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복희누나 본문
오래 전 복희누나라는 아침 드라마가 있었다. 스맛폰이 나오고 인터넷이 빨라지면서 집에서 TV를 보지 않은지 벌써 오래 되었지만 2011~2012년엔 이 드라마를 보고 출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드라마가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배우 장미인애가 분한 복희누나란 인물이 옛날 어린 시절 우리 집에 같이 살았던 정자 고모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대략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였고 복희누나는 그때 고모 또래의 여자로 등장했다. 특히 정자 고모는 장미인애의 미모를 쏙 빼어 닮았다.
사촌들이 모두 얹혀 살아 대가족을 이루고 있던 우리 집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고모를 난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언젠가 미스코리아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예쁜 딸과 어릴 때부터 늠름하기 그지없던 아들, 그렇게 두 남매를 낳고 행복하게 살아갔어야 할 고모는 어느날 교회 새벽기도회를 다녀오던 이른 시간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고모는 며칠간 사경을 헤매다 결국 세상을 떠났는데 난 그 연락을 받지 못했다. 당시 파주 북방 GOP에서 군생활하던 중이었는데 아마 아버지는 복무 중인 아들에게 나쁜 소식을 전해주지 않으려 했던 모양이다. 그 시기에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부고도 내겐 도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모가 세상을 떠난 것을 안 것은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흐른 후의 일이었고 부모님이 그때 내게 연락을 전하지 않은 '배려'를 난 매우 섭섭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예쁜 조카들도 이젠 모두 청춘을 지나 중년에 접어 들었겠지.
고모 외에는 너무나 느슨하고 서먹서먹했던 친척들과의 관계는 시간이 흐르고 생활이 팍팍해지면서, 그리고 해외생활이 길어지면서 대부분 희미해지고 끊어져 버렸다. 당시 고모와 함께 우리 집에서 시집 장가 갈 때까지 살았던 사촌들은 서로 소송을 벌이다가 우리와도 연을 끊는 사건이 벌어졌다. 아버지 대까지는 그럭저럭 긴밀한 관계를 갖던 강경의 종친들을 우린 전혀 모른다. 그건 아마도 장손 자리를 놓고 소송전을 벌였던 사촌들의 몫일 것이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르고, 복희누나 드라마로부터도 십년 전후의 시간이 지난 후 장미인애씨의 이름을 신문지상에서 만나게 되면 난 복희누나의 장면들보다 이대입구 한옥집에서 사촌들과 다같이 살던 시절 집안을 화사하게 밝혀주던 여고 하복차림 정자 고모의 환한 미소를 떠올리곤 한다.
그래서 시작되는 그 시절의 추억과 이후 벌어진 잔혹사를 더듬다 보면 가문의 족보 상에 내 이름이 어디 적혀 있느냐보다 사랑하던 이들의 웃는 모습이 내 기억 속 어디에 어떻게 보관되어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2020.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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