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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경제해결사 - 버클리 마피아 본문
(Berkeley Mafia)
1. 개요
버클리 마피아란 미국에서 공부한 일단의 인도네시아 경제학자들로 1960년대 후반 수하르토의 신질서 정부에서 고위 기술관료직을 맡았다. 그들은 1960년대 중반까지의 혹독한 경제환경과 기근의 문턱에서 인도네시아가 헤어나오게 만드는 데에 기여했다. 그들은 신질서 정권 초반에 대거 입각해 그후 30년간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그들은 냉전기간 중 미국과 인도네시아 사이 전략적 협력관계의 기초를 놓았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들 중엔 위조요 니티사스트로 (Widjojo Nitisastro), 모하마드 사들리(Mohammad Sadli), 에밀 살림(Emil Salim), 수브로토(Subroto), 알리 와르다나(Ali Wardhana) 같은 이들이 있다.
2. 기원
훗날 버클리 마피아라 불리게 되는 이들 경제학자들은 1950년 중반 모두 인도네시아 국립대학 경제학부(FEUI)를 다니는 학생들이었다. 당시 학과장은 수미트로 조요하디꾸수모 (Sumitro Djojohadikusumo)라는 경제학자로 정부에서 산업통상부 장관, 재무부 장관을 역임한 인물이다. 수미트로는 당시 경제학 학위를 가진 유일한 교수였으므로 경제학부 학생들을 제대로 교육시키기 위해 네덜란드인 교수들이나 다른 학과의 교수들을 초빙해 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당시 촉발된 서부 이리안(현 서파푸아) 분쟁으로 인해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 정부가 일촉즉발의 긴장관계에 들어서자 그나마 네덜란드인 교수들도 인도네시아를 떠나게 되었으므로 수미트로 교수는 미국 포드 재단(Ford Foundation)에 도움을 요청했다. 포드 재단은FEUI 학생들을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에 불러들여 교육시키기로 했다. 포드 재단이 준비를 마친 1957년부터 이 해외연수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1960년대 초까지 버클리 대학에서 해외연수과정을 마치고 귀국한 학생들 전원은 육군참모사령대학(SESKOAD)의 교수직에 채용되었다. (사진: 수미트로 조요하디꾸수모 교수)
한편1966년 수카르노 대통령으로부터 수뻐르스마르 서한을 받아낸 수하르토 장군은 인도네시아 국정의 전권을 쥐게 되었다. 정식 대통령이 되는 것은 아직 2년 후의 일이지만 그는 신질서 정권의 기초를 그때부터 놓기 시작했다. 1966년 8월 수하르토는 SESKOAD에서 정치-경제적 문제들과 신질서 정권이 그 문제들을 헤쳐 나갈 방안에 대한 세미나를 열었다. 이때 위조요 니티사스트로(Widjojo Nitisastro)를 위시한 FEUI 경제학자들이 이 세미나에 참석했다.
이 세미나에서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의견과 정책제안들을 쏟아냈다. 그들의 발표에 감명받은 수하르토는 그들을 초빙해 전문가팀을 구성, 국가경제와 재무의 재건작업을 시작하도록 했다.
3. 성취와 논란
1966년 10월 3일 이들 경제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자문단의 조언에 따라 수하르토는 인도네시아 경제안정과 회복을 위한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수카르노 시대가 저물어 가던 시절 인도네시아의 인플레이션은 네 자리 수에 육박했고 국가채무도 급격히 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있었던 이유는 수카르노 정권이 값비싼 기념비들을 건설하고 산업을 국유화하면서 해외 차관과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결과적으로 돈을 마구 찍어낸 것과 다름 아님) 적자예산을 메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버클리 마피아는 일부 규제완화와 인플레이션 통제, 그리고 예산의 균형을 잡는 등 보다 조심스러운 경제정책을 통해 당면문제들의 해결을 도모했다. 이 프로그램은 사회간접자본의 복구와 농업분야 개발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동시에 새로 구성된 “인도네시아에 대한 정부간 그룹”(Inter-Governmental Group on Indonesia: IGGI)의 후원으로 경제회복을 지원하는 국제 프로그램도 마련되었다.
새로운 경제 프로그램은 성공적으로 경제를 안정시켜 갔다. 인플레이션은 1966년 650%에서 1969년 13%까지 떨어졌다. 수하르토가 1968년 대통령에 취임한 후 버클리 마피아 구성원들은 수하르토 내각의 장관직이나 고문직에 포진하여 인도네시아 경제에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그들은 인도네시아 경제를 전례 없는 고속성장의 궤도 위에 올려 놓았다. 1960년대부터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아시아 경제위기에 치명적 타격을 입게 되는1997년까지 연평균 6.5%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사진: 1967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IGGI 회합)
그러나 버클리 마피아의 경제에 대한 자유분방한 접근방식을 누구나 다 지지했던 것은 아니다. 신질서 정권 내부에서도 알리 무르토포, 입누 수토워(Ibnu Sutowo), 알리 사디킨 같은 장성들의 반대에 맞닥뜨렸는데 그들은 속성상 더욱 민족주의적인 경제접근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히즈붓-타흐리르(Hizb ut-Tahrir)의 인도네시아 지부와 같은 일련의 단체들은 특히 버클리 마피아들이 국가 산업을 기꺼이 민영화할 의도가 있었다는 점에서 그들을 반역자로 취급하기까지 했다. 1970년대 중반 오일 붐이 시작되면서 수하르토는 경제적 민족주의자들의 말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버클리 마피아의 영향력은 축소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유가하락과 함께 인도네시아 경제성장율이 급격히 감소하자 수하르토는 다시 이들 버클리 마피아에게 돌아갔다. 버클리 마피아는 자유화, 규제완화를 주도했고 그 결과 인도네시아 경제가 다시 살아나자 이번엔 정치적 반대자들이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이번엔 경제적 민족주의를 옹호하는 수다르모노(Sudharmono)와 기난자르 까르타사스미타(Ginandjar Kartasasmita), 그리고 기술력 중심의 경제발전을 원하는 BJ 하비비(BJ Habibie)였다. 이번에도 수하르토는 경제 민족주의자들을 싸고 돌았고 버클리 마피아들은 또다시 총애를 잃었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로 인해 인도네시아 경제가 무너져 내리는 동안 사람들은 신질서 정권의 일부였던 이들 버클리 마피아에게 비난의 화살을 쏘았다. 그후 개혁정부엔 오직 위조요만이 내각에 남아 명맥을 유지했다.
4. 버클리 마피아의 면면
수하르토가 하야한 이후 버클리 마피아 중 오직 위조요만이 하비비 대통령과 와히드 대통령(구스 두르) 그리고 메가와티 대통령의 경제고문으로서 내각에 남아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모하마드 사들리(Mohammad Sadli)는 200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저명한 경제 해설가로 이름을 남겼고 에밀 살림(Emil Salim)은 줄곧 국내외의 환경 문제와 관련한 활동을 계속했다.
버클리 마피아의 핵심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위조요 니티사스트로: 국가개발기획부 장관/국가개발기획본부(BAPPENAS) 의장 (1967-1983), 경제, 재무, 산업 조정장관 (1993-1998) BAPPENAS 고문(1983-1998), 대통령 경제고문(1993-1998), 경제보좌진 수장(1999-2001) 역임
- 알리 와르다나(Ali Wardhana): 재무부 장관(1973-1983), 경제, 재무, 산업 조정장관 (1983-1988) 역임
- 모하마드 사들리: 제3차 개발내각의 광업부 장관 역임
- 수브로토(Subroto): 인력, 이주 및 협력부 장관 (1973-1978), 광물에너지 장관 (1978-1988)
- 에밀 살림: BAPPENAS 부의장 (1967-1971), 국가기구 장관 (1971-1973), 교통, 통신 및 관광부 장관 (1973-1978), 개발감독 및 환경부 장관 (1978-1983), 인구 및 환경부 장관 (1983-1993) 역임
2019.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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