이는 몰의 경비원 대장에게도 협조를 구하고 있던 차였어요. 그런데 미처 팀들이 모두 배치되기도 전에 에코가 위치를 이탈해 오바질을 하기 시작했던 거에요. 그게 어떤 사람들 눈엔 무하마드에 대한 원한이 사무쳐 그를 잡으려는 의욕이 너무 앞섰던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메이의 눈이나 그 얘기를 전해 듣는 내 입장에서는 에코가 오히려 우리의 노력을 방해하며 무하마드에게 경고를 하려 했다고밖에는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잔뜩 경계하고 있었을 무하마드가 그런 에코를 발견하지 못했을 리 없었죠. 불과 10분도 되지 않아 처형이 혀를 차며 동생이 전달해 온 문자를 메이에게 보여 주었답니다. 그건 무하마드의 메시지였는데 그는 상황을 간파하고는 아내를 저주하고 있었어요.

 

[네가 날 팔아 넘긴 걸 다 알고 있어. 몰에 회사 사람들이 깔려 있더군. 넌 다시는 날 보지 못할 거고 네 아들도 아비없는 자식이 되어 평생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가게 될 거야!]

 

체포팀들은 황급히 몰을 구석구석 뒤졌지만 무하마드는 이미 감쪽같이 꽁무니를 감춘 후였어요. 에코가 길길이 날뛰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낙담하는 모습을 보이자 빠사르밍구팀들마저 그를 위로해 주었다지만 메이는 그때부터 에코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게 되었고 나 역시 에코가 어떤 식으로든 무하마드의 사건사고에 연루되어 있을 것이라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에코는 초창기에 잠시 영업에 참여했다가 손을 땐 이후론 줄곧 자신의 매출계정 자체를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손이 딸리면 수금이나 물건 배달을 위해 무하마드나 에도의 거래선들을 수시로 들락거렸고 100% 내 편이라고 낙인찍힌 메이를 출산휴가 전부터 직원들이 경원시할 때 에코도 덩달아 메이를 왕따시키려 했던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전직원 거의 모두가 무하마드와 에도의 사고들에 연루되었다는 확증이 하나 둘 발견되는 시점에서 그런 에코가 아무 관련도 없을 수는 없는 일이었고 그날 버카시 몰에서 그의 이상한 활약은 그런 의심을 더욱 뒷받침해주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체포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고 무하마드의 아내가 그 시도에 협조했다는 사실을 들키긴 했지만 메이는 무하마드가 설마 자기 가족들까지 버리며 도주해 버리진 않을 거라 믿었고 그래서 조만간 어떻게든 잡을 수 있을 것이라 낙관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무하마드는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우리 예측을 간단히 뒤집어 버립니다.

 

한동안 아내와 SMS로 설전을 벌이던 무하마드의 날카로운 경계심이 어느 정도 누그러진 듯한 느낌의 문자들이 오가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는데 그는 매듭지어야 할 일이 있어서 보고르(Bogor)에 간다는 연락을 아침 일찍 아내에게 보내 왔습니다. 그 얘기를 전해 들은 메이는 다시 체포팀을 꾸려 보고르로 달려 가려 했는데 난 이게 성동격서를 기도하며 무하마드가 일부러 흘린 역정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메이를 만류했어요. 그 대신 만일 그가 정말 보고르에 갔고 정말 매듭짓지 못한 일이 있다면 그건 필경 그 곳에 남아 있는 우리 수금을 가로채려 하는 것이리라 예상하고 해당 거래선들에게 전화와 문자로 경고를 넣어 두었죠. 그러나 무하마드도 바보가 아니었어요. 그는 정말 보고르에 나타났지만 현재 거래가 진행중인 거래선에서 수금을 가로챈 것이 아니라 거래가 종료된지 오래된 거래선을 방문해 제품무상수리와 신품교환을 해준다는 허울을 내세우며 두 군데에서 중고제품들을 수거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어요. 나중에 어딘가에 팔아 먹었겠죠. 우린 그걸 보상해 줘야만 했고요. 뻔히 알고서도 이렇게 결국 막지 못하는 경우엔 더욱 기운이 빠집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그의 아내는 다음과 같은 문자 메시지를 받습니다. 번호는 남편 것이었고요.

 

난 이 핸드폰을 주은 사람입니다. 이 핸드폰의 주인은 교통사고로 사망해서 보고르 XXX 병원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이 사람의 가족이 맞다면 병원에서 시신을 찾아 가세요.

 

좀 오래된 일이어서 이 부분에서 일부 기억의 편차가 생깁니다.

메이는 이 부분을 조금 다르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연락을 받은 건 보고르 지역번호로 시작되는 모르는 번호였고 그래서 정말 보고르에서 뭔가 일이 벌어진 것이라 믿고 우리에게 도움을 청해 왔다고 말이죠. 생각해 보면 메이의 기억이 더 일리가 있습니다. 보고르 번호가 뜨지 않았다면 무하마드의 아내도 당장 이게 거짓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리 없죠.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 사용하는 에시아(Esia)나 플랙시(Flexy)같은 CDMA 핸드폰은 일반 유선전화처럼 지역번호가 앞에 붙는데 그 전화기를 가지고 다른 도시로 출장가게 되면 현지 지역번호가 붙는 임시번호를 신청해 받을 수 있는 무료서비스가 있습니다. 무하마드는 그 서비스를 이용해 아내를 감쪽같이 속여 넘기려 했던 거였어요.

 

물론 혹시 모르는 일이어서 해당 병원에 전화로 확인해 봤지만 그날 교통사고로 들어온 시신은 단 한 구도 없는 것을 확인했어요. 예상했던 것처럼 그건 무하마드의 자작극이었던 거죠. 잠복근무중인 형사라고 속이면서 아내 앞에 처음 나타났던 무하마드는 그렇게 사망을 가장해 모든 책임을 벗어 버리고 간단히 사라지려는 얕은 수를 부렸던 것입니다. 조희팔을 필적할 용의주도한 사망사기는 실패했지만 그날부터 무하마드는 아내와도 완전히 연락을 끊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국 아내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한껏 이용만 했던 것이고 갓 태어난 아들에게도 아무런 애정이 없었던 것이죠. 물론 그를 보았다는 얘기는 버카시 일대에서 그 후로도 종종 들려왔습니다

 

 

반둥에서 데려왔던 엔티와 헤르니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엔티를 해고한 것은 의외로 남자문제때문이었어요. 그녀는 회사를 그만두던 마지막날까지도 메이의 꼬스에 함께 살았는데 언젠가부터 외박과 결근이 잦아지던 끝에 어느날 아침 찌부부르(Cibubur)에서 연락을 해왔어요. 자기가 지금 남자 부모님 집에 왔는데 남자가 다른 일이 있어 자길 자카르타에 데려다 주지 못하니 출근하지 못한다는 거였어요.

 

그냥 거기 살아. 앞으로도 출근하지 마.”

 

엔티는 줄곧 자기 역할을 하지 못했으므로 내보내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스스로 빌미를 제공했던 거고요. 사실 엔티는 에도가 피투성이 되어 돌아온 그날 밤 3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의 엉성한 스토리를 지어냈을 때부터 이미 내 눈밖에 나기 시작했는데 그녀의 계정에서 사고가 발견될 때마다 이미 도망가 변명할 기회조차 없는 에도에게 매번 모든 잘못을 전가하고 있었으므로 나중엔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어요. 그러다가 엔티의 계정이었던 따만앙그렉몰(Taman Anggrek Mall)의 한 거래선에서 다운페이먼트로 주었던 상당한 금액이 보고누락되어 없어졌던 것을 나중에 어찌어찌 알게 되어 엔티에게 확인하려 했을 때 처음부터 삼천포로 빠지던 그녀의 대답은 괌 열도를 지나 하와이를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에도가 꼭 쓸 데가 있으니 달라고 해서,,,. 그래서 줬던 거에요.”

에도 것도 아니고 네 계정인데 어떻게 책임지려고 그랬어? 그리고 회사 돈인데 에도가 달라면 그냥 그렇게 주는 거야? 그러고서 왜 보고 안해??”

, 그게…”

“…….?”

그게……, 메이언니한테 허락을 받았어요. 메이언니가 에도한테 그 돈 줘도 된다고 했다고요. 그렇죠? 메이언니! 기억 나죠?”

 

내 방 문앞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메이가 뜬금없이 벼락을 맞습니다.

 

그때 내가 보고했잖아요? 기억 안나요?”

어어…, 그게…, 나한테 보고했다고….?”

그래요. 분명히 보고했다니까요!!!”

 

이 대목에서 메이가 좀 세게 나갔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갑자기 등에 칼을 맞은 메이는 혹시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데 자기가 잊어버리고 있었던 게 아닌가 잠시 스스로 의심을 했고 그런 낌새를 눈치챈 엔티는 더욱 메이를 몰아 붙였죠. 이제 상황은 그 없어진 돈에 대해 메이가 책임을 져야만 하는 쪽으로 기울어 가는 듯 했습니다.

 

이게 무슨….?”

미스터르, 믿어 줘요. 메이언니가 허락하지 않았으면 내가 어떻게 그 큰 돈을 맘대로 에도에게 줬겠어요?”

아니, 그래도 내가 그런 걸 허락할 리 없잖아??”

내가 맞다니까요!!”

 

이 상황이 벌어진 건 에도가 이미 도망갔고 무하마드는 아직 출근하고 있던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이건 어디서 이미 한번 본 듯한 상황이었습니다. 난 두달쯤 전 반둥에서 수금해온 돈을 빼돌리라고 지시했다며 메이를 모함하던 헤르니의 사건을 기억해 냈습니다. 조금만 확인하면 간단히 진실을 알 수 있었던 상황에서 밑도끝도 없이 메이를 횡령사건의 수괴로 몰았던 사건이었죠. 난 해당 자료를 다시 뒤적거렸습니다. 그런데 날짜가 말이 안됩니다.

 

수금한 날짜가 6 5일이네?”

아마, 그럴 거에요.”

이 날이 무슨 날인지 알아?”

그날 수금한 거 맞아요. 미스터르도 그날 일일보고 한 거 보시고 말씀하시는 거잖아요?”

그래. 이 날은 메이가 애기 낳던 날이야. 까르티카 병원에서 제왕절개수술 받느라고 하루종일 마취에 취해 있었던 날이라고! 이 날 수술실에 들어간 메이한테 넌 도대체 무슨 수로 허락을 받았다는 거야??”

 

요란스럽던 사무실에 갑자기 정적이 흘렀어요.

 

엔티…, , 지금부터 기억 잘 정리해서 메이한테 사실대로 보고해. 잘 생각해보니 사실은 미스터르가 허락해 준 거라는 소린 하지 말고.”

 

엔티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 올랐어요.

물론 엔티가 나중에 메이에게 보고한 얘기는 전혀 다른 스토리였는데 그건 이제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아무튼 그런 일도 있었으니 엔티가 점점 회사일을 소홀히 하다가 그렇게 떨려 나가게 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메이로서도 부담스러운 일이 하나 줄어든 것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 편이 아닌 게 분명한 사람과 한 집에서 산다는 게 말처럼 간단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게다가 아이 둘까지 돌보면서 말이죠. 그 당시 엔티는 한국으로 치면 PC방 격인 와르넷(Warnet)에서 알바로 일하는 한 남자와 사귀고 있었는데 법대를 다니다 잠시 휴학 중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그 남자는 그 레벨의 대부분 남자들이 다 그렇듯 새빨간 거짓말을 한 것이고 고등학교도 채 마치지 못한 채 와르넷을 하는 삼촌에게 빌붙어 지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메이가 출산휴가를 마치고 출근하기 시작하면서 급격히 결근이 많아진 엔티는 이런 저런 결근 사유를 댔지만 나중에 메이가 꼬스의 이웃들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메이가 아이들을 인근 엄마 집에 맡기고 출근하면 얼마 안 있어 엔티가 남자를 데리고 쪼르륵 메이의 방에 들어가 하루종일 문을 걸어 잠그고 빈둥거렸다는 것이었어요. 남녀가 밀폐된 방안에서 하루 종일 할 일이란 그리 경우의 수가 많은 것도 아니었으므로 방주인인 메이가 그런 사실을 알고 격분하는 것도 당연했고 회사를 떠날 당시의 엔티는 임신한 기색이 역력했어요.

 

물론 엔티의 입장을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볼 수도 있습니다.

헤르니와 함께 반둥에서 자카르타로 넘어와 우리 회사에 합류했을 때 필드에서 맞닥뜨린 현실은 나나 메이가 사전에 설명하고 경고했던 것보다 훨씬 살벌했을 것이고 막무가내로 횡령을 저지르는 무하마드나 에도의 윽박지름에 위협을 느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무서웠기 때문에 저들에게 동조하며 협조했고, 그러다가 환멸을 느낀 끝에 일보다는 남자를 탐닉하게 되었는지도 모르죠. 어린 여자들에게 나를 위해, 그리고 회사를 위해 투사처럼 싸워주기를 바라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한 상황에서 일이 그렇게 돌아가 버렸을 가능성도 적지 않았으므로 당시 엔티가 전전긍긍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지어내며 당장 상황을 모면하려고만 했던 것도 한편으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내가 그런 상황으로 등을 떠민 셈이니 좀 미안하고 안됐기도 하고요.

 

 

하지만 헤르니의 경우는 좀 달랐습니다.

 

위협을 당했다 하더라도 헤르니는 결과적으로 너무나 적극적으로 사건사고를 은폐했고 그 자신의 계정에서도 작은 금액을 끊임없이 횡령했습니다. 더욱이 메이의 출산휴가기간동안 헤르니가 담당했던 가장 중요한 업무는 통신과 조율이었어요. 거래선들과 연락하여 수금과 판매일정을 조정하고 그것을 직원들에게 배분해주고, 또 거꾸로 직원들의 개별 일정에 따라 해당 거래선에 연락을 넣어 스케줄을 확정해 주는 일 말입니다. 만약 뭔가 문제가 숨겨져 있고 판매내역이나 수금내역에 차이가 있으면 그 업무를 하면서 자연히 그 문제들을 발견하고 내용를 파악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메이가 그 일을 하고 있는 동안 누구도 지나치게 황당한 사고를 치지 못했습니다. 메이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사소한 금액의 문제가 어느 변두리 구석의 거래선에서 소규모로 몰래 벌어질 뿐이었지요. 그러나 헤르니가 그 업무를 인계받은 후 영업팀 전직원이 한통속이 되어 대대적으로 횡령을 저지르며 메이의 출산휴가기간 동안만 무려 4억 루피아, 한화 4천만원 정도가 증발되어 버리는 상황에 도달하도록 헤르니는 상황을 철저히 은폐했습니다. 그녀는 제대로 된 보고도 하지 않았을뿐더러 내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이런저런 질문을 할 때마다 모든 답변을 거짓말로 일관했던 거에요. 난 헤르니가 무하마드나 에도로부터 적잖은 금액을 나누어 받았을 거라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조사가 거의 마무리되어 가던 시점에 확인되는 사항들이고 직원들이 도주하고 엔티까지 해고하는 와중에도 우린 헤르니에게 모종의 헛된 기대를 하고 있었어요.

 

메이가 출산휴가에서 돌아오자마자 한달만에 에도가 도주하고 그로부터 다시 한달 후 무하마드가 도주했지요. 그 사이에 엔티를 비롯한 대부분의 영업팀 직원들을 해고하는 와중에 좀 더 심하게 무하마드와 어울린 직원들도 역시 눈썹을 휘날리며 도주했습니다. 개중엔 무하마드와 마찬가지로 첨부된 모든 신분증명자료들이 허위인 놈도 있었고 어떤 놈은 이자사(ijasa-졸업장)를 위조한 것이 발각되고서도 미용실에서만 사용하는 기기를 이발소에 팔았는데 꼭 믿어달라고 부득부득 우기다가 사실확인하러 간 현장에서 도주하기도 했어요. 그렇게 단기간에 영업팀이 완전히 공중분해되면서 우린 거의 천개에 가까운 거래선을 관리하고 수금하러 다닐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죠. 비록 헤르니의 죄가 크다 해도 이 친구가 개과천선한다면 몇 남지 않은 다른 직원들과 함께 상황을 수습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메이는 적극적으로 헤르니를 회유하려 했고 난 바람을 잡느라 짐짓 대인배 행세를 했습니다.

 

르바란 보너스를 가불해 달래요.”

 

또 그게 헛점이 되었던 모양이죠. 손이 발이 되도록 용서를 구해도 시원찮을 헤르니가 오히려 가불을 요구해 왔다는 겁니다. 거기다가 판매커미션도 르바란 전에 모두 지불해 달라는 조건을 달고서요. 당시엔 에도와 무하마드의 사건사고를 조사하고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일손이 턱없이 부족하던 상황에 헤르니의 계정을 조사할 여력이 없던 차였으므로 그녀의 계정이 사실은 무하마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지뢰밭이라는 것을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런 거 요구하는 거 보면 쟤, 르바란 끝나고도 안돌아올 확률이 99%일 것 같은데?”

돌아온다고 철썩같이 약속했어요.”

그 말 믿어?”

그동안 문제되던 사람들 이제 다 나갔는데 헤르니도 더 이상 거짓말 할 이유 없잖아요?”

 

월급, 보너스, 커미션을 모두 미리 지급해 주면서도 난 반신반의 했습니다. 개과천선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적중하지요. 르바란 휴무시작을 아직 몇칠 남겨둔 어느 날 헤르니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며 남들보다 빨리 휴가를 출발합니다. 이것도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어요. 그런 상황이 되면 친척 중 누군가 꼭 죽어요. 난 이 나라에 살면서 이런 부분에서는 거의 도사수준에 이르렀다고 스스로 자평합니다. 신끼가 생긴 거죠.

 

이 나라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인도네시아에서, 특히 그 특정계층에서 유종의 미란 좀 더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뜯어 먹을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쥐어짜 뜯어 먹는다든가 뭐 그런 의미  헤르니는 이미 에도와 무하마드가 빼돌린 돈에서 상당 부분을 챙겼을 터인데 회사에서 정상적으로 나올 돈도 모두 챙긴 상태에서 남들보다 몇칠 빨리 장기간의 휴가를 떠난 거였어요. 그녀는 당연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얘기는 이쯤에서 끝났어야만 했습니다.

사실 터질만한 모든 사건들이 터졌고 메이가 출산휴가에서 돌아온 후 2개월 남짓 지나는 사이에 대부분의 영업직원들이 도주하거나 해고된 상태로 르바란 휴무를 시작했어요. 긴 휴무를 마치고 회사문을 다시 열었을 때 돌아온 직원들은 예상보다 훨씬 더 적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에도와 무하마드의 사건사고에 연루되었던 직원들은 운이 좋아 비록 추궁당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들이 이미 익숙해져 있던 콩고물이 더 이상 떨어질 리 없게 된 우리 회사에 돌아올 이유가 없었던 것이죠.  업무 재개 첫 날 출근했던 직원들조차 둘째 날엔 대부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사무실엔 20개 가까운 책걸상이 가득차 있고 루꼬 앞 주차장엔 우리 오토바이들이 즐비한데 직원이라곤 메이와 에코 달랑 두 명만 남고 말았던 겁니다.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거래선관리를 그 인원만 가지고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어요.

 

난 다시 대대적으로 직원모집광고를 냈습니다. 하지만 응시자들 자체가 눈에 띄게 적었어요. 그 즈음에 인도네시아에는 넥타이 매고 탁자 위에 커피 마시며 컴퓨터나 두드리는 사무실 근무를 더 선호하는 시대가 도래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일이 자카르타 전역을 종횡무진하며 영업하는 일이라는 말을 들은 응시자들의 반응은 냉소적이기 이를 데 없었고 그나마 우여곡절 끝에 채용한 직원들은 2-3일을 채 버티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어요. 하지만 그렇게 짧게 일을 해도 그 2-3일 사이에 뭔가 사고를 쳐놓곤 했습니다. 결국 나는 물론이고 메이와 에코가 눈코뜰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 많은 거래선들은 자카르타뿐 아니라 반둥에도 산재되어 있었으므로 우린 하루에 수백킬로미터씩 차와 오토바이를 운전해야 했어요.

 

물론 대부분의 오토바이들은 운전할 직원이 없어 곧 처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마지막까지 남겨둔 한대의 오토바이와 내가 타고 다니며 짐차로 쓰던 아반자 밴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자산 중 하나였어요. 우린 하루의 대부분을 길바닥에서 보내야만 했으니까요. 차와 오토바이는 이제 사무실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밤 9시가 넘어 사무실에 돌아오면 메이 등이 퇴근한 후에도 난 밤이 깊도록 전표와 서류를 정리하고 해외 공급선들에게 이메일들을 띄우는 일과가 챗바퀴처럼 반복되었습니다.

 

1년간 계속된 직원들의 사건사고로 몸과 마음이 모두 기진맥진했지만 이제 어쨌든 모든 종양을 걷어낸 셈이니 잘 추스리면 좀 더 건강한 회사를 만들어 보다 실속있는 사업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람빠진 고무보트처럼 회사가 찌그러져 버린 상황에서 더 이상 나빠질래야 나빠질 수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큰 손해를 보긴 했지만 사업장과 거래선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모든 난관 속에서 철저히 내 편이 되어 주었던 메이가 여전히 버티고 있었으니 든든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어요. 그러니 이제 모든 것은 다시 노력하기에 달린 것이었고 곧 떨쳐 일어나 깃발을 더욱 높이 휘날리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 포부를 다지던 어느날 밤, 나름 보람찬 마음으로 퇴근하려 사무실을 나섰을 때 루꼬 앞에 당연히 주차되어 있어야 할 내 아반자 자동차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순간 머리털이 쭈뼛 곤두섰지만 아마도 어딘가 다른 곳에 세워 둔 것을 내가 착각한 것이라고 스스로 애써 믿으며 루꼬 단지 일대를 뒤졌지요. 그러나 차는 어디에도 없었어요. 당시 그 절박한 상황에서 절대 없어서는 안될 내 발을 도난당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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