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매일의 삶

사무실에 관짝이 들어온다면…

beautician 2009. 5. 23. 13:31



" 스페이스가 안나오겠는데요... "

 

그 말이 홍사장에게는 섭섭하게 들렸던 모양입니다.

 

인천 간석동의 한 3층짜리 건물 지하실에서 미싱 40대 놓고 공장을 하던 홍사장은 간절한 눈빛으로 나와 함께 온 부평역 뒤 정원산업 장사장을 바라보았지만 장사장은 우리 주계약 공장의 사장일뿐 정작 공장을 선택하는 것은 내 임무였죠. 이미 돌리고 있는 미싱들만으로도 이미 꽉 차 보이는 이 지하공장은 우리 씸테이핑 기계 네 대를 더 들여놓기에 아무래도 작아 보였습니다.

 

90년대에 막 들어서고 있던 당시의 한국은 노동쟁의의 불길이 전국에서 뜨겁게 불타 오르고 있었고 대기업들도 흔들거렸을 뿐 아니라 지방도시의 작은 공장들에게도 그 불길은 끊임없이 번져 나갔습니다. 어디서나 머리에 띠를 두른 공원들이 구호를 외쳐댔고 봉제공장 사장들은 이런 저런 고소 고발에 휘말려 노동부와 경찰서에 불려 다니기를 밥 먹듯 했지요. 불과 40평도 되지 않는 손바닥만 홍사장의 공장도 이미 몇 차례의 쟁의에 시달린 끝에 이젠 겨우 대여섯 명의 공원만 남아 빈둥거리고 있던 상태였죠. 홍사장은 그나마 기계라도 헐값에 팔고 가능하면 권리금이라도 받으려 내놓은 것이었고 우리는 일본에서 받던 레인웨어 오더를 기존 하청공장인 정원산업의 생산량으로는 도저히 채울 수 없어 추가 캐파를 만들어 주려 인근의 공장을 찾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몇 개의 공장을 더 돌아본 다음 본사에 돌아온 장사장은 우리 사업부장인에게 간석동 공장으로 결정하는 쪽으로 방향을 몰아갔습니다. 기계가 들어갈 공간이 안나온다고 설명했지만 비좁게라도 쓰면 된다는 의견이었죠. 일에 있어서는 매사에 철두철미한 사업부장이 절대로 받아들일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예상 외로 너무 쉽게 장사장의 의견에 동의해 버립니다. 어쩌면 장사장과 동향이라는 사실이 작용했는지도 모르고 또 한편으로는 오더는 몰려 오는데 특별한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요. 그래서 오랫동안 우리 하청을 받아 일을 해온 장사장에게 간석동 공장을 우리 비용으로 얻어 주면서 홍사장과의 질긴 인연이 시작됩니다.

 

어느 날 기계를 넣으려 가보니 공장을 팔기로 했던 홍사장이 계속 간석동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장사장 밑에서 공장장 직함을 단 월급쟁이가 됐다는 설명이었죠. 간석동으로 옮겨 오기 전에는 꽤 큰 공장도 운영했다는 그에게는 그런 경력의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왕년에 나도 잘 나가는 놈이었어…” 식의 곤조나 거만함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노느니 이렇게라도 월급받고 일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냐며 허허 웃는 홍사장의 서글서글한 눈매가 선해 보였고 몇 살이나 나이가 어린 나에게도 무역부에서 오신 분이라며 싹싹했을 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친절한 그의 행동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마음에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죠. 세상이란 참 불공평해서 착한 사람들에게 어려움이 더 많이 찾아 오는 거라고요. 그러나 홍사장은 그렇게 공장을 다 날리고 빈털터리가 되어 월급쟁이가 되어 버린 현재의 상황이 불행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 듯 했습니다.

 

그렇게 간석동 공장을 가동시킨 지 4개월도 채 되지 않아 사고가 터졌습니다. 장사장이 잠적해 버린 것이죠. 그는 김대리라고 불렀던 정원산업의 경리 여직원과 함께 우리가 내려 보낸 돈을 통째로 들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그 사이 돈될 만한 것은 대부분 몰래 팔아 버렸기 때문에 남은 것이라고는 엄청난 외상을 끌어와 빚더미에 앉은 공장과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가 우리를 통해 장사장이 야반도주한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아내와 두 딸들뿐이었습니다.

 

장사장은 그렇게 얻어 놓은 간석동 공장에 처음 1~2주를 빼고는 거의 와보지도 않았다고 하며 직원들 월급과 가동비조로 매월 3천 만원씩 정원산업에 내려 보낸 선급 가공임도 정작 간석동 공장을 실제로 운영하는 것이나 다름 없던 홍사장에게는 월 8백 만원도 지급되지 않았다는 얘기에 우리 사업부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죠. 그리고선 담당인 나를 닥달하기 시작합니다. 나 역시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어요.

 

납기를 지켜야 하는데... 채권도 회수해야 되고...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나는 단기간 내에 장사장 사건이 해결되기 어렵다는 것이 확실시되자 파일박스 속에서 장사장의 부동산담보 근저당서류를 꺼내 법제부에 넘겼습니다. 그 동안 우리 회사가 선급으로 내려 보낸 돈이 12천만원. 담보 설정된 장사장의 집을 경매로 팔아 치워 아무리 잘 받아도 50% 이상의 손해가 확정적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실제로 장사장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며 팍팍 밀어준 건 사업부장이지만 이제 공장마저 가동을 멈추면 납기는 끝장이고 내 목마저 위태롭다는 사실이 숨통을 조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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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장을 구슬리는 사업부장의 목소리가 소름 돋을 정도로 부드러웠습니다. 급조된 오더 계획표를 보여주며 간석동 공장을 우리 주공장으로 계약하자는 상담을 하는 중이었죠. 홍사장이 가끔씩 천장을 올려보며 뭔가 웅얼거리는 품이 사업부장 말대로라면 얼마나 떼돈을 벌 수 있는지 계산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활짝 웃는 표정으로 계약서에 서명을 했어요. 그것이 그 후 몇 년 동안 우리 회사가 그의 목줄을 잡고 흔들 빌미가 되리라는 것을 그는 꿈에도 몰랐겠지요.

 

하지만 사업부장이 그의 코앞에서 흔들어 보였던 생산계획표의 오더들은 사실 일본 바이어들의 대략적인 연중물량을 기준으로 한 것이지 정확한 가격이나 납기, 수량 등은 아직 결정된 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몇 개월 만에 상황이 변해 만 일본 바이어들은 엔화 가치가 상승했는데 제품의 수출가격을 내리지 않으면 생산지를 중국으로 옮겨 갈 수 밖에 없다는 협박성 전문을 보내오는 중이었고 실제로 국교개방과 동시에 수많은 한국기업들과 오더들이 중국본토에 밀물처럼 몰려 가고 있었습니다.

 

홍사장과의 계약에 있어 더욱 문제가 되는 건 그 동안 장사장이 간석동 공장명의로 외상 구입한 수천 만원 대의 물건들이었습니다. 어차피 다음 달이면 당장 표면에 떠오를 부채였지만 사업부장은 교묘히 그 부분을 피해갔고 홍사장은 그 내용을 잘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국내 굴지의 대기업과 계약을 맺는데 이제부터 무조건 열심히 오더를 쳐내면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오더에 목을 매고 상담 테이블 구석에 앉아 홍사장이 계약서에 서명하는 동안 침묵만 지키고 있는 내 자신의 비겁함에 스스로 구역질이 치솟았지요.

 

정원산업 장사장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소문으로는 경리직원 김대리에게 빠져 횡령한 돈을 모두 퍼부어 석바위 쪽 어딘가에 집을 사줬다는 얘기도 들렸고 남도 어딘가로 잠적했다는 소문도 무성했지만 그 후 다시는 그를 보지 못했습니다.

 

법원 집달리들을 따라 장사장의 집에 도착한 것이 아직 찬바람 쌩쌩 부는 3월초였습니다. 갑자기 들이닥친 남정네들이 세차게 두드리는 문틈으로 빼꼼이 내다 보던 장사장 부인의 겁에 질린 눈빛. 아직 철없는 두 딸들의 철부지 같은 칭얼거림…., 모든 것이 금방 후회되기 시작했습니다. 장사장이 나타나면 자근자근 밟아놓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이제 내가 하고 있는 일이라는 게 아무 것도 모르는 저 사람들을 추운 길바닥으로 내모는 야박한 짓이라는 사실을 자각한 것이죠. 집달리들이 집구석 곳곳에 차압딱지를 붙이는 동안 마루바닥에 주저앉아 넋을 놓고 있는 장사장 부인과 그제서야 장난을 멈추고 겁먹은 표정으로 사람들을 흘끔흘끔 쳐다보는 두 딸을 차마 똑바로 볼 수가 없다. 장사장은 이 사람들이 어떻게 되라고 경리여직원과 도망간 버린 건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집밖에 나가 뻑뻑 담배를 피워대는 것뿐이었어요. 그 집을 떠날 때 등뒤에서 그제서야 제정신을 차린 장사장 부인의 울부짖는 울음소리가 빗살처럼 퍼붓는 날카로운 화살들처럼 내 등에 박히고 있었습니다.

 

사업부장은 일본의 주바이어로부터 대형 오더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가격을 20%나 깎아 주는 파격적인 조건이었죠. 당시 일본 업체들은 모두 중국으로 들어갈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인도네시아에 공장을 세웠고요. 이제 한국 봉제공장들의 운명이 막판으로 치닫고 있는 것은 불 보든 확실한 일이었지만 오더는 처내야 했고 공장은 돌려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대기업은 손해를 봐서는 안되므로 깎인 20%는 고스란히 하청공장의 부담으로 떨어지는 것이었죠. 결과적으로 그 가공임은 이미 공장에서 수용할 수 없는 원가 미만이었습니다.. 그 하청 계약서를 가지고 가서 홍사장에게 다음에 좋은 오더 주겠다는 뻥을 치고 무조건 도장을 받아 오는 것은 다시 내 몫이었습니다.. 어이없어 할 홍사장의 표정이 인천에 도착하기도 전, 전철 안에 앉은 내 눈앞에 벌써부터 아른거렸습니다.

 

"배형이 까라면 까야지."

 

그렇게 말하는 홍사장의 말이나 표정에서는 그러나 억울함도 빈정거림도 비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날 믿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그에게 들은 얘기지만 내가 처음에 그의 간석동 공장 선택에 비토를 놓은 사실이 오히려 그가 나를 신뢰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회사에 손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사람이 설마 손바닥만한 하청공장에 손해를 끼칠 리 없다면서….  내가 뭘 해도, 무슨 말을 해도 배운 사람은 뭔가 다르다며 나를 늘 높이 평가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지난 몇 달간 같이 함께 날밤을 까며 제품검사를 할 때 짬짬이 소주잔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진심을 조금이나마 내비쳤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그는 원래부터 그는 그렇게 순박하고 악의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바보 같을 정도로 사람 좋은 홍사장이 벌써 너무나 좋아졌는데 얼마 후 뻔히 닥쳐올 파국의 예감 이 그의 사람 좋은 미소를 보는 내 마음을 시리게 했습니다.

 

장사장이 야반도주하기 전에도 중간에 증발하는 돈 때문에 어려웠던 간석동 공장의 자금상황은 이제 적자가 날 수 밖에 없는 오더 때문에 점점 더 돌이키기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생산을 하면 할수록 더욱 적자가 나는 상황이었고 홍사장은 이리 저리 돈을 끌어 대야만 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도 가공임 선급을 요청해 오곤 했지만 어렵사리 사업부장 서명까지 받은 지출결의서를 가져가도 경리과에서는 돈을 꺼내주지 않았습니다.

 

"거기 부채가 1억이야, 1. 너 같으면 돈 더 주겠어? 제품대금도 아니고 매번 그런 식으로 선급금을? 돈 받고 싶으면 담보 가져오란 말야! "

 

경리부 홍부장이 목에 힘줄을 돋구며 소리치면 거기 따라 내려와 있던 법제부 신차장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치곤 했죠.. 홍부장이나 신차장은 매달 그렇듯이 이번에도 경리부 문밖에 오늘이 월급날이라 돈 받아 가려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홍사장이 있는 걸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가끔은 동경지사에서 막 돌아와 부임한 경력 빵빵한 신임팀장이 경리과에 내려와 논쟁을 벌이며 돕기도 하고 보고를 받은 사업부장이 전화하면 홍부장이 거드름을 피우며 못이기는 척 돈을 결재해 주는 것이 매월 벌어지는 일이었습니다.

 

애당초 홍사장이 자기 건물도 아닌 반지하 공장을 팔려 내놓았던 것은 기계값와 권리금이라도 받기 위해서였어요. 그에게 부동산이 있을 리 없었습니다. 게다가 나와 만나기 전 노동쟁의를 겪으면서 집이며 차며 모두 직원들에게 빼앗긴 상태였습니다. 말만 사장이지 주변머리라곤 털 끝만큼도 없는 사람이 이런 상황이 뻔히 올 줄을 내다보지 못하고 사업부장의 간곡한 부탁에 못 이겨 정원산업 장사장 집을 경매하고도 상계되지 않은 부채마저 떠안은 상태였습니다.

 

양이사님, 이게 꼭 홍사장 잘못만은 아니잖습니까? 이 사람 어떻게 좀 살려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사정 딱한 걸 내가 왜 몰라? 안됐지만 우리도 월급쟁이야. 더러워도 제대로 일하라고 회사가 월급 주는 거고. 우리 월급 주는 회사에 손해 낼 수는 없는 일이야.”

 

무던히도 사고가 많았던 우리 일반상품부의 여러 팀들을 관할하던 사업부장은 각각의 팀들이 가져오는 문제들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인 것이 분명했지만 그 스트레스를 잘 견디고 있었습니다. 대개는 냉정한 표정으로 험한 소리를 내지르며 얘기를 끝내던 사업부장도 가끔은 그렇게 속내를 살짝 내비치기도 했어요. .

 

"이거면 배형, 이제 그런 소리 안 들어도 될 거요."

 

홍사장은 나를 놀라게 했습니다. 어느 날 본사에서의 정기 미팅 때 사업부장 앞에 자기 이모부 집문서를 내놓으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담보가 있다면 경리과와의 얘기가 훨씬 쉬워지긴 하겠지만 그것이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이런 멍청이같은 인간….   그게 그 순간 목까지 차오른 말이었어요. 난 어려우면 언제라도 이 회사를 그만두면 되는 일개 직원이지만 당신은 자칫하면 당신 집도 아닌 이모부 집까지 날린단 말야!

 

이 말이 끝내 내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이모부가 평생을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번 돈과 퇴직금을 모두 합쳐 산 달동네의 작은 집 한 채의 집문서를 들고 온 것입니다. 어차피 회사에서도 없는 걸로 알고 있던 부동산 담보였으므로 안 내놔도 나 하나 욕먹는 것 참고 있으면 될 일이었는데 그는 그렇게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법제부에서는 두 말 없이 집문서를 받아가 근저당을 설정했고 내 짐을 덜어 주었다며 싱글거리고 있는 홍사장의 얼굴을 난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예감하고 있었던 파국은 곧 찾아 왔습니다. 근저당이 설정된 지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아 우리 회사가 홍사장에게 최고장을 날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공장에서 발생한 작은 작업불량이, 그것도 우리가 공급해준 자재에 이상이 있어 발생한 것이 90% 틀림없을 문제가 빌미가 되어 일이 커졌고 홍사장의 이모부집 담보를 처분하는 쪽으로 대세가 기울면서 법제부 사람들이 홍사장 이모부댁에 부동산 가치평가를 하러 나가기에 이르렀죠.

 

"너 임마, 그 서류 법제부에 넘기라고 내가 언제부터 얘기했어? 그 돈이면 이자만 해도 얼만지 알아? 오늘 당장 넘겨버려!!"

"그건 홍사장 이모부댁이에요. 돈도 안되는 달동네 집이라고요. 그것도 집이라고 세든 사람이 셋이나 있어요. 일 잘하던 공장인데 차라리 오더 더 집어넣고 돈 벌어서 갚으라고 하는 게 훨씬 신빙성 있죠. 채권 설정할 때 부장님도 말씀하셨지만 채무액 삼분의 일도 안 되는 그 집 경매 돌리면 회사도 손해고 그 사람 죽습니다."

", 이 새끼야! 너 홍사장한테 돈 받아 쳐먹었어? 우리 공장이 인도네시아에 있는데 왜 그 사람 오더를 줘?"

 

홍사장 얘기가 나오면 얘기는 대개 이런 식으로 흘러갔습니다. 나름대로 홍사장을 안쓰럽게 생각하고 있던 사업부장도 이제 냉정하게 마음을 굳힌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자 전전긍긍하던 홍사장의 모습이 눈에 밟혔습니다. 홍사장의 담보를 처분한다면 불과 1년 전 장사장 집을 처분할 때보다 몇 배 더 심한 자괴감을 느껴야 할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아니, 자괴감이라기 보다는 죄책감이겠지요. 그러나 내 죄책감과 자괴감이 홍사장의 그것보다 더 클 리 없었습니다. 

 

더 좋은 해결책이 분명히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의 발주를 중단하고 간석동 공장에서 넣어 주었던 자재들과 반제품 상태의 제품들까지 모두 싹싹 긁어 회수한 상태였습니다. 회사에서 월급을 받고 있는 직원으로서 회사의 방침을, 그것도 어느 회사든 그렇게 밖에는 할 수 없는 한편으로는 당연한 조치를 나 혼자 정면으로 거절할 수는 없는 일이었지요. 그렇다고 내 책상서랍 깊숙이 들어가 있는 근저당 서류를 예전 장사장의 경우처럼 그렇게 간단히 법제부에 넘긴다면 난 죽을 때까지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고의로 또는 떠밀리면서 홍사장을 압박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고민은 점점 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결국 견디지 못할 한계에 이르렀을 때 난 홍사장에게 이렇게 부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발 부탁이에요. 어디로 도망 좀 가세요. 남들 다 하는데 홍사장님은 그거 왜 못해요? 우리 회산 담보 처분해야 돼요. 규정이 그래요. 하지만 홍사장님 여기 있으면 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요. 제발 좀 도망가세요."

 

그때 홍사장은 이미 거의 폐인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잃던, 자기가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되건 항상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울 수 있었던 남자가 이제 이모부의 집을 자기 실수로 날리게 된 상황이 되고 우리 본사에 여러 번 찾아 와 어떻게든 채무를 변제할 테니 경매처분만은 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지만 회사의 입장이 강경했지요. 하자 그는 이제 자신이 죽어야 할 차례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오더는 끊긴 지 오래여서 공장가동은 완전히 멈춘 상태였고 직원들마저 모두 뿔뿔이 흩어진 지금 그의 구원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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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매일 밤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지요. 그는 가끔 흥분하기도, 미친 듯 웃기도 또는 흐느끼기도 했습니다.

 

"배형, 나 죽으면 내 관, 당신 책상하고 부장님 책상 사이에 놔줘. 땅에 묻지 말고."

 

그는 매일 밤 자살했습니다. 술 먹고 죽을 수 있다면 분명히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매일밤 치사량의 소주를 마시려고 했어요. 엄포일 게 뻔한 그 전화를 받고 난 매번 놀라 한밤중에 인천까지 달려갔고 이미 엉망으로 취해 있는 그와 함께 텅 빈 공장바닥에 앉아 밤새 소주를 깠던 일이 셀 수도 없었습니다.

 

홍사장님, 제발 몸 생각해요. 홍사장님 이러다 어떻게 되면 나도 못살아요.”

내가 죽어서 이모부님 집 살릴 수 있다면 내가 죽는 게 나.”

에이, 진짜! 홍사장님이 살아 있어야 집을 살리든, 이모부를 살리든 할 거 아니에요? 제발 술 좀 그만 해요!!”

 

그건 더 이상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라고 보기 힘들었습니다.

난 사회에 나온 후 줄곧 넥타이를 매고 다녔죠. 그러나 홍사장은 넥타이를 맬 줄도 몰랐습니다. 난 늘 화이트칼라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러나 홍사장은 그렇게 반지하 봉제공장에서 평생 실밥이나 따고 미싱질이나 해야 할 신세일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망가져 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나와 나의 회사가 그의 마지막 남은 한 점 희망마저 짓밟는 것을 보면서, 그러고 그렇게 속았으면서도 홍사장이 끝까지 나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거든요.

 

나 역시 지난 1년여를 그와 함께 일을 하며 동고동락하면서 그가 무척이나 심성이 고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고 언젠가 다시 이 일을 좀 더 좋은 조건을 주면서 할 수 있다면 분명히 홍사장과 함께 하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나도 그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달동네의 이모부댁을 경매한다며 법제부 사람들이 들락날락 하자 대갈일성을 지르다 쓰려지신 이모부는 당시 병원에 누워 계셨습니다. 그런 상황을 다 알면서 도저히 내 손으로 그 집을 처분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회사가 그의 이모부 집을 경매처분하게 된다면 그가 스스로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나 역시 더 이상 회사를 남아 있을 마음이 없었어요.

 

홍사장과 나의 그런 미묘한 관계가 몇 개월간 계속되었습니다. 사업부장과 법제부에서 온갖 욕을 먹으면서도 내 서랍 속의 근저당 서류를 도저히 그들에게 꺼내 줄 수 없었으므로 외출할 때에도 책상 자물쇠를 채우고 나가야만 했지요. 몸무게가 또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홍사장의 본가, 처가와 이모부의 사위들이 3천 만원을 모아 들고 회사에 찾아온 것은 이듬해 3월의 일이었습니다. 1억의 채무. 경매 처분해야 천 만원이나 받을까 말까 한 코딱지만한 집. 그 집에 집착하는 이모부, 그리고 그 때문에 그들이 회사에 들고 온 3천 만원...

 

"이걸로 채무가 다 해결되는 게 아니에요. 알죠?"

 

법제부 신차장이 안경너머로 눈을 치켜 뜨며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지만 홍사장 일행이 사무실에 들어오기 전 한 푼도 못 건질 줄 알았는데 저 멍청한 것들이 돈을 3천만원 씩이나 가져온다며 기뻐하던 모습과 대조되면서 마음이 무척이나 씁쓸했습니다. 당시 그 정도면 우리 회사 차장이나 부장 1년 연봉쯤 되는 돈이었습니다. 그 돈을 만들기 위해 그 동안 고군분투한 달동네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 사이에 서있지 못하고 테이블 이편, 소위 채권자들 틈에 앉아있는 내 모습이 그날 따라 더욱 초라하고 부끄럽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집문서를 다시 홍사장 손에 쥐어줄 때, 아주 오랜만인 그의 환한 미소와 눈가를 적시던 기쁜 눈물, 그리고 내 손을 꽉 잡아주는 그의 굵은 손마디가 사무치도록 따뜻했어요.

 

회사를 나서기 전 홍사장은 사업부장과 법제부장 앞에서 근 20년 후인 2010년까지 채무잔액을 매년 얼마씩 갚겠다는 각서를 썼지만 회사 내부적으로 곧 대손 처리할 그 잔액 때문에 그 서류를 다시 들쳐볼 한가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 끝난 것이죠. 어쩌면 홍사장을 볼 일이 다시는 없을지도 몰랐기에 난 한동안이나 그의 손을 놓지 못했습니다.

 

 

당시 가파른 내리막 길을 치달리던 한국의 봉제산업은 결국 대부분의 공장들을 도산 또는 폐업을 피할 수 없었고 대기업들이나 여력이 되는 회사들은 모두 해외에 공장을 차려 나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북부 짜꿍(Cakung) KBN 공단에 작은 공장을 세웠다가 89년도에 종업원 800명 규모로 증설이 이루어졌고 다른 팀원들이 인도네시아 공장을 위한 수주에 전념할 때 내게는 사업개발이라는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화학전문인 회사에서 의류팀 직원이 해야 하는 신규사업개발이란 맨땅에 헤딩하라는 말과 동의어였지만 간석동 공장의 큰 짐에서 풀려난 나는 힘든 줄 모르고 콧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홍사장과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지만 몇 번의 중국출장을 통해 중국에 국제하청을 놓게 된 나는 첫해에 제법 괜찮은 실적을 올렸습니다. 홍콩에서 가까운 샨토우, 산동반도의 웨이하이에 오더를 넣었죠. 한편 우리의 본공장이었던 인도네시아 공장을 위한 수주는 중국생산으로 선회한 일본 거래선들이 등을 돌리면서 기대했던 것만큼의 생산을 해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중국에서 의류를 생산에 수입해 오거나 제 3국으로 수출하는 것이 매우 일반적인 일이지만 중국과 국교가 수립된 지 얼마 안되었던 당시 국내 10대 그룹 안에 들었던 우리 회사도 중국에 대해서는 아직 문외한이었고 그래서 회사에서는 중국에 오더를 뿌리는 나와 우리 팀을 기대 반 우려 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번 사고가 났습니다.

곧잘 생산해 내던 위해(웨이하이) 소재의 공장에서 원단을 뒤집어서 옷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다행히 안팍의 차이가 크게 나는 원단은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 바이어는 인수하기로 하지만 그 대신 가격을 1불 깎아달라고 요청해 왔고 난 이제 잘못을 인정하기는 커녕 잘못 자체를 이해도 못하고 있는 중국사람들을 상대로 1불씩 깎자는, 전부 60,000장이었으니 결과적으로 6만불 깎아달라는 시비를 붙어야만 했습니다. 소규모 봉제공장으로서는 금액이 컸으므로 절대 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사업부장이 막 바뀐 상태였어요. 간석동 문제가 해결될 즈음 우리 사업부장은 동경지사로발령을 받았고 그 대신 그룹회장의 고교동창이라는 분이 신임 사업부장으로 부임해 왔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국내 의류업계의 거인들도 모두 중국으로 건너가 공장을 차리지만 신임 사업부장은 중국인들은 믿을 수 없는 종족으로 치부하며 중국에 국제하청하는 것을 결사 반대하는 입장이었죠. 간신히 뼈대를 세워 놓은 중국 국제하청이 그의 부임과 함께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그 사고가 터지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나에게 집중포화를 퍼부었습니다.

 

바로 그 시점에 홍사장이 몇 년 만에 내게 전화를 해 왔어요.

 

중국 위해에 클레임이라고?  , 배형하고 나하곤 무슨 질긴 인연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나 지금 연태(옌타이)에 있어요. 마침 나도 위해 갈 일이 있는데 배형 괜찮으면 내가 미리 좀 봐 줄게. 공장 주소하고 번화번호 좀 줘요. 그리고 가능하면 배형 올 때 나도 위해에 가 있을께.”

 

참 묘한 인연이지요?

위동페리를 타고 인천항을 출발해 다음날 아침 중국 산동성 위해에 도착할 때까지도 난 이 우연에 대해 줄곧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뭔가 일이 잘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비록 페리가 닻을 내린 위해 항구가 도착 당일 정전이어서 아직도 추운 날씨에 히터가 들어오지 않는 중국식당에서 몸을 녹인다고 중국사람들과 필름이 끊길 정도로 전통 백주로 간빠이를 해대었지만 그 자리에 참석해 있던 홍사장의 모습에 이미 마음이 따뜻해 왔습니다.

 

영어를 못하는 그가 중국어를 잘 할 리 없었지만 그 사이 중국출장을 많이 다녔다는 그는 이미 위해 공장의 총경리를 비롯해 공장 요직의 사람들과 무척이나 친해져 있었습니다. 그는 조선족 통역원을 데리고 위해 항구에서부터 날 반겨 주었죠.  우리가 백주로 건배를 시작하기도 전 클레임 문제는 이미 해결되어 있었습니다. 일본 바이어에게 1불씩을 깎아 주어야 한다는 것을 들은 홍사장은 내가 도착하기 전날 내 대리인 자격으로 이미 중국 공장과 1 20센트를 깎는 것으로 결정을 지어놓았던 것입니다.

 

그는 내가 위해를 떠나는 날까지 만사 제쳐두고 위해에 남아 공장들을 돌아 다니며 내 일을 도와주었고 마지막 날 다시 페리 선착장까지 배웅해 주었죠. 얼마 후 내가 인도네시아로 발령을 받으면서 신임 사업부장은 중국 하청을 중단시켰지만 홍사장은 거의 연태에 주재하다시피 했으므로 그 후에도 몇 번을 더 간 중국출장은 나에겐 오랜 벗을 만날 수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또 몇 해가 흘러 한화그룹을 함께 나온 친구들과 세운 조그마한 무역회사에서 인도네시아 현지에 계약한 새 공장의 생산라인을 개조하는데 홍사장은 우리가 도움을 청하자 중국에서 하던 일들을 모두 제쳐두고 인도네시아까지 날아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 사이에도 그의 인생에는 굴곡이 많아 연태 공장을 하던 회사를 그만 두었던 짧은 공백기간에 인천의 친구들과 함께 공장 파이프 내부청소 용역도 나갔다가 파이프를 통해 발사된 고압가스에 맞아 며칠을 병원에 입원했었고 자카르타에 와서는 두달이 채 못되어 뇌에 물이 차는 수막염에 걸려 급히 귀국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한동안 우리 회사에서 중국공장을 관리해 주던 그는 그간 직책과 직함은 수도 없이 바뀌었지만 "홍사장" "배형"이라는 호칭은 언제나 변함이 없었죠. 그러다가 친구들과 만든 회사가 IMF 경제위기 때 번 떼돈을 서울에서 저희들끼리 흥청망청 쓰며 폭죽을 터뜨리다 위기를 맞고 그들과 결별하게 된 나도 사업에 부침을 겪는 동안 홍사장과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다시 연락처를 알게 되는 날이 오면 ! 배형!” 하며 그가 반갑게 맞아 주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자기 몸을 사리지 않고 아무런 보상도 원하지 않았던 홍사장님…, 지금도 어딘가에서 또 누군가를 돕기 위해 대책없이 자신을 희생하고 있지나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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