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매일의 삶

블랙베리 수리하기

beautician 2012. 3. 12. 20:59

 

엄청난 사람들이 붐비는 ITC 쯤빠까마스에서 토요일 이른 오후 시간 4층을 헤매고 있었던 이유는 핸드폰이 고장났기 때문이었어요. 블랙베리가 맛이 간 겁니다.

 

예전엔 항상 다이어리를 끼고 다녔고 한때는 메모의 대가라고 불리던 적도 있었습니다. 필요한 모든 것은 다이어리를 뒤지거나 지갑에 끼우고 다니는 작은 수첩을 열어 보면 모두 찾을 수 있었거든요. 하지만 랩톱이 데스크톱을 몰아낸 것처럼 점점 똑똑해지는 핸드폰이 수첩과 다이어리를 몰아내더니 급기야 구형 핸드폰들도 신형 스마트폰으로 교체되어 가는데 그 세대교체의 주기가 이젠 도무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져서 보통은 구형제품들이 도태되어야 정상인데 이젠 사용자마저 덩달아 도태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자동차는 기본적으로 네 바퀴가 잘 굴러가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으니 핸드폰도 전화기로서의 역할만 충실히 하면 된다는 게 지론이었지만 결국 변화하는 세태에 굴복하여 오랫동안 썼던 구형 노키아를 던져버리고 블랙베리를 산 지도 1년이 좀 넘은 시점이었습니다. 문제는 간신히 사용법을 익혀 전화기로서의 용도 외에도 여러가지 부가 기능들을 제법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었는데 갑자기 화면이 먹통이 되어 버린 겁니다. 화면이 하얗게 변하더니 부가기능은 고사하고 전화도 안되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죠. 더욱 큰 문제는 다이어리에 있었어야 할 모든 자료들, 즉 수백명의 전화번호와 그간 문자 메시지로 오간 거래선과의 교신내용 등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막혀 버린 것입니다. 당장 그날 오후 방문할 예정이었던 거래선의 전화번호조차 핸드폰 없이는 기억해 낼 수 없었어요. 당연히 핸드폰을 고치는 일이 최우선 과제가 되어버렸고 그래서 평소 같으면 붐비는 인파와 감당할 수 없는 먼지, 그리고 그 와중에 활약하는 소매치기들 때문에 웬만하면 가지 않는 ITC 쯤빠까마스를 주말에 방문하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4층에만 한 천 개쯤 될 것 같은 수많은 핸드폰 가게들 중 내가 처음 방문한 블랙베리 전문판매점 주인의 대답은 단호했습니다.

 

소프트웨어가 고장났어요. 이건 전부 다시 깔아야 하는데 데이터는 다 날아갑니다.”

 

청천병력 같은 얘기입니다. 그 데이터를 살리려고 바쁜 시간을 쪼개 ITC 쯤빠까마스를 들른 것이니까요. 게다가 난 고개를 갸우뚱거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가게 주인은 하얗게 변한 내 BB LCD를 보더니 밧데리를 뺐다가 다시 끼웠는데요. 그건 수리하러 오기 전에 나도 몇번씩이나 반복해 보았던 행동입니다. 대개의 사소한 고장이나 오작동은 그렇게 밧데리를 분리했다가 다시 끼워 재부팅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수정되고 고쳐지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이번 문제는 그렇게 해도 개선되지 않았고 그래서 가게 주인에게도 내가 밧데리 다시 끼워 보았다는 얘기를 막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가게 주인이 소프트웨어 고장 얘기를 하는 겁니다. 밧데리를 다시 끼운 내 BB는 아직 부팅도 되지 않은 상태인데 말이죠. 도대체 이 친구는 뭘 보고 소프트웨어 고장이라고 하는 걸까요?

 

다시 깔아요?”

 

가게주인은 어느새 랩톱에 연결된 USB를 내 BB에 끼우려고 하면서 내 결정을 재촉합니다. 난 급히 그의 손을 잡아 쥐어야 했습니다. BB 안의 데이터를 그렇게 간단히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다른 방법을 찾아 볼래요. 죄송….”

 

난 내 BB를 돌려 받고 그 가게를 총총히 떠나며 점점 더 황망한 마음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데이터를 날린다는 건 오래된 친구들과의 결별, 거래선들과의 소통장애 등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여러가지 요소들 중 중요한 몇몇 부분들을 영원히 잃어버리는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허무하게 데이터를 날린 후 다시 복구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로 방문한 블랙베리 전문 서비스센터에서도 창구직원은 똑 같은 얘기를 반복할 뿐이었어요.

 

소프트웨어 문제에요. 하지만 어쩌면 하드웨어 때문에 발생한 문제일 수도 있어요. 보증서를 가져 오세요. 저희가 확인해 보고 하드웨어 문제인데 아직 보증기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새 것으로 바꿔 드릴 수도 있고 수리되더라도 보증기간이 끝났으면 비용을 내셔야 해요. 하지만 소프트웨어를 다시 깔면 데이터는 살릴 수 없어요.”

 

새 것으로 바꾸던 소프트웨어를 다시 깔든 어차피 데이터는 소실된다는 얘기입니다. 전문 서비스센터에서도 그렇게 얘기하는데 이젠 정말 절망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맡기려 하는데 보증기간이 끝나 돈을 내겠다는데도 굳이 보증서를 꼭 가져와야 한다고 해서 좀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BB를 수리 맡기지 못한 채 돌아 나와야 했습니다.

 

망연자실하여 아직 4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문득 2년 전 일이 기억났습니다. 그때는 내 토시바 랩톱이 문제였습니다. 당시 내 랩톱은 저가형으로 나온 거의 첫번째 모델이었는데 구매한지 2년쯤 지나자 속도가 많이 느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일주일에 몇 번씩 제멋대로 전원이 나가 버리곤 했습니다. 작업하던 자료들이 많이 날아갔지요. 랩톱이 뜨거워져서 그럴 거라는 전문가 조언에 팬을 사서 설치하고 강제송풍기까지 갖다 붙였는데 결국은 한번 컴퓨터를 켜기 위해 20-30번씩 부팅한 끝에야 간신히 성공하는 대책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보고 수소문한 끝에 상아지(Jl. Sangaji) 거리에 있는 토시바 서비스 센터를 방문했었죠.

 

뿔테 안경을 쓰고 영리해 보이는 젊은 현지 직원이 내 랩톱을 이리저리 들여다 보고 몇번 부팅을 해 보더니 기판의 문제라며 기판 전체를 바꿔야 한다고 했어요. 그 비용이 새로 사는 가격의 3분의 1을 넘었으므로 느린 컴퓨터를 억지로 고쳐 쓰느니 새 것을 사는 게 나은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랩톱을 델(Dell)로 새로 장만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몇 주가 지난 후 그래도 지난 수년간 잘 써왔던 그 토시바 랩톱이 아까워 컴퓨터가게들이 많은 ITC 쯤빠까마스 맨 위층에서 수리점 몇 군데를 둘러 보며 조언을 구했죠. 대부분 토시바 서비스센터에서와 마찬가지로 기판을 바꿔야 한다고 했지만 그 중 한 수리점에서 흥미로운 얘기를 했습니다.

 

…., 한 번 맡겨 놔 보세요. 내가 보기엔 팬이 안돌아가는 것 같은데…., 팬이 고장난 건 아니고 먼지가 많이 쌓여서…., 그래서 열이 내려가지 않는 것 같아요…., 그리고 어뎁터도 가져와 보세요. 부팅하다가 전원이 나갈 리 없는 일인데…, 어쩌면 어뎁터나 플러그에 접촉불량이 있을 수도…”

 

그랬습니다. 그 수리점에서 기판과 팬의 먼지를 깨끗이 청소한 내 토시바 랩톱은 다시 정상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어요. 그간 전원이 나갔던 것은 물론 랩톱이 뜨거워졌기 때문인 적도 있었지만 하루에도 수십번씩 전원이 나간 이유는 밧데리가 더 이상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뎁터 전선에 접촉불량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기판이 아니라 어뎁터만 새것을 사면 해결되는 문제였지요. 전문점이라는, 전문 서비스센터라는 곳에서 헛소리를 한 것이고 그렇게 불과 15만 루피아의 청소비용을 내고 간단히 고칠 수 있는 것이었는데 랩톱을 새로 한 대 사고 말았던 것입니다.

 

뭔가 새로 깔아야 한다, 새것으로 바꿔 끼워야 한다는 얘기는 이 나라 사람들이 너무 쉽게 하는 얘기지요.  차에 문제가 생겨 정비소를 가면 한국 같으면 이것저것 조사도 해보고 테스트를 해 본 후에 정비사가 자기 의견을 얘기하고 비용을 최소화해 주려 번거로운 부분까지 협조해 주려 노력하는 게 보통인데 인도네시아에서는 무조건 부품을 새것으로 갈아야 한다고 얘기하는 경우가 대부분 입니다. 그렇게 매번 전부 새것으로 갈아 넣으면 고치지 못할 게 어디 있을까요?

 

그러니 중요한 일은 한 두 사람 얘기만 믿어서는 안되는 것임을 새삼 절감했던 순간이었죠. 이 나라 사람들 하는 말 중 쏘 따우”(sok tau)라는 말은 인니인들의 일반적 성품 중 하나를 대변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번역하자면 쥐뿔도 모르는 놈이 아는 척 하기는….’ 정도의 의미가 되겠지요. 그래서 차를 몰고 나선 지방 초행길에서 다른 여행자나 주유소 등에서 길을 물었다가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되는 경우가 종종 생기기도 합니다. 길을 알려주는 사람은 자기도 잘 모르면서 모든 걸 다 아는 척 당당히, 뻔뻔스럽게 얘기하기 때문이지요. 길을 물을 때도 그렇고 차를 정비할 때도 그렇고 컴퓨터를 수리할 때도 그렇고 블랙베리를 고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소한 4-5명에게는 물어 봐야 하는 거지요.

 

나는 그래서 ITC 쯤빠까마스의 4층을 떠나기 전에 최소한 몇 군데에 더 물어봐야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들른 또 한군데의 BB 판매전문점 주인 아저씨는 전혀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12 5천 루피아면 내가 다 수리해 드릴게.  30분이면 돼요.  데이터?  데이터가 왜? 절대 안날아가지. 요즘은 핸드폰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컴퓨터잖아요? 백업 안되는 컴퓨터가 어디 있어? 데이터는 잘 백업해 놨다가 프로그램 깐 다음에 다시 돌려 놓으면 끝. 간단해요.”

 

이건 복음이었습니다.

비록 약속한 30분의 두 배가 걸렸고 그래서 난 할 일없이 ITC 쯤빠까마스의 4층부터 6층까지를 할 일도 없이 배회해야 했지만 돌려받은 내 블랙베리는 다시 바탕화면이 떠올라 있었고 모든 것이 원상복귀되어 있었어요. 12 5천 루피아가 전혀 아깝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내가 다운로드 받았던 프로그램들이 그대로 남아 있지?

 

블랙베리 기본 프로그램 말고도 내가 그 후에 따로 다운로드 받았던 Whats app 같은 프로그램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 좀 이상하긴 했어요. 소프트웨어를 다시 깔았다는 건 컴퓨터의 윈도우 프로그램 같은 운용프로그램을 다시 깔았다는 얘기일 텐데 말이죠. 잘은 모르지만 따로 백업해 놓은 게 아니라면 그런 경우 기본프로그램을 제외한 다른 프로그램은 모두 날아갔어야 정상이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죠. 블랙베리를 다시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한 것이죠. 그래서 이 얘기는 데이터 날릴 거란 헛소리를 했던 첫 가게며 전문 서비스센터에 비웃음을 날려 주며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날 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Whats app 업데이트를 하려는데 내 BB에 이런 메시지가 뜨기 시작했어요.

 

이 서비스를 사용하시려면 먼저 블랙베리 아이덴터티를 업데이트 해야 합니다.

 

그래? 오케이, 업데이트.

업데이트 프로그램을 다운로드 하자 이번엔 이런 메시지가 뜹니다.

 

이 업데이트를 사용하시려면 핸드폰을 재부팅해야 합니다. 리스타트(restart) 할까요?

, 아니오, 무시.

 

당연히 예를 눌렀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벌어졌어요.  이미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에 화면이 하얗게 변하면서 내 블랙베리가 다시 먹통이 된 것입니다. 젠장!!

 

다음날 아침 난 내 블랙베리가 불과 1년 사용한 끝에 장렬히 전사한 것이라고 스스로 진단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다시 사야 한다면 블랙베리는 절대 아니고 삼성 갤럭시나 아이폰을 사겠노라 다짐하고 있었죠.  그런데 일요일인 그날 오후 일찍 메이에게서 내 에시아 전화기에 메시지가 왔습니다.  혹시 모르니 한 번 더 정식 서비스 센터에 가 보라고요. 마침 그날 메이가 들렀던 끌라빠가딩 롯데마트 건물에 상당히 큰 블랙베리 서비스센터가 입점해 있는 것을 봤던 것입니다. 마침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라 이게 마지막 시도라고 생각하며 차를 몰아 갔습니다.

 

얘가 살이 좀 쪘네요.”

 

내 블랙베리 밧데리를 꺼내든 서비스센터 직원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잘 몰랐어요.

그러더니 자기 블랙베리를 열어 밧데리를 내 핸드폰에 끼우는 겁니다. 내가 얘기했죠. 그거 내가 어제 수십 번 해 본 행동이라고. …., 그런데 이게 무슨….!  내 블랙베리는 로딩이 끝나면 액정이 다시 하얗게 변해버렸는데 이번엔 배경화면이 뜨면서 정상적으로 작동이 되는 겁니다.

 

밧데리가 오버차지 되면 이렇게 되곤 해요. 너무 오래 충전하면 안된다고요.”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밧데리를 전원에 연결시킨 상태로 오래 놔두면 옛날 내 토시바 랩톱의 밧데리가 그랬듯이 충전 후 사용가능한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던 일이지만 충전을 너무 오래 했다고 해서 밧데리가 핸드폰에 그런 영향을 끼친다는 얘기는 처음 들어 보거든요. 물론 핸드폰이나 전기계통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상식인지도 모르지만요.  아닌 게 아니라 문제가 된 내 밧데리는 몸통부분에 좀 불룩하게 돌출된 부분이 느껴졌습니다.

 

소프트웨어 문제가 아니에요?”

소프트웨어는 아무 문제도 없어요. 이건 밧데리가 고장난 거죠. 새로 사셔야 해요.”

 

그럼 어제 ITC 쯤빠까마스에서 걔들은 도대체 뭘 한 거야?

25만 루피아를 내고 밧데리를 새로 사 끼웠습니다.  5시간 충전한 후 이 단추 저 단추를 눌러 보았지만 정상 작동. 리스타트 했는데 역시 정상. BBM 업그레이드 후 리스타트, 역시 정상….

 

정말 밧데리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ITC 쯤빠까마스에서 첫번째 방문했던 그 가게주인이 왜 그리도 당당하고 자신있게 데이터를 날린다고 장담했는지는 알 길이 없지요. 마지막 가게 주인이 내 BB를 수리하면서 실제로 뭘 어떻게 한 것인지도 알 길이 없습니다. 정말 미스터리죠?

 

인도네시아에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미스터리의 연속입니다.

 

 

2012. 3.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