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영업직원 활약사

영업직원 활약사 (8)

beautician 2012. 8. 16. 03:29

여덟번째 라운드...

 

 

너 도대체 어쩌려고 그래…?”

미스터르, 이제 나 짜르실 거죠?”

 

메이는 한껏 매서운 표정을 지으려 하지만 금방이라도 넘쳐 흐를 듯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눈을 하고서는 여의치 않은 일입니다.

 

내가 널 왜 짤라? 바보 같은 소리 좀 하지 마.”

곧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될 텐데 그럼 월급 안주실 거 아니에요?”

일을 못하긴 왜 못해? 그리고 네가 정말 이 일로 당분간 회사 일을 못하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월급은 반드시 줄 거야. 규정이 그래.”

회사 일 못하게 되면 길가에서 바소(bakso)라도 팔면 돼요. 동정 받는 건 죽어도 싫다구요!”

 

결국 메이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펑펑 울기 시작합니다.

 

이 난리가 난 것은 메이의 건강상태가 악화되면서 몇 차례 병원을 옮겨가며 받았던 검진결과 때문이었습니다. 메이가 일하다가 혼절하는 일이 또 빈번히 벌어졌기 때문이었죠. 나와 일하기 시작하던 초창기에도 메이는 외근 중 심심찮게 졸도했고 심지어 밤늦게 퇴근하다가 사무실에서 내려가는 계단에서 혼절해 굴러 떨어지는 사태까지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그땐 끼스타(Kista)라고 인니인들이 부르는 자궁근종 때문이었고 우여곡절 끝에 나와 내 파트너 릴리가 반씩 비용을 대고 손가락 만한 크기의 근종을 절제해 내는 수술을 받게 했어요. 그때 회복된 후 몇 년 간 괜찮던 메이가 또 다시 혼절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한번은 폭우가 쏟아지던 찌부부르(Cibubur)에서 흠뻑 젖은 메이가 달리던 오토바이 뒷좌석에서 혼절해 도로로 떨어진 적도 있었습니다.

 

그때 오토바이를 몰고 메이와 함께 나갔던 사람은 앞서 에피소드에 등장했던 무하마드였어요. 그 친구의 전화보고를 받고 내가 급히 차를 몰아 나섰지만 폭우와 정체로 찌부부르까지 근 3시간 가까이 시간이 걸렸고 중간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메이가 오토바이 편으로 허겁지겁 곧장 귀가하면서 길이 엇갈렸었죠. 사족이지만 당시 무하마드는 혼절한 메이를 간호하기는커녕 메이가 지고 다니던 배낭식 가방을 뒤져 그 안에 있던 회사물건들을 빼돌렸고 그걸 까맣게 모르고 자기가 어디에선가 실수로 분실했다고 생각한 메이는 나 몰래 손해를 보전해 놓기 위해 오랫동안 절치부심 했었습니다. 그렇게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물건들을 무하마드에게서 구매한 한 거래선이 A/S를 요청해 오면서 정말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나중에서야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죠

 

메이는 혼절하는 것뿐 아니라 음식을 제대로 삼키지 못했고 간신히 마친 식사도 곧바로 토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습니다. 음식을 엄청나게 맵게 먹는 메이는 예전에도 위장병 때문에 심하게 시달린 적이 있었다는데 난 메이에게 이번에야말로 지난 번 자궁근종 이상의 뭔가 중대한 건강상 적신호가 켜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메이는 아파서는 안되는 직원이었습니다. 비록 소규모이긴 하지만 당시 나름대로 오토바이 군단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영업팀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도 여전히 우리 소매부문 매출의 대부분을 메이 혼자서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힘입어 수많은 사건사고에도 불구하고 사업이 힘차게 돌아갔던 것은 물론 호주와 싱가폴에서 대학을 다니던 우리 아이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댈 수 있었던 것이지요. 당시 나와 내 가족들이 누리던 것들의 반쯤을 메이가 해주고 있던 셈이었으므로 메이가 아웃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메이가 아프다면 수술을 하고 입원을 시켜서라도 반드시 고쳐 놓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빨라디안 아파트(Apartemen Paladian) 옆의 미트라 끌루아르가 병원 (RS Mitra Keluarga)에 데려갔던 것입니다. 자카르타 시내에 같은 이름의 체인식 병원을 여럿 거느린 이 병원은 현대식 설비와 더불어 고가의 병원비로 유명했고 그래서 내가 아파도 웬만하면 이 병원은 피해 가딩 니아스(Gading Nias) 쪽의 위윅(Wiwik) 아줌마가 하는 클리닉에 가는 게 보통이었어요. 하지만 메이의 상황은 당시 매우 위중해 보였으므로 돈을 아낄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했지요.

 

이것만으론 검사가 충분하지 않을지도 모르니 위내시경을 받는 게 좋겠어요.모래 새벽으로 시간 잡을 테니 내일 저녁부터는 금식 하시고….”

 

그러나 TV의 의료 드라마에서 막 튀어 나온 것 같은 전문가적 풍모의 나이 지긋한 의사 선생님이 지극히 고상하고 유려한 말투로 내시경 얘기를 꺼내자 솔직히 인간적으로 비용 문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진행한 수많은 검사비만 해도 웬만한 현지병원의 종합건강검진 비용 이상이 들었는데 이 의사선생이 얘기하는 수면위내시경 검사는 지금까지의 비용을 모두 합친 것의 두 배가 넘는 비용이었거든요. 돈문제가 걸리니 사람이 좀 간사해집니다. 그걸 확 질러야 남자답고 사장다운 건데 그렇게 비싸기 때문에 아내가 아파도 해주지 못했던 내시경 검진을 메이에게 해준다는 것이 양심에 심하게 걸렸거든요.

 

그렇게 비용얘기를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하고 있던 차에 메이가 먼저 내시경 검사는 절대 못하겠다며 핏대를 세웁니다. 병원 안내데스크에서 내시경 검사비용을 물었던 것이죠. 내시경 검사까지 받으면 미트라 끌루아르가 병원에서의 검사비만 지난 번 순터르(Sunter)의 사티아 느가라 병원(RS Satya Negara)에서 받았던 끼스타 수술비용에 육박한다는 사실을 메이 스스로도 알게 되었고 이 모든 비용을 자기가 나중에라도 꼭 갚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는 그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메이의 입장이 강경하니 나도 어정쩡하게 되어 버렸던 것인데 그렇게 이를 악물고 버티던 메이가 불과 사흘도 되지 않아 출근길에 쓰러져 버렸어요. 길바닥에 혼절한 메이의 지갑은 털렸지만 개중에 착한 사람들도 있어 메이를 병원까지 옮겨준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어요. 그 병원은 악명 높은 스넨(Senen) 사거리에서 마트라만(Matraman)거리 방향으로 가는 길 우측에 있는 끄라맛 128 (RS Kramat 128) 병원이었고 메이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라고 선언하는 그 병원 의사에게서 황당한 얘기를 듣습니다.

 



축하합니다.”

 

잠깐!

이 대목에서 왜 축하합니다가 튀어 나오는 걸까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 의사 제 정신이야? 아니, 너야말로 제 정신이야???”

 

메이는 임신 4개월이라는 거였어요.심각한 위장장애라고 보였던 것은 입덧이었고요. 그 몸으로 하루 종일 오토바이 뒤에 매달려 비를 맞으며 달렸으니 인도네시아 빈곤층 젊은 여자들의 평균적 건강상태를 감안하면 기절하기를 밥 먹듯 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지요. 난 어이가 없었어요. 그러나 누구보다도 메이가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메이는 그때까지도 매달 멘스를 하고 있었다는데 그게 아마도 다른 종류의 출혈이었던 모양이지만 어쨌든 그래서 임신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고 나로서도 메이가 지난 끼스타 수술을 전후해서 결혼직전까지 갔던 에도와 파토가 난 후 다른 남자와 사귄다는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므로 그녀의 임신 소식은 실로 뜬금없는 것이었습니다. 매일 밤늦게 귀가하는 메이가 남자를 만난다는 건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해 보였으니까요. 그러나 어쨌든 메이는 가임연령의 젊은 여자였고 그 상황의 배경을 따져 묻는 것은 분명 내 권한 밖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메이 못지 않게 나도 고민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지요.

 

당시 네 살 된 딸을 둔 미혼모로서 메이가 아이를 또 낳는다는 것은 메이 개인으로서도 이제 좀처럼 헤어나오기 어려운 구렁텅이로 더욱 깊이 빠져드는 불행일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미혼모나 결손가정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와 지원이 있는 서구의 나라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차별과 냉대의 세계에 메이는 이미 던져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이제 아이를 하나 더 갖게 된다는 것은 이슬람 사회에서 견디기 힘든 고통과 손가락질을 감수해야 하는 일임에 분명했습니다. 보통 이런 상황이 되면 책임을 져야 할 남자가 결혼해 주겠다고 나서거나 아니면 반대로 눈썹을 휘날리며 도주해야 하는데 메이에게선 그런 분위기를 전혀 눈치챌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이 모든 멍에를 혼자 지고 가려는 것 같았습니다.

 

낙태는 생각할 수도 없어요. 얠 나을 거라구요.”

 

넌 미친 게 분명해….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난 그때 그런 생각을 했구요.

 

실낱 같은 모든 빈틈을 파고 들며 회사 돈과 물건을 빼돌리려 하는 영업팀들 중 유일하게 철저히 믿고 신용할 수 있는 메이가 임신과 출산으로 현장업무에 충실치 못하거나 급기야 출산휴가로 현업을 한동안 떠나 있어야 할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나로서는 심각한 위기상황으로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메이의 인생에 닥쳐온 위기를 내 회사의 위기로 치환해 받아들이는 내가 너무 속물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직원이 임신했다고 해고해 내보내는 회사는 없어. 그런 걱정은 하지도 마.”

 

너만 마음을 정하면 돼.

이런 얘기가 뒤따라 튀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았습니다. 

 

오래 전에도 이런 비슷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아구스티나(Agustina)라는 여직원이 불의의 임신과 남자친구의 도주로 실의에 빠져 있던 것을 내 파트너 릴리가 구원해 주면서 내가 그 비용을 내 주었던 것이 벌써 십수년 전의 일입니다. 남자는 가정을 꾸리는 것도 낙태비용도 감당할 수 없어 잠적해 버렸던 것이고 애인과 연락할 방법이 없어진 아구스티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인생의 갈피를 잡지 못한 상태에서 릴리가 내민 도움의 손길을 덮썩 잡았던 것입니다. 릴리는 아구스티나에게 다시는 그런 못돼 먹은 남자들을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수술을 받게 해 주었지만 회복하고 돌아온 아구스티나의 어깨를 다정히 감싸 안고 나타나 나와 릴리에게 자기 애인을 보살펴 줘 고맙다고 말하는 그 남자친구의 뻔뻔스러운 면상을 한 대 갈겨주고 싶었지요. 돈 문제가 해결되고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이 사라지니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자는 자기뿐이었다고, 그간 잠적했던 것은 생각을 정리하고 모든 걸 책임지려고 결심하는 데에 조금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고 감언이설을 지껄이며 쪼르륵 애인 품으로 돌아왔던 것이죠. 이 나람 남자들이 그렇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평생, 아니면 최소한 한동안 크게 고마워 해야 할 만한 배려와 선처를 받은 직원들은 이제 더 나올 게 없다는 판단을 하고 회사를 그만 두는 경우가 태반인데 아구스티나 역시 그 후 채 두 달도 되지 않아 사직서를 냈어요. 물론 나나 릴리로서는 그 남자친구가 회사에 찾아온 후 아구스티나의 천진난만한 척 하는 얼굴을 사무실에서 매일 보는 것이 적지 않은 고역이었으므로 인내심의 한계가 온 릴리가 아구스티나의 얼굴에 돌려차기를 날리는 날이 오기 전 아구스티나가 먼저 회사를 떠나 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릴리에게 듣게 된 얘기이지만 라와망운(rawamangun) 인근 쁘라무까(Jl. Pramuka) 거리에는 의사의 처방전 없이도 온갖 위험한 약들을 판매하는 의약품 도소매상들이 산재해 있고 찌끼니(Cikini) 거리 인근 라덴 살레(Jl. Raden Saleh) 거리에는 겉으로 보기엔 일반 클리닉의 탈을 뒤집어쓴 낙태중개상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겁니다. 심지어 젊은 여성들이 라덴 살레 거리를 걸으면 오토바이 택시 오젝기사들이나 바자이 기사들까지 슬며시 접근해수술 받게 해 줘요?’ 라며 낙태를 주선해 온답니다. 예전엔 공항 화물청사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이민국이나 법원 근처처럼 어디에서 가서 무엇을 어떻게 요청하고 처리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현지인들이 흔히 짤로(Calo)라고 부르는 무면허 브로커들이 득실거리는데 낙태산업 역시 그런 짤로들의 역동적인 활동무대인 것이죠.

 

오래 전 현지 일간지 꼼파스(Kompas)에서 인도네시아 낙태실태에 대한 르포기사를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낙태는 인도네시아에서도 명백한 불법행위이고, 그래서 라덴 살레의 클리닉이나 거리의 짤로들에게 은밀히 소개를 받은 임산부들은 복잡한 루트를 통해 여러 명의 손을 거쳐 수술대에 오르게 되고 그러기 위해 때로는 목숨을 걸기도 하는데 동행한 보호자들을 중간에 떨궈뜨리고 핸드폰이며 신분증 등 자신의 신원을 밝힐 수 있는 모든 단서와 모든 통신수단을 압수당한 후 한적한 주택가의 아무도 알 수도 없는 급조된 수술실에서 눕게 되는 어린 임산부들 중에는 수술 중 예기치 않은 출혈로 목숨을 잃고 아무렇게나 버려지는 경우도 없지 않다고 합니다. 허가취소나 구속 등 단속과 처벌이 강화되면서 정규 병원들이나 의사들이 거의 낙태에 관여하지 않게 되자 조산원 직원, 산파 정도로 번역될 만한 비단(bidan)이라는 직업의 사람들이 소개해 준 브로커들과 중간 운반책 등과 나름대로 거액의 대금을 적당히 나누어 먹으며 별다른 의료장비도 갖추지 않은 일반 주택에서 수술을 집도하는데 정규 의사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의학지식 때문에 낙태수술 중 출혈 등 예상치 않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적절한 조치를 때맞춰 취하지 못하는 것이 낙태사고의 가장 큰 이유라고 당시 기자는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덴 살레 거리는 오늘도 짤로들로 붐비고 그 와중에도 뻔질나게 클리닉을 드나드는 경찰차들은 누굴 연행해 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낙태하려 왔을 리는 만무하니 영업 하도록 놔두는 대가로 뭔가 매번 받아가야 할 봉투들이 그렇게 많은 모양인 거죠.

 

메이에게 낙태를 제의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메이가 원한다면 무리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방법을 알아볼 생각은 있었어요. 하지만 이미 임신 4개월이라는 사실은 불법이고 말고의 문제를 넘어 생명이 죽고 사는 문제라는 의미였어요. 게다가 애기를 낳겠다는 메이의 의지도 확고했고요.

 

애기 아빠는…?”

 

난 얘기를 꺼내다가 입을 닫고 말았어요. 그런 메이의 의지를 애기 아빠가 알고 있는지 여부는 이제 와서 아무런 소용도 없는 질문이었으니까요. 메이의 임신과 출산의 문제는 전적으로 메이 자신의 문제였고 아울러 이제 내 회사의 문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그렇다면 미트라 끌루아르가 병원에서는 온갖 고가의 검사를 하고서도 메이의 임신사실을 몰랐던 것인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끄라맛 128 병원에서 청진기를 한 번 대 보고 초음파 검사로 단번에 확인했다는 메이의 임신을 미트라 끌루아르가 병원에서는 1 2일 동안 피검사, 소변검사, 대변검사 등 온갖 검사를 한 것 만으로도 메이의 증상에 대한 충분한 진단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막판엔 수면내시경 검사까지 제의하면서 빨아먹기 쉬운 고객을 만나 단번에 매상만 올려 보려 했던 것뿐이었을까요?

 

알고 보니 임신이네요. , 검사비가 댁의 일년치 연봉 이상 들었지만 어차피 종합검진 한번 제대로 받았다고 생각하시면 다 좋은 일 아니겠어요?”

 

그 의사는 메이에게 이렇게 얘기하려 했던 것일까요?

최고급 설비를 자랑하는 자카르타의 최상류층 병원에서조차 어이없는 오진을 남발하여 담보했던 환자들의 생명을 더욱 위험에 처하게 하는 사건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것은 어차피 실력 부족이니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이 경우엔 양심마저 부족해 보입니다.

 

 

 

얘들 눈빛 빛나는 거 보이지? 너 빠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야.”

 

메이는 소문 내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아무도 모르게 지나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메이의 배는 속절없이 불러 왔고 모든 직원들은 메이의 출산휴가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게 분명했습니다. 폭풍 전야와 같은 분위기였어요.



왕년의 멤버들 - 왼쪽부터 뚜따, 안디(릴리의 오피스보이. 릴리의 가방을 몰래 뒤지다 걸려서 해고당함), 에도, 그리고 맨 오른쪽은 띠따의 남친 로만.

 

메이는 필드캡틴으로서 영업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통제하고 조정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고를 사전에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다른 직원들이 메이의 눈에 띄지 않게 사고를 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메이의 배가 불러 오면서 이런 저런 일로 결근하거나 조퇴하는 경우가 잦아지자 직원들의 보고서에서는 점점 이상한 부분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고 특히 무하마드와 에도의 행동에도 이상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매일 밤 직원들이 쓰는 보고서는 보통 10-20분이면 끝나는 것인데 에도는 한시간 때로는 두시간이 지나도 보고서를 마무리 짓지 못했고 에도보다 입사가 3년이나 뒤인 무하마드는 내가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마치 자기가 에도의 상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에도에게 함부로 대했는데 에도는 맞받아치지도 않고 순순히 무하마드의 말을 따르는 인상이었어요. 대단히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무하마드의 이력서 사진

 

물론 에도는 오래 전부터 좀 이상했습니다.

에도를 내가 처음 만나게 된 과정은 오래 전 다른 글 (http://blog.daum.net/dons_indonesia/90)에서 쓴 적이 있는데 그때 메이와 곧 결혼하게 될 약혼자로서 소개를 받았던 에도는 나중에 메이와 깨진 후 회사 업무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메이와 서먹서먹해졌었죠. 당시 메이가 에도를 적대감으로 대한 것도 아니고 투명인간 취급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런 어정쩡한 시기를 지나면서 둘의 관계는 좀 사무적인 것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그 후 좀 괜찮아진 듯 하던 에도는 메이의 임신에 좀 충격을 먹은 듯 했습니다. 이미 애인관계가 청산된 상태였지만 어쩌면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메이가 덜컥 임신한 것에 배신감 같은 것을 느꼈던 것인지도 모르죠. 그러면서 어떤 모종의 이유로 에도는 무하마드와 급속도로 가까워 졌는데 회사의 서열상 분명 상관이어야 할 에도 앞에서 무하마드가 오히려 상관처럼 굴고 있었습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게 내 눈엔 보이는데 메이에겐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고, 예민한 메이가 그런 걸 볼 수 없을 리 없었으므로 에도와 무하마드가 메이 앞에서만큼은 절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무척 노력한다고 밖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분명 뭔가 있는데….”

 

심증은 가지만 확신이 서지 않는 상황이 계속 되면서 메이 없이도 안전을 담보하며 갈 수 있는 가능한 모든 방법들을 생각해 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모두 여의치 않았어요.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는 직원들을 모두 내보내자니 이미 벌려 놓은 일들이 나 혼자 감당할 수 없는 규모였고 그렇다고 메이의 출산휴가 기간에 임신하지도 않은 다른 직원들까지 덩달아 휴가를 주고 회사가 잠시 휴업할 수도 없는 일이었어요. 회사가 휴업을 하면 직원들은 회사의 통제를 받지 않고 더욱 자유롭게 거래선들을 드나들며 사고를 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면서 난 한편으로는 아직 좀 시간이 남긴 했지만 메이가 병원이나 조산소에서 출산을 한 후 갓난 아기를 포함해 아이 둘을 데리고 비위생적이기 이를 데 없는 자취집 꼬스(Kost)로 돌아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손바닥만한 집에 시장바닥 마른 생선들처럼 이미 7명이나 포개어져 살고 있는 부모의 집으로 돌아가 더욱 뒤엉켜 살게 될 것을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난 메이가 회사에 필요했는데 메이는 무사히 출산을 마치더라도 그런 상황에서 다시 출근하게 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워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메이에게 아이들과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따로 얻어 주는 것이 가장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거기엔 무하마드와 에도를 함께 데리고 들어가야 했으므로 메이의 집이라기 보다는 우리 회사의 직원 기숙사 같은 성격이 되어야 했습니다. 마침 에도는 당시 데폭(Depok)에 살았는데 워낙 출퇴근 시간이 많이 걸려 메이와 헤어진 후에도 그녀의 자취방 문간에서 자고 가는 일이 심심찮게 많았던 것을 알고 있었고 무하마드는 버카시(Bekasi)의 자티 브닝(Jati Bening) 지역에서 출근했는데 그의 결혼식을 반대했던 부모가 살 방을 내주는 조건으로 얼토당토 하지 않은 임대료를 뜯어내고 있다는 거였어요. 거기서 서로 이해가 맞았습니다.

 

내가 숙소를 해결해 준다면 그들은 모두 급여에서 상당부분이 소요되는 자취방, 또는 주택임대료 지출이 아예 없어지는 것이니 경제적으로 분명한 도움이 될 터였고 기숙사는 회사 가까운 곳에 얻을 것이므로 데폭과 버카시에서 출근하는 에도와 무하마드는 교통비 역시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게 되는 것이었지요. 회사의 입장에서도 메이가 출산휴가를 내더라도 기숙사에서 출근 전, 퇴근 후의 에도와 무하마드를 어느 정도 통제하고 감독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고 무엇보다도 메이가 다시 출근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 전업주부인 무하마드의 아내가 기숙사 집을 지키며 메이의 아이들을 함께 봐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뭔가 너무 무리해서 짜 맞춘 느낌. 그래서 매우 정교하게 돌아가야 할 톱니바퀴가 어느 한군데만 어긋나도 전체 구도가 무너져 내리고야 말 것 같은 그런 우려가 처음부터 있었지만 그 외에는 메이도 살리고 회사의 소매부문도 살릴 또 다른 방법을 더 이상 생각해 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하르 바루 (Johar Baru) 지역에 방 셋이 달린 비교적 큰 집을 계약했지요. 메이의 집이 있는 센티옹(Sentiong)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고 그래서 기숙사에 일손이 부족하면 메이의 어머니나 여동생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을 터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메이의 출산예정일은 속절없이 임박해 왔고 내가 아무리 발버둥 치며 이런 저런 안전장치들을 준비하면서 메이가 출산휴가로 회사를 떠나 있을 시간을 대비한다 해도 무하마드를 비롯한 다른 직원들은 온갖 창의적인 방법으로 빈틈을 파고들어 자기들 주머니부터 챙기려 들 것이 뻔한 상황이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내게 적잖은 신임을 받으면서도 실제로는 거의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에도가 한심스럽다 못해 야속하기까지 했고 그렇게 뻔히 알면서도 눈뜨고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닥쳐 온다는 것이 지극히 개탄스러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준비했던 계획은 처음부터 어긋납니다.

조하르 바루 집에 계약금을 치르고 직원들을 입주시키던 날 무하마드는 당초 얘기 되었던 것과 달리 가족들을 버카시에 놔두고 혼자 입주했습니다. 난 그의 아내가 기숙사에서 일정한 역할을 해주기 기대했었는데 말이죠.

 

저희 아버님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제 아내가 시중을 들어야 할 상황이라서요…”

 

건강이 좋지 않다는 아버지는 턱없는 임대료를 뜯어낸다는 바로 그 사람 얘기입니다. 그런 식으로 뭐라 비난할 여지를 원천적으로 막아 버리는 표면적 이유를 댔지만 결과적으로 무하마드는 자기가 꼴리는 데로 버카시든 조하르 바루든 편한 곳으로 퇴근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한 셈이었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최악의 경우 무하마드가 아내에게는 기숙사에서 잔다고 하고 기숙사에는 버카시로 간다고 하면서 중간에 다른 곳으로 새어 버릴, 즉 그의 소재를 더욱 모호하게 하는 빌미가 될 판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자기 방을 무슨 무당집 신당처럼 차려 놓기 시작했고 급기야 손가락만한 크기에서 성인 팔 정도 크기까지 다양한 크기의 끄리스 칼들을 진열해 놓습니다. 끄리스(Kris)는 칼날이 꾸불꾸불한 단검인데 한번 찌르는 것만으로 내장에 더 많은 상처를 내서 치명상을 유도한다는 병기학적 특성보다는 주술적 의미를 더 많이 담고 있기 쉽습니다. 그것들은 흑마술에 심취해 있던 무하마드가 모종의 이유로 사서 모은 것들이었는데 분명 적잖은 주술적 프리미엄을 얹어 샀을 그 물건들을 무슨 돈으로 샀을 지 나는 그 돈의 출처를 궁금해 했고 메이는 아이들과 함께 살아야 할 집에서 분명 귀신을 불러들이는 서툰 흑마술을 벌이려는 무하마드의 의도와 그 소장품들에 질색을 했습니다. 흑마술을 믿지는 않지만 귀신을 부리는 일은 분명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이고 그 대가란 대개는 사람의 목숨, 특히 자녀들의 목숨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지요. 자기 아들을 포함한 가족들을 데려오지 않은 무하마드가 기숙사에서 흑마술을 시전한다면 그 살이 메이의 아이들에게 튈 것이라는 생각이 메이가 질겁을 하는 이유였습니다.

 

무하마드 얘도 미친 게 분명했고 이런 짓을 할 때 짤랐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벌려 놓은 사업들이 내 발목을 잡고 있었으므로 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상황에 끌려 들어가고 있었어요. 그러면서도 어쨌든 기숙사를 만든 일이 비록 초창기의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일정 부분 소기의 성과를 얻게 될 것을 기대했고 메이가 더 이상 기동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이번엔 아무쪼록 에도가 좀 더 분발하여 어느 정도 회사의 구심점이 되어 줄 것을 기대했었지요.

 

그러나 그건 완전한 판단착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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