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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강점 -(12)

beautician 2019. 3. 8. 10:00



8. 국제 반응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 침공과 점령에 대해 미국과 호주를 비롯한 서방국가들이 혹시나 공산주의를 조금이라도 지지하게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해 왔다. 하지만 그와 관계없이 동티모르를 침공하고 현지 저항을 가혹하게 핍박한 것이 인도네시아의 국가적 위상과 신뢰도에 큰 타격을 주었다. 개발도상국에서도 불거져 나온 인도네시아에 대한 비판은 1980년 수하르토가 오래동안 목표했던 인도네시아의 비동맹운동기구 회장국 취임을 결국 좌절시켰고 인도네사아에 대한 비난은 1990년대를 관통하며 지속되었다.

 


1) 호주

1974 9월 호주 수상 고프 휫틀램(Gough Whitlam)은 수하르토와 만난 자리에서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합병하려 한다면 자신들이 이를 지지할 것임을 시사한 바 있었다, 그러나 1975 11 11일 휫틀램 내각은 총사퇴했다. 프레이저(Fraser)의 과도정부는 많은 제약을 안고 있었으므로 12 12일 선거결과가 나올 때까지 뭘 하려 해도 양대 정당의 승인을 동시에 받아야만 했다. 1975124일 호주는 동티모르 독립을 결정할 유엔 결의안을 얻어내려 노력하다 뜻을 이루지 못했자 호주인들은 물론 다른 외국인들을 모두 딜리로부터 소개시켰다. 인도네시아의 침공이 임박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호세 라모스-호르타가 다윈에 도착한 것은 125일의 일로 그는 호주 적십자의 원조팀들과 국가간 티모르 원조를 위한 호주사회’(ASIAT)의 동티모르 활동이 금지되었다고 말했다. 그 기자회견에서 라모스-호르타는 동티모르와 프레틸린 정부가 호주를 포함하는 유엔의 원조를 받지 않을 것이라며 선을 그었다.


하지만 12월 선거를 이긴 후 프레이저 과도정부는 매우 중요한 동남아시아와의 교역 및 정치적 연계를 위해 이미 잃고 만 명분 따위는 내팽개치기로 결심했다. 호주는 1976년과 1977년 유엔총회 결의에서 탈퇴해 동티모르를 공식적으로 인도네시아의 한 주로 인정한 첫 서방 정부가 된 것이다. 이제 호주는 동티모르에서의 이권에 대해 인도네시아 정부와 직접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1년 후 호주와 인도네시아는 티모르 갭(Timor Gap)이라 불리는 해양지역의 자원을 분배하는 협정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그 지역에는 대략 70억 배럴의 원유가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와의 전반적인 경제협력관계와 함께 이 협정은 호주정부의 입장을 나타내는 핵심 요소로서 자주 언급되곤 했다. (사진: 1978년 인도네시아의 합병을 인준한 호주는 티모르 갭(티모르 해협)에서 발견된 천연자원을 어떻게 배분하느냐에 대해 인도네시아와 협상을 시작했다)


태평양 전쟁 중 일본군의 티모르 침공이 시작되어 호주군과 일본군의 전투 중에 동티모르인 약 6만 명 가까이 사망한 것을 기억하는 일부 호주인들은 예전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동티모르에 특별한 빚을 졌다고 생각한다. 호주 의회의 선임 외교자문위원 제임스 던(James Dunn)은 일본군의 동티모르 침공전, 그리고 점령 중에 “1941년엔 동티모르가 가졌던 매우 핵심적인 전략적 가치가 1974년에는 이치에도 닿지 않고 없어도 상관없는 것이 되었다고 말했다. 비슷한 이유로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은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점령을 반대했다.


후임 호주 정부는 인근 가장 큰 우방이며 호주 북부해안에 안보 완충지대를 만들어주는 인도네시아와 우호적,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동티모르 문제만이 걸림돌이었다. 호주는 동티모르의 독립지지 지도자인 호세 라모스-호르타에게 중요한 피신처를 제공하고 망명기간 내내 호주에서 사는 것을 허용했다. 호주와 인도네시아의 교역은 1980년대에 크게 성장해 키팅(Keating) 노동당 정부가 1995년 인도네시아와 안보조약을 맺고 자카르타와의 관계를 우선순위 상위에 랭크시켰다. (사진: 태평양 전쟁 당시 딜리의 일본군들)


1998년 수하르토의 몰락과 하워드 정부의 호주 정책변화는 동티모르 독립에 대한 찬반투표를 하도록 하자는 제안을 내놓게 했다. 존 하워드 총리와 알렉신더 다우너 외무상(Alexander Downer)는 인도네시아에게 호주의 정책변화를 알리는 서한을 초안하면서 동티모르에게 10년 내에 독립찬반투표를 할 기회를 주자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이를 받아든 B.J 하비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인도네시아를 식민정권으로 매도하는 내용이라 보고 격분하면서 즉각적인 찬반투표 실시를 결정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UN이 후원한 국민투표가 1999년에 열렸고 압도적인 숫자가 독립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러나 뒤이어 독립을 반대하는 민병대가 선봉에 선 폭력적 충돌과 안보위기가 벌어지자 호주는 유엔의 동티모르 국제군(INTERFET)을 주도하며 폭력을 종식시키고 질서를 회복시키려 했다. 호주는 목적한 바 역할을 잘 해냈지만 그 댓가로 인도네시아와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에 그 후 몇 년이 걸렸다.



호주 노동당은 1999년 동티모르에 대한 정책을 바꾸어 동티모르의 독립을 지지하면서 외교부 대변인 로리 브레레튼(Laurie Brereton)을 통해 인도네시아의 철군을 촉구했다. 하지만 집권 자유당-국민당 연합정부는 브레레튼과 알렉산더 다우너 외무상, 하워드 총리의 신뢰성을 공격했다. 그들을 지지한 이가 당시 평의원이었던 케빈 러드(Kenvin Rudd)였는데 그는 후에 노동당 당수가 되어 2007년 호주 연방선거 승리에서 당을 승리하도록 하는 활약을 펼쳤다. (사진: 알렉산더 다우너 호주 외무상)

 








2) 필리핀


필리핀은 인도네시아와 견고한 외교관계를 가지고 있어 처음엔 동티모르 이슈에 무관심한 편이었다. 그래서 필리핀은 1997년 당시 필리핀 딜리만 대학(University of the Philippines Diliman)에 강연할 목적으로 온 호세 라모스-호르타의 입국을 거부했고 피델 V, 라모스 대통령은 그를 이민국 블랙리스트에도 등재시켰다.


그러나 많은 국가들이 동티모르의 입장을 지지하자 필리핀도 결국 정책선회를 시도했다. 티모르가 독립했을 때 필리핀은 INTERFET에 지상군을 참가시키지 않고 대신 병참과 의료병력을 파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 평화유지군이 INTERFTE으로부터 동티모르의 치안업무를 넘겨받을 때 유엔은 필리핀 장성인 제이미 드 로스 산토스(Jamie De Los Santos) 중장을 완편된 평화유지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사진: 제이미 드 로스 산토스 중장)


1969년 육사입학 후 필리핀 군에서 승승장구한 드 로스 산토스 중장은 해외에서 평화유지군 사령탑을 맡은 첫 필리핀 장성이었고 이후 동티모르 임시정부(UNTAET)의 군총사령관도 역임했다. 그는 2001년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대통령에 의해 필리핀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고 20024월 전역했다.


동티모르와 같은 로마 카톨릭 전통을 가지고 있는 필리핀은 쉽게 동티모르의 우방이 되어 지금까지 우호적인 관계를 견지해 오고 있다. 호세 라모스-호르타는 필리핀이 블랙리스트에서 제외한 후 필리핀 딜리만 대학, 필리핀 공예대학(Polytechnic Univercity of the Philippines), 드 라살레 대학(De La Salle University) 및 아테네오 드 다바오 대락(Ateneo de Davao University)에 자주 강연을 나가고 있다.

 


3) 포르투갈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침공한 바로 다음날 포르투갈은 인도네시아와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침공을 비난하는 유엔 결의문을 지지해 왔다. 그러나 1970년대말, 1980년대 초의 포르투갈 정부는 이 이슈를 계속 밀어붙이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 미국의 인도네시아 전문가 베네딕트 앤더슨은 그러한 포르투갈의 망설임이 EU 가입신청을 한 당시의 불안감에서 기인했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 포르투갈은 국제적 압력에 탄력을 받으며 비난의 목소리를 다시 높였고 동티모르의 자결권을 위한 국제포럼에서 가장 열띤 발제를 하는 국가가 되었다. 1990년대를 통틀어 포르투갈은 인도네시아에 대한 유엔 중재국의 일원으로서도 역할을 다했다.

 


4) 미국

1975년 미국은 베트남으로부터 철수를 마친 상태였다. 충실한 반공국가였던 인도네시아는 미국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균형추로 인식되었으므로 동티모르의 비식민지화 프로세스보다 인도네시아 정부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시기였다. 더욱이 미국은 인도네시아 섬들 사이 심해 협곡을 통과하는 잠수함 항로를 인도와 태평양 사이에서 적국 감시를 피하는 비빌통로로 계속 유지하길 원했다. 


동티모르 침공 하루 전 미국무장관 헨리 키신저, 제럴드 포드 미대통령과 수하르토 대통령 회담

 

동티모르 침공 하루 전 제럴드 R. 포드 미대통령과 헨리 A 키신저 미국무장관이 수하르토를 만나 이 자리에서 침공을 승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티모르에 대한] 신속하고 극단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상황임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라는 수하르토에 말에 포드는 우린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이 문제로 당신을 압박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문제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당신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키신저 장관은 단순히 이에 동의를 표했지만 속내는 미국 무기가 침공에 사용되는 것이 일반의 우려를 불러 일으키고 미국의 찬성을 받아내겠다는 인도네시아 정부의 의도로 다른 사람들이 다른 의견을 꺼내기 두려워하게될 것이라 우려했다. 미국은 침공이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상대편의 저항이 오래 지속되지 않기를 원했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매우 신속하고도 성공적이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키신저가 수하르토에게 했다는 말이다.


미국은 동티모르 침공과 점령 기간내내 인도네시아에 무기를 공급했다. 동티모르 침공 일주일 후 국가안보위원회(National Security Council)은 미국이 공급한 군용장비들이 동티모르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분석결과를 내놓았다. 미국 정부는 인도네시아가 방위 목적으로만 미국 무기들을 사용하기로 규정한 양자협약을 위반했는지 여부를 국무부가 조사하여 보고할 19766월까지 197512월분의 무기인도를 연기한다고 발표했지만 실제로 군사원조는 계속 인도네시아에 흘러 들어갔고 키신저가 인도네시아에 대한 무기판매를 중단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 국무부 직원을 징계한 일도 있었다. 키신저는 자신의 정책에 대해 미국 국민, 특히 의회가 보일 반응에 대해 우려하며 서류에 나타난 모든 내용들이 결국 날 옭아매게 될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1975년부터 1980년 사이 동티모르에서의 폭력이 극에 달했을 때 미국은 인도네시아 정부에게 약 34천만불에 달하는 무기를 공급했다. 인도네시아에 대한 군사원조와 무기판매는 1974년부터 늘어나 부시 행정부와 클린턴 행정부에서도 그 추세는 멈추지 않다가 1999년에 가서야 증가세가 멈췄다. 1975년부터 1995년까지 인도네시아에 대한 미국의 무기공급량은 11억 달러에 달했다. 클린턴은 국방부의 JCET 프로그램 하에서 인도네시아 특전사부대(Kopassus)에게 도심 게릴라전, 감시, 대정보전, 저격전술, 심리전 작전 등의 훈련을 제공했다.


유엔의 동티모르 포용, 진실 및 화해 위원회(Commission for Reception, Truth and Reconciliation in East Timur- CAVR)는 최종보고서의 책임편에서 1975년부터 1999년 사이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에 대한 침공 및 점령에 있어 미국의 정치, 군사적 지원이 결정적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 보고서 92페이지에서는 미국이 제공한 무기들은 1977년부터 동티모르 저항군을 와해시키는 인도네시아의 대규모 작전능력 강화에 크게 기여했고 특히 미국이 공급한 항공기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프레틸린은 미국이 동티모르에 대한 인도네시아 정부의 목적을 지지해준 것은 외교적 지원과 물질적 협조 수준을 크게 넘어선 것이라 주장해 왔다. 1978619일 호주 시드니 발 UPI 통신 보도에 따르면 미 군사자문관들과 용병들이 프레틸린 군에 맞서 최소한 두 번의 전투에 참전해 인도네시아 군인들을 도왔다, 이 시기에 미군 조종사들이 인도네시아 공군에 제공된 OV-10 브롱코 항공기를 조종하여 프레틸린 해방구 지역에 대한 공습과 폭격에 참여했다는 프레틸린의 보도자료를 인용하기도 했다.


미국은 인도네시아의 침공을 비난하는 대부분의 유엔 결의안에 참여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의 유엔대사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핸(Daiel Patrick Moynihan)은 훗날 자신의 자서전에서 미 국무부는 유엔이 채택한 모든 조치들이 아무 효과가 없었다고 드러나기를 기대했다, 그 임무가 내게 주어졌고 난 지극히 성공적으로 이를 수행했다고 회고했다. (사진: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핸 당시 주 유엔 미국대사)

 



5) 다른 나라들

영국, 캐나다, 일본 등 다른 나라들도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점령을 지지했다. 영국은 동티모르와 관련한 모든 유엔 결의문에 참여하지 않았고 점령기간 내내 인도네시아에 무기를 팔았다. 1978년 영국은 인도네시아에서 BAE 호크 제트(BAE Hawk jet) 훈련기를 판매했는데 이들은 포위 및 섬멸 작전에 동원되었다. 1990년대에도 같은 기종 수십 대가 인도네시아에 판매되었다. 캐나다는 동티모르에 대한 유엔의 초기 결의안들에 참여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 중 세 개의 결의안에는 반대표를 던졌다. 강점기 내내 캐나다 정부는 정기적으로 인도네시아에 무기를 판매했고 1990년대에는 4억 캐나다 달러 규모의 무기부품 수출을 승인했다. 일본은 동티모르에 대한 유엔총회 결의한 여덟 개 모두에 반대표를 던졌다.


인도 정부도 동티모르 사태를 자신들의 1961년 고아(Goa) 강점과 견주며 인도네시아를 지지했다. 일부 분석가들은 1962년 프랑스의 폰디체리(Pondicherry) 이양사례에서와 같이 인도네시아의 조치지연은 동티모르의 평화로운 합병을 어렵게 할 것이란 논평을 내기도 했다. 아세안 회원국들도 동티모르의 자결권을 요구하는 유엔총회결의안에 지속적으로 반대표를 던졌다. 한 마디로 동티모르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침공과 강점이 진행되는 동안 세계는 대체로 동티모르인들에게 등을 돌렸던 것이다.  (사진: BAE 호크젯 전투기)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