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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강점 - (13)

beautician 2019. 3. 11. 10:00



9. 파국

 

1) 사망자 수

동티모르 사태가 벌어지는 동안 발생한 사망자 수를 정확히 추정하기 어렵다. 2005년 동티모르 포용, 진실 및 화해 위원회(CAVR) 보고서에 따르면 이 기간의 사망자 추정치는 최소한 102,800명이며 오차범위 12,000명 정도일 것이라 한다. 물론 일반 사망자와 실종자들이 18,600(오차범위 1,000)이며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들도 평시 사망률을 크게 웃도는 84,000(오차범위 11,000)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 수치들은 CAVR이 과학적 근거를 통해 우선 발견된 내용들만 기반한 보수적 최저 추정치다. 이 보고서는 최대 추정치는 내놓지 않았지만 CAVR은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강점기에 기아와 질병으로 발생한 전체 사망자는 183,000명에 이를 것이라 보았다. 진실위원회는 이 시기에 벌어진 폭력관련 사망자의 70%에 대해서는 인도네시아군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조사연구원 벤 키어넌(Ben Kiernan)사망자가 15만 명이라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고 말한 바 있으나 그 수치가 20만 명 이상일 것이란 가능성도 열어 놓았다. 방위정보센터(The Center of Defence Information)도 전체 사망자를 15만 명으로 추정했다. 1974년 카톨릭 교회는 동티모르의 인구를 688,711명으로 보고했는데 1982년 그 숫자는 425,000명으로 줄었다. 전세계에 보도된 이 내용은 강점기 중 최소 20만 명의 동티모르인들이 살해당했을 개연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제사면위원회나 인권감시연대(Human Rights Watch)는 사망자가 20만 명이 넘는다고 본다. (사진: 벤 키어넌 교수)

전문가 개브리얼 디퍼트(Gabriel Defert)는 포르투갈와 인도네시아 당국, 그리고 카톨릭 교회에서 입수한 197512월부터 198112월까지의 통계자료에 근거해 약 308,000명의 동티모르인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분석했다. 이는 침공 전 동티모르 전체인구의 44%에 이르는 수치다. 중부자바 살라띠가 대학에 근무했던 죠지 아디죤드로(Goerge Aditjondro) 교수 역시 동티모르 강점 초기 몇 년간 약 30만 명이 죽었을 것이라는 유사한 추정치를 내놓았다.


하지만 호주국립대학교의 로버트 크립(Robert Cribb) 교수는 이러한 수치들이 크게 부풀려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1980년 동티모르 인구를 555,350명이라는 것이 가장 믿을 만한 수치이지만 그것이 최대치라기보단 최저치였을 것이라 주장한다. “수십만 명의 동티모르인들이 19999월에 벌어진 폭력사태 당시 사라졌지만 그 후 다시 나타났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그는 자신의 글에서 밝혔다. 인구조사에서 사리진 수치는 그 만큼 학살당해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에 필적하는 인구가 혼란과 위험을 피해 어딘가로 숨어들어갔다는 논리다. 물론 아무도 학살당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아님에 유의바란다. 1987년의 인구조사가 동티모르 인구를 657,411명으로 봤다는 점에서도 1980년의 인구조사 수치는 더욱 신빙성이 떨어진다. 이는 이 기간의 연평균 인구증가율이 2.5%였다는 말이 되는데 이는 1970~1975년 사이에 있었던 최고치의 인구증가율과 맞먹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당시 강점기의 가혹한 환경이나 당시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인의 강제 산아억제를 통해 신생아 출산율을 떨어뜨리려 노력했던 점 등을 감안하면 거의 불가능한 수치라는 것이다


잔혹행위에 관한 증언, 트라우마를 입은 인도네시아의 병사들의 개인적 증언들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을 떠나 동티모르는 그간의 뉴스보도나 학술적 평가들을 기반해 볼 때 대량학살로 인해 트라우마를 입은 사회처럼 보이지 않는다. 1991년 딜리 학살사건 이전의 상황을 보면 동티모르 사회가 만약 캄보디아의 폴포트(Pol Pot) 정권이 한 것과 같은 처우를 받았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활력과 분노를 여전히 함께 지니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고 그는 주장했다. 더욱이 당시 인도네시아군이 현지인들의 마음을 얻자는 전략을 썼으므로 인도네시아군이 대량살인을 지원했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사진동티모르 제노사이드 관련 유튜브 영상)


키어넌은 1975년 동티모르의 인구를 70만 명으로 기준하여 (이는 1974년 카톨릭 교회의 인구조사 수치를 기반함) 1980년의 기대인구를 735천 명으로 계산했다. 인도네시아 강점의 여파로 인구증가율이 연 1%로 저하되었음을 전제한 수치다. 크립이 10% 정도(55천 명) 낮게 조사되었다고 평가한 1980년 조사 수치를 일단 수용하면 18만 명이 전쟁 중 죽은 것이라고 키어넌은 결론지었다. 크립은 1974년 통계가 시사하는 3%의 인구증가율이 너무 높다고 주장한다. 교회가 앞서 가정한 1.8%의 인구증가율이 사실상 1974년 포르투갈의 인구추정치 645,000명에 따라간 것이라는 주장이다. (사진: 동티모르의 또 다른 학살현장)


크립은 포르투갈의 인구조사가 분명 과소평가되어 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지만 그래도 최소한 교회의 조사결과보다는 사실에 근접할 것이라 믿고 있다. 이는 교회가 조사한 인구규모는 사회 전체를 커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참고로 카톨릭 인구는 동티모르 전체 인구의 반이 채 되지 못한다. 동남아 인접국들의 인구성장율을 기준하여 계산한다면 197568만 명이라는 보다 정확한 결과를 산출할 수 있으며 같은 방식으로 1980년에는 775,000명을 살짝 상회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산아억제정책을 감안하지 않은 수치다. 편차는 거의 정확히 20만 명이다. 산아제한정책은 50% 이상 효과를 냈으므로 약 45,000명 정도는 살해된 것이 아니라 이 시기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라고 크립은 주장한다. 또 다른 55,000명은 인도네시아 당국이 실시한 1980년 인구조사를 동티모르인들이 기피하여 발생한 단순한 누락이라고 간주한다. 그 외에도 1974-5년 사이에 인도네시아군을 피해 고향과 프레틸린을 떠난 대규모 인구이동, 내전에서 사망한 수천 명, 강점기에 벌어진 동티모르 전투원들의 전사, 프레틸린에 의한 학살 그리고 자연재해 등 일련의 다양한 요소들이 감안되어야 하므로 이 시기에 인도네시아군에게 책임이 있는 민간인 사망자 숫자는 더욱 줄어들어야 한다. 이 모든 면을 감안하면 1975-1980년 기간동안 살해당한 이들은 총 10만 명 이하일 것이며 최소한으로 잡자면 전체 민간인 인구의 10% 선인 6만 명 정도라고 크립은 주장했다.


그러나 키어넌은 이에 대한 반응으로서 1987년의 추정치와 교회가 해당 사회 전체에 접근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여 그 결과가 과소평가되어서는 안되므로 1974년의 교회 인구조사-비록 가능한 최대치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더라도- 역시 과소평가되어서는 안됨에도 불구하고 강점기 외부 노동력의 유입과 인구성장률의 증가를 주장하며 전형적인 사망률 위기가 1980년 인구통계의 신뢰도를 높인다고 말한다. 그는 1975~1980년의 기간 중 최소한 116,000명의 전투원들과 민간인들이 양측에 의해 살해되거나 자연적이지 않은 이유로 목숨을 잃은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만약 그의 주장이 맞다면 1975~1980년 사이에 전체 동티모르 인구의 약 15% 정도가 살해된 셈이다. (사진: 로버트 크립 교수)


 F. 히어스(F. Hiorth)는 이와 별도로 전체 민간인 인구의 13%(출산율 감소를 감안하여 73만 명 중 95천명)가 이 기간에 목숨을 잃었다고 추정했다. 키어넌은 출산율 감소를 감안하면 약 145천명이 사망한 것으로 전체 동티모르 인구의 20%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유엔 보고서는 그 중간치인 146천명이며 정치살인 분석가인 R.J. 럼멜(R.J.Rummel)15만 명으로 추정했다.


많은 관측자들이 동티모르에서의 인도네시아군 활동은 전형적인 제노사이드라고 주장한다. 옥스포드에서는 학회를 통해 이를 제노사이드라 규정하였고 예일대학에서도 제노사이드 연구프로그램의 일부로 이 사건을 다룬다. 동티모르 강점에 대한 사법적 의미 및 적용에 대한 연구에서 법학자 벤 솔(Ben Saul)은 국제법이 지정한 어떤 그룹도 인도네시아 당국이 특별히 타겟으로 삼은 것이 아니므로 일반적인 제노사이드란 혐의는 적절치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 역시 동티모르에서의 분쟁은 정치적 집단에 대한 제노사이드 또는 문화적 제노사이드라고 칭하는 것이 더욱 정확하지만 양쪽 모두의 개념이 국제법 상에서는 직설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고 첨언했다.

동티모르 강점은 크메르 루즈, 유고슬라비아 전쟁 및 르완다 제노사이드의 집단살인사건과 비교되곤 한다. 인도네시아측 사상자 내역은 대체로 잘 문서화되어 있다. 강점기를 통틀어 전투 중 사망한 2,300명의 인도네시아 병사들과 친인도네시아 민병대원들은 물론 병사 또는 사고사 한 사람들 모두의 이름이 남부 자카르타 찔랑깝(Cilangkap)의 인도네시아 군사령부에 세워진 세로자 기념비(Seroja Monument)에 각인되어 있다.

 



  

2) 사법정의

솔은 반인도적 범죄행위, 전쟁범죄 및 여타 전반적인 반인권 침해에 대해 책임져야 할 측을 기소하는 문제까지 거론했다. 강점이 종료되고 몇 해 후 일련의 소송들이 진행되어 판결을 앞두었다. UNTAET을 승인한 1999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문은 국제법과 인권법에 대한 체계적이고 광범위하며 극악한 위반의 실제 사례들과 함께 이러한 위반행위에 있어 가해자 측을 법정에 세워야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UNTAET은 중범죄조사국(Serious Crimes Unit-SCU)를 설치하여 이러한 범죄의 책임있는 개인들을 조사하고 기소하려 노력해 왔다. 그러나 SCU는 변변찮은 결과를 낳아 비난을 받았는데 이는 활동비용이 적절히 지급되지 않았고 1999년에 이루어진 범죄만 조사대상으로 한정하는 등 여러가지 제약이 있었다. 이러한 범죄자를 처벌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된 인도네시아측 재판에 대해 유엔 위원회는 명백히 적절치 못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재판거래세력이 사법농단세력에게 솜방망이 처벌로 끝내려는 것처럼 가해자 측인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의 반인권 범죄자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할 것이란 논리다.


이러한 절차상 문제들로 인해 많은 단체들이 과거 유고슬라비아와 르완다의 경우에 그랬던 것처럼 동티모르의 집단살인에 책임있는 개인들을 기소하기 위한 국제 재판소의 설립을 촉구했다. 동티모르 NGO인 라오 하무툭(La’o Hamutuk)2001년 사설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동티모르에서는 1975~1999년 기간동안 셀 수도 없는 반인권 범죄가 자행되었다. 단 하나의 국제법정이 이 모든 범죄들을 추적할 수 없다. 이것은……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침공하여 점령하고 파괴한 것이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범죄음모이며 정부 최고위 차원에서 기획되어 명령한 것임을 확인해 줄 것이다. 그 범죄자들이 동티모르의 이웃나라에서 여전히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동티모르와 인도네시아 양국의 평화와 정의, 그리고 민주주의의 미래는 고위급 범죄자들에게 과연, 어떻게 책임을 묻을 수 있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


강점기에 자행된 범죄의 진실을 밝히고 양국의 상처를 아물게 한다는 목적으로(동티모르는 분명 치명적 상처를 입었지만 인도네시아가 과연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2005년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의 진실 우애 위원회(Indonesia-Timor Leste Commission of Truth and Friendship)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 위원회가 가해자의 형벌 면제를 제시하고 있다는 면에서 NGO들의 비난을 받았고 유엔은 이 위원회의 인증을 거부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