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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강점 -(9)

beautician 2019. 3. 5. 10:00


3) 자나나 구스마오의 나포

19921120일 프레틸린의 지도자 자나나 구스마오(Xanana Gusmao)가 인도네시아군에 체포되었다. 19935월 그는 반란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그후 20년 징역형으로 감형되었다. 전세계적으로 주목받던 저항군 지도자의 체포소식은 동티모르의 독립운동에 크나큰 좌절감을 안겼다. 그러나 구스마오는 찌삐낭 교도소 안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동티모르인들의 희망의 상징이었고 동티모르인들의 비폭력저항이 그후에도 계속되었다.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이 1994년 자카르타를 방문했을 때 29명의 동티모르 대학생들이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인도네시아를 지지하는 미국을 비난했다. 그와 동시에 인권 단체들은 인도네시아 군인들과 경찰들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잔혹한 폭력행위에 세계가 주목할 것을 촉구했다. 인권감시연대 (휴먼라이트워치)1995년 보고서는 역내에서 벌어지는 고문, 실종, 기본권 제한 등을 포함해 폭력행위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959월과 10월의 몇 차례 폭동이 있은 후 국제사면위원회는 인도네시아 당국이 영장도 없이 막무가내로 사람들을 체포해 고문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수용자들은 철봉으로 구타당하고 발길질, 칼질은 물론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동티모르 독립 후 첫 대통령이 되는 자나나 구스마오가 어떤 인물인지 잠시 들여다보기로 하자.

 


  카이 랄라 자나나 구스마오(Kay Rala Xanana Gusmão)1944620일 태어난 동티모르 정치인으로 태어날 당시 붙여진 이름은 호세 알렉산더 구스마오(José Alexandre Gusmão)였다. 그의 별명인 자나나(Xanan)는 미국 로큰롤밴드 샤나나(Sha Na Na)에서 따왔는데 샤나나 역시 두왑/R&B그룹 더 실루엣스(the Sillhouettes)1957년 노래의 가사에서 따온 것이다. (사진: 자나나 구스마오)

 

  구스마오는 포르투갈령 티모르의 마나투토(Manatuto)에서 포르투갈-티모르 혼혈인 교사 부모에게 태어났다. 그는 딜리 외곽의 제주이트(Jesuit) 고등학교에 다녔지만 돈이 없어 15세에 떨어져 나온 후 비숙련공 일자리를 전전했지만 어렵사리 야학을 다니며 공부를 계속하다가 19살이 되던 해에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되는 에밀리아 바티스타(Emilia Batista)를 처음 만나 2년 후인 1965년 결혼했고 유지니오(Eugenio)라는 아들과 제닐다(Zenilda)라는 딸을 얻었다. 1966년 비로소 공공부문 일자리를 얻게 된 구스마오는 드디어 스스로 학비를 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1968년 포르투갈 육군에 징집되면서 학업은 또 다시 중단되었다. 그는 19713년간의 군복무를 마쳤다. 제대 당시 그의 계급은 상병이었다. 막 군복무를 마치고 아들을 낳았을 때 그는 호세 라모스-호르타가 이끄는 민족주의자 조직에 몸을 담게 되었다. 그후 3년간 그는 식민주의 시스템을 겨냥한 평화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1974년 포르투갈에서 일어난 쿠데타를 계기로 포르투갈령 티모르에도 비식민화가 시작되었고 얼마 후 마리오 레모스 피레스 총독도 식민지의 독립을 허락할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1978년 독립을 목표로 그 안에 총선을 치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75년 내내 두 정치 라이벌 집단의 치열한 투쟁이 동티모르를 휘저었다. 구스마오는 이때 프레틸린 측에 깊숙히 간여하다가 1975년 중반 상대편인 UDT 파벌에게 체포되어 투옥되고 말았다.

 

  동티모르의 내부 혼란을 틈타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흡수하기 위해 사회정치적 혼란을 더욱 조장하면서 서티모르에 전진배치한 부대들을 움직여 포르투갈령 동티모르 영토를 자주 습격했다. 1975년 프레틸린이 동티모르 정국을 장악한 후에야 구스마오도 비로서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프레틸린의 언론담당관에 임명되었다. 19751128일 프레틸린이 동티모르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했는데 이를 영상으로 기록하는 것도 구스마오가 맡은 일이었다. 그로부터 9일 후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이 시작되었다. 당시 구스마오는 딜리의 친구를 방문하고 있었는데 산중턱에서 침공이 진행되는 모습을 보았고 그후 며칠 동안 흩어진 가족들을 필사적으로 찾아 나섰다.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 임시정부를 구성하자 구스마오는 저항운동에 깊숙히 가담하여 조직을 승리 가능한 저항조직으로 재편성했다. 초창기에는 이 마을 저 마을을 도보로 이동하는 발품을 아끼지 않고 지지자들과 지원병들을 확보했다. 1980년대 초반 프레틸린은 많은 문제에 휘말렸는데 그중엔 마욱 모룩(Mauk Moruk)을 비롯한 네 명의 팔린틸 고위장교들이 구스마오를 노리고 일으킨 1984년 쿠데타 시도도 있었다. (사진: 마욱 모룩)

 

팔린틸 고위 지휘관이었던 마욱 모룩은 총사령관 구스마오와 늘 대립하다가 회심의 쿠데타가 실패하자 인도네시아군에 항복했다. JSA에서 사고치고 탈영한 병사가 차제에 처벌을 피해 휴전선을 넘어 북한으로 귀순한 셈이다. 인도네시아의 배려로 너무나 안락한 네덜란드에서 유배생활을 한 그는 많은 시간이 흐른 후 돌아왔다. 한참 훗날의 일이지만 그는 또 다시 마우베레 혁명위원회(Maubere Revolutionary Council -KRM)라는 이름의 반군을 조직해 여전히 구스마오가 주축이 된 동티모르 정권에 항거했고 2015년 경찰에 대한 일련의 공격을 시도하다가 군경 합동진압작전에서 사살된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동티모르의 사회혼란이 야기될까봐 우려했을 정도로 그는 죽을 때까지 적잖은 영향력을 유지했다.

 

구스마오는 이후 프레틸린을 나와 여러 중도연합을 지지하다가 마침내 프레틸린의 강력한 라이벌 정당을 구축한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그는 주요 지도자들 중 한 명이었다. 1990년대에 그는 외교와 매체접촉에 깊이 간여했고 19911212일 산타크루즈에서 일어난 딜리 학살사건에 세계적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수많은 유력 언론들과 인터뷰를 하던 과정에서 구스마오는 세계적 인지도를 쌓았다.

 


 그가 유명해질 수록 인도네시아 정부는 그를 잡기 위해 더욱 혈안이 되었고 결국 199212월 마침내 그를 체포하는 데에 성공했다. 19935월 구스마오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진행한 재판에서 유죄평결과 함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51년 인도네시아 형법 12호의 108(반란)106(국토의 참절)을 위반한 혐의였다. (사진: 인도네시아군에 체포된 구스마오) 구스마오는 재판 전에 자기 자신을 변호인으로 지정해 스스로 변론했다. 19938월 수하르토 대통령은 그의 형기를 20년으로 감해주었다. 1999년말까지 그는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서신을 통해 영어를 가르쳐 주던 자카르타 거주 호주 여성 커스티 소드(Kirsty Sword)의 도움을 받으며 자카르타의 감옥 안에서도 동티모르의 저항운동을 성공적으로 주도했다. 그가 풀려났을 때 유엔 대표단이나 넬슨 만델라 같은 세계적 명사들이 그를 방문했다. 그는 에밀리아와의 35년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투옥기간 중 많은 도움을 주었던 커스티 소드와 2000년 결혼해 알렉산더(Alexandre), 카이 올록(Kay Olok), 다니엘(Daniel) 등 아들 셋을 낳았다.

 


 1999830일 동티모르에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는데 결과는 독립찬성이 압도적이었다. 그런 결과가 발표됨과 동시에 인도네시아군은 테러행위를 통해 엄청난 희생자를 발생시켰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자신들이 그 테러에 연루되지 않았다고 부인했으나 이를 미연에 예방하지 못한 책임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 결과, 1970년대에 포르투갈이 이끌었던 유엔으로부터의 외교적 압박을 1990년대에는 미국과 호주가 앞장섰고 유엔제재와 함께 호주군이 이끄는 평화유지군 INTRERFET이 동티모르에 상륙하자 그제서야 구스마오도 마침내 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동티모르에 돌아와 화해와 재건 캠페인을 시작했다. (사진: 인도네시아에서의 옥살이를 마치고 아일레우로 돌아온 구스마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