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영업직원 활약사

영업직원 활약사 (11)

beautician 2013. 1. 2. 05:21

 

 

반둥에 수금 나갔던 직원들이 돌아온 것은 저녁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습니다.

 

7시가 좀 넘어 사무실에 돌아온 에도는 도대체 뭐가 그리 복잡한지 훨씬 늦게 돌아온 다른 영업팀들이 속속 보고서를 제출하고 퇴근한 후에도 두 시간이 넘도록 결산보고서를 마무리 짓지 못한 채 쩔쩔 매고 있었습니다.  또 뭔가 내가 모르는 사고를 친 게 틀림없어 보였지만 그게 뭔지는 아직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묻는다고 대답해 줄리 없는 일이었으므로 스스로 찾아 내야만 했는데 메이도 없는 상황에서 끝도 없이 되풀이되는 그런 게임에 난 이미 지칠 대로 지쳐가고 있었어요.

 

집에서 쓸 운전사로 뽑았던 에코(Eko)는 내 아이들이 모두 대학 진학하여 인도네시아를 떠난 후 집에서 할 일이 거의 없어져 버렸고 그래서 내 아내가 일주일에 한 두 번 외출할 일이 있을 때 차를 모는 것 외에는 대부분 회사 영업팀과 함께 오토바이를 몰고 나가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메이의 배가 불러오면서부터 더 이상 오토바이를 탈 수 없는 상황이 된 후 내 차 운전대를 내주고 메이가 타고 다닐 수 있도록 했는데 메이의 출산휴가가 시작된 후에도 다른 여직원을 반둥에 수금 보낼 때마다 에코가 차를 몰았지요.

 

당시 에코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메이 대신 반둥을 다녔던 여직원은 메이가 출산휴가 직전 반둥에서 데려왔던 두 사람 중 나이가 좀 많은 편이었던 헤르니(Herni)라는 친구였어요. 반둥에서 오래 살았다는 사실 뿐 아니라 미용실에서 스탭으로 일했던 경력도 있어 여러모로 우리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던 헤르니는. 그러나 채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대했던 수준을 많이 낮추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작은 사건이 하나 벌어졌어요.

 

파트너가 정해진 만큼 내가 물어봐야 할 일이 좀 있을 거야. 무하마드랑 한 시도 떨어지지 말고 같이 다니면서 일도 배우고 일주일에 한 두 번 정도 내가 그날 일과에 대해 물으면 대답해 줘.”

 

그게 헤르니에게 주었던 첫 지시였습니다. 이미 몇 번 사고를 치고 된통 걸려 애걸복걸 용서를 구한 후에도 뭔가 꾸미고 있다는 냄새를 솔솔 풍기던 무하마드는 아무래도 감시가 필요했어요.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헤르니가 영업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주거나 필드에서 자기 입사선배 격인 무하마드를 통제하는 것은 애당초 기대하지도 않았던 거였지만 최소한 무하마드가 뭔가 빼돌리기 불편한 상황을 만들고, 매일의 상황을 나나 메이에게 얘기해 무하마드가 허튼 짓을 하는 건 아닌지 미연에 감지하고 판단하고자 했던 것이 내 의도였어요. 헤르니와 엔티는 반둥에서 온 후 줄곧 메이의 꼬스에서 함께 지냈으므로 두 사람의 보고는 메이를 통해 매일 듣고 있었지만 입사 후 한달이 채 못어 헤르니는 아르타가딩몰 인근 개천가 앞에 작은 꼬스를 따로 구해 나갔으므로 이제 내가 직접 무하마드에 대한 보고를 챙겨야 하는 상황이 되었죠. 그러나 헤르니는 좀처럼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페이스북으로 만나 남자친구가 있데요. 고론탈로 지방의 공무원이라는데 자카르타에 올 때마다 만나는 모양이에요. 그 남자친구랑 좀 더 편하게 만나고 싶었던 모양이죠. 그러니 엔티도 놔두고 혼자 방을 얻어 나간 거고요.”

 

메이의 설명은 그랬습니다.

 

아직 첫 월급 받기도 전인데…, 그 남자친구가 방값 내준 모양이지?”

그렇겠죠. 꽤 높은 공무원이라는데 돈이 마를 리 없겠죠. 게다가 유부남이 젊은 여자 사귀는데 꼬스 정도야 당연히…”

 

헤르니의 신상에 대한 파악이 어느 정도 되던 시기이기도 했어요.

 

그때 입사원서엔 미혼이라고 썼지만 사실은 빨렘방(Palembang) 부모님 집에 애기를 맡겨 놨대요. 오래 살았던 반둥을 떠난 것도 이혼한 애기 아빠가 심심찮게 돈도 뜯으러 오고 몹시도 괴롭혔던 모양이죠.”

 

헤르니가 가능한한 빨리 퇴근해서 그 고론탈로 공무원이라는 남자를 만나거나 또는 그 남자와 자유롭게 전화통화라도 하고자 할지도 모른다는 상황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난 무하마드의 동향에 대해 얘기를 들을 필요가 있었어요. 그게 헤르니를 채용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매일 저녁 무하마드랑 같이 돌아와 같이 보고서를 쓰고 같이 내 방에 들어와 보고한 후 같이 나가는 헤르니에게 무하마드가 뭔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당사자 앞에서 대놓고 묻는 건 곤란한 일이었습니다.

 

[아직 멀리 가지 않았다면 돌아와서 나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나중에 여기서 돌아갈 때는 내가 꼬스까지 데려다 줄게.]

 

헤르니가 숙소를 옮긴 지 2주차에 접어 들던 어느 날 난 막 퇴근한 헤르니를 다시 사무실로 소환하기로 마음먹고 문자메세지를 넣었어요. 하지만 헤르니의 회신문자는 좀 야릇했습니다.

 

[미스터르, 무슨 일인가요? 숙소에 거의 도착했지만 미스터르가 절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돌아갈게요.]

 

이건 뭐지…?

미스터르가 원하신다면….이라고?

 

[그럼 내일 얘기하지. 오늘도 늦게까지 수고했으니 푹 쉬고 내일 봐.]

 

헤르니의 회신내용을 곱씹다가 한참 후에야 내가 별것도 아닌 문구에 괜히 과민반응하고 있다고 스스로 실소를 지으며 넣은 문자메세지에 또 회신이 날아왔습니다.

 

[회신 늦어 미안해요. 씻느라고 늦었어요. 아직 옷도 입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도 전화 주세요. 우리 얘기해요.]

 

연어초밥에 추가로 너무 많이 발라 넣은 고추냉이의 날카로운 매운 맛이 양미간을 관통해 전두엽을 찔러오는 것처럼 헤르니의 문자메시지의 야리꾸리한 뉘앙스가 내 감각을 후벼내듯 파고 들었습니다. 헤르니가 방금 샤워를 했는지, 지금 알몸인지 아닌지는 내 알 바 아니었지만 굳이 그런 상황을 넌지시 시사하는 헤르니의 회신은 마치 20대 초반의 연인들이 밤늦게 서로를 떠보기도 하고 살짝 유혹하기도 하면서 주고받는 달뜬 속삭임 같은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내게 밀땅을 걸어온 것인데 순간 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손발이 오그라들었어요.

 

얘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문자로 내 입장을 분명히 하려고 자판을 두들기다가 멈추고 내가 보냈던 문자메시지들을 다시 한번 들여다 보았습니다. 헤르니는 내가 보낸 문자, 아니면 오늘 사무실에서 내가 했던 말이나 지었던 표정 어딘가에서 내가 자기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내가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인지 몰라도 그간의 경험상 이건 큰 문제로 불거지기 쉬운 일이었어요.

 

이 에피소드의 전반부에 등장했던 띠따의 경우는 회사의 내부질서를 완전히 와해시키는 수준까지 갔었습니다. 영업팀의 막내인 띠따를 잘 이끌어 주도록 다른 직원들에게 당부하고 때로는 혼내야 마땅할 띠따의 실수도 초창기에 한 두 번 눈감아 주며 오히려 어깨를 토닥여 주었던 것이 전부였지만 띠따는 그걸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띠따는 자기가 사장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하고 그래서 그걸 무기로 입사 선배인 회사 동료들 위에 군림하려 들었던 것입니다. 대청소가 있는 날이면 띠따는 뒷짐을 지고서 다른 직원들에게 청소구역을 나누어 주며 관리자라도 된 듯 굴었고 아침 미팅이 끝나고 나면 마땅히 메이가 해야 할 세부업무분장과 관련 지시를 자기가 하려 들었던 것이죠. 그래서 실제로 내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던 메이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내 그런 행동, 한국적인 기업조직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그런 의도에 대해 다른 직원들조차 띠따와 똑같이 받아들였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막내가 밑도끝도 없이 휘두르는 전횡에도 앞에선 찍소리 못하고 뒤에서만 군시렁 거리며 띠따의 지시를 따랐던 것입니다. 심지어 메이조차도요.

 

헤르니는 그때 띠따가 가졌던 생각을 똑같이 하고 있었던 것 같고 헤르니의 반응과 그 문자메시지에서 난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었습니다. 헤르니가 이미 아이까지 있는 이혼녀이고, 숙소까지 따로 얻어준 고론탈로의 공무원과 열애 중이라는 사실은 별개의 문제인 듯 했습니다. 띠따의 경우에도 그녀가 나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회사 동료들에게 과시하던 그 순간에도 그녀의 약혼자 로만(Roman)이 그녀를 매일 출퇴근시켜 주고 있었고 심지어 우리 회사 회식 때마다 초청되기도 했었습니다. 언젠가 소개했던 코린도 건물에 입주하고 있던 시기의 비서 아구스티나 역시 애인과 열애중인 상황에도 매일 아침 팬티가 보일 듯 말듯한 초미니스커트를 입고 출근시간의 로비와 주차장 앞을 오가며 전화번호를 따려는 남자들을 전리품처럼 챙겼고 자신을 임신시켰던 남자가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서 그 낙태비용을 내주었던 나에게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초청장을 보내고 결혼식장 사람들 앞에서 내 팔을 끼고 함께 사진을 찍으며 자랑스러워 했었죠. 사장의 총애, 외국인과의 친분이라는 것은 헤르니나 띠따, 아구스티나의 레벨의 인도네시아 여인들에게는 많은 경우 과시하고픈 자부심이자 때로는 휘둘러 댈 날선 무기이기도 하다는 것이 내가 절절히 겪었던 경험이었어요. 그런 상황을 또다시 반복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메이, 내일 아침 일찍 나올 수 있지?”

 

난 이미 출산휴가에 들어선, 그러나 아직 출산 전이었던 메이를 소환했어요. 그리고 다음 날….

 

미스터르, 어젠 미안해요. 오늘은 미리 말씀해 주시면 자정이라도 미스터르를 위해서 꼭 시간을 내 드릴게요.”

 

내 방에 불러들인 헤르니는 미리 와서 앉아 있던 메이에게 들으라는 듯이 그렇게 얘기하며 간드러진 여우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발가락이 오그라들며 금방이라도 쥐가 내릴 듯한 느낌을 애써 참았어요. 메이 옆에 의자가 하나 더 있었지만 헤르니는 자기가 들어왔으니 당연히 메이가 내 방에서 나갈 것이라 생각했는지 마치 메이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듯 그 뒤에 서 있었습니다.

 

그 옆에 앉아. 메이, 넌 의자 좀 옆으로 밀어 주고.”

 

헤르니는 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어요.

 

그 문도 좀 닫아 줘.”

 

그럼에도 헤르니는 뭔가 기대하는 눈치였어요. 그 기대에 찬물을 끼얹어야 한다는 사실이 좀 미안하긴 했습니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얘기는 중요한 얘기니까 잘 들어야 돼. 메이, 너도 잘 들어.”

 

헤르니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납니다.

 

헤르니. 어젯밤 너 사무실로 돌아오라고 한 거, 그거 오해하면 안돼. 내가 너한테 반해서 제발 사무실 돌아와 다시 한번 얼굴 보여달라는 게 아니야. 잘 들어. 난 정말로 너한테 단 1%도 흑심을 품고 있지 않아. 그러니 혹시라도 내가 너한테 반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걸 절대 잘못된 생각이야. 난 너한테 반하지 않았어. 정말이야.”

 

헤르니의 얼굴이 새빨개집니다.

 

이런 일은 오해가 없어야 하니 그래서 메이를 여기 부른 거야. 내가 널 어제 밤 부른 건 무하마드에 대한 보고를 받으려는 거야. 무하마드 면전에서 보고받을 순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걔 간 다음에 널 다시 불러 들이려 했던 거라고. 난 네 개인적인 일에 관심도 없고 앞으로도 절대 관심을 갖지 않을 거야. , 여기, 메이, 네가 증인이 되어 줘! 헤르니 자존심도 있는데 이런 일로 남자 애들을 증인으로 세울 수 없으니 휴가중인 메이를 부득이 불러 낸 거야. 알겠지? 우리 서로 오해 없는 거야? 그러니 밤늦게 내가 널 다시 불러들이는 일이 없도록 하려면 미리미리 보고를 해.”

 

헤르니는 귓불까지 새빨갛게 달아 올랐어요.

그날 아침 헤르니는 허겁지겁 무하마드에 대한 보고를 했지만 충분히 이해가 갈 만한 극도의 부끄러움에 제정신이 아니었으므로 보고는 앞뒤가 전혀 맞지도 않았습니다. 헤르니가 내 방을 나간 후 소리가 새어나갈 새라 자기 입을 틀어 막고서 자지러지게 웃는 메이도 그다지 제정신 같지는 않았습니다.

 

, 이렇게 오해는 피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게 정말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명색은 내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이었지만 메이가 출산휴가로 자리를 비우는 사이 그 빈자리를 메워 주어야 할 헤르니에게 결과적으로 큰 망신을 준 셈이 된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도 이미 한달 반쯤 지났고 메이가 출산을 한 지 열흘쯤 지났던 시점이었죠.  반둥에서 돌아온 헤르니는 보고서를 정리하는데 또 적잖은 시간을 쓰고 있었고 에도는 자기 보고서도 아직 마무리 짓지 못한 상태에서 헤르니와 뭔가 심각한 얘기를 했어요. 그러다가 자정이 거의 다 되어서야 헤르니가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에도의 보고서는 아직인데 말이죠. 그런데 헤르니의 보고서에서 평소와 다른 점이 바로 눈에 띄었습니다.

 

수금액이 계획한 금액의 반 정도뿐인 거야?”

…..”

이 세 군데에서…? 수금할 돈이 제일 큰 거래처들이 결재하지 않았단 말이야?”

“…..”

아니, 그럼 나나 메이한테 연락을 했어야지? 반둥 거래선들은 늘 결재가 좋았어. 메이가 가면 90% 이상 수금해 왔다고. 그런데 50%가 뭐야? 메이한테 전화해 본 거야? 메이가 뭐래?”

그게…..”

 

헤르니는 등 뒤 홀에 있는 에도를 자꾸 돌아 보더니 체념한 듯한 표정이 되었습니다.

 

사실은요…”

“….?”

사실은 그 거래선들 전부 수금 되었어요. 그런데…”

그런데….?”

 

허위보고라는 얘기지요. 난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습니다.

 

메이가 쓸 데가 있다면서 자기한테 그 돈을 갖다 달라고 했어요. 미스터르한텐 비밀로 하라면서요. 그래서 아까 반둥에서 돌아오는 길에 메이 숙소에 들러서 돈을 주고 왔던 거에요!!”

 

그러더니 헤르니는 평펑 울기 시작했습니다. 난 하늘이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이 턱 막히고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런 순간 뇌졸중이나 심장마비가 온다 해도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그 와중에 퍼뜩 머리를 스쳤습니다. 내가 그토록 믿었던 메이가요?  메이가 직원들을 통해 돈을 빼돌렸다고요?

 

절대 그럴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자꾸 그럴 수 있는 방향으로 기울었고 헤르니의 눈물은 자신이 진실을 얘기한다고 강변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에도가 네 시간 째 보고서를 마무리 짓지 못하는 이유도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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