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영업직원 활약사

영업직원 활약사 (14)

beautician 2013. 2. 16. 03:51

 

 

에도는 다량의 코피를 쏟은 것 같았습니다. 그의 셔츠 깃과 점퍼 앞부분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지만 츨혈이 있었을 만한 별다른 심각한 상처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물론 그는 눈두덩을 비롯해 얼굴 곳곳이 퉁퉁 부어 있었고 불편한 걸음걸이를 보아도 매우 심한 꼴을 당했던 것 역시 분명했어요.

 

어떻게 된 일이야?”

 

에도는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고 엔티는 극도로 흥분한 채 어쩔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게 좀 의심스러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에도 옷깃의 피자국이 말라붙은 것으로 보아 에도가 당한 사고는 한참 전의 일 같았는데 그렇다면 당시 크게 놀랐을 엔티도 지금은 좀 진정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엔티는 여전히 극도로 흥분해 있었으므로 그게 연기가 아니라면 그 흥분의 이유는 몇 시간 전 에도가 당한 일 때문이 아니라 바로 직전까지 벌어졌던 어떤 다른 일때문이거나 지금 이렇게 나와 다른 직원들을 마주 대하는 것때문일 수도 있었습니다.

 

직원들이 에도의 점퍼를 벗기고 소파에 눞히자 비상약통을 들고 온 메이가 상처를 닦고 약을 바르기 시작했습니다. 눈의 붓기 때문에 잘보이지 않았지만 한쪽 눈은 눈꺼풀 위가 좀 찢어져 있었고 다른 눈은 핏멍이 짙은 다크서클처럼 내려와 있었습니다.

 

사무실 돌아오는 길에 길가에서 저녁식사를 사먹으려는데 어떤 사람들이 와서 에도 가방을 낚아 채 갔어요. 걔들을 쫒아 갔다가가방만은 돌려 달라며 사정을 하는데도 그 놈들은 들은 척도 않고 에도를 저 지경으로….”

 

엔티는 숨을 헐떡이며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전반적인 그림은 얼마전 메이와 에도가 함께겪었던 라와망운에서의 사건과 흡사했어요. 그런데 난 이번에도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에도 가방이라면 저 백팩을 말하는 거지?”

, 저렇게 가방줄 한 개가 끊어질 정도로 잡아 챘어요.”

 

우리 직원들을 모두 백팩을 매고 다녔죠. 제품들을 넣고 다녀야 했으니까요. 그게 잡아 챈다고 여자들 핸드백처럼 가방줄이 간단하게 끊어지는 것들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아닌게 아니라 에도의 백팩은 한쪽 어깨줄 하나가 끊어져 있었습니다.

 

…, 에도가 저 정도로로 맞는데 사람들이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어? 길가 포장마차라면 사람들도 꽤 있았을텐데? 그것도 저녁먹을 시간이라면….?”

, 그게…, 그 사람들이 오토바이로 달려와서 채갔거든요….”

길가 포장마차에 앉아 있는데 오토바이가 지나가며 백팩을 채뜨렸다…?”

 

사실 오토바이 강도들이 길가에 서 있는 여자들이나 반대편으로 가는 오토바이 뒤에 매달린 여자 승객의 핸드백을 잡아 채는 사건들은 자카르타 곳곳에서 매일 벌어지는 사건이지요. 그러나 그 강도들이 남자의 백팩을 잡아챘다는 얘기는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토바이로 채갔으면 꽤 빨리 내뺐을텐데 저녁 먹던 에도가 어떻게 무슨 수로 그 빠른 애들을 쫒아 가서 저렇게 얻어맞기까지 한 거지?”

그건…., 오토바이를 탔어요. . 에도도 오토바이를 타고 쫒아 갔어요.”

그놈들이 오토바이로 냅다 내빼는데 그거 쫒아가겠다고 세워둔 오토바이에 시동 걸어 타고 쫒아갔단 말이야? 그 와중에 너까지 싣고?”

에도 혼자 쫒아 갔어요.”

 

난 또 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에도가 저 지경이 되었는데 정말 두 명뿐이었던 거야? 쟨 반항도 안했데?”

둘 뿐이었어요. 에도는 통사정만 했고요. 에도가 가방을 잡고 늘어지는데 그 놈들이 에도를 마구 짓밟았다구요.”

엔티, …, 얘기를 다시 좀 정리해 봐.”

 

그 대목에서 하마터면 난 엔티에게 큰 소리를 칠 뻔 했어요.

 

그건 3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이잖아!!!

 

엔티의 얘기를 정리하면 이렇게 되는 거였어요. 길거리 ATM 앞 오토바이 들치기처럼 한 오토바이 강도팀이 길가 포장마차로 접근해 에도의 백팩을 잡아챘고(그런데 그걸 아직 매고 있던 상태라면 절대로 잡아 채어질 리 없는데 말이죠), 에도는 황급히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고 혼자 강도들을 쫒아간 거죠. 오토바이로 달렸으니 길도 건너고 요리조리 커브도 돌아 추격전을 벌였을 것이고 어느 어두컴컴하고 한적한 곳에 이르러 에도가 결국 강도를 따라잡았든, 강도들이 에도를 거꾸로 기다렸든 아무튼 마침내 조우해서 에도가 거기서 반죽음 되도록 두드려 맞았다는 게 사건의 요지입니다. 에도가 구타를 당한 장소가 포장마차로부터 너무 멀고 한적한 곳이어서 포장마차에서 같이 식사하던 다른 사람들이나 행인들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다는 건데…, 그 포장마차에 남겨졌다던 엔티가 에도의 구타당하는 장면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천리안을 가진 것도 아닌데 엔티가 그걸 어떻게 목격한 것일까요?

 

내가 보기에 엔티가 한 말은 다 뻥이다.”

 

다음날 아침 다른 팀들을 모두 외근 내보낸 후 난 메이와 함께 당일 방문해야 할 목적지들을 내차로 돌며 내 생각을 얘기했습니다. 물론, 에도와 엔티는 그 날 하루를 쉬게 한 상태였죠.

 

저녁 먹을 때 벌어진 사고라면 그게 대충 7, 늦어도 8시 정도지. 들치기 하고 도망치던 놈들이 추격자를 반격하는 일이 분명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야 기껏 5-10분 정도겠지. 너무 시간을 끌면 경찰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잡힐 수 있잖아. 그러니 모든 상황이 완료된 시점은 늦어도 8시반 전후라고 봐야 해. 그런데 재들 돌아온 시간 봐. 새벽 1. 그 사이에 무려 네시간 반이 공중에 떴어. 쟤들 그 사이에 왜 연락을 안했을까?  말로는 둘 바 핸드폰 밧데리가 다 되어서라는데…, 또 말하게 되지만 우연은 그런 식으로 벌어지는 게 아니야. 사고가 나고 회사돈까지 날리고, 그 상황에서 시간이 네시간 반씩이나 남으면 최소한 인근 와르텔(wartel)이라도 찾아서 전화 했어야지. 보고를 하든, 도움을 청하든…”

 

에도와 엔티는 그 사건으로 가방은 되찾았지만 가방 안에 있던 그날 수금한 돈 전부를 강도들에게 뺏겼다는 것이었어요. 최근 그런 일들이 잦았습니다. 도주한 미용사들의 보고가 넘쳐나기 시작했고 무하마드는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수금한 돈이 든 자기 지갑을 길바닥에 떨어뜨려 잃어 버렸다거나 몰에서 나오다가 소매치기를 당했다는 보고를 해오기도 했었죠. 이 모든 게 메이가 출산휴가에서 돌아오면서부터였어요.

 

그런데 그 네시간 반동안 너랑 내가 그렇게 수백통 걸어댄 전화를 쟤들은 받지 않거나 한동안은 전화기를 꺼놓기까지 했어. 그러다가 자정이 다 되어서야 쯤빠까뿌띠(Cempaka Putih)라며 잠깐 전화해 오고, 10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재들은 1시간이 더 지난 후에야 사무실에 도착한 거야. 그러더니 엔티가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자기가 절대 보지 못했을 장면을 마치 옆에서 세심히 관찰한 것처럼 얘기하잖아?  에도가 맞는 걸 보니 무서울 정도였다고?  오토바이 타고 강도들 쫒아간 에도가 강도들한테 맞는 장면을 포장마차에 남아 있던 엔티가 무슨 수로 볼 수 있었을까? 엔티가 얘기한 사건경위대로라면 엔티는 에도가 구타당하는 장면을 볼래야 볼수가 없었을텐데 말이야.”

 

직원들이 거짓말 하는 것을 너무 많이 봐 왔던 터라 어느 정도 이력이 나 있던 터였고 그래서 그런 게 뻔히 보이기도 했어요. 물론 아니오의 단답식 거짓말이나 난 모르는 일이에요라며 발뺌하는 거짓말은 그 진위를 가리는 것이 아주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마추어가 별다른 사전 준비없이 즉석에서 거짓말로 풀어내는 소설 같은 스토리는 빈틈을 잡아 내기 쉬운 편이지요. 3의 거짓말 프로가 탄탄한 스토리를 만들어 준 경우라 하더라도 그 거짓말을 읊는 꼭둑각시는 어느 부분에선가 꼭 실수를 하기 마련입니다. 타고난 스토리텔러가 아닌 이상 급조한 거짓 스토리는 어딘가에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튀어 나오게 되거든요. 엔티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게다가 에도가 구타를 당하던 장면은 지난 라와망운 사건을 너무나 닮아 있었으므로 상당부분 표절임이 분명했어요. 그렇게 절박하게 설명하던 엔티는 안타깝게도 작가적 상상력을 가지고 있지 못햇던 것입니다.

 

띠따가 얘기했던 망가두아스퀘어 사건 기억나? 그런 케이스이지 싶어.”

 

메이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띠따가 우리와 함께 일하던 당시 망가두아스퀘어(Mangga Dua Square)에 지금은 이미 없어진 드엘레건트(De’Elengant) 미용실에서 일하던 이스로일(Isroil)이라는 미용사가 도주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판매대금을 모두 떼였고 우린 결국 이스로일을 잡지 못했죠. 당시 띠따의 보고가 그랬습니다. 미용실에서 띠따와 마주친 이스로일은 ATM에서 돈을 뽑아 주겠다고 감언이설을 펴며 ATM으로 가는 척 하다가 갑자기 달아나 망가두아스퀘어 몰 앞 도로를 가로질러 WTC 몰 앞의 버스웨이 정류장에서 전용버스를 타고 도주했다는 것이었죠. 굳이 말도 안된다고 할만한 전개는 아니었지만 띠따의 설명에 따르면 자기는 이스로일이 오토바이로 도주하려는 줄 알고 오토바이 주차장으로 달려갔는데 사실 그때 이스로일은 버스웨이를 향해 죽어라 달리는 중이었고 게단에서 한 차례 구르고 도로에서는 택시에 치일 뻔 하면서 간신히 버스웨이 정류장에 뛰어 올라 마침 도착한 버스를 탔다는 것이었어요. 망가두아스퀘어 건물 안의 오토바이 주차장으로 달려간 띠따는 도대체 무슨 수로 이스로일이 버스웨이 전용버스에 올라타는 모든 과정을 그렇게 디테일하게 묘사할 수 있었을까요? 그건 띠따가 소설을 쓴 것입니다. 실제로는 이스로일은 다른 경로로 도주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이스로일을 잡으러 갔다는 것 자체가 거짓이었던 거겠죠.

 

얘들은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겁니다. 전쟁영화에서 감독과 관객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이쪽 끝해안에서 저쪽 끝 벙커까지 모두 세밀하게 들여다 볼 수 있지만 정작 그 자리의 병사들은 자기 코 앞을 보기도 힘든 것이 현실이지요. 엔티나 띠따는 마치 그 영화의 감독처럼 전황을 설명하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역할이 해안 교두보에서 벌벌 떨고 있는 일개 병사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띠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에도가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오던 날 밤 엔티가 거짓말 한 것이 분명하다면 그 의도와 배경을 파악해야만 했습니다. 그 거짓말을 통해 엔티는 무엇을 감추려 했던 것일까요? 왜 그렇게 절박해 보였을까요? 구타당한 에도와 없어진 수금액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왜 새벽 1시가 되어서야 사무실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일까요? 왜 그 이전엔 연락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일까요? 이 모든 질문들 속에서 우리가 아는 진실이란 그날 에도가 구타를 당한 상태로 사무실에 돌아왔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에도가 그런 상황을 최근 자주 겪게 되는 것은 어쩌면 에도를 폭력으로 협박하는 놈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무하마드야? 널 괴롭히는 놈이?”

 

며칠 후 내 사무실에 에도를 불러 그렇게 물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어요.

 

너 혹시 마약해?  아니면 도박해? 빚 진 거 있어?”

 

이번엔 메이가 물었습니다. 에도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어요. 난 답답했습니다.

 

에도. 너한테 풀기 힘든 문제가 있다면 내가 어떻게든 도와줄 수 있어. 그러니 솔직하게 얘기해야 돼. 모르면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어. …., 무하마드한테 뭐 약점 잡힌 거 있어? 그 놈이 너 협박해?”

 

그러나 에도는 이번에도 입을 굳게 다물었어요. 난 마치 벽에 대고 얘기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에도에게 뭔가 심각한 문제가 닥쳐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아 낼 수도 그를 도울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그런 문제가 회사와는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역시 예측하기 힘들었어요.

 

쟤 월급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며칠 후 메이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월급날이 다가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도와 무하마드만은 월급날 10일 후에 월급을 주기로 합의가 되어 있던 터였습니다. 그건 그들이 이미 회사에 자기 연봉의 1-2년치 이상을 그간의 금전사고로 빚을 진 셈이 되어 있었는데 주로 월말 또는 월초에 월급날이 몰려 있는 다른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급여일도 그 즈음이었고 직원들이 금전사고를 냈던 것도 그래서 당연이 수금이 가장 많은 그 시기였으므로 에도와 무하마드만은 그 시기를 일단 지나 보낸 후 각각 담당 거래선들의 해당월 수금상황이 이상없음을 확인된 후에야 월급이 나가는 것으로 조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에도의 상황은 점점 악화일로를 걷는 것으로 보였으므로 이번 달에도 월급날을 늦춘다면 에도의 신상에 그 사이 무슨 중대한 사건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던 것입니다.

 

사실은 그간에도 줄곧 가불을 요청하고 있었어요.”

 

에도의 그런 가불요청을 메이가 자기 선에서 가차없이 끊어 놓고 있었던 모양이었어요. 게다가 그가 요청하는 가불은 자기 월급의 2배를 넘고 있었습니다. 난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어요. 에도는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는데 내가 손을 쓸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었습니다. 나 역시 한 차례 파산을 겪어 봤던 사람이고 돈 때문에 궁지에 몰리면 세상이 평소와는 전혀 다른 음침하고 스산하거나, 때로는 비정하고 잔혹한 얼굴을 하고서 다가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주자. 쥐어 짜기만 하면 저 놈 죽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것은 그 때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내 눈 앞에서 속절없이 공중분해되고 있는 듯한 형국의 에도를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어요. 하지만 월급을 주고 가불까지 해준 바로 다음 날 그게 터무니없도록 잘못된 결정이었다는 것이 바로 증명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날 아침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 있던 메이가 내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내 방에 들어오며 등 뒤로 문을 닫았습니다. 메이는 사무실 건물을 관리하는 익산(Iksan)이 새벽부터 걸어온 전화를 받고 일찍 출근했는데 익산은 에도가 사무실 열쇠와 타고 다녔던 오토바이 키, 오토바이 등록증 등을 넘겨 주더라는 것이었어요. 그날 새벽 2-3시에 이미 닫힌 사무실 문을 두드려 4층 숙소에서 지내는 익산을 깨운 에도는 사무실 열쇠가 있었음에도 사무실엔 들어가지 않고 1층 리셉션 데스크 앞 작은 소파에서 기절하듯 잠들었다는 것입니다. 옷은 엉망진창에 이번에도 피투성이가 되어 있던 에도는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을 뿐 아니라 어딘가 부러졌는지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는 것이 익산의 설명이었어요. 다음 날 새벽 에도는 아침 청소를 하러 내려온 익산에게 열쇄 등을 건내주고 마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그간 고마웠다는 인사를 하고선 절뚝거리며 사무실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난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어요.

 

제가 에도 엄마를 좀 만나고 와야겠어요.”

 

그때까지도 우린 에도가 도주했으리라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못했습니다. 메이는 명색이 지난 수년간 에도와 결혼을 전제로 교제했던 사이였던 만큼 에도의 두 어머니가 사는 곳도 알고 있었으므로 에도가 가족들까지 모두 버리고 어디론가 숨어버리리라곤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메이는 에도의 데뽁엄마와는 좀 껄끄러운 관계였다고 해요. 요즘도 그렇지만 미혼모라는 메이의 상황을 아는 남자들이 마치 메이를 구원해 주는 듯한 모양새로 거들먹 거리며 청혼을 해오는 모양인데 대개는 메이의 생활력에 기대어 빌붙어 살려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에도 역시 생활력을 비롯해 모든 면에서 메이에 비해 형편없이 쳐지는데도 불구하고 에도의 생모인 데뽁엄마는 메이가 미혼모라는 점을 지적하며 감당하기 어려운 지참금을 요구했던 일이 있었답니다. 빠당(Padang) 지역의 전통적인 결혼이란 그렇게 신부가 시댁에 지참금을 주고 신랑을 사오는 형식이었고 그래서 나중에 이혼하는 경우가 생기면 남자는 맨 손으로 내쫒기는 게 보통이라 하더군요. 그 지참금 요구로 인해 결과적으로 결혼식이 지연되다가 불발에 그치고 만 것이 나중에 생각해 보면 메이에게는 천만다행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메이는 찔레둑의 새엄마를 찾아 갔습니다. 하필이면 무하마드와 함께였지요. 그러나 메이는 거기서 에도의 문제를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했답니다. 오히려 에도 새엄마로부터 깜짝 놀랄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죠.

 

에도가 어제 밤에 급히 쓸 일이 있어 집문서를 빌려 달라고 했다는 거에요. 너무 간절히 요구해서 그걸 보관하고 있던 딸에게 부탁해서 오늘 낮에 집에 가져다 놓긴 했다는데 에도와 연락이 닿지 않았데요. 이 인간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에도의 상황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한 것 같았습니다. 전날밤부터 에도가 사라지던 새벽까지의 사건들을 다시 시간순으로 나열해 보자면 에도는 전날 저녁 월급과 함께 가불까지 받은 후 퇴근했고 그런 다음 찔레둑 어머니 집에 나타나 집문서를 요구하고는 다음 날 새벽 심하게 구타당한 모습으로 사무실에 나타나 밤을 지낸 후 익산에게 열쇠등을 맡긴 후 사무실을 떠났던 것입니다. 에도가 처한 곤경은 가불까지 합쳐 석달치에 가까운 월급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내게 돈을 받고서도 다시 찔레둑에 가서 새어머니에게 집문서를 요구했던 것이죠. 찔레둑 어머니로부터 집문서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걸 나중에 되돌려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에도 스스로도 알고 있었으리란 점에서 그가 궁지에 몰릴 대로 몰려 있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데뽁 친어머니와 달리 자애로움으로 대해 주었던 찔레둑 어머니의 등에 비수를 꽂으려던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찔레둑에서 빈 손으로 나온 에도는 그날 새벽 찔레둑에서 끌라빠가딩의 우리 사무실에 오는 동안 어디에선가 심하게 부상을 입는 상황을 겪은 건데 그날 반납받은 오토바이에 별다른 사고흔적이 없었던 것으로 봐서 교통사고를 당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누군가에게 공격당한 것임을 쉽게 추론할 수 있었습니다.

 

, …”

 

난 혀를 찰 수 밖에 없었습니다.

찔레둑 어머니마저 감언이설로 속여 사기를 쳐야 할 정도로 에도가 궁지에 몰려 있었음은 메이의 보고를 통해 충분히 이해하겠는데 그렇다면 그런 상황에서 회사 오토바이를 반납했다는 대목에서 또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토록 절박했다면 굳이 회사로 돌아올 필요 없이 오토바이까지 들고 튀었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요? 손마디가 흉하게 일그러질 정도로 당뇨와 관절염의 합병증을 앓고 있던 찔레둑 어머니는 거의 히스테리 증상까지 보이며 에도의 신변을 걱정하고 있었으므로 메이는 에도에 대해 더 이상 캐묻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은 영상지원이라도 받는 것처럼 쉽게 그려졌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데뽁 엄마 집값 할부금 내겠다고 찔레둑 엄마 집문서를 날린다는 건 말도 안돼. 그런 이유가 아니었던 거야. 그래, 어쩌면 에도가 도박빚에 쫒기고 있었던 건지도 몰라. 험한 놈들한테 들볶이다 보면 딸이라도 팔아먹고 싶어질걸? 그러니 데뽁엔 가볼 필요도 없어. 직원들하고 일 나눠서 에도 거래선들 전부 일일이 전화하고 방문해서 이상한 사항 없는지 급히 확인해 봐.”

 

메이와 다른 직원들을 그렇게 모두 내보내고서 난 생각에 잠겼습니다.

에도와 처음 만났던 때를 기억했죠. 사무실도 없던 시절, 나와 메이, 그리고 에도 단 셋이서 신바람 나는 유령회사의 깃발을 휘날리며 자카르타와 인근 위성도시들을 하루에도 수백 킬로미터씩 종횡무진 달리면서 거래선을 늘리고 회사를 키워가던 시절 말입니다. 그래서 회사에 온갖 사고가 터지고 에도마저 금전사고에 휘말렸지만 언젠가 이 모든 것들이 지나가고 나면 대홍수의 뒷자락에 복구작업이 시작되는 것처럼 다시 나와 메이, 그리고 에도 셋이서 모든 뒷일을 함께 감당하게 되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에도가 이번엔 정말 도주한 것 같았습니다. 익산이 표현했던 것처럼 콧뼈가 부러진듯 얼굴이 붓고 피투성이가 되어 절룩절룩 뒤뚱거리면서 말입니다. 난 비통한 기분이 되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날 하루 종일 직원들이 수집하여 보고해온 에도 거래선들의 상황은 나를 더욱 비통하게 했습니다. 메이가 첫거래를 텄던 오래된 거래선들 대부분이 메이의 출산휴가기간 동안 에도의 거래선으로 편입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가 정밀조사에 나서자 화들짝 놀라더라는 것입니다 본사에서 전화확인이 오면 무조건 맞다’, ‘그렇다라고만 대답해 달라는 에도의 부탁을 받았고 지난 수년간 메이와 함께 다니던 에도를 잘 알고 있던 그들은, 무슨 이유가 있으려니 하고 별생각 없이 맞장구를 쳐주었는데 그렇게 입을 맞춰 주었던 것들에 대해 이제 에도가 빠져 버린 판에 그들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팔았다는 제품들은 어딘가 다른 곳에 빼돌린 것을 그들 이름만 빌려 판매보고를 해 놓은 상태였고 한 두번 그들로부터 수금했다며 보고한 그 돈들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지 그 출처를 추측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가 몇 달 동안 지속된 것인데 난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어요.

 

물론 메이가 출산휴가 중이었다는 것도 내가 눈치를 채지 못한 이유 중 하나겠지요. 하지만 난 사고를 막기 위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하고 마련할 수 있는 모든 시스템을 가동시키고 있었어요. 우린 매일 재고조사를 하면서 숫자가 비는지 여부를 확인했습니다. 판매를 하면 간이계약서를 만들고 제 3자가 전화를 통해 계약서의 인적사항과 연락처를 확인했지요. 가지고 나갈 수 있는 물건 숫자를 제한해서 그 이상으로 오더를 받는 경우 반드시 제 3자가 다음 날 배달하도록 했습니다. 각 팀은 다름 팀의 판매분에 대한 수금을 진행하면서 크로스체크가 되도록 했고 아침에 출발하기 전 그날 수금액을 예측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두 명의 여직원들이 당일 방문처 모두에 전화를 해서 수금가능여부를 먼저 확인하도록 했지요. 그리고 각 팀은 시간체크리스트를 가지고 나가 각 목적지의 도착시간과 출발시간을 기재하고 해당 목적지 직원이나 경리의 서명을 해당 부분에 받도록 했고 서명을 받는 게 여의치 않을 경우 해당 목적지의 영수증 양식이나 명함을 얻아 체크리스트에 첨부해 제출토록 했어요. 사고가 날 때마다 조사를 통해 파악된 빈틈을 그렇게 매워 넣었던 것이고 그런 식으로 내가 매일 받는 서면보고가 현장상황에 최대한 근접할 수 있는 담보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에도의 거래선들을 당일 일부만 확인해 본 것으로 내가 마련한 장치나 시스템은 그 어느 하나도 현장에서 제대로 가동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난 당연히 헤르니를 불렀습니다.

 

네가 매일 아침 다 연락해 봤을 거 아냐? 네가 맞다고 보고한 이 거래선들이 이제 와서 모두 그게 아니라는데 어떻게 된 거야?”

 

메이가 출산휴가를 가 있는 동안 거래선과 전화확인을 하고 그날 방문할 거래처 목록을 확정하는 게 헤르니가 하던 일이었습니다. 헤르니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인 채 똑 같은 대답만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그건 에도가…”

그것도…, 에도가….”

 

모든 걸 에도에게 미루고 덮어 씌우리란 걸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헤르니의 그런 대답을 들으며 거꾸로 에도가 정말 도주한 것이 맞다는 실감을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모든 장치들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던 사실은 영업팀 직원들 일부, 또는 전부가 입을 맞추고 한 패가 된 것이기 쉽다는 반증이기도 했습니다. 무하마드는 다른 직원들 뒤에서 마치 다른 일에 집중하는 척 하며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나보다도 메이가 용암을 분출하기 시작한 활화산처럼 더욱 열을 받고 있었습니다. 메이는 이번엔 우신을 불러 다시 찔레둑으로 향했습니다. 우신은 오래 전에 썼던 돈이 정말 문제편에 등장했던 메단 출신 맘 잡은 쁘레만으로 당시 아쩨(Aceh) 지역 석유 시추선에서의 3개월 계약이 끝나고 잠시 자카르타로 돌아와 있던 중이었어요. 메이의 입장에서도 다른 직원들 모두가 한 패가 되어 돈을 해먹고 있다는 뻔한 정황이 보이는데 그들 중 하나인 무하마드나 에코의 오토바이를 타고 에도의 사건을 조사한다는 게 말이 안되었던 거지요. 게다가 우신이라면 메이를 도와, 어쩌면 시어머니가 될 뻔 했던 분에게 도저히 할 수 없는 얘기를 대신 쉽게 꺼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늘 현실은 계획한 바를 어긋나 버립니다. 두 사람이 찔레둑 어머니 집에 도착했을 때 거기엔 동네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는 가운데 엠블런스가 들어오는 중이었고 집 안에서는 아마도 찔레둑 어머니의 목소리라고 생각되는 넋놓은 듯한 고함소리와 울음소리가 들려왔답니다. 잠시 후 혼절한 어머니가 엠블란스에 실리는 것을 멀리서 보며 우신은 거기 다가가려는 메이를 만류하고 돌아갈 것을 촉구했다고 합니다. 왕년의 쁘레만으로서 뭔가 냄새를 맡았던 거지요. 뭔가 중대한 불상사가 벌어져 찔레둑 어머니가 당뇨 발작을 일으킨 것인데 거기서 메이가 나타나 에도를 언급하면 복잡하게 엮여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 얘기를 보고받으며 나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찔레둑 어머니가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다가 오늘 발작을 일으켜 병원에 실려간 것은 분명 에도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집에 가져다 놓았다는 그 집문서를 에도가 나타나 결국 빼앗아 들고 달아난 것이든지, 아니면 에도 뒤를 따라붙던 해결사들이 들이닥쳐 에도를 내놓으라며 난장을 죽인 직후였던 거라고 말입니다. 그 진실은 다시 탐문해 보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것이지만 난 메이가 더 이상 찔레둑에 가서 에도의 뒤를 캐는 것이 오히려 에도 뒤에 따라붙던 꼬리를 우리 뒤에 붙이는 일이 되기 쉽다는 생각을 했으므로 강력히 중지시켰어요. 그 대신 아직 미진한 에도 거래선들에 대한 정밀조사를 가능한 빨리 진행할 것을 메이에게 지시했어요. 그건 시간이 무척 많이 드는 작업이 될 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에도와 한패가 되어 놀아난 것으로 보이는 다른 직원들에게 조사의 일부를 맡기는 것은 오히려 진실을 은폐하는 일이 되기 쉬웠으므로 이 사건의 조사는 오롯이 메이 혼자 진행해야 할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 조사를 통해 발견하게 될 사실들이 얼마나 메이의 증오를 불러 일으키고 그 보고를 받는 나에게 최악의 환멸을 가져오게 되리라는 것을 그땐 아직 몰랐습니다. 몰랐던 것은 그건 뿐이 아니었죠. 출산휴가를 조기에 마치고 돌아왔을 당시 이상하리만치 에도에게 쌀쌀맞게 굴던 메이에게 병원과 숙소에서 사실은 어떤 사건들이 벌어졌던 것인지, 또한 나중에 알게되는 수치이지만 수만불이 넘는 돈과 물건을 가로챈 사건 중심에 서 있던 에도가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떠나던 순간 역시 팔아먹었어야 마땅할 오토바이를 왜 회사에 반납했던 것인지 등도 그땐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어요.

 

에도에게 괘씸한 생각이 들지 않았다면 물론 그건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내가 그에게 한 일들을 굳이 은혜라고 표현하고 싶진 않지만 그가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 같은 상황이 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정말로 믿었던 사람에게 몇번씩이나 똑 같은 배신을 당했다는 사실에 분통이 터졌고 수많은 복수의 방법들을 생각해 보기도 했지요. 그게 다 부질없는 일인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에도가 그렇게 나로부터 도망간 것만이 아니라 그동안 그를 그토록이나 괴롭혔던 모든 문제들로부터도 완전히 도망칠 수 있었기를 진심으로 바랬습니다. 그가 도주하기 직전 내가 줬던 월급과 가불을 뺏기지 않고 잘 간직하고 있었다면 그 돈을 가지고 꾸빵(Kupang)이든 이리얀(Iryan)이든 어디 먼 곳으로 도망가 거시서 새로운 시작을 하는 발판이 될 수 있기를 바랬어요.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을 버린 메이에 대한 복수심에서 시작된 것이 분명하고 그래서 메이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던 회사마저 그의 복수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라 생각되지만 그는 메이의 무릎을 꿀리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몰로토프 칵테일이 되어 자신이 내뿜은 복수의 불길에 자신이 먼저 스스로 활활 타올라 버리는 형국이 되고 만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 후 오랫동안 에도의 근황을 들을 수 없었지만 자신이 에도에게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동안 에도에 협조함으로써 내 회사가 입게 된 피해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려 발버둥치던 거래선들로부터는 더욱 흉흉한 얘기들이 끝도 없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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