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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강점 -(11)

beautician 2019. 3. 7. 10:00

 

 

 

7. 인도네시아 강점기의 종식

 

 

1) 인도네시아 내부 변화

 

인도네시아와 포르투갈 사이에 유엔의 중재노력이 1997년 초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수하르토의 신질서 정권 아래에서는 동티모르의 독립은 물론 제한적인 자치권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의 인도네시아의 대중적 견해는 내키지 않지만 어쨌든 동티모르 상황에 대해 종종 인정하면서도 동티모르의 독립이 결과적으로 인도네시아 전체의 통일에 불안요소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가 인도네시아의 정치지형에 대변혁을 가져오면서 19985월 마침내 수하르토가 32년간 지켜온 권좌에서 하야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것만 같던 위세등등한 육군전략예비전력사령부 사령관까지 승승장구하며 승진했던 쁘라보워 수비안토는 끝없는 추락을 시작하며 도망치듯 요르단으로 망명을 떠났고 동티모르에서의 군사작전은 이제 빈털터리가 되어 파산해버린 인도네시아 정부에게 매일 1백만 달러의 비용지출을 강요했다.

 

뒤이어 시작된 개혁시대’(Reformasi)는 상대적으로 정치적 개방과 전환의 시기로 전례가 없었던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 사이의 관계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1998년의 후반부를 통틀어 딜리 도시 전체에서 토론 포럼이 열렸고 국민투표를 하자는 시민합의에 도달했다. 외무상 알라타스는 어쩌면 독립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이 단계적 자치확대계획을 인도네시아에게는 고통만 있을 뿐 얻는 게 없는”(all pain, no gain) 것이라며 비관적으로 표현했다. 1998 68, 수하르토의 후임으로 대통령직에 오른 지 3주차였던 B.J. 하비비는 인도네시아가 곧 동티모르에게 특별한 자치행정 계획을 제안하겠다고 발표했다.

 

( 사진 :  존 하워드 당시 호주 수상 )

 

1998년 하반기에 존 하워드(John Howard) 수상의 호주 정부는 호주가 정책을 바꿔 향후 10년 내에 동티모르가 독립 찬반투표 하는 것을 지지한다는 서한을 인도네시아에 보내왔다. 하비비 대통령은 이 같은 호주의 행간에 인도네시아가 식민지 통치를 하고 있다는 뉘앙스가 숨어있는 것으로 보았고 제발이 저린 그는 그 찬반투표를 즉각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대통령이 바뀌니 사안을 받아들여 처리하는 방식도 전혀 달라진 것이다

 

199955일 인도네시아와 포르투갈은 동티모르인들이 인도네시아의 자치령과 자체 독립국 중 사이에서 선택하는 투표실시에 동의했음을 발표했다. 이 투표는 유엔 동티모르 미션(UNAMET)이 관장하도록 했고 원래는 88일로 계획되었으나 830일로 연기했다. 투표시기의 치안은 인도네시아가 담당하기로 했지만 동티모르인들에는 걷잡을 수 없는 우려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인도네시아가 자신의 국가적 이익이 크게 걸린 이 투표 시기에 유엔 평화유지군의 개입을 허용할 리도 없는 일이었다.

 

 

2) 1999년 국민투표

 

자치주로서 인도네시아의 일부로 남는 것과 별도의 국가를 세워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각각 지지하는 그룹들이 유세과정에서 충돌하기 시작했는데 독립을 반대하는 일단의 동티모르 준군사집단들이 폭력을 시사하며 위협했고 실제로 전국에서 폭력사건들이 벌어졌다. 독립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일부 UNAMET과 반목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UNAMET의 일부 그룹들이 인도네시아 군인들과 협조하면서 군사훈련도 받는 것이 목격되었기 때문이었다.  5월 합의가 발표되기 전인 4월 리퀴샤(Liquiça)에서 독립반대 민병대의 공격으로 동티포르인 수십 명이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리퀴샤  

 

 

리퀴샤 성당 학살사건은 19994월 동티모르의 독립찬반투표가 진행되던 시절 벌어졌다. 이 사건을 통해 약 200명의 동티모르 인들이 현지 카톨릭 성당 옆의 리퀴샤 사제관에서 살해당했다. 라파엘 도스 산토(Raphael dos Santos) 사제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목격했다. 친인도네시아 브시 메라쁘띠 민병대(Besi Merah Putih-‘철로 만든 홍백기(紅白旗란 의미. 홍백기는 인도네시아 국기를 뜻함)와 인도네시아 군인들, 리퀴샤의 경찰 등에 자행한 이 사건으로 살해당한 희생자들의 숫자는 서로 너무 큰 편차를 보이는데 인도네시아측은 불과 5명이라고 주장하는 한편 현지 증인들은 200명도 넘는다고 말하고 있다.

 

( 사진 :  사오 조아오 드 브리토 성당  2016 년 )

 

이 범죄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초청한 호주 외교관들에 의해 처음 조사되었는데 해당 조사보고서는 2001년까지도 공개되지 않았다. 그후 이 사건은 유엔 휘하에서 미국, 영국, 필리핀 및 호주, 뉴질랜드 헌병 범죄현장 전문가 등을 대표하는 ‘UNTAET 범죄현장 분견대라고 알려진 국제경찰팀이 재조사했다. 첫 지휘관은 영국 경찰관 스티브 미니넷(Steve Minhinett)이었다. 그 후 미국 경찰관 칼 클락(Carl Clark)이 지취하면서 미국 정보장교 앨런 윌리암스(Allen Williams)의 역할이 매우 커졌다. 이 조사는 광범위한 시체발굴, 증언 녹취, 궁극적으로는 21명의 인도네시아 장교들과 동티모르 친인도네시아 민병대를 암살, 고문, 강제추방 및 살해혐의로 기소하는 데에까지 진행되었다

 

리퀴샤 성당 학살과 마누엘 카라스칼라오(Manuel Carrascalao)의 주택공격은 중범죄 조사의 10대 우선 순위 중 포함되어 있던 두 가지였다. 마누엘 카라스칼라오는 1933년생 아타루오 섬 출신 동티모르 독립지도자로 199417일 딜리 시내에 있던 그의 집에 12명의 무장 민병대가 난입해 당시 17살이던 그의 아들 마넬리토 카라스칼라오(Manelito Carrascalão)와 폭력을 피해 도망쳐온 부녀자와 아이들을 포함한 사람들 백여명을 학살했다 .이 사건의 재판은 벤페이토 모소 라모스 안테로 루이스(Antero Luis-포르투갈, 안토니(Benfeito Mosso Ramos-케이프 버르데cape Verde) 주심과 오 헬더(Antonio Helder -동티모르) 배석판사로 이루어진 두 번째 재판부의 첫 재판이기도 했다. 공청회는 포르투갈어, 영어, 인도네시아어, 동티모르 방언인 터툰(Tetun), 리퀴샤 지역 방언인 토코데데(Tokodede)어 등 다섯 개 언어로 진행되었다. 법정에서는 브시 메라쁘띠 민병대원으로 기소된 이들의 세부 증언을 들었는데 이들은 리퀴샤 성당 공격의 일환으로 사람들을 죽이기 전 술, 동물의 피, 마약 등을 뒤섞어 만든 칵테일을 마신 민병대의 의식에 대해서도 증언했다. 이 학살에는 인도네시아 군인들이 지접 간여했지만 민병대 요원들처럼 평상복으로 갈아입고서 사람들의 눈을 속였다고 한다. 레오네토 마르틴스(Leoneto Martins), 토메 디에고(Tome Diego), 유리코 구테레스(Eurico Guterres), 조아오 타바레스(Joas Tavares) 같은 이들이 학살을 주도한 최우선 혐의자들인데 그들은 모두 동티모르인들이었다. 어디나 어제의 이웃이 등에 칼을 겨누곤 하는 것이다.

 

수하르토가의 사업동료이자 인도네시아 충성파의 대변인인 길 알베스(Gil Alves)는 다음과 같이 언론에 말했다. “브시 메라쁘띠 민병대가 공격을 주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공격이 있기 전 성당 안쪽에서 먼저 총성이 들렸습니다.” 그는 민병대가 사제관을 포위하고 거기 무기를 쌓아두고 있던 CRNT(자나나 구스마오를 따르는 반인도네시아 측) 요원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경찰들이 와 있었고 자위권을 발동해 최루가스를 쐈다는 것이다. 그는 구스마오측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도네시아군이 민병대를 무장시킨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학살이 아니라 정상적인 교전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7년 당시 총리였던 차나나 구스마오는 길 알베스를 통상관광장관으로 지명했다. 왜 그랬을까?

 

이밖에도 1999416일 인도네시아 부대를 대동하고 나타난 일단의 무리들이 아타라(Atara) 마을에서 독립지지 활동가들을 습격했고 6월에는 또 다른 그룹이 말리아나(Maliana)에 소재한 UNAMET 사무실을 공격해 왔다. 인도네시아 당국은 이 갈등이 동티모르 내 라이벌 세력들 간의 충돌일 뿐이며 중립을 지켜야 할 자신들은 이를 중단시킬 권한이 없다고 말했다. 이에 라모스-호르타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코웃음을 쳤다. 19992월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도네시아군은 그간 늘 장담해 왔던 것처럼 철수하기 전에 주요시설을 파괴하고 사회를 혼란시키길 원했습니다. 지난 몇 년간 그런 이야기를 동티모르에 주둔하는 인도네시아군으로부터 귀가 아프도록 들었습니다.” 그 장담이 현실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민병대 지도자들은 피바람이 불 것을 경고한 반면 인도네시아 순회대사프란시스코 로페즈 다 크루즈(Francisco Lopes da Cruz)만약 민중들이 자치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동티모르에 유혈사태가 벌어질 개연성이 크다고 말하며 다녔다. 동티모르인들 중에서도 가열차게 조국과 민족을 인도네시아에 팔아먹기로, 인도네시아의 개로서, 국민으로서, 살겠다고 결심한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을 보면 한일병탄 당시, 그리고 일제강점기 당시 황국시민이 되겠다며 필사적으로 일본에 매달리던 일부 지식인들의 모습이 저들을 통해 투영되는 듯 하다.

 

한 민병대는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당시 벌어졌던 반둥 불바다사건과 비교하여 독립찬성투표를 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동티모르도 불바다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 공포하기도 했다.

 

투표 당일인 1999 8 30일은 대체로 평온하고 질서정연했다. 등록된 전체 유권자 중 98.6%가 투표에 참여했고 9 4일 유엔사무총장 코피 아난(Kofi Annan)은 유효표의 78.5%가 독립에 찬성표를 던졌다고 결과를 발표했다. 그동안 동티모르가 합병을 원한다는 신질서 정권의 프로파간다를 사실로 받아들였던 인도네시아인들은 동티모르인들이 투표를 통해 인도네시아의 일부가 되길 거절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투표를 감독한 유엔과 호주가 하비비로 하여금 이런 결과가 나올 게 뻔한 국민투표를 강행하도록 강요했다며 비난했다.

 

투표결과가 나온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합병찬성 민병대가 공격의 포문을 열고 사람들에게 총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외국인 기자들과 선거참관인들, 그리고 수만 명의 동티모르인들이 산악지대로 피난해야 했다. 일단의 무슬림들이 딜리의 카톨릭 교구건물을 공격, 방화해 전소시켰고 수아이(Suai)에서는 근 100명 가까이 사람들이 살해당했다. 집단학살의 보도가 동티모르 전역으로부터 날아들었다. 유엔은 대부분의 자체인원을 철수시켰고 딜리의 주택단지는 피난민의 홍수를 이뤘다. 네 명의 유엔 직원들이 피난민들이 안전하게 소개되기 전엔 민병대 손에 죽게 될지언정 자기들만 먼저 떠나지 않겠다고 버티기도 했다. 어떤 지옥같은 상황에도 영웅들은 있기 마련이다.

 

( 사진 :  인도네시아군 위란토 장군 )

 

같은 시각, 인도네시아군과 민병대 집단은 20만 명의 동티모르인들을 서티모르의 수용소에 몰아넣었는데 인권단체들은 시설이 매우 열악한 그 수용소들을 개탄스러운 상태라고 묘사했다.

 

9 8일 자카르타에 도착한 유엔 사절단에게 인도네시아 대통령 하비비는 동티모르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유혈참사가 사람들이 지어낸 환상이자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위란토 장군은 동티모르에 파견된 인도네시아군이 상황을 장악하고 있다고 강조했지만 나중에 군 부인들을 위한 한 행사에서 1975년 히트송인 필링스’(Feelings)를 부르며 동티모르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고 한다. 연인과의 헤어짐을 아쉬워 하는 애절한 노래가사에 이제 독립해 떨어져 나가는 동티모르에 대한 그의 감상을 담았다는 것이다. 그건 정말 아쉬움이었을까

 

 

3) 인도네시아군 철수와 평화유지군 진입

 

 

(사진: 1999년 9월 20일, 친인도네시아 민병대들의 마지막 공세 2주 후 인터펫(INTERFET) 부대가 딜리에 진입했다)

 

 

동티모르에서 벌어진 폭력사태는 호주, 포르투갈을 비롯해 전세계의 공분을 샀고 포르투갈, 호주, 미국 등 여러 나라의 활동가들은 자신들의 정부에게 뭔가 조치를 취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호주 수상 죤 하워드(John Howard)는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의 조언을 구했고 호주가 주도하는 국제 평화유지군이 동티모르에 진입해 폭력사태를 종식시키도록 호주를 지원해 달라고 빌 클린턴 미대통령에게 로비를 했다. 미국은 핵심물자 및 정보제공과 함께 후방지원을 자원했지만 직접적으로 작전병력을 파견하진 않았다. 9 11일 빌 클린턴은 다음과 같이 공표했다.

 

  나는 향후 인도네시아에 대한 국제사회로부터의 경제적 지원을 기꺼이 후원하겠다는 내 의지가 오늘 인도네시아가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동티모르를 포기하지 않으면 인도네시아에 경제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위협이었다. 당시 경제적 궁지에 몰려 있던 인도네시아의 하비비 대통령은 9 12일 인도네시아군이 동티모르에서 즉각 철수할 것이며 호주가 주도하는 평화유지군이 동티모르에 진입하는 것을 승인한다고 발표했다.

 

( 사진 :  호주군 피터 코스그로브 소장 )

 

1999 9 15,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동티모르의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있는 것에 우려를 표하고 유엔 평화유지군 파견이 승인되어 현지에 파견될 때까지 다국적군이 동티모르의 평화와 안녕을 회복하고 유엔의 현지활동을 보호, 지원하며 인도주의적 원조활동을 원활케 하도록 하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문 제1264호를 의결했다.

 

호주군 피터 코스그로브(Peter Costrove) 소장의 지휘 아래 동티모르를 위한 국제군’(INTERFET- International Force for East Timor) 9 20일 딜리에 입성했고 인도네시아군의 마지막 부대가 10 31일 동티모르를 떠났다. 국제군이 동티모르에 도착함에 따라 국경을 넘어 인도네시아로 도주한 민병대들은 간헐적으로 국경을 넘어 국제군을 공격해 오곤 했다

 

 

코스그로브는 초급장교 시절 호주군 로얄 오스트레일리안 연대(Roal Australian Regiment) 9대대소속으로 1969년 소대장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해 공훈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호주군 요직을 거쳐많은 찬사를 받은 동티모르 미션 후 본국에 돌아가 대장까지 진급해 호주방위군 총사령관을 역임한 인물이다.

( 사진 :  미항모 벨리우 우드 )

 

 

유엔의 동티모르 과도정부(UNTAET)199910월 말에 세워져 2년간 이 지역의 행정을 도맡았다. 국가주권을 넘겨받은 동티모르 정부는 2002 5 20일 정식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같은 해 9 27일 동티모르는 191번째 유엔 회원국이 되었다.

 

INTERFET을 구성하는 주력은 호주군으로 절정기 병력규모는 보병여단과 기갑 및 항공지원대를 포함해 5,500여명에 달했고 그 외에도 22개국이 참여해 최고조일 때의 병력은 11,000명에 이르렀다. 대한민국 상록수 부대도 여기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은 현지 위기가 지속되는 동안 병참과 외교적 지원을 담당했고 미순양함 모빌 베이(cruiser USS Mobile Bay)INTERFET의 해군을 보호했고 혹시 있을지 모를 중대한 반격을 대비한 전략예비부대로서 1,100명 규모의 미해병대대와 기갑부대 및 포대가 미항모 벨리우 우드(USS Belleau Wood) 선상에서 대기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