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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강점 -(10)

beautician 2019. 3. 6. 10:00


4) 노벨 평화상

1996동티모르의 갈등에 대한 평화적인 해결책과 정의를 추구해 온 업적을 기려카를로스 필리페 지메네스 벨로 주교(Bishop Carlos Filipe Ximenes Belo)와 호세 라모스-호르타(José Ramos-Horta)에게 노벨평화상이 시상되면서 동티모르에 갑작스러운 세계의 관심이 쏟아졌다.

 


카를로스 필리페 지메네스 벨로 주교(왼쪽)와 호세 라모스-호르타(오른쪽)

 

노벨 위원회는 보도자료를 통해 이 상이 자결권에 대한 인간들의 권리에 기반하여 동티모르에서 갈등을 종식시키는 외교적 해결책 모색을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기 바란다고 밝혔다. 노벨학자 어윈 아브람스(Irwin Abrams)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도네시아로서는 이 노벨상이 곤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인도네시아 정부는 공개성명에서 벨로 주교의 노벨상 수상을 마지못해 인정했지만 라모스-호르타는 동티모르의 내전 당시 불거진 적개심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비난하면서 두 수상자 사이에 격차를 두려고 노력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벨로 주교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반면, 라모스-호르타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정치적 기회주의자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시상식에서 세제르스테드(Sejersted) 회장은 라모스-호르타가 내전 당시 동티모르 국내에 있지도 않았고 귀국하자마자 내전의 양쪽 당사자들을 화해시키려 노력했다고 지적하며 인도네시아 정부의 관련 발언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한편 인도네시아와 포르투갈의 외교관들은 인도네시아 외무상 알리 알라타스가 인도네시아의 신발 속에 들어간 자갈이라고 언급한 문제의 해결책을 모색할 목적의 일련의 회합을 통해 1982년 유엔총회 결의안에서 요구한 협상을 계속했다.

 

여기서 앞서 몇 차례 언급되었던 라모스-호르타의 이력을 잠시 짚고 가기로 하자.

호세 마누엘 라모스-호르타 (José Manuel Ramos-Horta [ʒuˈzɛ ˈʁɐ̃muz ˈɔɾtɐ] 주제 러무즈 오르터)19491226일 출생의 동티모르 정치인으로 동티모르가 독립을 얻은 후엔 2007520일부터 2012520일까지 동티모르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는 2002년부터 2006년 사이 외무상을, 2006년부터 2007년 사이엔 잠시 총리직을 맡기도 했다. 1996년 노벨평화상 공동수상자이기도 한 그는 프레틸린의 발기인이자 당원으로서 1975~1999년의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강점기간 동안 망명정부의 대변인으로 일하며 온갖 풍상을 견뎌냈다.

 

라모스-호르타는 종족으로 따지자면 메스티코(Mestico)족으로 1949년 동티모르 수도 딜리에서 티모르인 어머니와 살라자르(Salazar) 정권에 의해 당시 포르투갈령 티모르였던 동티모르로 유배당해 온 포르투갈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소이바다(Soibada)라는 작은 마을의 미션스쿨에서 카톨릭 교육을 받았는데 이 마을은 훗날 인도네시아의 침공이 시작된 후 프레틸린의 사령부가 차려지게 되는 곳이다. (사진: 호세 라모스-호르타)

 

라모스-호르타는 1983년 헤이그 국제법 아카데미(Hague Academy of International Law)에서 공공국제법을 공부했고 오하이오 옐로우 스프링스의 앤티오크 칼리지(Antioch College)에서 1984년 평화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스트라스버그의 국제 인권대학(International Instutute of Human Rights)에서도 1983년 인권법을 공부한 후 뉴욕의 콜롬비아 대학에서 미국해외정책 학과에서 석사과정을 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전혀 다른 지역에서 굴지의 대학을 다닌 그는 어쩌면 많은 능력들 중에 순간이동 능력도 가졌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는 심지어 1987년에는 옥스포드 대학 세인트 앤터니 칼리지 멤버로서 포르투갈어, 영어, 불어, 스페인어, 동티모르어 등 5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그는 훗날 동티모르 국무장관 겸 내부장관이 되는 아나 페소아 핀토(Ana Pessoa Pinto)에게서 모잠비크 유배 당시 아들 로로 호르타(Loro Horta)를 얻었다. 훗날의 일이지만 두 사람은 결국 이혼하게 된다.

 


그는 포르투갈령 동티모르 정치상황 전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가 1970-1971년의 2년간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그건 어쩌면 그의 유전자에 새겨진 집안 내력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포르투갈인 할아버지도 아조레스 섬, 케비프 버르데(Cape Berde), 포르투갈령 기니아를 거쳐 포르투갈령 티모르까지 유배당한 전력이 있었다.

 

그는 동티모르 민족주의 지도자들 중 온건파에 속했고 인도네시아 침공 이전 동티모르의 독립분위기가 무르익던 1975년 독립지지정당들에 의해 주창된 동티모르 민주공화국 외무상에 지명되기도 했다. 그때 그는 불과 25살이었다. 그는 인도네시아군이 동티모르를 침공하기 사흘 전 유엔에 티모르 상황에 대한 청원을 위해 출국했다. (사진: 1976년 만 27세의 호세 라모스-호르타, 확실히 동양인처럼 보이진 않는다)

 

뉴욕에 도착한 그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앞에서 연설하며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점령하면 약102,000명의 동티모르인들이 죽을 것이므로 이를 막아 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이후 10년간 유엔에서 프레틸린의 붙박이 대표를 지냈다. 그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그의 수중엔 불과 25불 밖에 없었으므로 금전적으로 몹시 쪼들렸지만 그의 정치적 견해와 결단을 지지하는 미국인들의 자선ㅇ로 어느 정도 연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의 당이 처한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전세계를 돌아다녔다.

 

1993년 동티모르 주민들이 라프토상(Rafto Prize)를 수상하게 되었는데 라모스-호르타는 망명 중인 외무상 자격으로 시상식에 참석했다. 하지만 국제사회가 동티모르나 라모스-호르타에게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19945월 필리핀 대통령 피델 라모스가 자카르타의 압력에 굴복해 마닐라에서 열리기로 했던 동티모르에 관한 국제 컨퍼런스를 금지하려 하면서 라모스-호르타를 블랙리스트에 올렸고 태국도 그해 후반 그를 외교적 기피인물에 포함시켰다.


199612월 라모스-호르타는 지메네느 벨로 주교(Bishop Ximenes Belo)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노벨위원회는 두 수상자가 소수민족에 대한 억압에 맞서 오랫동안 애써 저항한 사실을 높이 평가했고 이 상을 통해 민족자결권에 기반해 동티모르 문제가 외교적 돌파구를 찾을 수 있길 희망한다는 수상자 선정의 변을 내놓았다. 위원회는 라모스-호르타가 1975년 이래 동티모르의 입장을 가장 앞장서 국제사회에 호소한 대변인이라고 평가했다. (사진: 벨로 주교)

 

한편 카를로스 필리페 지메네스 벨로 주교는 194823동티모르 북부 해안가 베마세(Venasse) 지역 인근 와일라카마(Wailakama)라는 마을에서 도밍고스 바즈 필리페(Domingos Vaz)와 에르멜린다 밥티스타 필리페(Ermelinda Baptista Filipe)의 다섯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교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2년 후 세상을 떠났고 그는 어린 시절을 바우카우(Baucau)와 오수(Ossu)의 카톨릭계 학교에서 보낸 후 딜리 외곽의 다레 준신학대학(Dare minor seminary)으로 진학하여 1968년 졸업했다. 1974-1976년 기간 도이모르와 마카오에서 지낸 견습사제 기간을 제외하고는 1969년부터 1981년까지 그는 포르투갈과 로마에서 살레시안 소사이어티(Salesian Society-SDB)의 회원이 되어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1980년 신부 서품을 받았다.

 

19817월 동티모르로 돌아오는 그는 20개월간 교사로 근무했고 파투마카(Fatumaca)의 살레시안 대학에서 두 달간 학장으로도 일했다.  1983년 마르친뉴 다 코스타 로페스 주교가 사임하자 카를로스 필리페 지메네스 벨로는 교황 직속의 동티모르 교회 전체의 수장인 딜리 교구의 사도행정관으로 임명되었고 198926일에는 로리움(Lorium)의 명목 주교로 서품받았다.

 

벨로 신부는 그가 복종적일 것이라 생각한 바티칸의 자카르타 프로 눈시오(Pro Nuncio)와 인도네시아 지도층이 선택한 인물이었으므로 그를 지지하지 않던 티모르 성직자들은 그의 선임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취임 후 5개월 만에 설교를 톨해 크라라스 학살(the Kraras massacre-1983)의 잔혹성을 가열차게 비판했고 인도네시아인들이 벌이고 있던 막무가내식 체포행위를 비난했다

 

당시 교회는 동티모르에서 외부 세계와 소통이 가능한 거의 유일한 통로였으므로 이를 잘 알고 있던 신임 사도행정관 벨로 주교는 인도네시아측의 압박과 대부분 세계의 무관심으로 야기된 철저한 고립상황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외국에 편지를 보내며 동티모르의 소식을 전하는 데에 애썼다.

 

19892월 그는 포르투갈 대통령과 교황, 유엔사무총장에게 편지를 써 유엔이 동티모르의 미래를 결정할 국민투표를 열어줄 것과 국민으로서, 또한 국가 자체로서 죽어가고 있는동티모르에 대한 국제적 도움을 촉구했다. 그런데 유엔에 보낸 편지가 그해 4월 일반에 공개되면서 그는 더욱 더 인도네시아측의 요주의 대상이 되었다. 1991년 산타크루즈 학살이 벌어졌을 때에는 도망쳐 온 젊은이들을 위해 자기 집을 피난처로 제공한 것이 셀 수도 없으며 살해된 희생자 숫자를 세계에 알리려 지난한 노력을 경주했다.

 


동티모르인들을 대신한 노력과 평화와 화합을 위한 헌신으로 그는 199612월 호세 라모스-호르타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은 후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과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과의 만남을 통해 노벨평화상 수상을 영예롭게 생각함을 전했다. 그는 1995년 캐나다 인권단체인 권리와 민주주의’(Rights & Democracy)로부터 존 험프리 자유상(John Humphrey Freedom Award)를 수상하기도 했다. (사진: 라모스-호르타와 함께 노벨평화상 수상)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