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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지도층의 저항 - 50인 청원 본문
50인 청원
Petition of Fifty/Petisi 50
1. 개요
50인 청원(Petisi 50)이란 수하르토 대통령이 빤짜실라 국가이념을 정적들을 공격할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반대의견을 밝힌 문서를 말한다. 1980년 5월 5일 “우려의 포현”(expression of Concern / Ungkapan Keprihatinan)이라며 발표된 이 서류에는 전 육군참모총장 나수티온, 전 자카르타 주지사 알리 사디킨(Ali Sadikin), 전 총리 부르하누딘 하라합(Burhanudin Harahap), 모하마드 낫시르(Mohammad Natsir) 등을 포함한 50명의 저명인사들이 서명했다.
청원에 참여한 이들은 수하르토가 자신을 마치 빤짜실라의 화신처럼 인식하여 자신에 대한 비판을 국가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이며 빤짜실라 이념을 “정적들을 위협할 도구”로 여겼고 군이 계획한 명예롭지 못한 일조차 승인해주고 군인 서약과 맹세가 헌법보다 위에 있으며 군에게 수하르토의 판단에만 의거해 적과 동지를 나누도록 선택하도록 강요했다고 비판했다.
2. 배경
공산당같은 좌익과 이슬람 정치세력 같은 우익으로부터의 사상적 위협을 피할 목적으로 신질서 정부는 1978년 건국이념인 빤짜실라에 자신들의 의지를 가미해 정부와 부처, 학교, 직장 등에 주입시키려 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지식인들의 비판과 조롱을 불러왔다.
1980년 3월 27일에 있었던 인도네시아 국군(ABRI) 사령관 전체 회합에서 수하르토 대통령은 건국이념인 빤짜실라과 1945년 헌법 수호에 헌신할 것을 약속한 바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군이 하나의 사회정치적 세력으로서 빤짜실라 이념과 1945년 헌법 수호의지를 증명한 올바른 파트너들을 선택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일단의 사회정치적 세력들이 이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말했다. 그는 얼마 후 특수부대 창설기념일 연설에서도 이 같은 생각을 다시 한번 반복해 강조했다. 이 연설들은 강렬한 비판을 불러왔고 소위 ‘50인 청원’이라는 것까지 나오게 되는데 이는 인도네시아 사회에 영향력 있는 저명인사 50명이 수하르토의 연설을 비난하며 함께 연서한 문서다.
3. 문서 전문
우려의 표현 (Ungkapan Keprihatinan)
전능하신 신의 축복 속에서 지난 총선에 표를 던진 유권자 집단의 하나로서 우리는 지난 1980년 3월 27일 뻐깐바루(Pekanbaru)에서 열린 전군 사령관 회합과 1980년 4월 16일 찌잔둥(Cijantung)에서 있었던 코파산다(Koppassandha-이전 RPKAD, 현재 Kopassu(특전사)) 본부에서 수하르토 대통령이 한 연설내용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합니다. 우리는 우려하는 부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a) 날로 부담이 가중되는 상황에서도 국가개발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우리 국민들 사이에 빤짜실라 이념을 보존하려는 한 축과 이 빤짜실라 이념을 다른 것으로 교체하려는 다른 축 사이의 양극화가 발생하고 있는 것처럼 표현하는 부분입니다. 이는 사회구성원들 사이에 새로운 갈등을 촉발시킬 우려가 있습니다.
b) 빤짜실라 이념을 정적들을 위협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 역시 우려되는 부분입니다.
실제 건국의 아버지들은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빤짜실라 이념에 국가 통합의 의지를 담았음을 기억합니다.
c) 헌법 제7조[군의 맹세]와 군인서약이 헌법보다 우선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이유로 1945년 헌법을 제한하려는 당국의 도저히 칭찬할 수 없는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표현을 우려합니다.
d) 군으로 하여금 사회 전반의 모든 그룹들과 함께 하지 말고 당국의 판단에 근거해 적과 동지를 구분하라고 촉구하는 표현에도 우려를 표합니다.
e) 수하르토 대통령 스스로가 빤짜실라 이념의 화신이며 자신에 대한 어떤 식의 비난도 빤자실라 이념에 대한 반대로 간주한다는 뉘앙스 역시 우리는 우려를 표합니다.
f) 무장봉기와 국가전복, 침투 또는 다가오는 총선을 저해하는 악의적 책동이 진행되고 있다는 발언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합니다.
수하르토 대통령의 이러한 연설들이 담고 있는 사고방식은 국정과 다가오는 총선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바 우리는 국민대표의회(DPR)와 국민자문의회(MPR)가 1980년 3월 27일과 4월 16일 대통령 연설에 대해 올바르게 반응할 것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1980년 5월 5일, 자카르타
서명인
Ø HM. 카말(H.M. Kamal)
Ø 아흐맛 유누스 모꼬긴타 중장(Letjen Ahmad Yunus Mokoginta)
Ø 수잇노 수키모(Suyitno Sukirno)
Ø M.야신 예비역 중장(Letjen (purn.) M. Jasin)
Ø 알리 사디킨(Ali Sadikin)
Ø 까스만 시오디메죠 교수(Prof. Dr. Mr. Kasman Singodimedjo)
Ø M.라잡 랑가솔리(M. Radjab Ranggasoli)
Ø 바크룬 마르토수까르토 (Bachrun Martosukarto SH)
Ø 압둘 무티-반둥 소재 (Abdul Mu'thi SH (Bandung))
Ø M.아민 엘리(M. Amin Ely)
Ø HM 사누시 (Ir. H.M. Sanusi)
Ø 모하마드 낫시르(Mohammad Natsir)
Ø 이브라힘 마딜라오 (Ibrahim Madylao)
Ø M. Ch 이브라힘(M. Ch Ibrahim)
Ø 부스타만 (Bustaman SH)
Ø 부르하누딘 하라합 (Burhanuddin Harahap)
Ø SK 뜨리무르티 박사 (Dra S.K. Trimurti)
Ø 크리스 시너르 케이 띠무 (Chris Siner Key Timu)
Ø 막디르 이스마일 (Maqdir Ismail)
Ø 알렉스 유숩 말릭 (Alex Jusuf Malik SH)
Ø 율리우스 후세인 (Julius Hussein SE)
Ø 다르샤프 라흐만 (Darsjaf Rahman)
Ø 슬라멧 브라따나타 (Slamet Bratanata)
Ø 엔디 샤프루딘 (Endy Syafruddin)
Ø 와크디앗 수까르디 (Wachdiat Sukardi)
Ø D. 왈란다우 여사 (Ibu D. Walandouw)
Ø 후겡 이맘 산또소 (Hoegeng Imam Santoso)
Ø M. 스리아민 (M. Sriamin)
Ø 에디 하리요노 (Edi Haryono)
Ø AH 나수티온 (Dr. A.H. Nasution)
Ø AM 파트와 박사 (Drs. A.M. Fatwa)
Ø 인드라 K. 부데나니 (Indra K. Budenani)
Ø 술라이만 함자 박사 (Drs. Sulaiman Hamzah)
Ø 하리요노 (Haryono)
Ø S. 유숩(S. Yusuf)
Ø 이브라힘 G. 자키르 (Ibrahim G. Zakir)
Ø 에즈라 MTH 샤 (Ezra M.T.H Shah)
Ø 쟈릴 라뚜쫀시나-수라바야 (Djalil Latuconsina (Surabaya))
Ø 조디 하삐-수라바야 (Djoddy Happy (Surabaya))
Ø 바끄리 AG 띠아니안 (Bakri A.G. Tianlean)
Ø 유딜헤리 유스땀 박사 (Dr. Yudilherry Justam)
Ø 도디 Ch 수리아디레자 박사 (Drs. Med. Dody Ch. Suriadiredja)
Ø 쇼판디 자카리아 (A. Shofandi Zakaria)
Ø 바카르 무이드 (A. Bachar Mu'id)
Ø 마휴딘 나와의 (Mahyudin Nawawi)
Ø 샤리푸딘 쁘라위라느가라 (Syafruddin Prawiranegara, SH)
Ø 마나이 소피아안 (Manai Sophiaan)
Ø 모하마드 나지르 (Mohammad Nazir)
Ø 안와르 하리요노 (Anwar Harjono)
Ø 아지스 살레 (Azis Saleh)
Ø 하지 알리 악바르 (Haji Ali Akbar)
4. 정부 반응
대통령이 이 두 연설을 통해 무엇을 의미하려 했는지 국회의원들을 통해 대통령에게 질문할 목적으로 작성한 이 청원서는 1980년 5월 13일 국민대표의회(DPR)에서 낭독되었다. 낭독을 주도한 의원들의 중심엔 아지스 살레 퇴역소장(by Maj. Gen. (ret.) Dr Azis Saleh)이 있었다. 국회는 대통령에 보낼 질의서를 작성했다. 국회는 국회와 정부를 포함한 각계의 관심을 끌기 충분한 중요 사안들을 담은 이 ‘우려표명’에 대통령이 동의하는지, 그리고 제기된 사안들에 대해 인도네시아 국민들이 포괄적이고도 세세한 설명을 들을 권리가 있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이 질의서는 서한 형식으로 7월 14일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 이 질문들은 의회에서도 다양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수다르지(Soedardji)의원은 대통령이 이 질문들에 대답할 의무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당 의원인 안와르 누리스(Anwar Nuris)는 그것이 통상 헌법절차의 일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1980년 8월 1일, 수하르토는 국회 대변인 다리앗모(Daryatmo)에게 보낸 답변서에 “우려 표현”을 불러 일으킨 두 연설문을 동봉했다. 그는 이 서한에서 연륜 높은 의원들이라면 누구나 다 이 연설들의 의미를 이해할 것이라고 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변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현행 국회 규정과 절차에 따라 적절한 국회내 위원회를 통해 그 질문들을 던져 달라고 요구했다. 정부는 국방장관과 군사령관들을 통해 특히 50인 청원에서 제기된 내용들에 대해 기꺼이 추가 답변을 하겠다고도 말했다. 국회 대변인은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이 답변서가 국회에서 청원서 낭독을 주도한 19명의 국회의원들의 요구에 주목하며 국회에 성의를 보인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이후 정부는 위원회들을 통제해 공개 토론을 통해 신질서 정부의 드위풍시(이중기능) 정책의 현상유지, 골카르 당과 군의 연대, 빤자실라 이념의 탁월성 등을 재차 강조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50인 청원이 지적한 사안들에 대한 답변으로 보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그해 8월 수하르토 대통령은 독립기념일 연설에서 “우리 앞에 놓은 단 하나의 유일한 길은 개발에 전력을 다하는 것입니다….(이를 위해) 우린 안정된 지역 역동성을 유지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수하르토의 반격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수하르토는 이후 자신을 비판한 이들의 여행 특권을 폐기하고 신문사들이 그들의 사진을 싣거나 그들의 발언을 옮기는 것을 금지했다. 뿐만 아니라 이 청원에 참여했던 이들은 은행 대출을 받을 수 없게 되거나 거래계약이 무산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다음은 훗날 수하르토가 한 발언이다. “난 그 소위 50인 청원이라는 짓거라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들 방식은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다구.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애국자라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
2019. 1. 5.
참고자료:
https://en.wikipedia.org/wiki/Petition_of_Fifty)
https://id.wikipedia.org/wiki/Petisi_50
http://news.detik.com/berita/942379/ali-sadikin-sang-penggagas-petisi-50
https://id.wikipedia.org/wiki/Petisi_50
https://sejarahpetisi50.blogspot.com/2016/08/sejarah-petisi-50-198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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