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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강점-(14)

beautician 2019. 3. 12. 10:00



10. 동티모르 저항군 팔린틸(Falintil)

본문에 자주 등장한 동티모르 저항군 팔린틸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면 이제까지의 이야기들을 간단히 복기해 보기로 하자.

 

팔린틸은 원래 1975820UDT 당과의 갈등에 대한 반동적 성격으로 동티모르 프레틸린 정당의 군사조직으로 태동했다. 팔린틸(Falintil)이란 말은 포르투갈어로 동티모르 민족해방군(Forças Armadas da Libertação Nacional de Timor-Leste)에서 따온 약자다.


  팔린틸 최초의 부대는 대부분 포르투갈 철수 후 19758월 프레틸린에 충성키로 맹세한 전 포르투갈의 수비대 병력을 근간으로 했다. 1975년 인도네시아의 침공이 시작되었을 때 팔린틸을 2,500명의 정규군(전 포르투갈령 티모르군)과 포르투갈 군사훈련을 받은 7,000, 그리고 단기군사교육을 받은 10,000, 그렇게 2만 명 규모였다.


팔린틸의 첫 사령관은 니콜라우 로바토였으나 1978년 인도네시아군과의 교전 중 전사했다. 그 후 자나나 구스마오가 1981년 비크크(Viqueque)의 라클루타(Lacluta)에서 열린 비밀 전국회의에서 후임 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이 회합은 국가적 저항을 위한 혁명위원회’(CNNR-Conselho Revolucinario de Resistencia Naciona) 이라는 것을 조직했는데 이는 각기 흩어져 있는 저항조직들을 하나로 묶으려는 첫 번째 단계의 노력이었다. (사진: 니콜라스 도스 레이 로바토)

 

1980년대를 통틀어 구스마오는 팔린틸과 CNNR을 이끌면서 프레틸린으로부터 이격해 팔린틸을 정당 정파를 초월한 조직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19833월부터 1986년까지로 기간을 정해 체결했던 인도네시아군과의 휴전은 사실상 불과 5개월만인 198388일에 깨지는데 팔린틸 부대는 이때 비빌레오(Bibileo)에 주둔하고 있던 인도네시아 공병부대(Zipur 3)을 공격해 들어갔고 그 보복으로 인도네시아군가 민병대는 9월초 크라라스(Kraras) 지역의 주민 200-300명을 학살했다. 1983512일에 (또는 19813월초 프레틸린이 스스로를 마르크스-레닌 당이라고 천명했던 첫 전국 컨퍼런스)에서 구스마오는 인도네시아 강점에 항거하여 투쟁하는 것은 모든 민족주의자들이 함께 공감하는 부분이라 강조했고 19844월까지 저항전쟁을 진행함에 있어 우선 프레틸린이 특정 이념으로부터 사상적으로 독립할 것임을 주장하며 무장 저항운동을 본격적으로 재건하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한 1983 인도네시아 공병부대를 공격해 16명을 죽인 사건을 계기로 그해 8 31일 인도네시아군이 딜리에서 100마일 떨어진 비크크에서 군사작전을 시작했다. 캔버라 소재 인도네시아 대사관 대변인은 특수부대를 포함한 4개 대대 3,200명의 병력이 전차와 수송기를 나누어 타고 해당 지역에 전개했다고 밝혔다. 198555일 구스마오는 망명 중인 프레틸린 중앙위원회에 CNNR이 조직되었다는 사실과 자신이 팔린틸의 총사령관직을 맡는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팔린틸은 그사이 19863UDT전국적 협조에 동의하고 곧바로 각자도생하며 중구난방의 저항을 펼쳐나가던 저항세력들을 간의 본격적 통합절차를 시작했다. 그 사이 팔린틸 게릴라는 계속 인도네시아군을 공격했다. 자카르타의 외교관들은 훗날 19866월 팔린틸의 매복공격으로 인도네시아군은 20명에서 35명 사이의 병력을 잃었다고 인정했다. 19861121일 로스 팔로스(Los Palos) 남쪽에서 있었던 오소히라 매복작전(Ossohira Ambush)으로 인도네시아군에게 타격을 입혔다.

 


1988 6 20일 동티모르 전국학생 저항운동(RENETIL-Resistencia Nacional dos Estudantes de Timor-Leste)이 인도네시아에서 조직되었고 팔린틸 사령관 자나나 구스마오에게 직접 보고하는 체제를 갖췄다. 19881231일 구스마오는 팔린틸이 더 이상 특정 정당 소속이 아니며 통일 저항운동의 무장 저항부문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이 통일 저항운동은 전국 마우베레 저항 위원회(CNRM-Conselho Nacional da Resistência Maubere )라고 알려져 있다. (사진: 자나나 구스마오)

 

1990523일부터 28일 사이, CNRM은 저항운동 전반을 재건할 목적으로 특별회합을 가졌다. 이 컨퍼런스에서 구스마오는 공식적으로 프레틸린을 탈당했고 팔린틸의 사령관과 CNRM의 회장직을 유지했다. 또한 이 회합에서 비밀전선을 구축했고 오랜 기간 인도네시아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해오면서 크게 약화된 저항군 조직 팔린틸에게 이에 대한 승인도 얻었다. 그러자 인도네시아군의 진압소탕작전도 아연 활발해졌는데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산간지역이나 해외로 피신해야 했고 지도자 구스마오도 19921120일 인도네시아군에게 체포되었다.

그를 대신해 프레틸린 운영위원회 위원인 마후노(Ma’Huno)가 저항군 지도자로 등극하지만 그 역시 199345일 인도네시아군에게 체포되었다. 니노 코니스 산타나(Nino Konis Santana)가 다음 지휘관이 된 것이 1993425일의 일이다. 저항군의 모든 분파들은 그해 9월까지 산타나를 저항활동 전반의 지도자로서 인정했다. 한편 타우르 마탄 루악(Taur Matan Ruak)이 팔린틸의 사령관으로 지명되었다. 구스마오가 처음 시작했던 저항세력 전반의 재편성이 산타나의 지휘 아래 마저 진행되어 CNRM의 휘하에 흡수되며 강화되었고 산타나는 투쟁집행위원회의 수장으로, 그리고 사발라에(Sabalae – 또는 페드로 누네스(Pedro Nunes)- 케리 라란 사발라에(Keri Laran Sabalae)라는 이를 비밀전선의 책임자로 선출했다.

 


 

1990년대를 통틀어 인도네시아군은 저항군을 더욱 강력히 압박했고 업친 데 덥친 격으로 프레틸린과 다른 저항군 조직들 사이의 첨예한 분파갈등이 CNRM을 흔들었다. 프레틸린 당원들이 산타나의 리더쉽에 반대하는 서류에 서명하는 일도 있었다. 비밀전선의 수인 사발라에는 199561일 글레노Gleno 인근에서 인도네시아군에게 나포되었지만 구스마오는 인도네시아 감옥에 감금된 상태에서도 여전히 CNRM의 최고 지도자이자 팔린틸의 총사령관이라는 위상을 유지했다. 팔린틸은 저항을 계속해 1997531일 동티모르 게릴라가 바우카우에서 남동쪽에 위치한 퀠리카이(Quelicai) 인근 아바팔라(Abafala) 마을 인근에서 매복을 통해 16명의 경찰관과 1명의 군인을 사살했다.

 1998년 산타나가 사고로 사망하자 팔린틸 사령관 루악이 투쟁위원회 지도자로 선택되었고 팔린틸의 운영사령관 직책도 그대로 겸임했다. 19984, 포루투갈에서 개최된 해외거주 동티포르인 전국회의에서는 티모르인 전국위원회 CNRT(Conselho Nacional da Resistência Timorense)가 조직되어 CNRM을 대체했고 인도네시아에 맞서 저항투쟁을 하는 모든 분파들을 통일하기 위한 더욱 활발한 노력을 정진했다.

 

인도네시아 정부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박이 커져가던 중 하비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동티모르 자치에 대한 동티모르인들의 국민투표 일정을 발표했다. 동티모르가 자치를 거부할 경우 독립국가가 되는 길도 열어 두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군은 현지의 합병지지 민병대에 무기를 공급하며 동티모르 주민들이 자치 찬성표를 던지도록 등을 떠밀었다

1999810일 구스마오는 팔린틸 부대들에게 병영 안에서 머물며 인도네시아군이나 무장민병대의 모든 도발에 저항하되 인도네시아군이 획책하는 무장 충돌에 휘말리지 말라고 명령했다. 약간의 군사적 충돌이라도 벌어지면 이는 곧장 내전으로 번져 인도네시아 점령군들에게 또 다른 빌미를 줄 터였다. 팔린틸은  대체로 이 명령을 준수해 국민투표가 진행되는 동안 그들의 비밀 캠프 안에 머물렀다. 830일 국민투표에는 등록 유권자의 98%가 참여했고 94일 유엔은 투표자의 78.5%가 자치반대에 표를 던졌다고 밝혔다. 그 결과 독립절차가 시작되었다. 이 투표 결과에 격분한 인도네시아군과 자치찬성 민병대는 다음날인 95일 동티모르 주민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약탈과 폭력을 휘두르며 대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구스마오와 CNRT 지도부는 팔린틸이 부대를 벗어나거나 전투에 휘말리지 않도록 강력히 통제했다.


920일 호주군이 주축이 된 유엔군 INTERFET이 동티모르에 상륙해 무장 민병대들에 맞서 동티모르의 질서회복을 도모했다. INTERET의 지상명령 중 하나는 팔린틸을 포함해 동티모르의 모든 분파들을 무장해제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침 막 석방된 자나나 구스마오의 조언을 받으며 INTERFET과 유엔군은 팔린틸을 무장해제시키지 않는 대신 병영 안에 계속 머물기로 했고 평화가 완전히 도래하는 시점에서 무기를 내려놓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팔린틸의 마지막 사령관은 타우르 마탄 루악이었다. (사진: 타우르 마탄 루악)

 

200121일 팔린틸은 공식 해산되었다가 곧바로 신생독립국가 동티모르의 정규군으로 거듭났다. 그들은 팔린틸-동티모르 방위군이라는 의미의 F-FDTL(FALINTIL – Força de Defesa de Timor Leste)이라는 공식명칭을 받았다. 그들은 동티모르 헌법에 의거해국가의 독립을 지키고 영토, 자유, 헌법과 질서를 존중하지 않은 모든 공격으로부터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의무를 부여받았다. 타우르 마탄 루악은 준장 계급장을 달고 F-FDTL의 첫 총사령관이 되었다.

팔린틸 전사들은 후에 동티모르의 정치적 무장세력인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 CPD-RDTL, 콜리마우 2000(Colimau 2000) 등 조직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팔린틸 전사들

  

 


타우르 마탄 루(왼쪽에서 세 번째)의 팔린틴 전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