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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매일의 삶

운전면허증 만들기 (2009년)

beautician 2009. 11. 11. 00:54

 

 

 

올해도 운전면허증을 갱신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말았습니다.

 

2008년에 부패가 완전히 사라진 다안 모곳 (Daan Mogot)의 면허시험장(경찰서)을 방문했던 기억이 생생했지만 그로부터 불과 반년 후 딸이 싱가폴에 가기 전 운전면허를 신규발급 받기 위해 갔을 때 돈을 요구하는 창구 직원이 있었다는 얘기에 인도네시아 공직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렇듯 면허시험장의 부패 역시 그렇게 쉽게 사라지기 어려운 고질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생활에서 우리가 매일 부딪히면서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인도네시아의 부패현실에도 불구하고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정권이 들어선 후 부패척결을 위한 많은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대통령궁을 제외한 인도네시아 공직사회 거의 대부분이 부패척결위원회(KPK)의 전 수장 안타사리 아자르(Antasari Azhar)에게 화살을 겨누어 국영회사 PT. Putra Rajawali Banjara의 사장 나스루딘 줄카르나엔(Nasrudin Zulkarnaen) 청부살인의 주범으로 몰아 매장시키는 등 KPK를 오히려 범법조직처럼 몰고 가는 작금의 상황도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당시 안타사리는 나스루딘의 정부이자 땅거랑 BSD 소재 가딩라야(Gading Raya) 골프장의 캐디였던 미모의 아가씨 라니 줄리아니(Rani Juliani)와의 치정에 얽혀 질투를 참지 못한 그가 청부살인을 지시했고 그래서 승용차로 골프장을 떠나던 나스루딘을 오토바이로 따라잡은 두 명의 군인 중 한 명이 권총으로 사살했다는 것이 당시 발표된 사건의 요지였지요. 그러나 수백억 루피아(한화 수십억원)에 달하는 비자금이 나스루딘의 정부 캐디 라니의 개인 구좌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에서 비자금 세탁을 깨끗하게 처리하지도 못하고 급기야 꼬리까지 밟힌 나스루딘을 그 비자금의 원소유주, 또는 집단이 도마뱀 꼬리를 자른다는 차원, 본보기를 보인다는 차원에서 백주에 처형해 버리고 차제에 공명정대해마지 않아야 할 KPK의 수장을 가장 파렴치한 치정살인, 그것도 청부살인의 주범으로 엮어 넣었다는 냄새를 강하게 풍겼습니다.

 

몇 년 전부터 해상선적한 제품이나 자재 컨테이너들의 통관이 까다로워지고 그 일정을 가늠하기 어렵게 된 것도 수입상 등 관련 당사자들에게 있어서는 재난에 가까운 일이지만 그 역시 수입 통관 과정에서 투명성을 추구하기 위한 일련의 규칙과 장치들이 마련되면서 종래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뒷돈을 챙기기 힘들게 된 세관 등 관련 공직자들이 규정을 필요 이상으로 엄격히 적용하여 수입상들을 더욱 어렵게 하여 자발적으로 뒷돈을 바치도록 유도하는 과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후유증인 것이죠. 4년이 넘도록 그 후유증이 사라지지 않고, 때로는 오히려 더욱 심해진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그 부패의 뿌리가 너무도 깊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고 상식이 통하는 공직사회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더욱 더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노력의 흔적이 11월의 면허시험장에서도 곳곳에 눈에 띄었습니다.

 

그러나 면허시험장을 찾은 나는 첫 날 그 흔적을 보기는커녕 본관 현관문 앞에서 건물 안에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돌아 나와야만 했습니다. 내가 도착했던 시간은 오후 2 30. 늘 하던 아침 미팅을 11시 반경에 마치고 수라바야로 보내야 할 물건을 안쫄(Ancol)인근 수라바야 전문 택배회사에 맡기는 등 급한 일들을 처리하면서 차를 몰았던 것인데 그 시간에 현관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습니다.

 

접수마감은 정오까지요. 면허증 발급도 3시에 끝나니 내일 다시 오셔야겠소.”

 

현관을 지키고 있던 경관이 하던 말이었습니다.

오후 3시까지면 아직 30분이나 남았는데 그럼 면허증 발급까지는 기대하지 못하더라도 신청서라도 받아갈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그는 결국 나를 건물 안에 들여 보내주지 않았고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사무실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다음날은 오전 10시에 출발했지요.

예전엔 불과 30분이면 새 면허증을 받을 수 있었지만 작년 내 딸은 거의 4시간이나 걸렸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었고 이번엔 또 어떻게 절차가 변해 있을지 알 수 없어 오후 3시까지는 반드시 갱신 면허증을 받겠다는 각오로 서두른 결과였습니다. 만일을 위해 우리 회사의 필드캡틴 이메이(Imey)도 대동했습니다. 작년에도 이메이는 내 면허 갱신 때 대동했는데 그 전엔 현장에서 경찰관 등 브로커들을 통해 늘 25만 루피아에서 40만 루피아 사이를 내던 비용을 단돈 75,000 루피아만 내고 발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영수증이 나오는 정상 비용은 72,000 루피아였으므로 겨우 3,000 루피아가 추가로 지급된 것이었죠. 기적적인 일이었고 당시의 면허시험장은 전혀 부패를 찾아 볼 수 없는 쾌적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올해 갱신 면허증을 받기까지의 절차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1. 건강 검진 : 주차장에 차를 댄 후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은 본관 건물에서 주차장 건너편에 있는 건강검진소(Test Kesehatan) 였습니다. 창구에서 수수료 Rp20,000을 내고 티켓을 받아 안쪽 사무실에 들어가 5초도 걸리지 않는 시력검사를 받습니다. 그게 건강검진의 전부였어요.

 

2. 수수료 납부 : 그런 다음 본관으로 향했습니다. 주차장을 가로지르는 동안 볼륨을 있는 데로 높힌 안내방송이 한창이었습니다.

 

내방객께서는 브로커를 사용하지 마시고 안내원들의 안내를 따라 본인이 직접 수속하시면 훨씬 빠르고 효과적으로 면허증 발급을 받을 수 있사오니….”

 

면허시험장에서 이런 안내방송이 나오리라고 그전에는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불과 2년전까지만 해도 면허시험장에는 수백명의 브로커들이 진을 치고 호객행위를 하는 곳이었고 일반인들 외에도 안내 데스크의 경찰관들, 심지어 청소부들까지도 도와주겠다고 접근하면서 30~70만 루피아를 요구하던 것이 보통이었으니까요. 자카르타 면허시험장의 문화가 이제 정말 바뀐 것이라고 생각할 뻔 했습니다. 주차장을 빠져 나갈 때 주차원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내 곁을 스치듯 지나가며 속삭이는 소리를 듣기 전까지 말이죠.

 

내가 면허 내 줄까요? 70만 루피아? 50만 루피아?”

 

그럼 그렇지

 

본관에 들어서면 정면에 안내 데스크가 마련되어 있고 그 뒤쪽엔 면허증 받는 절차가 전광판에 표시되어 있었어요. 습관적으로 안내 데스크로 향하는 내 소매를 이메이가 잡아 당겼습니다.

 

아무한테도 물어보지 마세요. 돈만 더 들어요.”

 

아차 싶었습니다. 주차장에서는 아직도 예의 안내방송이 한창이고 현관 바로 옆에는 불만신고접수 전화번호가 대문짝만하게 적혀 있었지만 본관 로비에는 브로커로 보이는 사람들이 신청자들을 이리 저리 데리고 다니는 모습이 보였고 그 중에는 정복을 입은 경찰도, 자바 전통복장에 화장을 진하게 한 여경들도 보였기 때문입니다. 안내 데스크에는 이미 4~5명의 신청자들이 뭔가를 묻고 있었는데 그 주변에 데스크 안쪽과 바깥쪽으로 경찰과 여경들 여러 명이 모여들어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도와주겠다는 것이겠죠.

 

안내데스크 우측 뒤쪽으로 신청서를 내 주는 접수창고에 줄을 서서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창구직원이 퉁명스럽게 내뱉듯 말을 합니다.

 

“BRI duli!”

 

베에르이 둘루. 이 얘기는 BRI 은행에 먼저 다녀 오라는 얘기입니다.

안내 데스크를 가운데 두고 창구 반대편에는 BRI 은행지점이 입점해 있었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곳 창구 앞에는 번호표를 받는 기계가 하나 있고 가격표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신규 : Rp75,000

갱신 : Rp60,000

 

나는 갱신이니 6만 루피아를 내고 은행창구에서 번호표가 달린 용지를 한 장 받았습니다. 앞에 건강검진을 위해 2만 루피아를 먼저 냈으니 결국 운전면허 갱신을 위한 정식 비용은 8만 루피아, 한화 1만원 정도인 셈입니다.

 

이것이 현 유도요노 대통령 정권이 이룬 부패 척결의 개가였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면허증 갱신을 위한 실제비용은 불과 Rp72,000 이었지만 각 창구마다 돈을 요구하고 브로커를 사용하면 브로커 수수료를 포함해 최소 25만 루피아, 물정 모르고 달라는 대로 주게 되면 많게는 100만 루피아 이상도 내야 했던 종래의 부패관행을 BRI 은행지점을 입점시켜 수수료 지불창구를 일원화시킴으로써 일거에 해소해 버린 것입니다.

 

 

3. 신청서 양식 수취 : BRI 은행창구에서 받은 양식에는 뭔가 기재하도록 되어 있지만 이것은 해당 비용을 냈다는 영수증 이상도 이하도 아니므로 아무 것도 기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재해야 하는 것은 이제 그 BRI 영수증을 가지고 아까의 창구로 가서 받는 신청양식이지요. 그러나 현 정권의 부패척결 의지가 통하는 곳은 BRI 은행지점까지였습니다.

 

신청서 발급창구 직원의 질문이 사람을 곤란하게 했습니다.

 

얼마 기부하시겠소?”

 

이건 또 무슨 소리?

 

얼마 내면 되는 거에요?”

, 성의껏 내시면 되는 거요.”

성의껏요? 그럼…”

 

창구 직원은 차마 금액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메이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5천 루피아 짜리 지폐를 꺼내 주었습니다. 현지인들도 2만 루피아, 5만 루피아짜리 지폐를 꺼내 주는 것을 보았는데 5천 루피아로 될까 싶었고 처음부터 퉁명스럽던 창구직원의 표정이 일순간 적의까지 보이기도 했지만 신청서 양식을 내주지 않을 수는 없었지요. 그러나 비용을 줄이려던 이메이의 순발력은 다음 창구부터 역효과를 내기 시작합니다.

 

그 창구에서는 1천 루피아짜리 영수증 5장을 주었는데 그것이 다음 창구에서 내가 얼마를 냈는지의 증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4. 신청서 접수 : 양식 발급 창구 앞의 간이 기재대에서 양식을 채운 후 우린 다시 BRI 은행지점 앞을 지나 본관 건물의 안쪽으로 향했습니다. 거기엔 지하철 개찰구 비슷한 것이 중간 문에 설치되어 있고 경찰들이 앉아 있었어요. 유리창에는 신청자 외 출입금지라는 경고 스티커가 붙어 있었습니다.

 

외국인이요?”

 

함께 들어가려는 이메이에게 시비를 거는 경찰관이 내 신청서를 보고 그렇게 묻습니다. 이메이와 함께 들어가려면 인도네시아어를 모르는 척 하는 게 상책이죠.

 

당신 인도네시아 말 하시오?”

하하, 굿 에프터눈. 오피써.”

 

한번 웃어주는 것으로 일단 통과.

외국인은 19번 창구로 가라고 했는데 18, 20번 창구에는 창구 직원이 앉아 있었지만 19번 창구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아직 시간은 11 40분을 막 지나고 있었는데 19번 창구직원은 이미 점심식사라도 하러 간 모양이었습니다. 하긴 하루에도 수백, 수천명이 면허증 때문에 방문하는 이곳 면허 시험장에도 외국인은 하루에 많아야 20~30명 정도일 테니 창구에 계속 앉아 있는 것도 비효율일지 모르지만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창구직원을 기다리는 외국인의 입장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19번 창구.”

“19번 창구.”

 

18, 20번 창구의 직원에게 외국인 면허갱신 문의를 했지만 아무도 대신 처리해 주려는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모두 화가 나있는 듯 퉁명스럽게 19번 창구로 돌아가라는 얘기만 할 뿐이었어요. 그러나 19번 창구의 직원은 여전히 자리를 비운 상태였습니다. 그러다가 창구 위에 전광판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004. 20번 창구

 

이런 식으로 전광판에 불이 들어와 있었는데 우리가 번호표를 뽑아 오지 않아 직원이 대기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까 개찰구 가까이의 로비로 돌아가니 정말 그곳에 번호표를 뽑는 기계가 있었습니다.

 

1. 만료 1년 이상 면허증 갱신, 2, 면허증 손상, 분실로 인한 재발급 5개의 메뉴가 나와 있었는데 3번이 외국인 면허등록이었고 나는 그 번호를 눌렀습니다. 그와 동시에 아까 창구 쪽에서도 ~’하며 부저가 큰 소리로 울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 기계에서 번호표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죠. 다시 3번을 눌렀습니다. ~”하는 큰 부저음. 그러나 여전히 번호표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또 다시 부저를 누르려 하자 지나던 경찰관이 얘기합니다.

 

고장난 지 오래요. 그냥 창구에서 기다려요.”

 

대책 없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다시 창구에 돌아갔지만 19번 창구는 여전히 비어 있었어요. 이미 시간은 정오가 넘고 있었습니다. 전날 현관 앞에서 돌아 나갈 때 경찰관이 하던 말이 기억났습니다.

 

접수는 12시까지요.”

 

그날 그렇게 돌아갈 때 운전사가 하던 말도 기억났습니다.

 

“3시에 무조건 창구를 닫기 때문에 당일 면허증이 나오지 않으면 다음 날 다시 가야 되요. 그런 일 비일비재 합니다.”

 

접수도 못하고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까 울리 부저의 효과가 있었는지 들여다 보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는 옆 방에서 빠꼼히 머리를 내밀고 19번 창구에 서 있는 우리쪽을 바라보더니 잠시 후 창구로 다가왔습니다. 드디어 접수하게 되는가 싶었어요.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세요.”

 

자기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외국인이 창구 앞에서 장시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도 않은 듯 했어요. 이메이는 체념한 듯 창구 앞에 즐비하게 늘어선 대기의자에 앉았고 나도 10여분 함께 앉았지만 이렇게 기다리다가는 끝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 아까는 우리가 부저라도 울리고 창구 앞에 서있기라도 했으니 누가 나와 봤던 것인데 이렇게 대기의자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는 푸시(push)하는 효과가 있을 리 만무했어요. 난 다시 19번 창구 앞으로 갔습니다. 창구에 기대 창구선반에 오른손 네 손가락으로 피아노 치듯 두들기기 시작했죠. 큰 소리가 나진 않았지만 여기 기다리는 사람 있다고 공지하는 효과로서는 충분했어요.

 

그러기를 5분쯤. 드디어 한 사람이 못 이기듯 옆방에서 나와 창구에 앉았습니다.

 

시앙, !”

 

안녕하쇼! 반가운 맘에 그렇게 말하는 데 어느새 달려온 이메이가 또 소매를 당겨 나를 뒤로 잡아 뺍니다.

 

이메이는 작년에 나와 내 아내, 그리고 두 아이의 운전면허를 갱신하고 신규발급 받으면서 이 대목을 가장 껄끄러워 했습니다. 내 면허갱신 때에는 아무 문제없이 넘어갔지만 아내의 경우에는 공공연히 돈을 요구하는 것을 자기 전화번호를 주는 것으로 갈무리했고 아들과 딸의 운전면허 신규발급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얼마간의 뒷돈을 신청서에 끼워 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창구직원이 여자일 경우에 이메이는 더욱 곤란해 했어요. 그녀는 남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구워삶을 자신이 있었지만 그 마력이 여경들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인니어를 할 줄 아는 외국인에게라면 더욱 강력하게 뒷돈을 요구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다행히도 그날 창구에 앉은 사람은 남자였습니다. 이메이는 바로 작업을 시작했지요. 하지만 아까의 기부금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지만 기부금 낸 영수증을 접수창구에 같이 내도록 되어 있었거든요.

 

당신 저 외국인 데려온 사람이요?”

그런데요?”

한국사람?”

.”

돈 좀 더 내라고 해요. 한국사람들은 돈도 많을 텐데. 5천 루피아가 뭐야? 밥값이라도 좀 끼워 넣으라고 해요.”

나도 아직 밥값 못받았는데요. 아저씨, 나 짤리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요? 아까 5천 루피아도 내 지갑에서 나온 돈이라고요.”

 

이메이는 그렇게 승강이를 하면서 간신히 서류를 접수시켰어요.

아까 BRI 은행에서 면허갱신을 위한 정식 수수료를 이미 완납했지만 각 창구에서는 그렇게 계속 돈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경험으로서는 그 신청서 접수창구가 가장 집요하게 돈을 요구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접수창구를 통과한 이상 남은 사진촬영, 지문날인 및 서명, 면허증 발급 등의 순서는 그간 아무런 문제도 없던 곳이었습니다. 이제 다 끝난 것이나 다름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것은 전혀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5. 사진촬영, 지문날인 및 서명 : 사진촬영과 지문날인, 서명을 하는 수속은 컴퓨터로 이루어집니다. 23번부터 26번의 4개 창구에서 진행되는데 디지털 카메라와 지문인식기, 펜보드 등이 연결된 컴퓨터가 설치된 책상 앞에서 담당 직원의 지시에 따라 왼손, 오른손 엄지의 지문을 날인하고 서명하고 사진촬영을 하는 것이죠.

 

작년과 달라진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그간 경찰서 안에서도 디지털카메라를 도난당하는 사고가 많았는지 카메라는 용접한 금속 박스에 체포당한 듯 들어가 렌즈만 내놓고 있다는 점이었고 또 하나는 로비 쪽에서 통하는 문들이 모두 닫혀 있다는 것이었어요.

 

우린 맨 끝의 26번 창구로 먼저 들어갔습니다.

 

외국인은 23, 24번 창구로 가세요.”

 

우린 24번 창구로 들어갔습니다.

 

외국인은 25, 26번 창구로 가시오.”

“26번에서는 이쪽으로 가라고 하던데요?”

아무튼 이쪽은 바쁘니 다른 창구로 가요.”

 

이 사람들은 모두 뭔가 화가 나 있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우린 이번엔 다른 사람들이 들어서든 25번 창구로 따라 들어 갔습니다. 다른 창구에 비해 현저히 붐비지 않던 이 창구의 직원은 우리가 들어서자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 앞에 들어온 사람들의 사진촬영을 하다가 갑자기 이메이에게 말을 던집니다. 다른 창구에서와 같이 퉁명스러운 말투로요.

 

컴퓨터가 고장이요. 다른 창구로 가시오.”

 

앞 사람 촬영과 날인 등을 잘 처리하고 있으면서 이게 또 무슨 소리입니까?  나도 이메이도 다른 창구들에서 쫓겨나면서 이미 기분이 몹시 상하고 있었는데 너만은 절대 안해 주겠다는 의도가 명백한 이 창구 직원의 말투에 화가 머리끝까지 솟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꾹 참고 이번엔 23번 창구로 들어가려 문을 열었습니다.

 

들어오지 마!”

 

문을 반쯤 열었을 때 컴퓨터 앞에 자바 전통복장에 짙은 화장을 한 40대 후반 내지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경이 소리를 질러 댔습니다. 창구 안의 대기 의자에는 15명 정도의 사람들이 빈틈도 없이 앉아 있었고요.

 

다른 창구들에서도 다 다른 방으로 가라는데 여기도 안되면 우린 사진 어디서 찍어요?”

 

이메이가 대들 듯 대꾸하자 여경은 정말로 화가 난 목소리를 더욱 돋구웠습니다.

 

아무튼 난 기도하러 갈 거라구요. 딴 데로 가라면 가요!”

 

어이가 없었습니다.

본관 건물 앞에는 커다란 간판을 달아 놓았고 거기엔 ‘KAMI SIAP MELAYANI RAKYAT’ 이라고 적혀 있었어요. 까미 시압 멀라야니 락얏이 말은 우린 국민들을 위해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는 뜻이지요. 그러나 말만 그럴 듯 했을 뿐 이 사람들은 국민들에게 봉사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아니면 내가 외국인이라서 그랬을까요? 난 자기들 국민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요?

 

이 상황에서 그 표어는 고쳐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KAMI SIAP MELAYANI RAKYAT kalau sempat.’ 이라고요. 국민들한테 봉사는 나중에 여유가 되면 좀 해 볼라나…” 라는 뜻으로요.

 

이제 우린 23번에서 26번까지 모든 창구를 돌았지만 전부 거절을 당하고 만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린 다시 24번 창구로 들어갔습니다. 이번에도 마침 우리 앞에 들어가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창구직원에게 넘겨주던 서류에 끼워진 2만 루피아 짜리 지폐가 얼핏 보였습니다.

 

여긴 바쁘다니까.”

왜들 핑퐁치고 그래요? 당신도 컴퓨터 고장이에요? 이젠 대기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군요, . 잔말 말고 우리도 사진 찍어 줘요!”

 

이메이가 세게 나가자 창구직원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 서류를 받아 들었고 우린 대기의자에 앉았어요. 드디어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리고 거기서 알았습니다. 사진을 찍으러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우리처럼 로비 쪽 문을 사용하지 않고 모두 방 뒤편 좁은 복도로 나 있는 문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요. 그리고 그들이 창구직원에게 내미는 서류에는 5천 루피아에게 5만 루피아 사이의 지폐가 대부분 끼워져 있다는 것도요.

 

부패척결의 반작용이라고 할까요? BRI 은행지점이 들어서면서 예전 같은 전면적인 부패가 불가능해지자 이젠 각 창구에서 더욱 철저히 돈을 요구하는 상황이 되었고 예전에는 누군가 챙겨 주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대놓고 트집을 잡거나 돈을 요구한 경우가 한번도 없이 오히려 친절하기만 했던 사진촬영 창구마저 경찰들의 영업장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왼손.”

오른손.”

서명.”

앉아.”

 

찰칵!

 

“30번 창구!”

 

마치 범죄자를 취급하듯 퉁명스럽기 이를 데 없었던 24번 창구직원은 화가 나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면허 갱신을 위한 모든 절차가 끝난 것이고 이젠 30번 창구에 가서 기다렸다가 갱신된 면허증을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최소한…, 우린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6. 갱신 면허증 수령 : 아이러니 한 것은 24번 창구에서 가라고 했던 30번 창구가 사실은 없다는 것이었어요. 어쩌면 30번 창구라는 팻말이 떨어져 나가 없어진 것인지도 모릅니다. 모퉁이를 사이에 두고 28번 창구와 31번 창구 사이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었습니다. 31번 창구 바로 옆에 (아마도 30번 창구라고 생각되는) 창구에서 발급된 면허증을 나누어 주고 있었고 그 앞에 200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대기실이 있었지만 30분 넘게 기다려도 내 이름이 불리지 않자 30번 창구가 어딘가에 따로 있어 우리가 지금 전혀 틀린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어요.

 

내가 30번 창구가 따로 있나 찾아보고 올게.”

 

이메이에게 그렇게 말하고 건물의 개찰구 안쪽 공간을 한 바퀴 돌아 보았지만 30번 창구는 없었습니다. 아까 기다리던 곳이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기다리던 100여명의 신청자들이 모두 면허증을 받아 돌아갔고 내 뒤에 대기실에 도착한 사람들도 50명 넘게 면허증을 받았는데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 틀림없었어요. 우린 아까 24번 창구에서 싸웠던 일과 직원이 짓고 있던 한없이 퉁명스러운 표정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결국 우린 24번 창구로 되돌아갔어요.

 

어떻게 된 거에요? 30분도 넘게 기다렸는데 면허증이 왜 안나와요? 어디 컴퓨터 좀 봐요. 프린트 된 거에요?”

다른 사람들 먼저 사진 찍고 나서…”

프린트 했는지 보자니까요? 아직 프린트 안했으면…, 한 번 혼나 볼래요?”

 

이메이가 24번 창구에서 난리를 벌였습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서도 상대방이 화내지 못하고 어쩔 줄 모르게 만드는 것도 한 사람의 능력입니다. 그런 능력을 이메이가 가지고 있었어요. 남자가, 그것도 외국인이 신청자들이 줄 서 기다리고 있는 창구에서 그렇게 언성을 높였다면, 그것도 명색이 경찰서인데, 좋게 끝났을 리 없지요. 그러나 창구직원의 반응은 이메이를 진정시키며 방 뒤쪽 복도로 데려 나가려는 것이었고 그게 돈을 달라는 요구로 이어질 것을 간파한 이메이는 방 안에서 더욱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인쇄 중

 

그것이 그 창구직원이 컴퓨터에 다시 띄운 내 자료화면 밑에 떠 있던 글이었어요. 아직 10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 대답을 듣기 위해 이메이는 은근한 눈초리로 치근덕거리기 시작한 창구직원에게 또 자기 전화번호를 준 결과였습니다.

 

그때는 이메이도 몰랐던 일이지만 그 창구직원은 내 면허증의 인쇄를 보류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난 무작정 기다리다가 24번 창구를 찾아 갈 수 밖에 없는 일이고 기다리다 지치면 빨리 처리해 달라고 몇 푼 쥐어줄 것을 기다린 것이지 싶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면허시험장 업무가 끝나는 오후 3시까지 기다리고서도 면허증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을지 모릅니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이메이가 24번 창구에서 언성을 높일 때 사진촬영 의자에 앉아 어쩔 줄 모르던 중년의 인도네시아 남자가 30번 창구에서 바로 내 앞에 호명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메이가 난리를 치자 그제서야 24번 창구직원이 내 면허증의 인쇄 버튼을 누른 것이고 그래서 그 중년남자와 동시에 면허증이 인쇄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30번 창구에서도 그렇게 그냥 끝나지 않았습니다.

 

“5천 루피아 내시오.”

?”

“5천 루피아!”

 

그게 면허증용 푸른색 지갑의 값이라는 겁니다. 작은 명함첩처럼 생긴 그 지갑엔 경찰청 로고가 날림으로 새겨져 있었는데 지갑엔 들어가지 않는 크기였으므로 사실 사용하기 불편한 것임에도 그것을 30번 창구에서 5천 루피아를 받고 강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신청서 양식 발부창구에서부터 면허증 발급 창구까지 매 창구마다 돈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렇게 해서 그날 면허증 갱신이 끝났습니다.

정규 비용 Rp80,000. 작년보다 8천 루피아가 오른 가격이지요. 거기에 기부금 5천 루피아와 푸른색 지갑 값 5천 루피아를 더해 9만 루피아가 들었습니다. 획기적인 가격이지요.

 

면허시험장에 도착한 것이 11 5분경이었고 떠난 것이 오후 1 20분쯤이었으므로 2시간 15분 정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기부금을 조금 더 냈다면, 그리고 사진촬영 창구에서 돈을 쥐어 주었다면 시간은 한 시간 남짓으로 대폭 줄어 들었겠지요.

 

그것이 인도네시아의 현실이고 다안 모곳(Daan Mogot) 면허 시험장의 오늘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부패추방을 위해 여러가지 방법과 장치를 모색하며 실행하고 있지만 공무원들을 그 틈을 파고 들어 여전히 부패를 저지르고 있는 셈입니다. 그것도 예전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던 때와 달리 신청자들을 어렵게 만들어 자발적으로 뒷돈을 쥐어주게 만드는 소극적인 방향으로 선회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수속을 브로커를 통하지 않고 직접 진행한다면 신청자들은 진행과정에서 조금 마음을 다치는 일은 있겠지만 다시는 25~100만 루피아에 달하는 말도 안되는 비용을 운전면허증 갱신을 위해 지불할 필요가 없어진 것도 사실입니다. BRI 은행지점을 설치한 것이 주효한 것이죠. 그것이 면허시험장의 모든 경찰관, 직원들이 퉁명스러운 화난 표정을 짓고 있던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 이상을 기대하는 것이 인도네시아에서는 무리일까요?

그러나 부패척결을 위한 인도네시아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이 계속되는 한 모든 상황은 날로 개선되어 가겠지요. 그래서작년에도 그랬듯이 난 면허증을 갱신하면서 인도네시아의 내일에 또 다시 작은 기대를 걸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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