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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강점 -(8)

beautician 2019. 3. 4. 10:00



6. 1990년대

 

1) 저항방식과 합병작전의 변화


1975년 이래 동티모르의 사회간접자본과 의료, 교육시설을 개선하려는 인도네시아 정부의 주요 투자 정도로는 동티모르인들의 반감을 억제할 수 없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 프레틸린 전사들은 불과 수백 명 규모로 축소되었지만 젊은 동티모르인들, 특히 딜리 청년들과 접촉을 늘렸고 자결권을 요구하는 비폭력 저항운동도 자생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했다. 이 저항운동에 참여한 이들 대부분은 침공 당시 아직 어린이었다가 인도네시아식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이들이었다. (사진: 알리 알라타스 당시 인도네시아 외무상


그들은 인도네시아인들이 경제개발을 한다며 동티모르를 문화, 정치적으로 착취하는 현실에 분통을 터뜨렸고 그들끼리는 포르투갈어로 말하며 자신들의 문화 속에 녹아 들어 있는 포르투갈의 문화유산을 중요시했다. 그들은 인도네시아를 점령군으로 인식하며 자결권 획득을 위해 포르투갈의 도움을 촉구했다. 대외적으로 프레틸린의 조직원들 가장 널리 알려진 이는 예전 언론인이었고 훗날 티모르레스테의 수상과 대통령을 역임하게 되는 호세 라모스-호르타 - 은 외교 포럼들을 다니며 자신들의 명분을 강조했다.


무장저항이 잦아들자 인도네시아 정부는 1988년 언론인들의 여행제한 해제 등을 포함해 동티모르 개방을 선언하며 상업부문의 개선을 도모하려 했다. 군은 자신들의 위상이 약화될까 우려하며 반대했지만 당시 외무상 알리 알라타스(Ali Alatas)가 이 새로운 정책을 밀어붙였다. 알라타스와 외교관들은 국제적 우려에 대한 반응차원에서 수하르토의 정책변경을 유도했다.


알리 알라타스 박사(Dr. H.C. Ali Alatas S.H.) 1932 11 4일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에서 출생한 인도네시아 외교관으로 1988년부터 1999년까지 11년간 수하르토 정권과 하비비 정권에서 외무상을 지냈다. 그는 2008년 사망할 때까지도 유엔대사, 대통령의 중동문제 특사단, 대통령 자문위원회(Dewan Pertimbangan Presiden) 위원장을 지낸 인물이다.


1989년 말 강경파 주둔군 사령관 물야디 준장(Brigadier General Mulyadi)이 물러나고 반란세력에게 보다 설득력있는방식의 접근을 약속한 루돌프 와라우 준장(Brigadier General Rudolph Warouw)이 부임했다. 역내 여행제한이 완화되었고 일단의 정치범 수형자들이 석방되었다. 심문할 때 고문이 동원되는 경우도 드물어졌다. 와라우는 군기를 바로 세우려 노력했고 그 일환으로 19902월 한 인도네시아군 병사가 동티모르에서의 비합법적 행위를 한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이는 침공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핍박에 대한 우려가 줄어들자 저항운동은 더욱 거세어졌는데 1989년 요한 바오로 2세 같은 유명인사의 동티모르 방문에 맞춰 반합병 저항시위가 조직되었다. 냉전이 종식되면서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점령을 지지하던 서방도 그 정당성의 상당부분을 상실된 상태였다. 자결권과 인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주목도가 결과적으로 증가한 것도 인도네시아에겐 압박으로 다가왔다. 1990년대에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동티모르 문제를 국제적으로 부각시켰고 저항세력을 결집시켰다.

 

2) 산타크루즈 학살사건(Santa Cruz Massacre)

딜리 학살사건이라고도 알려진 산타크루즈 학살사건(Santa Cruz Massacre)은 인도네시아의 강점기간이던 19911112일 동티모르 수도 딜리의 산타 크루즈 공동묘지에서 인도네시아군이 동티모르 독립요구 데모대에게 총격을 가해 250명 이상을 살해한 사건이다.

사건은 세바스티아오 고메즈의 장례식에서 벌어졌다.


19911112일 인도네시아군에 의해 사살된 청년 의 추모미사 도중 2,500명에 달하는 시위대는 프레틸린의 깃발과 휘장을 펴들고 독립을 요구하는 구호를 가열차게, 그러나 평화적으로 외치고 있었다. 시위대는 인도네시아군과 잠시 대치했는데 인도네시아군이 발포해 최소 250명의 동티모르인들이 살해되었다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국제여론을 환기시켜 이전에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강점을 승인하고 지지했던 미국, 영국 같은 강고한 서방국가들 대부분이 결국 동티모르의 자결권을 지지하는 쪽으로 선회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사건의 전개는 이랬다.


199110월 인권에 관한 유엔 특별기록위원회(UN Special Rapporteur) 피터 코이만스(Pieter Kooijmans) 위원장의 방문에 맞춰 포르투갈 의회 의원들과 12명의 언론인이 사절단으로 동티모르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 사절단에 독립운동단체 프레틸린을 지원하는 질 졸리페(Jill Jolliffe) 기자가 포함된 것에 인도네시아 당국이 반대의사를 표하자 포르투갈은 사절단 파견 자체를 취소해 버렸다. (사진: 질 졸리페 기자) 그들의 방문을 계기로 자신들의 명분을 국제적으로 알리려 했던 저항 활동가들은 크게 실망했고 인도네시아 당국과 동티모르 젊은이들 사이의 긴장감은 더욱 높아졌다.

1028일 인도네시아군은 딜리의 모타엘 교회(Motael church)에서 일단의 저항조직원들을 포착했다. 합병지지 시위대와 교회 안의 사람들이 충돌했는데 그 결과 양측 모두 각각 한 명씩 사망자가 나왔다. 동티모르 독립지지 측의 세바스티아오 고메스(Sebastiao Gomes)가 교회 밖으로 끌려나가 인도네시아군에게 사살되었고 혼전 속에서 합병지지파의 아폰소 헨드릭스(Afonso Hendriques)가 칼에 찔려 사망했다.

 

포르투갈 사절단의 방문을 취재하기 위해 동티모르에 온 외신기자들 중엔 미국 독립언론인 에이미 굿맨(Amy Goodman)과 앨런 네언(Allen Nairn), 영국인 카메라맨 맥스 스탈(Max Stahl)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1112일 고메즈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여기 참석한 인근지역 주민들인 어린이들과 부녀자들을 포함한 수천 명의 조문객들이 모타엘 교회로부터 인근 산타크루즈 묘지까지 걸어서 이동했다. 그 과정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동티모르 국기를 꺼내 들었다. 비록 큰 목소리로 구호를 외쳤지만 군중들은 대체로 평화롭고 질서정연했다고 대부분의 증인들이 말하고 있다. 이것은 1975년 이후 처음 등장한 가장 큰 대중시위였다.

 


 인도네시아군과 시위대가 대치하던 짧은 시간동안 몇몇 시위 참석자와 게르한 란따라(Geerhan Lantara) 소령이 칼에 찔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스탈에 따르면 란타라 소령이 티모르 국기를 든 한 소녀가 포함된 시위대를 먼저 공격했다고 하며 또 다른 프레틸린 활동가 콘스탄시오 핀토 신부는 인도네시아군과 경찰들이 시위대를 구타했다고 증언했다. 운구행렬이 묘지 안으로 들어간 후에도 일부는 묘지 울타리 앞에서 시위를 계속했다. 그러자 약 200명 가량의 인도네시아 군인들이 도착해 무기를 꺼내 들고 집회장소로 진입해 비무장 민간인들에게 발포하기 시작했다. 장례식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참석자들은 묘지 밖으로 몸을 피해 내달렸지만 최소 250명의 동티모르인들이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다. 희생자들 중엔 정치학과 학생이자 호주에 본부를 둔 인권단체 활동가인 뉴질랜드인 카말 바마다지(Kamal Bamadhaj)도 있었다.

이 학살은 에이미 굿맨과 앨런 네언 등 두 명의 미국인 기자들 눈 앞에서 벌어졌고 영국 요크셔 TV에서 일하는 맥스 스탈이 카메라에 담았다. 스탈이 촬영하는 둥안 굿맨과 네언은 티모르인들과 인도네시아 군인들 사이에 서서 티모르인들의 방패가 되어주려 했다. 그러자 인도네시아 군인들이 굿맨을 구타하기 시작했고 이를 말리려 뛰어든 네언도 개머리판에 머리를 맞아 두개골 골절을 당했다. 스탈은 우여곡절 끝에 영상이 담긴 필름을 숨겨 호주로 가지고 나갈 수 있었다.


 그들은 다윈에 도착하여 인도네시아와 한 통속인 호주에게 필름을 압수당할 것을 우려해 네덜란드 언론인 사스키아 쿠벤버그(Saskia Kouwenberg)에게 필름을 맡겼다. (사진: 사스키아 쿠벤버그 네덜란드 언론인) 이 영상은 19921월 영국 ITV를 통해 모든 냉혹함으로: 동티모르의 학살’(In Cold Blood: The Massacre of East Timor)이란 제목으로 방영되었다. 스탈의 영상은 굿맨, 네언 및 다른 이들의 증언과 함께 전 세계로부터 격렬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이 다큐멘터리는 1992년 처음 만들어진 국제사면위원회 영국 미디어 어워드(Amnesty International UK Media Awards)를 수상했다.


이 학살장면은 TV를 통해 전세계에 방영되어 인도네시아 정부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미디어들의 성장으로 인해 신질서 정권이 인도네시아 국경을 넘나드는 정보를 점점 더 얼마나 통제하기 어렵게 되었나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1990년대에 냉전이 종식되면서 인도네시아 정부엔 국제적 우려의 시선이 더욱 집중되었다. 산타크루즈 학살의 동영상 복제본이 거꾸로 인도네시아 국내로 유입되어 인도네시아인들도 자기 정부가 무슨 일을 했는지 가위질 되지 않은 원래의 영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었다. 다수의 민주주의 성향의 학생그룹들과 잡지들이 동티모르 문제뿐만 아니라 신질서 정권 전반, 넓은 시각의 역사,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미래 등에 대한 보다 공개적이고 비판적인 토론을 주도했다.

 

  그 여파로 미국 의회는 인도네시아군에 대한 미국 무기 판매를 계속하면서도 인도네시아군 요원들에 대한 훈련프로그램 IMET에 대한 자금지원을 삭감했다포르투갈 정부는 외교전에 박차를 가해 유럽연합 회원국들에게 동티모르 이슈에서 인도네시아에게 압박을 행사하도록 요구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인도네시아와 경제적 관계가 돈독하고 무기까지 판매하고 있던 영국 같은 나라들이 자국 이익에 해가 될까봐 유보적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호주에서는 동티모르의 주권이 자카르타에 있음을 인정한 연방정부에 비난이 쏟아졌다. 학살 당시 호주 정부는 인도네시아군과의 연대를 더욱 고양시키던 중이었다.

 

한편 인도네시아 당국은 이 사건을 시위대의 폭력으로 인해 발생한 우발적 반응 또는 그저 오해라고만 설명했다. 하지만 이에 수긍하지 않는 이들은 퀘리카이(Quelicai), 라크루타(Lacluta), 크라라스(Keraras) 등에서 인도네시아군의 대규모 폭력의 역사적 기록들과, 군의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인도네시아 본국의 정치가 관료들, 이렇게 두 가지 요소를 지적한다. 당시 인도네시아군 총사령관 뜨리 수뜨리스노(Tri Sutrisno)는 학살 이틀 후 이렇게 발언했다. “우리 군을 우습게 봐서는 안된다. 마침내 우린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들에게 발포할 수밖에 없었다. 저 선동자들처럼 덜 떨어진 것들은 총을 맞아 죽어 마땅하며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오랜 식민지 시절을 겪었던 인도네시아가 다른 민족, 남의 땅을 점령하였을 때 그 오만함이 이미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섬뜩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19911229일 국내외 여론에 밀린 뜨리 수뜨리스노 대장은 이 사태의 책임을 물어 동인도네시아 군사령관 신통 빤자이탄(Sintong Panjaitan) 소장과 동티모르 군사령관 루돌프 와라우 준장을 각각 직위해제했다.

 

 학살에 대한 반응으로 전세계 활동가들이 동티모르인들과 연대를 형성하고 신속한 자결권 승인을 인도네시아에 촉구했다.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를 지원하기 위해 1973년 구성된 영국의 조직 TAPOL은 동티모르에서의 활동을 확대했다. 미국에서는 동티모르 활동 네트워크(‘the East Timor Action Network (지금은 동티모르와 인도네시아 활동 네트워크-the East Timor and Indonesia Action Network))가 발족하자마자 곧 전국 10개 도시에 지부가 설치되었다.

또 다른 연대가 포르투갈, 호주, 일본, 독일, 말레이시아, 아일랜드, 브라질에서 만들어졌다. 매체와 통신의 발전으로 학살사건에 대한 보도가 인도네시아 국경을 넘나드는 것을 신질서 정부가 결국 막을 수 없었다. 더욱이 1990년대에 접어들어 냉전도 끝나면서 인도네시아 정부는 보다 철저해지는 국제감시활동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의 민주주의 성향 학생그룹들과 그들이 발행하는 잡지들이 동티모르 문제만을 다룬 것이 아니라 신질서 정부 자체와 보다 확장된 지역역사 그리고 인도네시아 미래에 대해 공개적, 비판적으로 논하기 시작했다


군에 대한 날카로운 비난은 비단 국제사회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인도네시아 국내 엘리트들 중에서도 흘러나왔다. 하지만 학살사건으로 1989년의 개방 분위기는 사라지고 새로운 압제의 시대가 도래했다. 와라우의 해임과 함께 그의 상관들은 티모르인들의 저항에 대해 와라우가 취했던 유연한 접근방식을 철저히 폐기했다. 프레틸린 동조자로 의심되는 자들은 다시 체포당했고 인권침해사례가 증가하면서 외국 언론인들의 출입금지조치도 되살아났다. 동티모르인들 사이에서는 인도네시아 주둔군에 대한 증오가 더욱 불타올랐다. 한편 쁘라보워 대령의 특전사(Kopassus) 3 그룹은 검정색 후드 복장을 한 일단의 민병대들을 조련해 남은 저항조직을 뿌리뽑으려 했다(사진동티모르 주둔 시절의 쁘라보워 수비안토 대령)

 

훗날 독립 동티모르는 1112일을 국가공휴일로 지정해  민간인들이 역사상 단일 사건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흘린, 그래서 전세계의 이목을 동티모르인들의 독립의지에 집중시켰던 이 날을 기념하고 있다.

 


(사진) 199811월에 있었던 산타크루즈 학살 재현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