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매일의 삶

달리는 차에 매달린 새끼 고양이

beautician 2013. 12. 2. 22:16



 


난폭한 트럭이며 컨테이너 로리들이 속력을 내는 도로에서 나도 질세라 지그재그로 차를 몬 것이 어느새 20여분. 강렬하게 쏟아지는 음악소리를 뚫고 계속 신경을 자극하던 어떤 소리 때문에 카스테레오를 껐을 때 갓난아기의 가느다란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습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있지도 않은 갓난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은 분명 좋은 징조가 아닙니다.


당시 나의 94년형 다이하추 페로자(Feroza)는 쓰리도어 찝이었는데 새 차는 아니지만 아기귀신이 붙을 정도로 을씨년스러운 상태도 아니었고 별로 넓지 않은 내부공간을 한눈에 휙 둘러보는 것만으로 차 안에 떠돌아 다니는 도깨비불이 없다는 걸 확인하기 충분했습니다. 그렇다면 애기 울음소리는 도대체 어디서 들려온 것일까요?


이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은 내가 아직 북부 자카르타의 주택단지인 따만모데른(Taman Modern)에 살고 있을 때이지만 나중에 쯤빠까마스(Cempaka Mas)아파트로 이사 갔을 때 그곳 경비원들로부터 들은 으스스한 얘기가 있습니다. 새벽 일찍 안쫄(Ancol) 해양공원 페리 선착장에 주인 가족들을 데려다 주고 아파트로 돌아오던 운전사는 셈뻬르(Semper) 갈래길이 나오는 톨 밑에서 갑자기 나타난 일단의 사람들을 치고 맙니다. 아직 아침 해가 떠오르기 전 어스름 속이었어요. 황급히 급정거를 하고 돌아보았을 때 도로에 널브러져 있어야 할 피해자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헛것을 봤던 것일까요? 이상한 기분이 들어 황망히 그 장소를 이탈한 운전사는 잠시 후 아까 자기가 치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좀비처럼 스산한 모습으로 차 뒷좌석에 웅성거리고 있는 것을 룸미러를 통해 발견하고 기겁을 합니다. 돌아 보면 아무도 없지만 룸미러에만 비치는 그들은 핏기 없는 섬뜩한 얼굴을 하고서 운전사의 뒷머리를 잡아당기려 했다는데 그 정도면 중간에 차를 버리고 달아났어야 마땅할 그 운전사는 책임감이 남달리 투철했는지 그 와중에서도 기어이 아파트까지 차를 몰아 왔고 그 난폭한 운전에 아파트 경비원들이 몰려왔을 때 운전사는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거품을 물고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오전 10시경. 비록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쾌청한 날씨는 아니지만 귀신 나올 시간은 절대 아니었죠. 하지만 아기 울음소리는 여전히 들려옵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아기 울음소리가 아니라 고양이 울음소리인 것 같았습니다. 철책선 부근에서 근무했던 군시절, BOQ 근처에서 저런 아기울음소리 같은 고양이소리를 많이도 들었던 것을 기억해 냈습니다. 사방에서 들려오던 그 소리에 처음엔 소름이 끼쳤지만 6.25 당시 격전지였던 그곳에 당시 죽은 아기 원혼들이 아직도 돌아 다니는 것이라고 너무나 간단하게 수긍해 버렸었죠.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발정난 고양이들의 울음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차 안에서 들려오는 고양이 울음소리는 발정난 것 같진 않았고 마치 새끼고양이가 낑낑 앓는 소리 같았습니다.


결국 차를 세우고 좀 살펴봐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 위치가 하필이면 자카르타 해양수송의 관문인 딴중쁘리옥(Tanjung Priok) 앞길. 유지보수 상태가 형편없는 도로변 좁은 보도를 따라 줄지어 세워진 철조망 너머로 하늘을 찌들 듯한 컨테이너 빌딩들이 끝도 없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 너머 뒤쪽 멀리엔 대형 크레인들이 머리꼭지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당시 무법지대로 악명을 떨치던 딴중쁘리옥 지역은 아침시간에도 넥타이를 단정히 틀어 맨 나 같은 외국인들이 함부로 나다닐 곳이 아니었어요. 선원들을 위한 싸구려 술집이며 클럽들이 즐비한 그곳 도로변엔 기회만 된다면 가차없이 어금니를 드러내고 덤벼들 불량배들과 양아치들이 우글거리기도 했는데 내가 차를 세우고 차 밑을 들여다 보는 사이 어디선가 사람들이 스믈스믈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98년 자카르타 폭동 때에도 비교적 피해가 경미했던 북부 자카르타에서 유독 딴중쁘리옥만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던 것을 기억해 내면서 내 머리 속에서 경고등이 점멸하며 비상 사이렌을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공습경보, 공습경보, 이건 실제상황이오니....

슬금슬금 내 뒤로 다가서던 사람들을 뒤늦게 발견하고 나는 허겁지겁 차에 올라 황급히 차를 출발시키면서도 아까의 그 고양이 소리를 다시 떠올렸습니다. 몇번씩이나 들여다 보았던 차 밑엔 아무것도 없었어요. 정말 고양이가 있었다면 이미 뛰어 내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시내 순환고속도로의 톨게이트 입구가 가까워지자 다시 폭우가 내리치며서 평소 흙먼지에 덮여 있던 아스팔트 도로가 세찬 빗줄기에 원래의 우중충한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고양이 울음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한 것은 그 고속도로에 막 올라섰을 때였어요. 그 소리만으로는 고양이가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었지만 딱히 차를 세울 곳이 없는 고속도로에서 목적지까지 앞으로20km 정도 더 달려가야 하는데 계속 뒤따라 다니는 이 정체불명의 고양이 울음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은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본네트를 열어보면 뭔가 중요한 부품이 통째로 빠진 듯 듬성듬성 빈 공간이 많은 내 페로자 찝은 정차중이라면 고양이 일개 중대가 들어가 놀아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이미 숙소에서부터 상당한 거리를 달려오면서 뜨겁게 달아오른 엔진이나 복잡한 배관들 틈에 아직까지 굳세게 매달려 있을 만한 수퍼고양이가 있다는 얘기는 어디에서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고양이 소리는 차 뒤쪽에서 들려왔는데 그쪽에 타이어, 스프링, 업소버 등 고양이가 끼거나 걸리면 치명적인 것들 투성이였어요. 시속 80km가 넘는 속도로 달리던 차 안에서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저 고양이 울음소리는 지금 그 뒤쪽 어딘가에 고양이가 꼼짝 못하게 끼어 있다는 확신을 주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벌써 오래 전에 뛰어 내렸을 테니까요.


고양이가 아직 죽지 않았다면 고속도로 한가운데서라도 차를 세우고 그 놈을 꺼내 줘야 했습니다. 하지만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가 자꾸 비겁함과 타협하게 만듭니다. 목적지인 빤쪼란(Pancoran)의 코린도 빌딩까지 이미 반쯤 달려온 상황. 꺼내 주더라도 고양이는 이미 치명상을 입었거나 최악의 경우 만신창이 걸레가 되어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와이퍼 사이로 바퀴 어딘가에 꼬리나 뒷다리가 끼어 바퀴가 한번 돌 때마다 휘돌려져 아스팔트 바닥에 머리를 힘껏 내다 꽂고 있는 고양이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이제 잠시 후 어디서든 차를 세우게 되면 그렇게 너덜너덜해진 고양이 시체를 바퀴나 회전축에서 끌어내야 할 것이고 그러다가 고양이 몸뚱어리가 뚝 떨어져 나오기라도 하면 난 거기 어딘가에 남아 있게 될 고양이의 머리나 발목 등, 아무튼 죽은 고양이의 몸 어느 한 조각을 한동안 차 밑에 매단 채로 자카르타를 돌아다니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끔찍한 상상이 자꾸 꼬리를 물었습니다.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오는 것으로 봐서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 모르나 차 밑엔 고양이가 안전하게 올라탈 공간이 절대 없었고 그런 환경에서 살아 남을 고양이도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 집을 나설 때 집 앞을 배회하던 한 무리의 고양이들이 있었습니다. 엄마고양이가 이끄는 네 마리의 새끼고양이들이었어요. 새끼들은 오늘 아침 우리 집 앞 골목 일대의 쓰레기통들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었는데 어미 고양이는 천방지축인 애들 때문에 잔뜩 스트레스라도 받았는지 우리 옆집 차고로 기어들어 가다가, 그저 쳐다보고만 있었던 나한테 송곳니를 드러내고 마치 압력밥솥에서 수증기가 빠지는 듯한 쉬-익 하는 소리를 내며 신경질을 부렸습니다.


그 새끼 네 마리는 내가 차에 시동을 걸 때까지도 쓰레기통에서 발견한 생선조각을 가지고 내 차 밑에서 추격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지금 저 아래 어딘가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녀석은 그 와중에 어쩌다가 빠져나가지 못한 그 중 한 마리일 것이라는 판단이 섰습니다. 생판 모르는 녀석도 아니고 평소 알고 지내던 놈이라고 생각하자 더욱 마음이 편치 못했어요.


주택단지 뒤쪽 풀장입구 화단에서 그 녀석들이 태어난 것은 대충 2개월쯤 전의 일이었고 그때 어미고양이의 배 밑으로 파고들며 젖을 빨던 손바닥 1/3정도 크기의 새끼들은 아직 눈도 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평소 성질 더러운 어미도 그때는 출산에 힘을 다했는지 누가 새끼고양이들을 안아 보아도 신경질 부리기는커녕 거의 움직이지도 못했습니다. 화단에 고양이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준 사람은 풀장에서 일하던 직원이었는데 동네고양이들 꼬리를 닥치는 대로 절단하거나 부러뜨리는 악의적 장난이 일상화된 이곳에서 생활의 여유도 없는 그가 주인 없는 고양이들을 보살핀다는 사실이 자못 의외였습니다. 내가 겪어본 인도네시아의 빈민들은 대부분 곤경에 처한 자들을 도와주기는커녕 더욱 철저하게 착취하고 그들 위에 군림하려 들곤 했거든요.


"저것들도 알라가 주신 생명인데 그냥 버려둘 수는 없죠. 하지만 당분간이에요. 이제 새끼들이 눈을 뜨면 쫓아내지 않아도 자기들이 알아서 나가겠죠."


그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풀장 화단의 그 보금자리는 비어있기 일쑤였고 고양이들은 온 동네를 몰려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누런 줄무늬 두 마리와 검정 줄무늬 두 마리. 그 검정 줄무늬 중 한 마리는 다른 형제들보다 덩치가 반 밖에 안되는 발육부진이었지만 형제들보다 더한 장난끼로 똘똘 뭉쳐 있었어요그들 중 한 마리가 그날 내 차 밑 어딘가에서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무실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웠을 때 난 착잡하기 이를 데 없는 심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고양이 울음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어요. 너무 늦어버린 것입니다. 이제 고양이 시체를 끌어내야 할 시간이었어요. 오피스보이인 딜라(Dilla)에게 카톤박스를 갖고 내려오라고 전화할 때 차에 고양이 시체가 있다는 말을 들은 내 파트너 릴리는 펄쩍 뛰며 뭘 하려는 거냐고 히스테리를 부렸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그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직접 카톤박스를 깔고 차 밑에 기어들어가진 않더라도 최소한 지상 주차장 화단이나, 어딘가 적당한 곳에 고양이를 손수 묻어 주려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딜라나 주차장 경비원들에게 부탁한다면 오늘 가엾은 죽음을 당한 고양이는 쓰레기통에 버려질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차 안에서 비상용 손전등을 꺼내 차 밑을 다시 비추자 빗길을 달린 차에서 아직도 뚝뚝 떨어지던 물방울들이 마치 고양이가 죽어가며 흘린 핏방울처럼 느껴져 설마 하는 마음에 떨리는 손가락으로 한번 찍어보게 됩니다. 물론 그건 그냥 흙탕물이었어요. 하지만 조명 때문일까요? 내 눈에는 페로자 찝이 피로 물들어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때….


야옹~


뭐시라? 야옹이라고?


주차장이 너무 어두운 탓이었을까요? 이 고양이는 죽자마자 거치기간도 없이 바로 귀신이 되어 등장하려는 것일까요? 난 반사적으로 차 밑 더욱 안쪽에 손전등을 이리저리 비춰 보았습니다. 하지만 차 밑에는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등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다시 몸을 일으켜 주변을 돌아보니 내 차 건너편에 주차한 끼장(Kijang) 밴 뒤로 가도가도(Gado-gado)를 파는 구내매점과 거기 앉아 있는 다른 운전사들이 보였습니다. 로비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는 정복을 차려 입은 경비원도 한 명 서 있었고요. 이 정도면 귀신 나올 분위기는 아닌데 저들에게는 이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까요?


미심쩍은 마음에 다시 차 밑을 헤집던 손전등을 오른쪽 뒷바퀴 위의 시커먼 공간에 비쳤을 때 그 안에서 나타난 작은 얼굴이 나를 소스라치게 했습니다. 검정 줄무늬. 발육부진, 그 녀석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름통 위에 그런 공간이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바퀴 스프링 위엔 기름통으로 통하는 작은 입구(?)가 나 있었고 그 기름통 위에 고양이가 장시간 매달려 있을 만한 비교적 큰 공간이 있었던 것입니다. 고속으로 돌던 타이어가 쏟아 붓던 흙탕물을 고스란히 뒤집어 쓴 손바닥만한 작은 고양이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그 입구에 머리를 내밀고 있었습니다. 잡으려고 손을 뻗치자 안쪽으로 슬금슬금 도망가는 것이 어딘가에 껴 있는 것도 아니고 다치지도 않은 것이 분명했습니다. 단지 쾌적한 승차감과는 전혀 관계없는 그 좁은 공간에서 험한 도로를 고속으로 달려온 탓에 멀미를 하고 있을 것임은 분명했어요. 오늘 아침 어쩌다가 그 위까지 기어 올라갔던 그 녀석은 결국 빠져나올 찬스를 잡지 못한 채 40km는 족히 될 거리를 나 몰래 무임승차 해온 것입니다. 뒤늦게 내려온 딜라와 함께 차 밑으로 기어들어가 흙투성이가 되어가며 고양이를 간신히 끄집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적잖은 시간과 노력이 더 들었지만 내내 참담한 상상을 했던 난 비로소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 소동을 벌이는 동안 주차장 경비원들과 기사들이 내 차 주위에 몰려 들었고 내가 고양이를 안고 차 밑에서 기어 나오자 모두 탄성을 지르며 박수까지 쳐 주었습니다. 영웅이 된 기분이었어요. 하지만 정작 내 두 손 안에 쏙 들어와 안긴 흙투성이의 고양이는 구출과정에서 또 다시 쇼크를 먹은 듯 오돌오돌 떨고만 있었습니다.


"갖다 버렸다구??"


아까 차 밑을 기느라 흙투성이가 된 와이셔츠 소매며 팔뚝을 화장실에서 씻고 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내가 사무실에 풀어 놓은 고양이를 그 사이 릴리가 다시 주차장에 내다 버리라고 딜라에게 시켰다는 것입니다. 이미 늦어버린 다른 약속시간을 대보려고 곧장 달려나가려던 참이었는데 그 시간계획은 또다시 한도 없이 지연됩니다.


"갠 집이 짜꿍인데 여기서 풀어주면 어떡해?"


"흙투성이 고양이를 어떻게 사무실에 놔둬요? 여긴 사무실이지 동물원이 아니라구요!"


"우리가 오늘 하루만 동물원 차리면 걔는 오늘 저녁에 자기 엄마랑 다시 만날 수 있는데 그 몇 시간을 못참아서 걔를 고아로 만들자는 거야?"


"손님이라도 오면 어떡해요? 고양이한테 커피 타오라고 할 거에요? 그리고 이 건물 관리사무실에서 알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말싸움으로 릴리를 이겨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훌륭한 수완으로 놀랄 만한 실적을 올려온 릴리는 일반직원으로 시작해 불과 몇 년 만에 명실공히 내 파트너까지 승진을 거듭했는데 자기 주의주장이 몹시 강한 여자였어요. 가끔은 그게 좀 지나쳤습니다. 고양이를 사무실에 둘 수 없다는 릴리의 말도 충분히 일리는 있었지만 고양이가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이제 우리가 아주 작은 수고와 배려를 아껴 새끼고양이가 자기 가족들과 생이별하게 만드는 것은 너무 매정한 처사였습니다.


"무조건 찾아 놔!! 인간적으로 너무 하잖아? 나 데모하는 거 볼래?"


허탈 반, 노여움 반으로 그렇게 화를 내며 사무실을 나선 후, 고양이를 버리고 왔던 딜라는 고래싸움에 등터진 새우 꼴이 되어 다시 고양이를 모시러 주차장으로 내려가야 했을 것이고 마침내 고양이를 다시 되찾아왔다는 보고를 약속장소로 달려가던 자고라위(Jagorawi) 톨에서 전화로 듣게 되었어요. 쏜살같이 도망쳐 다니는 천방지축 고양이를 잡으려고 지하주차장을 뛰어다니며 땀범벅이 되었을 딜라의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습니다.


사무실에 다시 돌아왔을 때 내 책상 옆 카톤박스 안에 웅크리고 있던 작은 고양이는, 책상에서 잔뜩 인상을 쓰고 있던 릴리 못지않게 매우 심기가 불편해 보였습니다. 말하자면 단식투쟁에 들어간 모양인데 태어난 이후 한 번도 먹어 보았을 리 없는 KFC닭다리에 우유까지 줘 보았지만 그 녀석은 입도 대지 않고 내가 박스 안에 손을 집어 넣으면 이빨과 발톱을 곤두세우고 으르렁거렸어요.


"구해 줬다고 뭐 영웅취급 받을 줄 알았어요? 직원들한테 좀 그만큼 해 봐요."


릴리가 빈정거리듯 말하지만 사실 진짜로 화난 것이 아님을 그 말투에서 이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실 릴리도 마음 약하고 섬세한 감정을 가진 여자입니다. 그녀는 단지 이 새끼고양이에게 정을 주지 않기로 작정했던 모양이었어요. 하지만 퇴근길에 고양이 박스를 들고 내 차에 오른 것도 역시 릴리였습니다.


"어디 한 번 같이 가 봐요. 고양이들이 고맙다고 고개라도 까닥 하는지."


짜꿍 집에 도착한 것은 석양이 뉘엿뉘엿 지던 저녁시간. 동네사람들은 차에서 커다란 박스를 끄집어 내는 우리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이 주택단지에 몇 안되는 외국인 중 한 명이라지만 입주한 후 지금까지 이미 몇 년 동안이나 그들은 아직도 호기심 가득한 눈초리로 내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습니다. 나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눈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때로는 눈싸움이라도 하자는 듯 한참을 노려보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물론 그들이 비단 나한테만 그런 건 아니었겠죠.


박스를 내려 옆으로 눕히자 당장 박스에서 뛰어 나갈 줄 알았던 새끼고양이는 뚜껑을 지긋이 밟고 선 채 야옹 하는 울음을 몇 번 길게 울어댔습니다. 그러자 눈깜짝할 사이에 여기저기에서 고양이들이 뛰어나오기 시작했어요그 녀석들입니다. 어미고양이, 형제 고양이들. 내 집 앞은 폴짝폴짝 뛰는 고양이들로 난리가 났습니다. 가족의 정은 동물들에게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죠. 그들은 아침부터 종적을 감춘 발육부진 막내를 찾아 하루 종일 온 동네를 뒤지고 다녔던 모양입니다.


어미고양이가 가까이 오자 그제서야 발육부진 이 녀석이 박스에서 쏜살같이 뛰어나가 엄마 주변을 돌며 기뻐 날뛰기 시작했고 형제들도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그를 에워싸고 맴돌았습니다. 가족이란 저렇게 좋은 것이죠.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푸근해졌고 살짝 옆을 돌아보니 짐짓 찌푸린 표정을 짓고 있던 릴리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져 있었습니다.


우리 집에서 볼일을 다 본 고양이들은 공터 쪽으로 몰려가기 시작하는데 어미고양이가 나를 홱 돌아보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저 녀석은 십중팔구 내가 회개한 유괴범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어요. 다음 번엔 절대 가만 두지 않겠다는 경고의 눈초리를 하고 있었거든요. 예의 그~하는 신경질까지 내면서요.  잰 도대체 뭐가 틀어졌길래 오늘 아침부터 왜 나만 가지고 저러는 걸까요? 릴리 말대로 저 녀석들은 도무지 고마워 할 줄을 모릅니다. 어미고양이가 다시 새침하게 고개를 홱 돌리며 새끼들 뒤를 쫓아 갈 때 릴리는 벌써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습니다.


, 아무려면 어떻겠어요? 어쨌든 난 오늘 좋은 일을 하나 한 셈이었고 전능하신 야옹이신이 어디선가 내려다 보신다면 난 이제 복받아 마땅한 고양이 세계의 천사가 된 것입니다. 이젠 아예 내 등을 탕탕 두드리며 박장대소하는 릴리를 애써 무시하면서 난 스스로 자부심을 가져 보려 무지 노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