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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갑질

beautician 2019. 4. 15. 10:00


예수의 갑질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누가복음 19장 29~34절)



종려주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기에 못박힌 고난일 또는 성금요일이라 부르는 4월 19일이 인도네시아에서는 법정 공휴일입니다.

그 이틀 전인 수요일 17일은 공교롭게도 인도네시아 대선 투표일로 임시 공휴일 이니 17일부터 21일(일)까지 때아닌 긴 연휴를 갖는 회사들이 많습니다. 


교회들은 4월 21일(일) 부활절까지 분위기를 죽 고조시켜 왔습니다. 

예수의 탄생과 죽음에 대한 기념을 골자로 하는 기독교의 정점은 역시 십사가 사건이 있으니만큼 그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은 축제 분위기인 성탄절에 비해 좀 더 비장한 분위기를 띕니다. 그런데 매년 반복되는 설교를 듣다 보면 왜 조금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지 않는지 의아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바로 저 위 누가복음 귀절의 사건같은 것 말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앞서 제자들을 시켜 마을에 들어가 나귀새끼를 끌고오라 하죠. 

그리고 나귀주인이 왜 나귀를 푸냐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 하라 합니다.


"주가 쓰신다 하라."


나귀 주인의 제지를 받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무작정 남의 재산을 가져가려는 낯선 사람들에게 주인이 달려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시킨 대로 대답하고 나귀를 끌고 왔고요. 


이 사건에 대해 목사님들은 여러가지 성스러운 해석들을 내놓습니다.

대체로 기독교는 이 장면을 제시하며 순종해야 귀하게 쓰인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겐 꼭 그렇게만 보이지만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장면에서 위력에 의한 강요, 즉 '갑질'이 보이기도 합니다.


나귀 주인은 그 대답을 듣고 과연 흔쾌히 나귀를 내놓은 것일까요? 

당시 이스라엘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큰 랍비가 나귀를 쓰겠다니 기꺼운 마음이었을까요? 아니면 내키지 않으면서도 어쩔 수 없었던 걸까요?  물론 서는 이에 대해 더 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이 겸손함의 표시였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나귀도 타지 않고 두 말로 걸어 들어감으로서 더욱 큰 겸손을 보이려 하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예수님은 이때 오만의 정점에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에 들어가면서 평소엔 전혀 하지 않았던 '세레모니'의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영광스러운 예루살렘 입성을 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의 장사치들을 쫒아내며 기염을 토하시죠. 잡히시던 밤이 오기 직전까지 예수는 자신의 커리어 정점을 향해 끝없이 올라가는 듯 보입니다.

거기 오만이 잠시 자리잡았더라도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닙니다.  인간적으로 충분히 그럴만 한 상황입니다.

그러니 무리해서 남의 나귀를 가져오라 시키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걸어들어가기보다는 성서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 나귀를 타려 하는데 그 정도는 너희들도 이해해 줘야 하지 않겠니.....라고요.

아마도.


그런 후 겟세마네에서 피를 토할 듯한 기도를 통해 그 모든 오만을 회개하며 예수는 하나님께 자신의 운명을 다시 온전히 맞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스카리옷의 유다가 데려온 병정들에게 붙잡혀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과 로마병사들에게 고난을 받은 끝에 십자가에 달리면서 성금요일은 피로 얼룩지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이런 해석은 교단 관계자들에겐 매우 위험한 불장난입니다.

당장이라도 이단이란 딱지가 붙을 테니 말이죠.

예수가 오만했다고 대놓고 말하면 십자가에 못박겠다고 달려들 목사들, 광신도들이 눈에 선합니다.


기독교란 애당초 그런 것입니다.

갑질조차도 신앙의 이름으로 겸손함으로 둔갑시키는 그런 곳 말입니다.



2019. 4.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