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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강점 -(15)

beautician 2019. 3. 13. 10:00

11. 뒷 이야기들

 

1) 호세 라모스-호르타

라모스-호르타는 인도네시아 철군 이후 독립을 위한 제도적 토대 마련을 위한 협상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200051UNTAET의 중요한 합동 워크샵에서 티모르 사절단을 이끌며 새로운 전략을 사용해 동티모르 독립의 제도적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 결과 집행전권을 가진 합동 행정부에 동티모르 재건 전국의회(CNRT-National Congres for Timorese Reconstruction)의 지도자들이 참여한다는 유리한 결정을 유엔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었다. .20005월의 컨퍼런스에서 보다 구체적인 내용들이 조율되었다. 동티모르 주재 유엔 사무총장 특별대리인 세르지오 비에이라 드 멜로(Sérgio Vieira de Mello) 2000622일 리스본에서 열릴 후원 컨퍼런스와 2000627일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새로운 청사진을 제시했다. 2000712NCC는 동티모르인들과 네 명의 UNTAET 대표들로 구성하는 과도내각 수립에 대한 규정을 수용했다. 이렇게 조율된 합동 정부는 독립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성공적으로 닦았다. 2002927일 동티모르는 유엔에 가입했고 라모스-호르타는 동티모르의 첫 외무상이 되었다.



2006년 동티모르 정치파동 당시 알카티리와 구스마오의 관계를 묘사한 현지 만평

 

200663, 국방장관이 사임하자 라모스-호르타는 국방장관직을 임시로 겸임했다. 하지만 몇 주 후인 2006625나는 현재의 정부는 물론 알카티리(Alkatiri)가 개인된 어떤 정권에도 연관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그는 두 개의 장관직 모두에서 물러났다. 알카티리 총리는 자나나 구스마오 대통령을 대신하는 그의 직책에서 사임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는데 625일 프레틸린당 지도자들이 알카티리의 총리직 유지를 결정하자 라모스-호르타가 즉시 사표를 던지며 불만을 강하게 표시한 것이다. 호주 외무상 알렉산더 다우너는 라모스-호르타의 사임에 개인적 실망을 표했다. 하지만 626일 결국 알카티리가 사퇴를 선언하자 라모스-호르타는 사임을 번복하고 돌아와 알카티리 후임이 정해질 때까지 임시총리직을 겸했고 200678일 구스마오 대통령에 의해 정식 총리로 지명되었다. 그는 710일 선서를 하고 총리가 되었다.

 

총리선임 전 라모스-호르타는 코피 아난의 뒤를 잇는 유엔 사무총장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는 동티모르 총리가 되기 위해 유엔 사무총장가 되는 것을 포기했지만 나중에 언제든 유엔 직책에 나서볼 것임을 시사하기도 했다. “내가 정말 그 직책에 관심이 있다면 2012년까지 5년을 기다릴 수 있다. 난 아마 거기 관심을 가질 것 같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2007222일 알자지라 방송과는 인터뷰에서 라모스-호르타는 20074월 대선에 대통령 후보로 나서겠다고 천명했고 2007225일 그는 공식적으로 입후보했다. 그해 재선에 나서지 않은 구스마오는 그를 지지했다. 세계 남반구 개발 매거진(Global South Development Magazine)과의 인터뷰에서 라모스-호르타는 마하트마 간디가 그의 개인적 영웅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대선 1차 투표가 열린 49일 라모스-호르타는 21.81%의 득표로 2위를 차지했다. 1위는 프레틸린의 후보 프랜시스코 구테레스(Francisco Guterres)였다. 그해 5월 그들은 2차 투표에서 격돌했는데 511일 선거결과를 발표하는 선관위 대변인 마리아 안젤리나는 라모스-호르타가 69%를 득표했다고 발표했다. (사진: 프란시스코 구테레스)

 

그는 2007520일 딜리의 국회에서 대통령 취임식을 가졌다. 그보다 하루 전 그는 총리직을 사임했는데 에스타니슬라우 다실바(Estanislau da Silva)가 후임총리도 선임되었다.

 


2008211일 호세 라모스-호르타에 대한 암살이 시도되었다. 총격을 당한 것이다. 뒤이어 벌어진 총격전에서 라모스-호르타의 경호원들이 부상을 당했고 반군 지도자 알프레도 레이나도(Alfredo Reinado)를 포함한 반군 두 명이 사살되었다. 인도네시아 강점기 당시 프레틸린의 팔린틸 부대가 은거하던 산 속에 이제 독립 동티모르에 무력투쟁을 벌이는 반군이 들어앉아 있었던 것이다. 라모스-호르타는 딜리에 있는 뉴질랜드 병영에서 응급조치를 받고 곧 호주 로얄 다윈 병원(Royal Darwin Hospital)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의료진은 그가 2-3회 총격을 당했고 가장 위험한 것은 우측 폐를 관통한 총상이라고 판단했다. 중상이었지만 다행히 상태는 안정적이었다. 아직 다윈에서 회복 중이던 라모스-호르타가 312일 방송을 통해 근황을 전했다. 그 메시지에서 라모스-호르타는 지지자들과 호주 당국에 감사를 표하며 사람들이 그를 잘 보살펴 주고 있다고 밝혔다. 대변인은 그의 상태가 호전되고 있어 운동삼아 매우 조금씩 산책을 하기 시작했다고 발표했다. (사진: 라모스 호르타 대통령 암살기도 기사)

 

라모스-호르타는 몇 주 더 물리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호주 당국의 조언을 뿌리치고 319일 퇴원을 강행했다. 그는 총격을 당했을 때에도 정신을 멀쩡해 그날의 모든 구체적 상황들을 다 기억하고 있다고 훗날 밝히기도 했다. 417일 그는 다윈을 떠나 딜리로 돌아왔다. 그는 공항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산 속의 반군들에게 항복을 촉구했다.

 


 5년 후 2012년 대선에서 재선에 도전한 그는 3171차 투표에서 19.43%를 득표해 3위에 그쳤다. 프란시스코 구테라는 27.28% 따우 마딴 루악은 24.17%로 각각 1위와 2위를 차지했다. 라모스-호르타는 깨끗이 패배를 인정했다. 그는 519일 대통령 임기를 마쳤고 타우르 마탄 루악이 후임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사진: 타우르 마탄 루악)

 

2012년 기니아-비사우(Guinea-Bissau)에서 벌어진 쿠데타에 대해 그는 중재를 나서겠다고 자원한 바 있는데 파란만장한 대통령 임기를 마친 후 2013131일 유엔 특별사절단을 이끌고 기니아-비사우를 방문했다. 그는 어려운 시절 희망의 말들”(Words of Hope in Troubled Times)이라는 책도 발간했다.

 

라모스-호르타는 피스잠 컨퍼런스(Peacejam Conference) 연단에 자주 올랐다. 그는 평화와 인권을 위한 웹사이트인 TheCommunity.com의 자문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2001년 그 웹사이트에서 28명의 노벨평화상 수상자들 중 아홉 개 상 11명 수상자의 성명을 모아 게재했고 수상자 동료들 중 주축이 되어 또 다른 평화운동들을 주도했다.

 

그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점렴을 지지했고 미국을 비난하던 이라크 독재자에게 위선적이라고 지적했다. 1990년대에 그는 이라크 내의 쿠르드족의 명분을 지지했다.

 

20095월 라모스-호르타는 미얀마 집권세력 준타(junta)에 대한 국제형사제판소의 조사를 촉구했다. 그러나 20108월 그는 미얀마에 대한 그의 견해를 누그러뜨리고 미얀마 외무상 냔 윈(Nyan Win)을 영접하면서 미얀마와의 관계개선과 강력한 무역연대를 촉구했다.

 

라모스-호르타는 국제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흔히 발생하는 교착상태 탈피를 위한 국제동시정책(International Simultaneous Policy – SIMPOL)에 가장 먼저 서명한 사람이었다. 20098월 그는 필리핀 전대통령 아키노(Aquino)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는 그 장례식에 참석한 유일한 외국 정상이었다. 2010630일 그는 베니그노 S. 아키노 3(Benigno S. Aquino III)의 필리핀 제 15대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했다. 이때에도 그는 취임식에 참석한 유일한 외국 정상이었을 뿐 아니라 해외에서 도착한 귀빈들 중 첫 번째 손님이었다. 이 두 번의 방문은 동티모르와 필리핀의 외교관계를 더없이 돈독히 해주었고 동티모르의 아세안(ASEAN) 가입에 대한 필리핀의 지지도에도 분명 영향을 주었다.

 


오바마 미대통령 부부와 함께

 

라모스-호르타는 중재와, 민주적 제도들, 개방형 시장, 인권과 법치 등 형태에 있어 선량한 통치를 촉구를 통해 원격 민주적 지도제체를 지원하고 분쟁예방과 종식을 위해 일하는 단체인 세계 지도자 재단(Global Leadership Foundation)의 회원이다. 이 단체는 전 지도자들의 경험을 당대의 국가 지도자들에게 제공하여 그들이 이를 문의하고 분별하고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일을 한다. 이 단체는 전 국가 지도자, 당대의 특정한 통치이슈에 있어 국가 정상들 가까이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는 정부 및 국제 조직 관료들로 구성된 비영리 조직이다.

 

20178월 라모스-호르타를 포함한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은 2011-2012 사우디 아라비아 시위에 참여한 젊은이 14명에 대한 처형을 중지해 달라고 사우디 아라바이아에 촉구하기도 했다.

 



 그는 화려한 수상경력을 가지고 있는데 물론 가장 획기적인 것은 동티모르의 로마 카톨릭 사제 카를로스 벨로와 함께 공동 수상한 1996년 노벨 평화상이다. 그외의 포훈으로서 포르투갈 자유 대십자훈장 (Grand-Cross of the Order of Liberty, 199869), 포르투갈의 헨리왕자 그랜드칼라 훈장(Grand Collar of the Order of Prince Henry, 20071113), 동티모르에 독립을 가져온 뛰어난 지도력으로 호주와 동티모르 양국의 유대를 강화한 놀라운 업적을 기려 호주의 호주의 영예로운 동지 훈장 (Honorary Companion of the Order of Australia, 20131125) 등이 있다.

그는 캄보디아 대학에서 정치과학 명예박사학위 (2010)도 받았다.

 

그는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고 다큐멘터리에 출연하기도 했다. 톰 쥬브리키(Tom Zubrychi) 감독이 2000년에 제작한 다큐멘터리 <외교관>(The Diplomat)1998년부터 그가 동티모르에 돌아가는 2000년까지의 기간을 담았다. 2009년 작 <발리보>(Balibo)에서는 오스카 아이작(Oscar Isaac)이 라모스-호르타는 연기했다. 이 영화는 인도네시아의 본격적 동티모르 침공이 벌어지기 직전 발리보 5인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2) 카를로스 필리페 지메네스 벨로 주교


라모스-호르타와 함께 1996년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했던 벨로 주교는 2002520일 동티모르가 막 독립하여 혼란스럽던 와중에 그간 견뎌온 일들로 인한 스트레스가 건강의 적신호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요한 바로오 2세 교황은 20021226일 벨로 주교의 사도행정관직 사퇴를 수리했다. (사진: 살레시안 소사이어티 로고)

 

그후 그는 치료를 위해 프로투갈에 갔다. 2004년 초까지 어서 돌아와 대통령직에 도전해 달라는 동티모르로부터의 요구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20045월 그는 포르투갈 국영 TV 방송국 RTP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이름이 대통령 후보로 오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정치는 정치가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 제 결심입니다그는 이렇게 말했다. 200467일 살레시안 소사이어티의 수장 파스쿠알 차베즈(Pascuál Chavez)는 벨로 주교의 건강이 회복되어 곧 다른 직책을 맡게 될 것이라고 로마에서 발표했다. 그는 홀리씨(Holy See)의 요청에 동의해 모잠비크에 선교사로 나갔고 그곳 살레시안 소사이어티 회원으로 살았다. 벨로 주교는 68일의 성명을 통해 2003년과 2004전도를 위한 회중측과의 두 번의 회합결과에 따라 자신은 어릴 적부터의 희망해던 바에 따라 모잠비크의 마부토 교구로 임무를 받아 떠난다고 밝혔다.

 

그는 20047월에 출발했는데 같은 해 CEU 카디널 헤라라 유니버시티의 명예박사학위도 수여했고 20112월 국제 루소포노 운동(MIL: Movimento Internacional Lusófono)으로부터 올해의 루소포닉 인물상(Prize for Lusophonic Personality of the Year)을 수상하기도 했다.

 

3) 마리 알카티리

  마리 빈 아뮤데 알카티리(Mari bin Amude Alkatiri)19491126일 출생한 동티모르 정치인이다. 그는 프레틸린 당의 사무총장이자 현재 우쿠세(Oecusse) 특별행정구의 수장이기도 하다.

 


  우쿠세를 먼저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이 지역 이름은 여러가지 발음으로 소리나는데 예전엔 암베노(Ambeno) 또는 우쿠시-암베노(Oecussi-Ambeno)라고도 불렸고 동티모르의 영토로 분류된다. 티모르 섬 서쪽 해안지대에 고립된 영토인 이곳은 인도네시아 영토인 서티모르와는 국경선을 맞대고 있다. 수도는 빤뗴 마카사르(Pante Macassar)이며 포르투갈령 티모르 시절 오쿠시 타운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예전엔 지역명이 암베노(Ambeno)였고 수도 이름이 오쿠시였던 곳이다. (사진: 빨간 부분이 우쿠세)

 

  알카티리는 종족으로는 아랍계 하드라미족(Hadhrami Arab)이고 지금은 예멘의 일부가 된 하드라마웃(Hadhramaut) 왕가의 방계인 알-카티리(Alkathiri) 부족 출신이다. 그는 인구의 97%가 기독교인인 국가에서 매우 드문 무슬림 정치가 중 한 명이었다. 그가 두 번쨰로 총리를 맡던 당시의 주된 이슈는 환경보존, 문화보존, 동티모르의 아세안 가입, 공공무상교육, 공공건강서비스 및 국가경제건설 등이었고 특히 매우 느린 공공서비스와 제조부문의 문제들이었다.

 

  2002520일 유엔 과도정부가 새로 선출된 동티모르 국회와 정부에 주권을 넘겨주었다. 그는 2001 8월의 총선에서 많은 의석수를 얻은 프레틸린 당의 사무총장으로서 신생 독립국의 첫 총리로 선출되었다.

 


  20065월 동티모르 정부는 국가 치안병력의 대략 절반이 반란을 일으켜 수도 딜리에서 폭동과 약탈이 난무하는 준 내전상황을 맞았다. 암살단을 시켜 정치적 반대세력을 위협하거나 죽이도록 사주했다는 혐의가 알카티리에게 걸리면서 대대적인 반발을 불러와 대통령 자나나 구스마오는 알카티리의 사임을 촉구하면서 그가 물러나지 않으면 구스마오 자신이 물러나겠다는 초강수를 띄웠다. 프레틸린 수뇌부가 625일 회합을 통해 알카티리의 총리로서 입장을 협의하는 동안 대규모 시위가 벌어져 구스마오 대신 알카티리가 사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이 알카티리를 총리로 유지시키도록 결정하자 외무상이자 임시 국방장관이던 호세 라모스-호르타가 그 결정을 듣고 즉각 사퇴를 발표했고 같은 날 동티모르 경찰총장 파울로 마르틴스(Paulo Martins)는 정적에 대한 살해기도혐의로 알카티리에 대한 체포를 명했다. (사진: 마리 알카티리)

 

  그는 당의 재신임을 받았지만 2006626일 총리직을 사퇴하면서 혼란상황에 종지부를 찍었다. “나는 이 정부의 총리직에서 물러날 준비가 되었으며 이로서 공화국의 대통령 자나나 구스마오 각하의 사임을 막을 것임을 천명합니다그는 사퇴발표에서 이렇게 말했다.

 

  알카티리에게 씌워진 암살단 운용혐의는 그후 유엔위원회에서 기각되었다. 유엔위원회는 오히려 정치파동기간 중 선동적 발언을 쏟아낸 구스마오를 비판했고 파울로 마르틴스 경찰총장에게 직무유기를 물어 퇴임을 촉구했다.

 

  20076월의 총선에서 알카티리는 프레틸린 당수 프란시스코 루 올로구테레스(Francisco "Lu Olo" Guterres) 다음으로 두 번째 의원후보로 이름을 올려 다시 국회에 입성했다. 200781일 그는 프레틸린 당의 총리후보로 출사표를 던지며, 막 대통령직을 마치고 내려와 신생정당 티모르 재건 전국회의(CNRT)의 당수로서 국회에 입성한 라이벌 구스마오의 이력을 비난했다. 프레틸린은 CNRT를 포함한 그 어떤 정당보다 많은 의석을 얻었지만 노련한 구스마오는 다른 당들과 연합종횡하면서 과반 의석을 구축했다.

 


  알카티리는 성명을 통해 국회에 입성한 모든 정당들로 이루어진 전국엽합정부 구성을 촉구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국가적 안정을 가져올 것이라 말했다. 그러나 각 정당들이 정부구성을 위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호세 라모스-호르타 대통령은 86일 구스마오를 수장으로 하는 CNRT가 주도하는 연정이 정부를 구성하도록 결정했다. 알카티리는 라모스-호르타의 결정이 위헌이라며 비난했고 알카티리가 그 결정에 맞서 당은 준법투쟁에 나설 것과 시민들의 불복종 시위를  유도했지만 분노한 프레틸린 지지자들은 라모스-호르타의 발표에 대한 반응으로 폭력시위를 벌였다. 프레틸린은 점차 준법투쟁을 하겠다는 위협을 거두었다.  (사진: 자나나 구스마오의 CNRT)

 

  그해 8월 평화유지군으로 활동 중이던 호주 군인들이 시위를 벌이면서 프레틸린 국기를 가져다가 짓밟는 사건이 있은 후 알카티리는 호주인들이 프레틸린의 반대편에 서서 위협을 가한다고 비난하며 호주군인들에게 중립을 지킬 능력이 없다면 집에 돌아가는 게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20179월 알카티리는 다시 동티모르의 총리로 선출되었다.

 

그는 국제 라울 월렌버그 재단(the International Raoul Wallenberg Foundation) 론칼리 위원회(Roncalli Committee) 명예회원이다. 그는 능수능란한 협상가이며 티모르해의 자원을 동티모르가 호주보다 더 큰 부분을 가져가도록 확보한 경제적 민족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포르투갈의 지속적 지원을 받았지만 호주의 존 하워드 정부와는 각을 세웠다. 그는 2016214일 포르투갈 헨리왕자 대십자 훈장을 받았다.

 

4) 자나나 구스마오

구스마오는 유엔이 2002520일까지 이끌었던 동티모르 과도정부의 중책을 맡았다. 그 시기에 그는 지속적으로 동티모르의 통일과 평화를 촉구하는 모습을 보였으므로 세계는 그를 대체로 신생 공화국의 사실상 지도자라고 평가했다. 2001년 말에 열린 선거에서 구스마오는 프레틸린을 제외한 아홉 개 정당의 지지를 모아 상대방을 가뿐히 누르고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그 결과 그는 2002520일 동티모르가 공식적으로 독립했을 때 첫 대통령에 취임했다. 구스마오는 자신이 쓴 글 여럿을 모아 엮은 자서전에 승리를 위한 저항”(Resist Is to WIN)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는 자신과 동티모르에 대한 2006년 다큐멘터리 영웅의 길/해가 뜨는 곳’(A Hero's Journey/Where the Sun Rises)의 메인 나레이터를 맡기도 했다. 그레이스 팬(Grace Phan) 감독은 동티모르를 구축하고 자유를 부여한 한 남자의 개인적 변화를 가까이 들여다본 시선이라 말했다.

 


2006621일 구스마오는 마리 알카티리 총리에게 퇴진을 촉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사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알카티리는 당시 정적들을 위협하거나 죽이기 위해 암살단을 사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던 차였다. 결국 알카티리는 사임했지만 유엔은 그의 혐의를 각하하고 오히려 구스마오가 정치파동기간 중 선동발언을 했다고 비판했다. (사진: 브라질 대통령 딜마 루세프를 만난 구스마오)

구스마오는 2007년 대선출마를 거부했다. 대신 그는 아직 대통령 재임 중이던 20073월 티모르 재건 전국회의(CNRT)라는 신당을 만들어 그해 하반기로 예정된 총선에 뛰어들었다. 그는 총리직을 노렸다. 2007520일 호세 라모스-호르타가 차기 대통령으로 그의 뒤를 이어 취임했다. CNRT20076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의 CNRT24.10%를 득표해 프레틸린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며 18개 의석을 확보했고 그는 CNRT 후보명부에 1번으로 이름을 올려 국회에 입성했다. CNRT는 다른 정당들과 연정을 구성해 국회 다수석을 차지했다. 프레틸린과 연합정당은 누가 정부를 구성하느냐로 수 주간 논쟁을 벌인 끝에 라모스-호르타 대통령이 86일 발표를 통해 CNRT가 이끄는 연합정당의 손을 들어주었고 구스마오는 88일 총리로 선출되어 대통령궁에서 취임선서를 했다.

 

2008211일 호세 라모스-호르타 대통령에 대한 암살시도가 벌어져 라모스-호르타가 배를 피격당해 중태에 빠졌다. 구스마오가 그 소식을 들었을 때 프레틸린 지도자 프란시스코 구테레스는 구스마오에게 집에서 머물라고 충고했으나 구스마오는 차를 타고 딜리로 향하다가 가스타오 살시나(Gastao Salsinha)가 이끄는 일단의 암살단에게 공격을 당해 교전을 벌였고 그 사이 발리바(Balibar)에 소재한 그의 자택도 신원미상의 군인들에게 포위당했다. 자택에는 커스티 소드와 자녀들이 남아 있었다. 잠시 후 포르투갈 공화수비대가 현장에 도착하여 가족들을 구조했고 그들이 곧 구스마오와 합류하여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면서 위험상황은 막을 내렸다. 상황은 쿠데타 시도의 가능성과 암살 또는 납치 시도였다고 해석되기도 했다.

그는 팔린틸을 이끌며 인도네시아군과 싸웠고 2002년부터 2007년까지 동티모르의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 그는 20075월부터 2015216일까지 총리를 역임한 후 20152월부터는 기획 및 전략 투자부 장관을 맡고 있는 자나나 구스마오는 지금도 동티모르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인 중 한 명이다.

 

그는 1999년 사상의 자유를 위한 사하로프 상(Sakharov Prize for Freedom of Thought)을 수상했고 20007월에는 뉴질랜드-동티모르 관계증진 노력을 인정해 뉴질랜드의 명예동반자(a Honorary Companion of the New Zealand Order of Merit -CNZM)로 지정되었다. 2000년에는 동티모르 인민들의 독립에 헌신한 용기와 신념의 지도자로 인정하는 시드니 평화상(Sydney Peace Prize), 광주인권상, 2002년엔 유럽위원회의 노스-사우스 프라이즈(North-South Prize)도 수상했다. 구스마오는 세르지오 비에이라 드 멜로 재단(Sergio Vieira de Mello Foundation)의 유수회원이기도 하다. 199369일 포르투갈의 자유 대십자훈장을, 2003년엔 영국 성 마이클, 성 조지 대십자 최고 명예훈장(Honorary Knight Grand Cross of the Most Distinguished Order of Saint Michael and Saint George), 20071113일에는 포르투갈의 헨리왕자 그랜드칼라 훈장을 받았다.

 


자나나 구스마오-커스티 소드 부부 가족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