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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강점 -(7) 본문
7) 1983년 청소작전
반란진압작전이 연속적으로 실패하자 인도네시아군 수뇌부는 1983년 3월 딜리 지역 군휴양소 사령관인 뿌르완토(Purwanto) 대령에게 프레틸린 사령관 자나나 구스마오(Xanana Gusmão)와 평화협상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내려 회담이 성사되었다. (사진: 뿌르완토 대령과 자나나 구스마오) 그러나 자나나가 협상에 포르투갈과 유엔을 참여시키려 하자 1983년 3월 인도네시아군 사령관 베니 무르다니(Benny Moerdani) 장군은 “이젠 더 이상 바보짓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번에야말로 어떤 자비도 베풀지 않고 저들을 철저히 분쇄할 것”이라고 천명하며 휴전을 깨고 대청소작전(Operation Clean-Sweep)을 개시했다.
휴전협정 폐기와 함께 인도네시아군에 의한 학살과 즉결처형, 실종 등이 쇄도하는 파도처럼 또 다시 시작되었다. 1983년 8월 앞서 언급한 크라라스(Kraras) 학살사건으로 200여 명의 주민들이 살해당했고 가까운 강가에서 다른 500여명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1983년 8월에서 12월 사이 국제사면위원회는 수도 딜리에서만 600명 넘는 인사들이 체포되거나 실종되었다고 보고했다. 군은 실종자 가족들에게 누가 물으면 실종된 이들이 발리로 갔다 말하라고 강요했다.
합병을 반대하는 이들은 체포되어 고문당하곤 했다. 1983년 국제사면위원회는 동티모르에서 입수된 교본을 출판했는데 이는 개인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야기시키는 방법과 전기고문이나 발가벗겨지는 등 고문당하는 모습의 사진을 찍지 말라는 경고 등을 포함하고 있다. 1997년 콘스탄시오 핀토(Constâncio Pinto) 주교는 그의 회고록 ‘동티모르의 끝나지 않은 투쟁: 티모르인들의 저항 그 내면’(East Timor's Unfinished Struggle: Inside the Timorese Resistance)에서 인도네시아 병사들에게 고문당하던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들은 질문 한 개를 던질 때마다 내 얼굴을 두 세 번 가격했다. 머리를 그렇게 자주, 세게 맞으면 안면이 완전히 부서진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된
다. 그들은 내 옆과 뒤에서 주먹으로 날 내려치고 발길질 했다….(또 다른 장소에서) 그들은 나를 심리적으로 고문했다. 그들은 그때 날 때리진 않았지만 날 죽이겠다며 강력한 협박을 해왔다. 그들은 책상 위에 권총을 놓아두기까지 했다.” 미셀 터너(Michele Turner)의 저서 ‘동티모르를 말하다: 1942-1992의 증언들’(Telling East Timor: Personal Testimonies 1942–1992)에 딜리 감옥에서 벌어진 고문에 대한 파티마(Fatima)라는 여성의 목격담을 담았다. “그들은 사람을 의자에 앉혀 놓고 그 사람의 엄지발가락 위에 또 다른 의자의 다리를 올려 눌러 놓고 있었어요. 그리고 병사들은 음식에 소변을 본 후 음식과 비벼 그 사람에 먹도록 했어요. 그들은 전기고문을 자행했고 발전기도 사용했어요…” (사진: 콘스탄시오 핀토 주교)
8) 프레틸린의 폭력
인도네시아 정부는 1977년 프레틸린에 의해 살해당한 20여 명을 포함한 집단 매장지가 아일리에우(Ailieu)와 사메(Samé)에서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 국제사면위원회는 이 보고의 진위를 1985년에 확인하면서 프레틸린이 자신의 소행이라 밝힌 여러 건의 즉결차형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1997년 인권보호 단체인 ‘인권감시연대’(Human Right Watch)은 아홉 명의 민간인 죽음을 야기한 일련의 프레틸린의 공격을 비난했다.
9) 강점기 당시 인구통계학과 경제
동티모르에서 포르투갈어 사용이 금지되고 인도네시아어가 정부, 교육, 상업 등의 공용어로 채택되었고 인도네시아식 학제가 보급되었다. 인도네시아의 공식 건국이념인 빤짜실라가 동티모르에도 적용되기 시작했고 공무원직은 빤짜실라 훈련 수료증을 가진 이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 동티모르 저변의 애니미즘 다신교의 신앙체계는 인도네시아의 헌법상 일신교 원칙과 맞지 않았으므로 결과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하는 인구가 크게 늘었다. 포르투갈인 성직자들은 인도네시아인들로 교체되었고 라틴어와 포르투갈어로 진행되던 천주교 미사도 인도네시아식 미사로 바뀌었다. 인도네시아의 침공이전 로마 카톨릭 인구는 전체의 20% 선이었으나 1980년대에 이르러 95%의 인구가 카톨릭 신자로 등록했다. 그리하여 90% 이상의 카톨릭 인구를 가진 동티모르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카톨릭 인구밀도가 높은 나라가 되었다. (사진: 합병시절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휘장)
동티모르는 특별히 인도네시아 정부의 이주정착 프로그램이 가장 활발하게 적용되는 지역이 되었다. 이주정착 프로그램은 기본적으로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의 주민들을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으로 이주시켜 정착시키는 제도다. 신질서 정부 치하에서 보도 매체에 대한 강력한 검열로 인해 동티모르로 이주하려는 자바와 발리의 가난한 농부들은 동티모르가 격렬한 분쟁지역임을 알지 못했다. 현지에 도착한 이주민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동티모르 저항군의 공격목표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욱이 동티모르인 소유의 막대한 토지를 국가가 강제로 수용해 이주정착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토지를 강탈당한 현지 주민들이 자신들의 존재에 대해 이를 갈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주자들 상당수가 그런 상황을 견디지 못해 이주를 포기하고 중도에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티모르에 남은 이주자들은 결과적으로 동티모르의 인도네시아 합병에 적극적으로 기여한 셈이 되었다. 1993년엔 662가구의 이주가정(2,208명)이 동티모르에 정착했고 1990년대 중반까지 교사와 공무원으로 파견된 이들을 포함해 약 15만 명의 인도네시아 이주자들이 동티모르에 유입되었다. 사업에 눈을 뜬 이주자들이 현지 산업들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이주자들에 대한 동티모르인들의 분노는 더욱 커져갔다.
포르투갈인들이 독점하던 상업적 이권들은 침공 이후 인도네시아인들에게 넘어갔다. 서티모르와의 경계선은 서티모르 농부들이 대거 경계를 넘어오면서 사실상 유명무실해졌고 1989년엔 이 지역에 민간투자를 유치하기 시작했다. 도시경제는 점차 남부 술라웨시에서 유입된 부기스인(Bugis), 마카사르인, 부톤인(Butonese) 사업가들의 손아귀 속에 들어갔다. 한편 동티모르의 생산품 수출은 서로 손잡은 군과 인도네시아 사업가들의 배를 불렸다. 군이 운영하는 데녹(Denok)이라는 회사는 나무 샌들 수출, 호텔업, 생필품 수입 등 돈 되는 사업 대부분을 독점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이윤이 큰 것은 동티모르의 대표적 환금작물인 커피 수출의 독점이었다. 인도네시아 사업가들은 데녹이나 군이 독점하지 않은 사업분야이면서 포르투갈 식민지 시절부터 인도네시아에 수출하던 현지 제조업체들을 장악했다.
이러한 정책에 대한 비판이 일자 인도네시아 정부는 첫 반응으로써 자신들이 동티모르의 의료, 교육, 통신, 운송 및 농업분야 개발을 위해 자금지원을 한다는 부분을 강조했다. 잘 살게 해줬으니 좀 가져가도 되지 않느냐는 논리였다. 그러나 동티모르는 포르투갈의 식민지로서 착취당하던 지난 수 세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가난했고 인도네시아 비평가 조지 아디쫀드로(George Aditjondro)는 강점기 초창기 수년 간의 갈등이 쌀과 커피 생산량, 가축들의 개체 수를 크게 떨어뜨렸다고 지적했다. 다른 비평가들은 도로건설과 같은 사회간접자본 개발이 인도네시아군의 이동을 원활케 하거나 사기업들의 이익을 위해 편향되어 있음을 지적했다. 인도네시아군이 주요 비즈니스를 독점하고 있었으므로 인도네시아나 해외 개인투자자들이 이 지역에 대한 투자를 기피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1976년부터 개선책들이 시행되었지만 1993년 인도네시아 정부 보고는 동티모르의 61개 지구 중 4분의 3, 최소 절반 이상이 절대빈곤 상태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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