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매일의 삶

폭우 속에서 하는 이사

beautician 2020. 2. 3. 10:00



나는 사회생활을 우비장사로 시작했다.


물론 이런 명제를 내려면 약간의 성찰과 설명이 필요하다. 

내가 (주)한화 무역부문 의류팀에서 레인웨어 일본수출 담당이 된 것은 전역 직후인 1988년 6월 이후의 일이지먼 사실 한화에 입사한 것은 학군 임관 전인 1986년 1월인가 2월의 일이었고 당시 연수를 마치고 본사에서 한달 간 했던 일은 당시 아직 골든벨상사라 불리던 무역부문에서 플라자호텔에 납품한 연어가 살짝 선도가 떨어져 재포장한 연어를 들고 친지, 지인들에게 팔러다녔으니 사회생활을 생선장사로 시작했다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또 한편으론 대학 2학년때 반년쯤 과외를 했고 당시부터 영어 번역을 시작했으니 교육과 번역사업으로 사회에 첫발을 디뎠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전역한 후 한화에 돌아갔을 때의 마음가짐은 그 전에 어딘가 겉도는 듯 소속감 희박하던 돈벌이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으므로 본격적 사회생활은 우비장사로 시작한 것이 맞다.


그렇게 88년 6월에 시작된 우비장사를 96년 6월 한화가 의류팀을 해체할 때까지 만 8년 동안 한국, 중국, 인도네시아에서 생산한 레인웨어를 일본 구석구석의 수입상들에게 수출했다. 스미쿠라, 카지상교, 다이산쇼지 등 사람들이 절대 알 리 없는 오카야마, 코마츠 등 촌구석의 중소기업들이 주거래선이어서 한번 일본출장을 기획해 그들을 모두 방문하려면 꼬박 2주간 신칸센을 타고 일본일주를 해야 했다. 1995년 1월부터는 북부 자카르타 보세지역의 자체 생산공장에 부임해 1년 반 후 공장의 최후를 목도하던 날까지 직접 레인웨어 생산을 관리하기도 했다.


원래 비를 좋아한 편이어서 군시절 부대에서도 GOP에 내리는 비를 창밖으로 오래동안 내다보곤 했는데 인도네시아 우기의 폭우를 그토록 사랑하게 된 건 아무래도 그런 직업적 요인이 컸다.  인도네시아 2년차가 되던 1996년 1월에 큰 홍수가 나 공단 전체가 물에 잠겨 내 그랜드 끼장이 잠수함처럼 본네트 위로 넘실거리는 파도를 뚫고 공장 주차장까지 갔다가 돌아온 일도 있었는데 그건 1990년 한강이 넘쳐 당시 성내역 인근을 침수시킨 대홍수 당시 성내역 앞 주공아파트 1층까지 물이 올라오자 생후 3개월도 안된 아들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고 목까지 차는 물을 헤치고 나갔던 사건과 함께 이후 오래동안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주던 짜릿한 모험담이기도 했다.



2020년 정초 자카르타 수도권 대홍수



2020년을 맞던 새해 벽두에 역대급 홍수가 다시 한번 자카르타를 비롯한 수도권을 휩쓸어 40명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설날 전야인 1월 24일 밤에도 큰 비가 와 시내 곳곳이 침수되었다. 이 글을 쓰는 2월 2일 오전에도 큰 비가 내려 상습침수지역은 또 다시 발목까지 집안에 물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매년 한번쯤 큰 홍수가 나던 예년에 비해 올해는 홍수 빈도가 매우 높다.


비를 좋아하는 내 성향이 그간 변한 건 아니지만 누군가의 생활과 생계를 망가뜨리는 폭우를 예전처럼 베란다에 나가 담배 연기 내뿜으며 여유롭게 보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이렇게  입장이 변하는 경우는 대개 두 가지 이유인데 하나는 인격이 성숙해져 역지사지하는 마음이 생겼거나 또 다른 하나는 그간 보이지 않던 측면을 새삼 발견했거나 그걸 직접 경험하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사족이지만 20여년 인도네시아에서 직접 운전하고 다녔던 네게는, 늘 운전사를 쓰다가 내 차를 빌려 타려고 따라 들어와 보게 된 주차장 모습을 신기해 하는 한국인들이 오히려 신기해 보였다. 주차장이란 십년 넘게 주재원으로, 법인장으로 지냈던 그들에겐 한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던 장소일 테니 절대 비난하려는 건 아니지만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매캐하고 번잡하고 후덥지근한 주차장이  마치 가상의 공간처럼 여긴 그 좁은 식견과 얄팍한 사려엔 조금 잔소리를 해주고 싶다.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는 국회의원, 직원들을 가족같이 여긴다는 사주들은 밑바닥 서민들과 월급에 목을 거는 직원들 입장을 진심으로 주목하거나 겪어보지 않은 것과 다른 바 없는 것이고 그 결과 그들의 약속과 맹세는 립서비스일 뿐이니 말이다.  홍수로 고생하는 이들의 생활을 직접 겪은 후부터 더 이상 폭우를 느긋하게 바라볼 수 없었다.


메이는 더 이상 관리비를 내기 어려웠던 쯤빠까마스 아파트를 나가 북부 끌라빠가딩 히브리다의 저지대 주택으로 이사한 후 지난 3년간 매년 한 차례씩 집안에 물이 들어오는 홍수를 겪었다. 특히 올해는 벌써 몇 차례릐 홍수를 겪었다.  특히 1월 1일 홍수로 모든 가재도구가 물에 잠겨 못쓰게 되어버렸다.그래서 결국 매우 무리해 이사를 시켰다. 오늘도 폭우로 거실에 발목까지 물이 찬 상태에서 메이 가족은 회사가 보내준 트럭에 짐을 실어 내가 구해준 지대가 높은 인근 주택으로 이사를 시작했다. 메이와 두 아이들 차차와 마르셀은 이사간 집에서 한 시름 덜게 될 것이다. 


누군가를 배려한다는 것은 마음도 써야 하고 때로는 돈도 드는 일이다. 하지만 매우 보람있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메이 가족들을 돌보며 새삼 느끼곤 한다. 그리고 또 하나 느끼는 것은 내가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해서 내가 늘 그들을 변하게 만드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메이와 그 아이들을 만나면서 나도 많이 달라졌다. 입장도. 시각도.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세상은 조금씩 달라 보이게 된다.

쏟아지는 폭우의 의미가 내게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게 된 것처럼.


2020. 2. 2.







'매일의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 길바닥에서  (0) 2020.02.05
코로나 바이러스 대비상황 - 인도네시아  (0) 2020.02.04
복희누나  (0) 2020.02.01
예술가는 어디에나 있다  (0) 2020.01.31
신박한 단체이름  (0) 2020.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