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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영업직원 활약사

영업직원 활약사 (12)

beautician 2013. 1. 25. 02:56

 

 

다음날 아침 출근했을 때 아침 일찍부터 메이가 사무실에 나와 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열을 내야 할 상황인데 오히려 메이가 눈초리에 잔뜩 독을 품고 있었어요. 아무리 상대가 메이라 하더라도 군기를 잡아야 할 날이 온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메이가 헤르니에게 돈을 빼돌려 자기한테 가져다 달라 했다는 전날 밤 보고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얘기였습니다. 그게 메이여서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상식적, 논리적으로 좀처럼 말이 안되었기 때문이었어요. 기본적으로 메이는 그 정도의 돈을 그렇게 나 몰래 빼돌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메이는 다른 직원들보다 보통 4-5, 많을 때엔 10배도 넘는 매출을 매월 올리고 있었고 올린 매출에 따라 계상되는 판매 커미션이 월급과는 별도로 매월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다른 직원들은 그렇게 쌓인 커미션이 얼마가 되었든 매월 신청해 홀라당 털어 먹고 있었지만 메이는 그것을 몇 개월씩 가져가지 않고 회사계정에 저축하듯 쌓아놓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게 아직 회사 지갑에 들어 있다고 해도 어차피 메이의 개인 돈을 맡아둔 셈이었으니 돈이 필요하면 내게 자기 돈을 얼마 달라고만 하면 될 일이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메이가 빼돌렸다는 돈은 메이의 판매 커미션 한달 치에도 미치지 않는 금액이었어요. 그런 돈을 마치 훔치듯 빼돌린다는 게 이치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헤르니가 거짓말을 한다고 보기도 어려웠습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내가 메이에게 한 마디 물어보기만 하면 알 수 있는 일이었거든요. 단번에 들통날 수 있는 거짓말을 그렇게 펑펑 울어가며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요. 게다가 헤르니는 그렇게 보고하며 펑펑 울고 있었는데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면 여자의 눈물이란 진실을 담보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곤 했습니다.

 

대개의 경우 이런 추론이 속시원한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는 것은 어딘가에 필수적인 정보가 한 두 개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필수정보 없이 결론을 도출하려면 논리적 비약이라는 모험을 해야 하는데 초월적 혜안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냉정한 이성으로 도출했다는 최선의 추론이 대개 삼류 소설 나부랭이가 되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지고 있는 데이터만을 가지고도 몇 가지 그럴듯한 스토리를 물론 생각해 낼 수 있었습니다. 그 중 가장 그럴 듯한 건 이런 거였어요.

 

당시 메이는 아기를 낳은 지 열흘도 채 되지 않은 상태였어요. 정상분만을 하지 못하고 제왕절개수술을 한 탓에 회사가 지불한 비용은 당초의 예산을 크게 넘어서 버렸죠. 저희 같은 영세기업에 있어 직원들의 의료비는 어떤 규정에 의거해 회사가 어느 정도 선까지 지원해 주는 식의 그런 것이 아닙니다. 특히 슬램 출신인 메이의 경우에겐 말이죠. 대개의 경우 도무지 경제적으로 감당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목숨을 거느냐 아니면 어떻게라도 돈을 마련해 그나마 살 수 있는 확률을 더 높이느냐 하는 것이 제왕절개수술을 앞둔 가난한 산모들이 해야 하는 선택인데 메이의 입장이란 사회적 약자의 대표격인 미혼모인데다가 부모 형제 그 누구도 메이를 도와줄 만한 경제적 상황에 있지 못했어요. 그러니 몇 년 전에도 메이가 수개월째 하혈을 하고 길바닥에서 몇 번씩 졸도해 쓰러지는데도 나와 릴리가 돈을 모아 끼스타 수술을 해주기 전까지는 아무도 메이의 의료문제를 해결해 줄 시도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배경을 이해한다면 메이의 제왕절개분만에 대한 회사의 입장이란 끝까지 책임지고 한 사람을 살려 내느냐, 아니면 아예 못본 척 생까느냐 양단간의 결단을 해야 하는 것이었고 난 전자를 택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메이는 이미 한달 반 이상 출산휴가를 사용하는 동안 거의 매출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거의라는 게 놀라운 일이죠. 휴가 중에 회사에 매출을 일으켜 주는 사람이 어디 있던가요? 그런데 메이는 그 와중에도 심심찮게 전화로 오더를 따서 회사에 던져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는 회사로부터 거의 전방위적인 지원을 받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회사에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하게 되어 버린 현재 상황을 많이 미안해 했을 것이고 그래서 급히 돈이 필요하게 되었을 때 이미 자신에게 큰 지출을 해버린 회사에게 그 타이밍에 자기가 맡긴 판매커미션 일부를 지출신청 하는 게 인간적으로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 일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만은 몰래 처리해 보려 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출산휴가는 유급휴가였으니 월급날 본봉은 나올 것이고 그때 커미션 지출도 함께 요구해서 차이가 나버린 수금부분을 매워 넣으면 되는 일이라 생각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그건 곤란한 일이었어요. 다른 직원들에게 매우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기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헤르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펑펑 울기 시작했고 에도를 비롯한 다른 직원들은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으므로 메이가 그런 지시를 한 것이 직원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인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사람이 참 간사하죠. 메이가 출산휴가 중에도 틈틈이 매출을 올려주는 걸 흐뭇하게 생각하면서 메이가 휴가중에 직원들에게 사규에 반하는 지시를 몰래 내렸다는 부분에서는 화가 치밀어 올랐어요.  그렇다고 막 출산한 메이에게 죽일 듯 따져 물을 수는 없는 일이었어요.

 

[반둥 거래선 수금 건인데…., 내가 누구를 짜르면 좋을까?]

 

고민 끝에 메이에게 보낸 SMS가 고작 이랬습니다. 보내면서도 내용이 좀 유치하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무슨 일이에요, 미스터르? 갑자기 누굴 자른다고요? 또 사고가 났나요?]

 

메이에게서 즉각 회신이 왔습니다. 거기서 상황을 미주알 고주알 늘어 놓는 게 좀 모양 빠진다고 생각했어요.

 

[헤르니한테 물어봐. 엔티한데 듣든지.]

 

메이가 짐짓 모르는 척 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기본적으로 나도 메이를 탓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고 네가 그렇게 시킨 게 맞잖아?’라고 되묻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걸 꼭 내가 말해줘야 알겠느냐고 소리치고 싶었던 것이죠. 당시 헤르니는 따로 꼬스를 얻어 나갔지만 엔티는 메이가 출산한 후에도 메이의 꼬스에서 함께 살고 있었으므로 그날 밤 사무실에서 벌어진 상황을 엔티로부터 더욱 소상히 들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상황을 알게 되었다면 사과를 해야 마땅할 메이가 아직 제왕절개수술자국에 밴디지도 풀지도 않은 상태에서 눈물 그렁그렁한 눈에 독기까지 품고 사무실에 나와 있었던 것입니다. 뭔가 섬뜩한 느낌.  그리고 그와 함께 이건 뭔가 분명 잘못되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디서 뭐가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었어요.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 알게 되는 일이지만 난 전날 밤 직원들이 원하는 그대로의 반응을 했던 것이고 그 판단, 그 반응으로 인해 나와 메이를 스스로 함정에 빠뜨리는 중이었어요.  누군가 치밀하게 계산을 했던 것인데 난 그 당시 우리 직원들이 그런 식의 계산을 할 수 있는 인간들이라고는 생각해 보지도 못했습니다.

 

미스터르가 원하는 게 이거죠?”

 

메이의 목소리조차 냉랭했습니다.

메이가 내 책상 위로 내미는 서류엔 사람 이름들과 숫자가 빽빽히 적혀 있었습니다. 그건 에도와 무하마드가 사고를 쳤을 때 받아냈던 경위서랑도 비슷하게 보였지만 좀 틀렸어요.

 

당장 생각나는 게 그것들뿐이에요. 일단은…, 나중에 더 생각나면 추가로 보완할게요.”

이게 뭔데?”

제가 놈복한 목록이에요.”

 

놈복. 어간은 tombok. 동사원형은 menombok. 그래서 구어체에서는 nombok(놈복)이라고 하는 이 말은 모자라는 부분을 더 추렴해서 채워 넣다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난 미간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어요. 그건 내가 이미 몇 차례에 걸쳐 엄하게 금했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오래 전, 띠따가 아직도 우리와 일하던 시절, 나에게 폭로하겠다며 메이를 협박하던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그때 이미 설명했던 일이지만 다시 요점만 정리하자면 메이는 이미 도주했거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수금이 장기적으로 지연되는 거래선들의 문제된 해당 결재금액들을 자신이 책임진다는 차원에서 자기 돈으로 몰래 채워 넣었던 것인데 다른 직원들은 그걸 보고 메이의 책임감이나 회사를 위한 희생정신을 배운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렇게 허위보고가 되었는데도 내가 그 진위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나중에 월급 받으면 채워 넣겠다는 생각으로 수금한 돈을 우선 빼돌려 쓰기 시작했던 것이고 그 빼돌린 금액이 점점 커져 월급이나 커미션으로 감당이 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자 온갖 가당치 않은 거짓말로 보고서를 수놓으며 내가 매일 밤 공들어 컴퓨터로 정리하는 업무상황을 현장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한갓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이완과 아흐맛이 횡령한 돈을 감당하지 못해 도주해 버렸고 당시 만삭이었던 띠따는 자신이 직접 가담하거나 묵인했던 모든 횡령사건들에 대해 극구 결백을 주장하며 이미 도주한 이완과 아흐맛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려 발버둥 쳤었죠.

 

그래서 그때, 그리고 그 이후 수 차례에 걸쳐 메이에게 경고하고 엄히 금지한 그 놈복을 메이는 그 해당 목록이 A4 용지 한 면에 꽉 찰 정도로 당시에도 여전히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건 내가 직원들의 보고서를 통해 파악하고 있는 현장상황이라는 것이 이미 오래 전부터 현실감 없이 펼쳐지고 있는 상상의 나래가 되어 있었다는 의미였지요.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이야??”

저도 최선을 다한 거라고요.”

이런 짓 하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언제 거래선 사고내면 네 돈으로 다 메꾸랬어?? 내가 양아치야? 직원들 삥 뜯게???”

 

난 언성을 높였어요.

 

그래요. 내가 잘못 했어요! 그러니 원하시는 데로 제가 그만 두면 되잖아요!!”

이 자식이! 그게 사과하는 태도야??”

 

내가 높인 목소리가 사무실을 쩡쩡 울리며 홀에서 내 방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직원들에게도 들렸을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메이와의 얘기는 간단히 끝날 것 같지 않았습니다. 내가 당장 메이를 해고해 버릴 게 아니라면 설명하고 설득하고 이해시켜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쉬운 일이었다면 그 동안 이미 몇 번씩이나 반복했던 이 세션을 또 다시 반복해야 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그 만큼 나와 메이는 생각하는 차원이 달랐던 것입니다. 그건 한국인과 인도네시아인의 사고방식 차이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메이는 자신이 놈복한 것이 회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일말의 영웅적, 희생적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어요. 나로서는 그런 메이의 심정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회사에 손해가 나더라도 있는 사실 그대로를 보고해서 그 문제들을 회사와 개인이 함께 해결해 나가야만 회사가 더욱 건강해질 수 있고 그렇게 축적된 자료를 바탕으로 같은 사고가 반복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란 강고한 주장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어찌된 일인지 메이에겐 전혀 이빨도 먹히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건 꼭 인도네시아와 한국 사이의 남중국해만큼이나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문화적 차이 때문만은 아닐지 모릅니다. 돌이켜 보면 나는 그러지 않았었나요? 서슬 시퍼렇던 5공 시절 87년 대선에서 김영삼씨를 찍겠다며 내 부대 직속상관들은 물론 사단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꼴통 중위 소대장이었던 시절도 있었고 치기 어린 정의감에 휘둘려 회사 돈을 횡령하는 공장장, 지사장과 정면충돌하면서 결국 막판엔 다니던 대기업에서 오히려 내가 쫓겨나듯 사표를 내고 옷을 벗었던 30대 초반도 있었지요. 어느 정도 비열하고 어느 정도 무책임해야 인생을 정말 편하게 살 수 있다는 절대 진리를 경멸해 마지 않던 젊은 시절의 날카로운 가치관은 종종 막무가내인 경우가 많지요. 그 날카로움을 무디게 할 수 있는 것은 자상한 설명도, 합리적인 추론도 아닙니다. 오직 시간만이 그걸 가능케 하는 것이죠. 시간이 좀 더 지나야만 같은 사안을 조금 다른 각도와 조금 다른 입장에서도 바라볼 수 있는 기술과 연륜을 비로소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잔뜩 긴장하고서도, 한편으로는 무슨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 마지 않는 것이 분명한 직원들을 모두 먼저 영업출발 시킨 후 난 다시 메이와 마주앉았습니다. 메이의 얼굴에선 눈꼬리를 끌어 올리던 독기도 이젠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출산한 지 열흘도 되지 않은 초췌한 산모가 거기 앉아 있었습니다.

 

. 그래, 이제 애들도 다 나갔고…, 제대로 다시 한번 얘기해 보자, 그러니까…”

 

나도 으르렁거리며 이제 정말 한 판 붙어 보려고 하는데 메이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 내립니다. 마음이 또 짠해 집니다.

 

근데…, 오늘 뭘 좀 먹긴 먹고 나온 거니?”

 

대답이 없는 모습이 아마도 밤새 뜬 눈으로 지새고 아침에 부리나케 회사로 나온 게 분명해 보였어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습니다.

 

한 시간쯤 후 우린 길 건너 다미식당에 앉아 있었습니다. 산모에겐 가딩 바타비아 (Gading Batavia)의 송가네 삼계탕이 더 나을 것 같았지만 언제 눈물을 펑펑 쏟거나 갑자기 언성을 높여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독립된 방들이 있는 다미식당에서 갈비탕을 사주기로 했던 것입니다. 피가 나고 고름이 솟는 상처엔 약국에서 파는 약이 잘 듣는 것처럼 상처 난 마음엔 따뜻하고 좋은 음식이 약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독살스런 표정을 하고 있었던 거야?”

 

전날 밤 내 문자메시지를 받고 영문을 모른 채 불안함에 발을 동동 구르던 메이에게 밤늦게 퇴근해 돌아온 엔티는 내가 메이를 해고해 버리겠다며 길길이 날뛰더라고 얘기해 주었다는 겁니다. 전날 밤 반둥에서 돌아온 헤르니의 보고를 받을 당시 내 반응이 직원들 눈에는 길길이 날뛰는 것으로 보였을까요? 내 입에서 나오지도 않은 메이를 해고하겠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수로 엔티 귀에는 들려왔던 것일까요?

 

아무래도 나한테 지출한 비용도 만만찮은데 너무 실망시켜 드린 거죠? 그래서 절 짜르시려고그래도 그렇게 직원들 다 보는 앞에서…”

으이구. 이 눔아…!”

 

테이블 건너편에서 커다란 갈비 한 조각을 포크로 찍어 들고서 또 다시 훌쩍거리려는 메이에게 제대로 꿀밤을 한 방 먹였어요.

 

그건 그렇고 어제 반둥에서 수금한 돈은 어떻게 된 거야?”

 

사실 이 모든 난리가 그걸 밝히자는 거였어요. 그런데 메이는 뜬금없이 자기가 놈복한 리스트를 들고 와서 아침부터 좌충우돌해 댄 것이죠.

 

저도 이젠 돈이 다 떨어졌거든요. 출산휴가 기간 동안 월급 주시는 건 고맙지만 그걸론 생활하기도 빠듯해서요.”

그래, 그건 이해해. 그래도 생활비가 모자라면 커미션에서 가져가든가 나한테 말이라도 한 마디 했어야지.”

생활비가 아니고 놈복할 돈이 더 없었다고요. 내가 헤르니한테 그 수금보고 빼라고 한 건 잘못했어요. 하지만 그건 블록엠 스퀘어 거래선 수금을 놈복할 돈으로 충당했던 거라구요. 블록엠 스퀘어에서 이번 달 수금하면 완납될 것을 한 달 더 연장요청 해왔는데 거절할 수 없었어요.”

 

잠시 계산이 복잡해졌습니다. 그러니까 헤르니가 전날 밤 보고 누락시키고 메이에게 갖다 주었다는 그 돈은 메이가 개인용도에 쓴 게 아니라 다른 거래선이 결재한 것으로 바꾸어 보고했다는 얘기입니다. 결국 실제로 수금한 반둥 거래선은 이번 달 수금을 못한 것으로 보고한 대신, 실제로는 수금하지 못한 블록엠 스퀘어 거래선은 수금한 것으로 보고했다는 얘기였지요. 그 블록엠 스퀘어 수금을 보고한 것은 에도였습니다. 그 대목에서 난 고개를 갸우뚱 할 수 밖에 없었어요. 헤르니는 그 돈을 반둥에서 돌아오면서 곧바로 메이에게 가져다 주었다고 했지요. 그런데 그 블록엠 스퀘어 수금보고를 한 에도는 헤르니보다 두 시간이 일찍 사무실에 돌아와 있었습니다. 헤르니가 메이에게 가져다 준 그 돈을 그날 밤 에도가 메이에게 가서 받아 와서 내게 입금시키는 것이 시간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시간적인 순서가 뒤집어져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난 그게 이 대목에서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놈의 놈복은 이제 좀 안할 수 없니? 그러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을 얘기했어?”

안 그러면 일이 정리가 안되잖아요? 끝나야 될 게 끝나지 않고 질질 늘어지고…”

이 눔아. 그건 정리되는 게 아냐. 오히려 정리가 안되는 거라구.”

 

얘기가 여기까지 오면 또 루프홀에 걸려 들어가는 거에요. 메이는 그게 왜 회사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지 아직까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앞으로도 한 5년쯤 더 시간이 흘러 직원들이 더 들어오고 메이가 관리자로서 자리매김하게 될 날이 온다면 그제서야 비로소 내가 당시 왜 그토록 현장업무를 사실대로 보고해야 한다고 악을 써댔는지 스스로 이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날 다미식당에서 메이와 오해를 풀고 여러가지 얘기를 나누면서 난 이게 어떻게 된 사건인지 대략의 그림을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직원들은 메이가 출산휴가에서 돌아오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메이를 회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횡령사건의 배후인 것처럼 몰아가며 그런 인상을 주려 어설픈 시도를 했던 것이죠. 그러다가 만의 하나 나와 메이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가고 만다면 메이의 성격상 사표를 던지고 아이들과 함께 자기 가족들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한동안 종적을 감춰 버릴 가능성도 사실 충분히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간 회사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횡령사건으로 인해 그런 행위에 대해 내가 얼마나 이를 갈고 있는지 직원들을 모두 잘 알고 있었고 특히 띠따가 퇴직하기 전 출산휴가를 간 상태에서 에도나 무하마드에게 나 몰래 이런 저런 지시를 하면서 자기 돈이라고 주장하는 돈을 수금해서 자기한테 가져다 달라고 했던 사건에 대해 내가 얼마나 매섭게 대응하며 띠따를 압박해 들어갔는지 역시 직접 목도한 바 있었지요. 그들은 그 똑 같은 프레임에 메이를 잡아 가두려 했고 그렇게만 된다면 그 다음은 내가 알아서 길길이 날뛰며 망나니처럼 단번에 메이의 목을 날려 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가지고 있던 메이에 대한 신뢰의 깊이를 너무 과소평가했어요.

 

내가 예언을 하나 하지.”

무슨….?”

너 출산휴가 마치고 돌아오면 눈썹을 휘날리며 도망가는 놈들 한 둘이 아닐거야.”

설마요…?”

그중에 가장 먼저 도망가는 놈이 널 제일 두려워하던 놈일 거고…, 바로 그 놈이, 그래서 네가 돌아오는 걸 가장 원치 않는 놈일 거야.”

 

이 예언이 기가 막히게 적중하리란 것을 그 당시엔 그렇게 얘기하면서도 스스로 확신하지는 않았어요. 단지 논리적으로 볼 때 메이가 돌아오지 못하도록 어설픈 시도를 할 정도라면 메이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간단히 발견할 어설픈 사고들을 영업현장에 많이도 쳐 놓은 상태임이 분명했고 이 사건에서 헤르니와 엔티 등 반둥 아가씨들이 보여준 행동은 자신들을 취직시켜 준 메이의 휴가 복귀를 이들도 원치 않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미 많은 조짐과 증거들이 이 두 명의 반둥 아가씨가 회사에서 벌어지는 금전사고에 직간접으로 밀접하게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강변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메이가 그때까지도 즐겨 놈복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긴 것이었고 따라서 차제에 빨리 바로잡아야만 했습니다. 그건 당시 미납 거래선들 매출 자료 전체의 4분의 1 정도를 수정하는 대공사였고 그 컴퓨터 작업을 내가 혼자 다 하고 해당 거래선에 사실확인을 받아오는 것은 일주일 가량 걸리는 일이었습니다. 그걸 빨리 바로 잡아야만 자료를 통해 파악되는 상황과 영업현장상황의 괴리가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었죠. 따라서 그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었지만 부작용도 뒤따랐습니다.

 

메이가 가진 매주 좋지 않은 습관 중 또 하나는 전혀 메모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어요. 그건 그만큼 그녀가 대단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컴퓨터처럼 필요한 순간 전체자료들을 필터링하고 소팅해서 원하는 자료를 단번에 산뜻하게 출력해 낼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까먹는 부분들이 있었지요. 메이가 제출한 놈복자료는 그녀가 얘기했던 대로 당장 기억나는 것들 뿐이었어요. 그래서 내가 대공사를 거쳐 수정된 수금자료를 출력해 영업팀들에게 수금지시를 내릴 때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짓는 직원들도 있었습니다. 에도나 무하마드, 또는 운전사 에코 등 오랫동안 메이의 거래선들을 함께 다녔던 직원들은 메이가 놈복했던 거래선들의 목록을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거래선들을 각각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들은 수정된 수금자료에도 메이가 놈복했던 몇몇 거래선들에 대한 수금지시가 누락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지요. 그것은 메이가 그때 기억하지 못해 내게 제출한 목록에 포함시키지 못했던 것이었어요. 기억나는 것만으로도 A4 한면을 빽빽히 기재할 정도였으니 기억나지 않는 것드 역시 적지 않았겠지요. 메이는 기억해 내지 못하고 그래서 난 당연히 알 도리도 없고 아루런 기록이나 단서조차 없는데 그걸 기억하는 에도나 무하마드로서는 로또를 맞은 셈이 되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 돈의 주인인 메이가 출산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려면 아직도 한달 반이나 남아 있었고요.

 

시간이 많이 지난 후 놈복했다가 까맣게 잊어버렸던 거래선들이 불현듯 기억나 부랴부랴 방문할 때마다 메이는 그 돈을 이미 에도나 무하마드가 그 사이 홀라당 수금해 가버렸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뿐이었습니다. 빠듯하게 살아가는 메이가 회사 일의 효율을 위해 대납했던 그 돈은 한푼 한푼이 더 없이 소중한 것이었을 텐데, 그래서 속상한 마음에 남몰래 눈물짓는 메이가 안쓰러웠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벌어졌던 일로 메이를 정말 아끼고 사랑하던 시내 카리나(Carina) 미용실이 나이 많은 미용사들이 메이의 월급 몇 배가 되는 큰 돈을 모아 출산선물로 주었던 일이 있었는데 우리 내부 사정을 전혀 알 길 없었던 그들이 하필이면 그 돈을 봉투에 넣어 전달해 달라며 맡겼던 사람이 무하마드였고 그 돈을 너무나 당연하게도 무하마드가 몰래 먹어치웠다는 것을 안 것은 메이가 출산휴가에서 돌아온 지 3개월도 넘은 후였습니다. 그때 무하마드는 이미 도망자가 되어 신분세탁을 해가며 버카시 어느 구석을 유령처럼 떠돌고 있을 때였죠.

 

그리고 또 하나, 매출자료를 바로 잡는데 정신이 팔려 간과해 버린 또 다른 부분도 있었습니다. 바로 그 시간적 순서가 뒤바뀌어 있던 부분 말입니다. 메이가 헤르니에게 반둥 수금액 일부를 다른 거래선에서 수금한 걸로 둔갑시키도록 지시한 것은 사실이지만 헤르니가 메이에게 그날 밤 돈을 가져다 주었다는 것이 새빨간 거짓말이었음은 조금만 추궁했어도 금방 알아낼 수 있는 것이었어요. 사실 헤르니는 그 돈을 사무실에 돌아와 에도에게 직접 전달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에도는 헤르니보다 두 시간 전에 사무실에 들어왔어도 그 돈을 받아 내게 입금할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 보고서를 마무리 지을 수 없었던 것이죠.

 

이 대목이 당시의 일들을 기억할 때 가장 아쉬운 장면입니다.

그날 다미식당에서 메이와 얘기할 때, 헤르니의 보고와는 달리 자신이 꼬스에서 헤르니에게 돈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살짝 확인하기만 했다면….하고 말이죠. 얘기가 놈복 문제로 흘러 버리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지만 그날 헤르니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내가 깊은 태클을 걸고 들어갔다면 그 후 아마도 많은 것이 변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후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들이 사실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말이죠.

 

그 돈을 메이가 아니라 사무실에서 에도가 받은 것이 맞다면 헤르니에게 왜 눈물까지 흘리며 그런 연기를 해서 메이를 모함하려 했던 것인지 따져 물었겠죠.  돈을 받은 에도에게도 왜 그때 침묵하고 있었는지 분명히 따졌을 것입니다. 그러면 엔티가 메이에게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왜 그토록 왜곡하고 과장해서 얘기했었는지, 무하마드는 그 사건에서 왜 혼자만 쏙 빠져 버렸던 것인지, 누가 그런 식으로 입을 맞추기로 했던 것인지, 이 모든 게 누구의 계산이었는지를 알 수 있었을 것이고, 바로 그날 이 녀석들의 계획을 완전히 와해시켜 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내가 너무 멍청했거나 우리 직원들이 억세게 운이 좋았던 것이죠.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최소한 몇몇 직원들에겐 말이죠. 특히 에도에게는 모르긴 몰라도 이때부터 본격적인 불운이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의 그는 이미 내가 처음 만났을 때의 에도가 아니었습니다. 메이와의 관계가 깨져버린 후 메이의 관심과 배려를 받지 못하는 에도는 이미 점점 천덕꾸러기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예전의 자신만만하고 유머러스하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늘 불안해 하고 전전긍긍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죠. 그런데 그날 반둥 사건 이후 에도는 낡은 봉제인형처럼 곳곳에서 실밥이 풀리며 해체되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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