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동티모르

우린 그동안 얼마나 발전했을까?

beautician 2019. 4. 27. 10:00


1999년, 그러니까 내가 인도네시아 오고 나서 5년 차 되던 해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20년 전이죠.

이 오래된 글을 읽어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는데 또 한편으로는 깜짝 놀랄 정도로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도 있습니다.

우린 그 동안 얼마나 변했고 얼마나 발전했을까요?

또는 얼마나 퇴행했을까요?








 

1999년 말 인도네시아 교민사회의 최대 이슈는 동티모르에 대한 한국 상록수부대의 파견이었습니다.

당시 분위기는마치 전쟁을 앞둔 것처럼 암울하면서도 팽팽한 긴장이 감돌고 있었어요. 이제 동티모르는 "티모르 레스테" 라는 명칭의 국가로 독립하여 올림픽에도 미니팀을 출전시킨 바 있지만 당시에는 정치와 경제적 이권의 광기가 지배하는 혼란의 땅이었고 바로 직전인 일년전 자카르타를 공포로 몰고 갔던 5월 폭동의 후유증이 아직 현저히 남아 있던 시절, 교민들은 상록수 부대의 파병을 자랑스러워 하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씨의 명에 따라 며칠 날밤을 까며 자료를 수집하고 직접 취재를 뛰어 다니면서 썼던 글을 1999년 10월 딴지일보 24호에 실은 적이 있습니다. 딴지 데스크에서는 '르뽀'라는 거창한 제목을 붙여 주었지만 동티모르 르뽀가 아닌 자카르타 르뽀 였지요.

 

다시 읽어 보니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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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뽀우리는 동티모르로 간다.

 

누사 떵가라(Nusa Tenggara) 군도 우측 끝에 자리잡은 작은 섬그것도 동쪽 일부 뿐인 동티모르인도네시아의 평균적인 인구증가율을 기준한다면 이미 백만은 넘었어야 마땅할 인구가 아직 60만을 겨우 웃돌고, 75년 이후 최소 20만명의 생명이 인도네시아 군부의 탄압과 학살로 스러져 갔다는 것이 정설로 알려진 그곳에이제 우리는 존엄해야 할 인권수호를 위해 총칼을 들고 첫발을 내 딛는다.

  

이 한국군 활동이 인도네시아의 3만 한국교민들의 생존권을 심각하게 위협할 것인가아니면 정부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잘못된 정보로 인한 교민들의 오해'에서 빚어진 한낱 기우에 불과한 것인가한국기업들이나 교민들에게 있어 그 불안과 공포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파병결정에 대한 현지교민 반응

9 21일 아침인도네시아의 한국교민들 중에는 정부의 파병강행결정이 알려지자 머리끝까지 화를 내며 한국정부의 강퍅함에 독설을 뿜는 사람들이 있었다재 인도네시아 한인회와 수많은 한국인협의회 공동명의의 동티모르 파병반대결의서가 발표된 지 하루만의 일이다현지에서 왕성하게 사업을 벌이고 있는 코린도그룹(Korindo Group)의 사옥도 한국인 관리자들의 한탄으로 가득찬 것은 물론이다.

 

승은호 회장의 코린도그룹은 인도네시아에서도 대기업으로 꼽히는 원목업계의 주역으로훨씬 앞서 진출한 '깔리만탄(Kalimantan)의 왕최계월회장이 창업한 코데코그룹을 그 명성이나 규모 면에서 추월한지 이미 오래인 명실공히 인도네시아의 대표적인 한국기업이다그 모체인 동화기업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으리라 생각된다

 

한국에는 '보루네오'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진 인도네시아 군도 최대의 섬인 깔리만탄에 원목사업의 근거지를 둔 코린도그룹은 파푸아뉴기니의 서부를 점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이리얀자야(Irian Jaya)에도 진출하여 현재는 원목사업뿐 아니라 제지합판제화내해운송 분야에 폭넓은 사업을 벌리며 깔리만탄의 울창한 원시림 사이로 난 대부분의 도로들을 닦았고 벌채한 원목을 대체할 광활한 산림조성단지를 이룩하고 있다

 

산림과 하안에 분포한 이들 공장주변에는 없던 마을이 생겨날 정도로 대단위의 현지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기업이다따라서 인도네시아인들과 현지관리들을 수없이 접촉하고 협조를 구해야 할 이들로서는 한국정부의 동티모르 파병결정이 치명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다.

 

현지기업들과 다각적인 사업을 모색하고 또한 진행중인 여러 한국종합상사들에게도 동티모르 파병문제는 역시 뜨거운 감자다. 97년의 경제위기 발발과 98 5월의 자카르타 폭동 이후 침체의 늪에 빠진 인도네시아에서의 사업이 조금씩 회복기미를 보이는 시점이기에 파병에 따른 후유증에 대한 우려가 눈덩이처럼 더욱 더 불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안과 우려의 시각은 지난 9 20일 인도네시아 교민대표들에 의해 발표된 동티모르 파병 반대결의문 곳곳에서 발견된다이 결의문의 내용에 따르면 교민대표들은 한국군 파병이 필연적으로 한국교민들을 타겟으로 하는 테러와 폭동을 유발시키고 한국기업들은 반한 감정에 기반을 둔 노사분규와 불매운동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언뜻 보기에 피해망상에 가까운 단정을 내리고 있다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우호관계를 우려하는 부분에서마저, <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바 동티모르에서 독립지지자들을 향한 무차별무자비한 살인과 방화약탈을 자행하는 자들을 가리켜 우리 전투부대과의 교전으로 피를 흘리게 될 현지 민병대는 인도네시아인들에게는 외세와 맞서 싸우는 애국 청년들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라고 강변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자칫 실소까지 터뜨리게 한다

 

공포는 그렇게  시각을 왜곡하고 때로는 사람들을 비겁하게, 지극히 자기보호본능에만 충실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공포의 실체

그렇다면 그런 공포는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만일 98 5월의 자카르타 폭동이 없었다면 현지교민들은 정부의 동티모르 파병의 후유증을 이토록 우려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따라서 당시의 상황과 그 후 경과를 간과한다면 교민들의 공포의 배경을 이루는 정서를 이해하기 어렵다.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현지 한국인들이 바라보는 인도네시아인들에 대한 일반적인 감정은 '이등국민', '자존심만 센 거짓말장이', '이슬람의 허울만 덮어 쓴 게으름뱅이들같은 것이었다

대부분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체구에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씩 웃기를 좋아하여 좋게 봐서는 순박하고 나쁘게 봐서는 쌈박질하면 맨날 질것 같이 나약한그리고 한국사람 특유의 고성으로 윽박지르기 시작하면 찍 소리도 못하고 찌그러지기 일쑤인 아주 녹녹하고 만만한 사람들... 그래서인지 그간에도 한국교민에게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이 끊이지 않았지만 인도네시아인들에게 한바탕 위협을 받은 후에도 조금 한숨을 돌릴 만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그들에 대한 경멸적인 시각은 즉시 되돌아 오곤 했다.

 

가까운 예로 전직장의 공장장은 자가용에 흠집을 냈다는 이유로 인도네시아인 운전사에게 욕설을 퍼부우며 일방적으로 해고했지만 앙심을 품은 그 운전사가 밤마다 칼을 품고 집 주위를 한달 쯤 배회하며 위협을 가하자 결국 끝까지 주지 않으려던 소정의 퇴직금을 내주고서야 합의에 이른다

 

그 후 귀국하기 전까지 6년여간 새로 구한 운전사를 이용했지만 불평 한마디 없이 나름대로 성의를 다하는 그에 대해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면 항상 '쥐새끼 같은 놈'이라고 부르는 것을 공장장은 잊지 않았다.

 

  5월 폭동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것이 98 5월의 자카르타 폭동이다

 

트리삭티(Tri Sakti) 대학에서의 벌어진 반정부시위의 과잉진압으로 수명의 대학생들이 목숨을 잃은 후 더욱 격화된 시위는 도시 빈민들이 약탈과 방화의 형태로 가세하면서 수십년간 철권통치를 해 온 수하르토 정권을 몰락시켰을 뿐 아니라 자카르타에 며칠간 아비규환의 지옥도를 그려냈다

 

공식적으로도 1,2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고 꼬타(Kota), 그로골(Grogol), 하르모니(Harmoni), 망가두아(Mangga Dua), 글로독(Glodok) 등 도심의 주요 화교상업지역은 붉은 화염과 피어 오르는 검은 연기에 휩싸여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재산과 기회들이 불길 속에 사그러들었다

한때 자카르타 중국인들 사이에 강간방지용 정조대가 선풍적인 유행을 타게 된 것도 이 시기에 벌어진 수많은 집단 강간사건들 때문이었고 96년 하반기까지만 해도 달러 당 2,200-2,300루피아 정도이던 환율이 달러당 18,000 루피아 이상으로 폭락하던 것도 이 당시의 일이다

 

 당시 취재 카메라들 앞에서 'V'자를 그리며 중국인 상점들로부터 컴퓨터며 집기들을 들고 유유히 사라지던 그 수많은 약탈자들 가운데 누구 하나 그 후 체포되어 응분의 대가를 치렀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그리고 그 날 이후 자카르타는 더 이상 우리가 잘 알던 도시가 아니었고 정겹기만 하던 인도네시아인들의 미소에도 소름끼치는 전율을 느껴야 했다.

도심은 이제 거의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복구되어 있다하지만 조금만 더 도시외곽으로 나가면 아직도 당시 폭동의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자카르타 공항으로 알려져 있는 수카르노하타(Soekarno-Hatta) 국제공항 인근의 땅그랑(Tangerang), 다안 모곳(Daan Mogot), 까뿍(Kapuk) 지역에는 당시 돌팔매질로 유리창에 수없이 구멍이 뚫리고 급기야 방화로 전소된 수많은 건물들이 유령처럼 서 있는 것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대부분 화교였던 입주자들이 아무도 되돌아 오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자카르타 북동부 짜꿍(Cakung) 지역의 유일한 부촌인 따만 모데른(Taman Modern) 주택단지도 폭동 당시 심각한 위협을 당했다주택단지 초입의 도로에 몰려 든 수천명의 인근 빈민들은 밤이 어두워지자 트럭을 타고 주택지에 진입하여 입구 가까이 대형주택 몇 곳을 약탈했고 초입의 사하밧(Sahabat) 백화점을 위시하여 경비원들이 모두 달아난 경비소 앞까지 이르는 약 200미터 구간의 모든 상점들을 불태우기에 이른다

 

다행히 바람방향이 중간에 바뀌어 불길은 더 이상 주택단지까지 번져 오지는 않았지만 당시 주민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최소한의 재산을 지키겠다는 필사적인 몸부림으로 주택단지 중앙공터에 승용차들을 주차시키고 자신들은 뒤쪽 수영장으로 대피해 불길을 피해 보려 했다

 

이미 1년 반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사하밧 백화점은 그날 불길에 그을린 모습 그대로 음산하게 서 있고 불탄 상점들은 일부 복구한 곳도 있지만 아직 대부분이 당시 화재로 내려앉은 지붕들을 앙상하게 드러내놓고 있다다른 지역의 주택단지들이 그러하듯 그 동안 따만 모데른도 겹겹의 담장과 철문바리케이드들이 들어서 이제는 마치 요새와 같은 모습을 띄고 있다.

 

당시 교민들의 피해는 사실 잘 알려져 있지 않다

 

98 10 3일 주 인도네시아 한국 대사관의 홍정표 대사는 현지 영자신문인 자카르타 포스트(Jakarta Post)와의 한국특집 인터뷰에서 한국기업들의 현지투자법인이 380여개라고 공식 발표한 바 있다.(섬유/의류업체 약 120개사신발 약 48개사완구 30개사,- 삼성현대대우 등 그룹계열사 51개사기타 기계전자금속화학업체 등

 

연락사무소들까지 통틀어 말하자면 공식적으로는 500-600 군데가 되겠지만 현지 자카르타의 한국교민 2만명을 포괄하기에는 턱도 없는 숫자다이중 대충 절반은 가족없이 본인만 달랑 나와 있는 공장의 생산기술자장기출장자 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기업이 최소한 2,000개는 되어야 마땅하다.

 

때로는 대사관 발표보다는 더 신빙성있는 현지 교민정보지 자카르타 벼룩시장을 보면 이런 의문이 조금은 해소된다합작법인은 차치하고라도 외국인 투자업종은 아니지만 인도네시아인 이름을 빌어 세워진 한국업체들이 부지기수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여행사와 슈퍼마켓학원컴퓨터상점환전소도박장사우나건강원가구점자동자 정비소에 이르기까지호화 식당과 가라오케만 자카르타에 백 군데에 가까운 것은 물론자카르타에는 한국인 가라오케 조합까지 있다

 

공단지역의 업체들은 거의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폭동이 극심했던 지역의 한국인 상점들은 화교상점들과 마찬가지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필라(Fila) 자카르타 사무실에 근무하는 김부장(가라오케 암호명 니콜라스)은 폭동이 최고조에 달했던 98 5 14일 출장을 마치고 자카르타에 돌아왔다출국자들과 무작정 대기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던 공항에서 바쁜 일정의 출장에서 돌아온 그로서는 당시 사태의 심각성을 잘 알 수 없었다

 

당시 미국일본 등 선진국 대사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교민안전대책으로 교민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던 한국대사관에서는 신규입국자들에게 거의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고 그전에도 늘 격렬한 데모와 사건사고들이 줄을 잇던 자카르타 상황에 너무 익숙해 있었을 니콜라스 역시 '지난 번보다 조금 더 심한 데모정도로 치부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니콜라스는 대기하던 승용차를 타고 유유히 공항을 빠져나갔다차가 집에서 공항까지 왔으니 아무려면 다시 집까지 못가겠느냐고 느긋하게 생각하면서도심고속도로를 타고 가면서 도로 좌우에서 맹렬하게 솟아오르는 불기둥과 검은 연기들을 보면서 약간씩 머리에 쥐가 나기 시작했겠지만 설마 고속도로야 안전하지 않겠냐며 스스로 위안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짜왕(Cawang) 인터체인지를 지난 후부터 고속도로상에서 폭도들과 마주치면서부터는 아마 피가 마르는 심정이 되었을 것이다전후 좌우의 도로에서 차량들이 뒤집어져 불타고 폭도들은 차창을 각목이며 쇠파이프로 내려치면서 니콜라스와 운전사를 끌어내리려 했다

 

가지고 있던 돈을 빼앗긴 것은 물론니콜라스는 머리며 어깨는 날아드는 몽둥이에 금방 피투성이가 되었다나중에 옷과 살의 찢긴 상태로 미루어 쇠갈퀴같은 것까지 동원된 것 같다고 한다모든 것을 빼았기고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고서 엉망진창이 된 차로 다시 고속도로를 타고 집까지 가는 동안 니콜라스는 몇 번 씩 다시 폭도들과 마주쳤지만 피로 물든 얼굴이며 옷가지가 마치 놀이동산의 자유이용권 역할이라도 한 듯 매번 조금씩 덜 얻어맞으며 자동차의 네 바퀴만은 멀쩡한 상태로 무사히(?) 귀가할 수 있었다

 

그로서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경험이 되었다그런 비슷한 일들이 당시 다른 한국인들에게도 벌어졌고 빤쪼란(Pancoran) 톨게이트에서는 폭도들에게 몰매를 맞는 서양남자가 목격되었다고도 한다당시 어떤 사람들은 소액권을 몇 다발씩 준비해 폭도들이 점거한 고속도로를 지나칠 때마다 돈다발들을 허공에 흩뿌리며 폭도들이 돈을 줍는데 분주한 틈을 타 질주하여 빠져나갔다고 전한다.

 

 5월 폭동 그 후

폭동이 잠잠해진 후 자카르타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평온을 되찾았지만 이 사건은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들뿐 아니라 현지 인도네시아인들에게도 짙은 공포의 그림자를 드리웠다순박하고 녹녹해 보이는 그들이 보이는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결코 만만치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그래서 언제 어떻게 폭도로 돌변할지 모르는 불안정성을 지닌그리하여 결국 그런 야만적 잠재성의 인간들과 공장에서거리에서주택지에서 하루하루를 함께 지내야 한다는 서스펜스 사이코 드릴러 급의 공포.

 

일상생활은 폭동 전과 다를 바가 없어 한국인 식당과 가라오케는 다시 손님들로 넘쳐 나고 경찰들 주머니는 갈취한 돈으로 두둑해지기 시작하고 각종 사회비리들이 원위치를 찾아 돌아왔지만 지방으로부터 흉흉한 소문들이 돌기 시작하고 각종 범죄의 당사자들또는 범인으로 오인된 사람들이 군중들 손에 처단되는 정글로(Jungle Law)가 거리를 지배했다

 

땅그랑에서는 오토바이를 훔치던 두 명의 용의자가 성난 주민들에게 사냥당해 경찰이 나타나기도 전에 무참히 맞아 죽고 한국인들이 자주 다니던 마하캄(Mahakam)의 한 환전소에는 M16으로 무장한 강도가 들어 경비원이 사살되기도 하고 정체불명의 닌자들이 횡횡하던 수라바야(Surabaya) 인근지역에서는 수개월간 회교지도자들과 흑마술사로 추정되는 주민들이 200명 이상 살해되면서 차량에 끄리스(Keris = 인도네시아 전통 단검)을 지니고 있던 여행자들이 닌자로 몰려 자경단 청년들에게 피살되기도 했다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그 누구 한 명 사건과 관련하여 체포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이때의 분위기는 지난 99 1 31일자 자카르타 포스트지의 1면 톱기사에 '공포의 도시자카르타'라는 제하의 기사에서도 읽을 수 있다다음은 그 일부를 번역해 본 것이다.

 


 

자카르타(JP) ; (전략늘 택시를 사용하는 사람으로서 최근 자주 보도되는 택시운전사가 낀 택시강도 사건들이 하리(Hari Indrawan)를 두렵게 한다강도 당하고 때로는 심한 상처를 입은 채로 동떨어진 도로에 버려지는 승객들특히 여자와 외국인 승객들에 대한 보도를 접할 때면 소름이 끼칠 뿐이다

얼마 전만 해도 택시는 공공버스에서 소매치기들의 손쉬운 범행대상이 되길 원치않는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던 가장 빠른 공공 교통수단 중 하나였다자구수단이 절실함을 깨달은 그는 범죄자들의 이목을 끌지 않고자 이제 모든 값나가는 물건들을 집에 놓아두고 다니는 식의 예방책을 사용하고 있다그는 또한 다른 많은 자카르타 시민들과 같이 신변보호기구의 구입도 신중하게 고려하고 있다

하리는 불과 몇 개월 사이에 그전의 살기 좋던 안전한 장소에서 이제는 마치 전쟁터처럼 변해버린 수도 자카르타의 급증하는 범죄를 우려하는 많은 시민들 중 한 사람이다거리의 난동이나 도심고속도로에서의 강도사건약탈방화폭탄협박 등은 이제 매일의 단골 뉴스거리가 되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많은 자카르타 시민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도시 곳곳의 화교소유 상점들을 약탈하고 불태웠던 지난 5월 집단폭동의 후유증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3일간에 걸쳐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이 피비린내 나는 소요사건은 보안군이 지켜보는 앞에서 벌어졌지만 군인들은 약탈자들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바 있다

 

보다 심각한 사실은 보도된 바와 같이 수십명의 화교계 인도네시아 여인들이 당시 집단 윤간당하거나 성폭력에 희생되었다는 점이다그 후 보다 많은 폭력사건들이 자카르타에서 터져 나왔고 마치 그전에는 친절과 친근함으로 묘사되던 자카르타 시민들이 이제 폭력에 맛을 들여 아주 사소한 문제조차도 폭력에서 그 해결책을 찾는듯한 상황이 되었다

지난 11, 13명의 사람들이 스망기 인터체인지에서 일어난 학생시위대와 보안군의 충돌사건에서 목숨을 잃었다그리고 그 다음날비록 지난 5월에 비해서는 훨씬 작은 규모였지만 폭동이 도시 곳곳의 상업지구에서 발생했다


같은 달암본출신 기독교인들이 회교사원을 불태웠다는 소문이 또 다른 유혈폭동을 촉발시켰고 회교도들이 문제의 거리들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14명이 다시 목숨을 잃었다이 사건의 피해자 대부분은 말루꾸 주의 원주민인 암본인들이었고 이러한 인명피해 외에도 중부 및 서부자카르타에 소재한22개의 교회와 많은 상점들이 전소되거나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산발적인 폭동과 약탈로 인해 많은 국가들이 자국민들의 불필요한 인도네시아 여행을 자제하라는 지침을 발표하기에 이르고 대사관들은 여기 주재하는 자국민들에게 현지상황의 진전상황을 알려주기에 분주했다미 국무성은 불요불급한 자국민의 자카르타 방문을 연기하도록 경고하였고 일본은 아직까지도 인도네시아에 대해 2급 여행금지경고를 유지하고 있다
.

어떤 사람들은 집봐주는 사람 없이 외출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어떤 이들은 여러 종류의 자구장비로 무장하기도 했다자구장비들은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강력한 손바닥 크기의 최루가스 분무기자상방지용 조끼작은 소화기만한 최루가스 분사기 등을 비롯해 보다 위험한 무기까지를 망라한다. 5월 강간사건은 정조대(현지에서는 강간방지 코르셋으로 알려짐시장을 창조하기까지 했다이러한 모든 기구들은 입과 입을 통해 판매되기도 하고 현지 신문에 정식광고 되기도 했다자구 장비의 가격은 5만루피아 (68백원)에서 3천만 루피아(4백만원짜리 라이센스를 득한 권총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이다


범죄증가에 대한 우려가 증폭되고 있는 가운데 경찰치안국은 연말 보고서에서 자카르타 경찰국의 보고를 인용하여 자카르타에서의 범죄건수가 1997 19,832건에서 1998 18,674건으로 오히려 감소했다고 발표했다그러나 경찰은한편올해 절도강력강도난동과 같은 범죄가 증가할 것으로 점치고 있다이러한 범죄들은 그 전에도 횡횡하였지만 범죄자들이 보다 흉포하고 대담해지면서 이제 범죄의 양상이 자못 바뀌었다...(후략)

 


 

이상은 이미 8개월이나 지난 기사이지만 이것은 여전히 현재 자카르타의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인도네시아의 한국교민들이 한국정부의 동티모르 전투병력 파병에 대해 우려하는 것은 이러한 5월 폭동 당시의 상황들이 이번에는 한국교민들을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발생할 지도 모른다는 점그리고 당시 보안군이나 경찰들이 화교들을 외면한 것과 같이 한국교민들의 피해를 외면할지도 모른다는 점그리고 이번 파병과 그 후유증으로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충분한 명분을 주어 그 후 발생할 모든 일들에 대해 인도네시아인들은 추호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형태의 보상도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현지 정서

한국 전투병력의 동티모르 파병이 사실 어느 방향으로 불똥을 튀길지어쩌면 아무런 후유증도 일으키지 않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9 21일자 국내 주요일간신문의 인터뷰에서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관 자우하리 나타아트마자 대사가 밝힌 바 '한국군 파병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요청한 것이고 한국군과 인도네시아군과의 충돌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이유로 한국교민에게 피해가 없을 것이라고 강변하는 것은 설득력이 너무도 빈약하다.

 

  첫째로 현재 하비비 대통령이 이끄는 인도네시아 정부나 현 집권여당인 골카르(Golkar)에 대한 인도네시아 일반 국민들의 지지는 미미하기 이를 데 없어 하비비 정부가 파병요청했다는 사실이 교민들에게는 전혀 방패막이 역할을 해주기 못할 것이고 더욱이 교민들이 우려하는 대상은 인니 정부가 아닌 일반 국민들이며

    둘째로 교민들의 우려는 한국군 vs 인도네시아군과의 충돌보다는 한국군 vs 친인도네시아 민병대와의 충돌이기 때문이다유엔 평화유지군의 동티모르 파병결정이 나온 후 자카르타의 대학생들과 시민 일각에서는 상대가 유엔군이라도 일전을 불사해야한다는 강경한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더욱이 75년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합병할 당시 제재는 커녕 오히려 동티모르의 공산화를 우려하여 환영일색이던 미국오스트레일리아가 이번에는 동티모르의 독립을 쌍수를 들고 지지하며 다국적군 파병을 주도하는 모습에 대해 인도네시아인들의 역겨움은 극에 달해 있다고 할 수 있다대사관들이 몰려 있는 꾸닝안(Kuningan) 지역에서 대대적인 데모가 줄을 잇고 오스트레일리아 대사관 앞에서 국기를 불사르는 시위가 연일 계속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오스트레일리아군은 유엔 평화유지군이라고 생각할 수 없어요보세요평화유지군의 상징인 파란색 철모도 쓰지 않았고 중무장한 채 주위를 살피는 모습이 살벌할 뿐이잖아요."

 

오스트레일리아군 선발대가 동티모르에 첫발을 딛던 날부터 사무실 여직원을 포함한 많은 인도네시아인들이 하는 이야기다.

 

하비비 대통령의 동티모르 독립시사발언 때부터 우리 영토를 왜 포기하느냐며 불만이 많던 대부분 인도네시아인들은 이제 하비비 대통령의 평화유지군에 오스트레일리아군은 제외시켜 달라던 요청성명을 정면으로 맞받아치며 오스트레일리아군 중심의 다국적군을 파병하기 시작한 유엔의 처사를 못마땅해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를 명백한 적국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많은 동티모르인들이 죽어간 것은 사실이지만 인도네시아도 그동안 동티모르를 많이 개발하고 투자도 해서 제반 생활여건을 많이 향상시킨 것도 사실이에요그런데 이제 와서 동티모르가 독립을 원하니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모두 나가라고 하는 건 분명히 불공평한 일이에요오스트레일리아 입장에서는 태평양으로 나가는 길목에 꽉 버티고 있는 인도네시아가 눈에 가시같은 존재인지도 모르죠그러니 이번 기회에 유엔을 내세워서 동티모르에 교두보를 만들겠다는 생각인지도 모르고… 하지만 인도네시아는 이라크와는 달라요최악의 경우에 경제봉쇄조치를 당하더라도 사막만 있는 이라크와는 달리 우린 자원이 풍부한 나라니까 얼마든지 버틸 수 있지요."

 

일화의 인삼드링크 진생업을 인도네시아에 대대적으로 홍보유통하고 있는 반유아르타(PT. Banyuarta Distrindo)의 여사장 시스카(Ms. Frieda Siska)는 이렇게 말한다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으로 태어나 화교라는 인종적으로 제한에 한때는 좌절하기도 했다가 이제 훌륭한 상인으로 성공하겠다며 사업에 박차를 가하는 이 여사장의 말은 누군가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일본 고위관리나 정치가들이 이따금 내뱉는 망언과 많이 닮아 있지만 어쨌든 동티모르 독립에 대한 넘쳐 흐르는 반대의사를 충분히 읽을 수 있다

 

교민들의 파병반대 결의문에서처럼 동티모르의 친인도네시아 민병대들을 애국자로 생각하며 그들의 만행에 갈채까지 보내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물며 화교들까지도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동티모르에 대한 일반적인 정서의 대강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현지의 화교들은 60년대에 일어난 수카르노대통령 시절의 PKI(인도네시아 공산당구테타가 수하르토 장군에 의해 진압된 후 사회가 혼란할 때마다 정부와 일반 국민들에게 동네북처럼 얻어맞고 따돌림당하는 계층이 되어 왔다.

 

중국어를 탄압하여 차이나타운의 상점들도 중국어 간판을 쓰지 못하고 화교학교들은 차례로 문을 닫아 다른 동남아국가의 화교들과는 달리 중국어를 제대로 쓰거나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이들은 여차하면 외국으로 달아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부유한 비겁자들돈만 아는 중국인이라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그리 부유하지도 않고 오히려 인도네시아인으로서의 자긍심과 애국심을 지닌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따라서 동티모르에 대한 한국군 파병과 이에 따른 민병대와의 충돌은 이들과 한국교민들 사이에 깊은 골을 만들지도 모른다.

 

98년 폭동이후 사회가 혼란해 질 때마다 주요 주택단지에서는 자경단이 조직되어 주민들이 죽창일본도못박은 야구방망이 등을 들고 단지 내를 돌며 불침번을 서고 경비를 서기도 했고 그때마다 나 역시 그 일부가 되어 대부분 화교나 부유한 인도네시아인들인 그들과 함께 밤을 지새곤 했다

 

매번 폭동의 주 타겟이 되어 막대한 희생을 치루어야 했던 그들 화교즉 중국계 인도네시아인들이제 한국교민들이 테러의 타겟으로 지목되는 순간 그들 역시 우리의 적이 되어 어쩌면 지난 자카르타 폭동 때의 그 가공할 파괴력으로 밀려들 폭도들 앞에서 우리에게 등을 돌릴지도 모른다.

 

  교민들은 정말 안전한가?

한편앞서 언급한 인도네시아의 흉흉한 사회분위기는 언제나 즉각적으로 폭동의 불씨를 튀길 가능성을 안고 있다과거 일종의 사회적 지위와 특권을 누렸던 외국인들도 이제는 상대적으로 높은 지불능력과 부로 인해 강도와 납치 등 범죄의 주 대상이 되고 있고 일전에 단속과정에서 경찰과 일대 총격전까지 벌인 한 납치단은 당시 한 독일인을 납치해 둔 상태였고 한국인 한명을 납치 살해했다는 자백도 했다

 

밤늦게 만취한 상태에서 가라오케를 나오다가 훔친 택시에 의해 납치된 그 한국인은 그 후 자카르타 외곽의 어느 강가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바 있다굳이 파병때문이 아니라도 한국교민들은 이미 그렇게 현지 범죄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동티모르에 대한 한국 전투병력의 파병은 한국정부나 일반 한국인으로서는 국력상승의 척도로서 자랑스러워 마지않을 일이며 김대중 대통령 개인으로서도 유엔 평화유지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공으로 국제사회질서와 인권보호에 앞장선 지도자로서 후세 만대와 노벨평화상 심의회에 그 업적이 영롱하게 빛날지 모르나 인니 한국교민들의 정서와 그 처한 상황 역시 '잘못된 정보로 인한 오해'로 매도하기엔 너무도 현실적이며 외면해 버리기에는 그 파장이 치명적이다

적지에 버려진 심정이라고나 할까.

 

주 인도네시아 한국대사관은 최근 별도의 안전대책을 다시 세우지는 않았지만 98 5월 자카르타 폭동 당시의 혼란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지난 6 7일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동포안전대책'을 발표한 바 있다소요사태 발생시의 집결지와 수송계획 등을 명시한 이 안전대책이 그러나 실제상황이 닥쳤을 때 얼마나 실효를 거둘 것인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있어 한국은 무엇인가

인도네시아의 분쟁지역은 단지 동티모르 뿐이 아니다

 

수마트라 북단의 아체(Aceh) 지역은 인도네시아 독립초기부터 분리독립 움직임으로 정부의 갖은 탄압을 받았고 동티모르 못지 않은 학살과 악행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다그만큼 격렬한 양상은 아니지만 파푸아 뉴기니 섬의 서쪽인 이리얀 자야(Irian Jaya) 역시 독립움직임이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는 곳으로 하비비 대통령의 동티모르 독립시사 발언이 나온 직후 우리도 독립하겠다며 나선 이리얀 자야 지도자들의 성명서는 인니정부에 의해 단번에 묵살되었다수많은 인명피해을 낸 종교분쟁이 이미 1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는 암본(Ambon) 역시 대표적인 분쟁지역 중의 하나다.

 

이들 지역에 대해 우리 정부나 교민들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우리들은 이 지역에서 박해당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럴 자격이 없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인니정부와의 반목으로 인한 교민들의 피해를 우려했기 때문이었을까그것도 아니면 우린 모두 그런 데에 신경을 쓰기에는 그동안 먹고 살기만으로도 너무나 바빴기 때문이었을까

 

어쨌든결과적으로 우린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그러니 이제 와서 동티모르의 민병대를 애국자들이라고 찬양하는 것도 낯간지러운 일이지만 인도네시아 인권에 별 관심도 없었던 것이 틀림없을 한국정부가 동티모르의 인권수호를 외치기 시작한 것도 앞뒤가 잘 맞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87-89년 한국의 의류/신발공장들이 인도네시아를 가장 적합한 해외투자국으로 간주하고 대거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물론 싼 물가와 호의적인 투자여건도 크게 작용했지만 무엇보다도 정권의 안정성 때문이었다

 

민주국가의 형태를 갖춘 인도네시아에서 수하르토 대통령이 이미 장기집권의 가도에 들어선 지 오래된 시점이었고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당시 전무해 보였던 것이다역설적이지만 한국기업들은 사업의 안정성을 위해 수하트로 대통령의 철권통치가 오래오래 계속되기를 희망했으니 한국인들은 인도네시아 민주화에도 그리 도움이 되는 사람들은 아니다.

 

이들 공장에 대거 몰려든 한국인 생산관리자들은 처음 언어의 장벽에 맞부딪히면서도 불굴의 의지를 발휘하여 빠른 속도로 공장들을 안정시켜 갔다하지만 이로 인한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한국의 공단들이 혹사와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악명 드높았던 시절에 일을 배워 관리자로 성장한 이들 중 많은 수가 자신이 배워왔던 체제와 방식을 현지 공장에 강요함으로써 인도네시아인 근로자들로부터 심한 반발을 사기도 했고 때로는 대규모의 파업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많이 나아졌다지만 아직도 이런 경향은 도처에 엿보인다지금도 이력서에 한국업체에서 수년간 일한 경력이 있으면 다른 한국업체들은 물론 현지업체나 여타 외국업체에 취직하는 것이 훨씬 쉬어진다그 막무가내무대포에 '빨리빨리만 외쳐대는 한국사람들과 오랫동안 같이 일했다는 사실은 성격이 어지간히 무던하고 업무능력도 탁월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버릇들

일상생활에서도 일부 교민들은 한국인이라는 이름에 먹칠을 하곤 했다한때 사이판이나 괌처럼 자카르타에도 '한국인 출입금지'의 팻말이 걸린 업소들이 등장했었다기본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2-3배 큰 목소리로 옆 테이블의 대화를 교란하면서 급기야 술에 취하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예쁘장한 여종업원의 손목을 더듬고 더 나아가 그들이 알아 듣지 못할 것이 분명한 한국말로 폭언과 음담패설을 쏟아붓는 사람들을 지금도 식당에서 종종 볼 수 있다.

 

가라오케와 환락가를 전전하는 소위 '자카르타의 황태자들도 만만찮은 사람들이다그전에도 가라오케 룸 바닥을 고액권으로 빽빽하게 깔아놓고 최고의 대우를 받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일부 있었지만 경제위기와 IMF 상황에 편승해 한때 연리 55-65% 까지 치솟은 예금금리에 돈을 맡기고 희희낙락하며 일반 인도네시아인들의 몇 달치때로는 몇 년치 봉급을 하루 밤에 써대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래서 IMF 상황 속에서 자카르타에 유입되는 한국인 숫자가 늘어난 것 만큼 한국인 가라오케들은 수도 늘어났을 뿐 아니라 점점 더 그 시설의 사치를 더해갔고 망가 두아(Mangga Dua)지역의 한국인 가라오케 아궁(Agung)에서는 사실상 회교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기본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스트립쇼까지 진출하여 현재도 성업중이다.

 

또한 인도네시아에서 사업을 하는 모든 기업들이 마찬가지지만 많은 한국업체들도 뒷거래편법줄잡기에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도 결과적으로 한국인들의 인상을 흐리고 있다한편으로는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므로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인도네시아에서 일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나치다 싶은 경우도 없지 않았다한동안 수하르토 대통령의 자녀들을 통하지 않으면 인도네시아에서의 주요 입찰이나 프로젝트를 따내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인도네시아를 도시바(Toshiba)가 망쳤다'라는 말을 하곤 했다

 

일견 반일문구처럼 들리는 이 말은 사실은 '인도네시아를 수하르토 대통령의 자녀들인 Tommy, Sigit, Hardiyanti(Tutut), Bambang이 망쳤다'는 뜻이다이들이 간여하지 않은 사업이 거의 없을 정도였고 다들 막강한 재벌을 형성하고 있어 사업가들은 이들에게 줄대기에 여념이 없었고 한국기업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현재자동차의 엘란트라와 엑센트는 둘째아들 밤방(Bambang)이 소유한 비만타라 그룹(Bimantara Group)을 통해 각각 비만타라(Bimantara)와 챠크라(Cakra)라는 브랜드로 판매되고 있고기아자동차의 세피아는 막내아들 또미(Tommy)의 소유인 훔푸스 그룹(Humpuss Group)을 통해 티모르(Timor)라는 브랜드로 소개돼 급기야 일본 경쟁업체들의 WTO 제소논쟁을 불러 일으키며 세계적인 스캔들을 거치며 인도네시아의 국민차로 선정된 끝에 지난 자카르타 폭동 때 성난 폭도들의 주요 타겟이 되기도 했다

 

다른 경쟁사에 비해 수입관세가 반도 안되는 특혜를 받던 국민차 지정이 이미 무효화된 것은 물론이다. 95년 당시 인도네시아 경찰청 경비정수주 입찰에 참여한 한 저명한 한국기업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다른 한국기업과 합작으로 막내아들 또미를 자가용 비행기에 태워 한국으로 모셔가 한국의 진미(?)를 맛보게 한 바 있고 당시 자가르타 지사장은 또미와 찍은 사진을 지갑 속에 넣고 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보여 주며 자신의 활약을 자랑하곤 했다.

 

세단인 세피아가 평균 가족수가 6-7명은 될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많이 팔리고 있던 도요타 끼장(Kijang)같은 8인승 밴을 제치고 국민차로 지정된 것도 그 직후의 일이다이 정도면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화교계 대기업들에 비해 한국기업들도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교민사회의 폐쇄성

어느 나라의 어느 교민세계든 어느 정도의 폐쇄성은 있다하지만 현지 화교들이 곧잘 인도네시아인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들에 의한 부의 독점불공정한 관행 뿐 아니라 그 사회의 폐쇄성에도 적지 않은 이유가 있기 때문임을 감안할 때 그 못지 않은 한국교민사회의 폐쇄성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문제다

 

교민사회의 규모가 1만명을 넘어서고 그들 대부분이 상당한 구매력을 보유하고 또한 관련 기업들이 수백개에 이르게 되면 사실 현지 타 업체들을 무시하고 교민들만을 상대로 사업을 하더라도 먹고 사는 것은 물론 상당한 이익도 남길 수 있고 실제로 그런 교민상대의 사업이 폭주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그 때문에 자카르타 폭동당시 7천명 수준까지 떨어졌다는 한국교민 인구가 어렵지 않게 원래의 수준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기업들끼리만 재하청을 주고 받는 봉제업체들현지업체나 제 3국 업체의 제품이 제아무리 가격이나 조건이 좋다고 해도 한국업체로부터의 구매만을 고집하는 관리자들한국에서 막 도착한 한국인 출장자를 처음 데리고 가는 곳이 한국식당이고 2차는 한국인 가라오케한국인 사우나에서 맛사지를 받고 한국인 브로커를 통해 한국업체들을 소개받아 한국어한국어로만… 

 

따라서 한국인 직원이 없는 현지업체는 결코 그들의 거래상대가 될 수 없으며 자연히 주부들은 십년을 넘게 살아도 인도네시아어를 거의 할 줄 모르고 한국인들은 인도네시아인들과 사업과 생활의 단순한 파트너를 뛰어 넘어 진정한 동반자의 단계까지 결코 가지 못하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전체를 상대로 사업을 하는 코린도그룹이나 종합상사 현지지점들의 절절한 노력이 빛을 잃는 대목이다그나마 코린도그룹 역시 인도네시아인들에게는 승진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주지 않은채 모든 관리자급 직위는 한국인들이 독점하고 있다인도네시아에서 이미 십수년을 살아오면서도 우린 그래서 아직도 '영원한 외국인일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 단편적인 행동양태의 배경이 단지 일상의 편안함을 추구하기 때문이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 배후에는 인도네시아인들에 대한 경멸적인 시각도 다분히 깔려있다는 것 역시 부인하기 어렵다.

 

95년 당시 자카르타 연합교회 남선교회 회보에서 한 여집사는 '운전사들도 사람이니 교회주부들 식사모임이나 골프모임 때 땡볕에서 장시간 기다리는 운전사들에게 물이라도 한 컵 가져다 주고 식사라도 제공하자라는 요지의 기고문을 올린 적이 있다

 

훌륭하고도 인도적인 취지였지만 결국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해주는 운전사들에 대한 한국인들특히 한국부인들의 평소 처우가 얼마나 열악했는가를 거꾸로 미루어 짐작케 해주는 글이었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잘 대해주면 기어오른다'라는 논리를 근거로 가족들 외식 때 유아를 위해 함께 데리고 다니는 현지인 유모(일반적으로 '간호사'라고 부르나 간호사면허는 있을 리 없음)에게 풍성한 식탁에서 밥 한톨물 한컵 나누어 주지않는 대부분의 현지화교들에 비해서는 실천적 행동면에서 한국인들이 분명 더 호의적이지만 인도네시아인들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에서는 화교들과 거의 아무런 차이도 없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꾸랑 따우(Kurang = 모자라다, Tahu = 알다)라는 말은 '잘 모르겠다'는 의미로서 '모른다'는 의미인 띠닥 따우(Tidak Tahu)와 회화적으로는 같은 맥락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전임 창고장은 '인도네시아 놈들은 거만하기 짝이 없고 자존심만 엄청 쎄서 몰라도 모른다고는 죽어도 하지 않고 '아는 게 좀 부족하다'며 끝까지 우기고 다닌단 말야라며 자카르타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멸 가득찬 말투로 말해 주곤 했다무지의 소치였지만 이 역시 인도네시아인들을 바라보는 한국교민들의 한 단면이었다.

 

화교들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시각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앞뒤 꽉 막힌 천박한 장사치로 치부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그러나 항상 웃음을 띄고 한 발 양보하는 듯한 그들이 한국교민들을 보는 비판적인 시각도 한번은 짚어 봐야 할 것이다여기서 또 한번 시스카 여사장의 말을 빈다.

 

한국사람들은 일할 때엔 그렇게 적극적이고 친절할 수가 없어요하지만 일상생활로 돌아가면 왜 그렇게 변해 버리는 거죠우리 옆집에도 한국사람들이 살아요그 사람들은 전혀 웃지도 않더군요 

그렇게 오래 같은 동네에 살면서 자주 지나치면 인사라도 한번 걸어올 법 한데 눈만 마주치면 홱 고개를 돌리거나 집안으로 들어가 버려요원래 한국사람들은 그렇게 건방진 건가요아니면 듣던 데로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깔보는 건가요?"

 

이런 말을 들을 때면 가끔 할 말을 잃게 된다.

 

  우리는 동티모르로 간다.

인도네시아의 '영원한 이방인한국인들은 친구를 만들지 못했다그래서 어쩌면 우리가 공포에 떠는 진정한 이유는 자카르타에서 멀리 떨어진 인도네시아의 동쪽 끝 동티모르에 파병되는 우리 군인들때문이라기 보다는 날로 험악해지는 현지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을 때 진심으로 발벗고 감싸주며 힘이 되어 줄 진정한 친구들을 그동안 만들어 두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제 교민들이 아무리 아우성을 치고 국내 주요일간지에 수십면 씩의 전면광고를 때려 반대결의문 할아버지를 내더라도 이미 결정된 파병은 예정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어차피 그렇게 진행될 파병이라면 좀더 이해 당사자들의 충분한 의견을 수렴하고 원만한 합의를 거쳤으면 좋았으리라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파병에 관하여 세계평화와 인권을 중시하기 때문이라고 자신있게 말 할 만큼 오늘 우리의 조국이 그런 평화공화국인권국가였다면 더더욱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또한 지난 8 14일 마지막 교민안내문을 발표한 후 파병반대의 목소리가 교민사회를 뒤흔드는 동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재인도네시아 한국대사관에 대해서는 유감스러울 뿐이다설마 현지 한국교민 전부가 자스민 9호와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

 

처음에 우려했던 것처럼 이미 많이 늦어져 버린 일이지만 동티모르와 한국교민의 내일에 대해 다 같이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할 듯 하다하지만 그 결과에 관계없이 우리 병사들은 동티모르를 향하고나와 현지교민들의 운명 역시 모두 함께....

이제 우리는 동티모르로 간다...

 .

 

1999.10.11

 

 

 

동띠모르 파병 반대 성명서 (전문)

 

인도네시아는 아세안의 종주국으로서 광활한 영토와 석유가스목재석탄 등 풍부한 자원을 보유한 동남아 최대의 자원 보유국이며인구 2억이 넘는 막대한 노동력을 가지고 있는 경제적 잠재력이 매우 높은 나라입니다.

우리나라는 이러한 자원 개발사업과 투자사업을 위해 1960년대 후반부터 진출하여그간 긴밀한 정치적 유대와 경제적 협력관계를 유지해 왔으며현재 약 400여 기업이 100억불 이상의 자금을 투자하며활발한 기업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또한 이러한 사업활동을 위해 일시 방문자를 포함하여 약 3만여명 이상의 동포가 거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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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번 우리 정부의 동띠모르 사태 수습을 위해 전투 병력을 파병코자 하는 정부의 움직임에 대해 3만여명의 인니 거주 동포를 대표하는 재 인니 한인회상공 회의소 그리고 각 협의회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전투병력 파병을 반대 합니다
.

첫째동포의 안전이 위협받을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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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니 국민성은 순박하나자존심이 강하고 다혈질이어서 한번 폭발하면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만일의 경우우리 전투요원들과 띠모로 민병대 간에 물리적인 충돌이 있게 되고 이러한 사실이 현지 신문에 과장보도되면 인니인들의 적개심을 일으켜 그 여파가 재인니 한인들에 대한 테러로 이어질 것입니다비근한 예로 98 5월 폭동사태시 중국인에 대한 테러가 이번 파병으로 인하여 그러한 사태가 그대로 한국동포들에게 재연될 것입니다지금 이 시점에서는 다국적군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호주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대사관 및 기업에 대한 테러가 자행되고 있습니다
.

둘째현지 진출 한국 기업들의 활동 기반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

수십만의 인니 근로자를 고용하고 있는 한국기업이 파병으로 인한 반감으로 노사분규를 겪게될 것이며또한 한국상품 판매거부 운동으로 확대될 경우 기업들은 원자재 수습에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현재 호주산 농산물에 대한 입항거부 및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원자재 수급의 어려움과 노사분규로 인해 IMF로 부터 간신히 벗어나기 시작한 기업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힐 것입니다
.

셋째, 30여년간 쌓아온 우호관계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

비전투요원도 아닌 전투요원을 파병하는 것은 인도네시아와의 우호관계를 지속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적대관계에 놓이게 됩니다우리 전투부대와의 교전으로 피를 흘리게 될 현지 민병대는 인도네시아인들에게는 외세와 맞서 싸우는 애국 청년들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

과거 1960년대초 인니의 독립 초기 시절아쩨지역의 분규에 당시 한국의 이 대통령이 동 지역의 독립을 지지한다는 의사표명으로 그 이후 인니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인니가 북한과 수교를 이룬 한참 이후까지도 국교관계를 맺지 못하여 어려움을 겪었던 쓰라린 경험을 상기하여 금번 파병은 앞으로 인니와의 관계 설정을 고려하여 신중을 기하여야 할 것입니다
.
명예를 위해 실리를 포기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부득이 참여해야할 경우 식량이나 의약품의 지원이나 의료팀 등의 비전투요원을 파견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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