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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도 떨어뜨린 수미트로 장군 (General Sumitro) 본문
나는 새도 떨어뜨린 수미트로 장군 (Jend. Sumitro)
수미트로는 수하르토의 신질서 정권 초반, 가장 눈에 띄는 장군이었으나 말라리 사태가 벌어진 1974년 1월 수하르토의 눈밖에 나 급속히 정치적 몰락의 길을 걸었다.
수미트로는 1928년 1월 13일 동부자바의 쁘로볼링고(Probolinggo)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설탕공장 창고의 경리였고 동시에 인도네시아 국민당(PNI)의 활동가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수미트로는 쁘산트렌에서 이슬람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수미트로는 일본군 보조부대인 PETA에 입대했다. 그는 보고르에서 기초훈련을 받으면서 규율을 잘 지키지 않는 생도라는 평판을 얻었지만 1944년 쁘로볼링고의 고향에서 마침내 PETA 소대장으로 임명될 정도의 점수를 얻을 수 있었다. (사진: 수미트로 장군 – 퇴임 후 리구나스 그룹 시절)
인도네시아의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후 수미트로는 쁘로볼링고에서 국민치안대(BKR) 민병대를 조직했고 1945년 10월 5일 인도네시아군이 정식 창설되자 정규군 소대장이 되었다. 1948년 수미트로는 부대대장이 되었다가 말랑(Malang)시의 군사령관으로 승진하는 등 단기간에 승승장구했다. 인도네시아로 주권이 이양된 후 수미트로는 재5지역군 브라위자야 사단 위수지역인 동부자바의 고향에 계속 주둔했다.
이 단계에서 그는 일천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이미 굉장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오드 찰스 윈게이트(Orde Charles Wingate-2차 대전 당시 버마전선에서 활약한 영국군 장교)가 버마에서 그런 것처럼 그도 인도네시아의 독립전쟁 중 게릴라전 전략을 성공적으로 운용했다. 인도네시아가 네뎔란드로부터 주권을 넘겨받던 1949년은 그가 21세가 되던 해였다. 그는 시도아르죠, 모조꺼르토, 빠순단 등지에서 과격 민병대들을 소탕하는 데에도 수완을 발휘해 수카르노 대통령이 그를 불러 그 성과를 개인적으로 치하하기도 했다.
1952년 수미트로는 반둥의 육군참모사령대학(SSKAD)에 다니던 중 육군사령관 AH 나수티온 대령이 대통령궁을 탱크로 둘러싸고 수카르노 대통령에게 의회(DPR)해산을 요구한 10월 17일 사태에 휘말렸다. 수카르노 지지자였던 수미트로는 당시 반둥에서 사태의 소식을 전해 듣고 또 다른 자바인 장교들과 함께 학교를 이탈했는데 나수티온 측 께말이드리스(Kemal Idris)가 이끄는 1개 연대가 추격했지만 그들은 결국 추격을 따돌릴 수 있었다. 동부자바로 탈출한 수미트로는 3개 대대를 넘겨 받아 자카르타의 항명사태가 지방까지 번지면 중앙정부를 위해 기동하라는 명령을 받지만 상황은 곧 진정국면을 맞았고 그는 다시 반둥으로 돌아가 학교과정을 마저 마쳤다.
SSKAD를 마친 수미트로는 제5지역군에서 군경력을 계속 쌓았다. 1952년 그는 제5지역군 사령관 제2참모였고 1953년에는 연대 참모장이 되었다가 1955년엔 연대장으로 승진했다. 수미트로는 1956년 반둥에 돌아와 SSKAD 교관으로 부임하면서 동시에 장기장교과정을 이수했다. 그런 후 이번엔 미국으로 건너가 포트 베닝의 미육군학교를 다녔다. 그는 기회만 있으면 고등군사교육을 이수하는 데에 남다른 집착을 보였다. 미국에서 귀국한 그는 육군병기창 사령관이 되어 다시 반둥에 부임했다.
그는 1963년까지 같은 보직을 맡고 있다가 육군기획위원회 의장이 되는데 그 사이도 더 폭넓은 군사교육을 받을 기회를 놓지지 않고 1963년엔 군 참모사령대학을 다녔고 그 후 서독 함부르크의 피룽삭아카데미 데어 분데스베르(Führungsakademie der Bundeswehr)에서도 교육을 받았다.
그의 풍부한 군사교육경험은 동료들도 모두 인정하는 바였다. 그는 그간에도 사령관 직위를 제안받았으나 줄곧 거절하다가 1965년 마침내 제9지역군(Kodam) 사령관직을 수락하고 동부 깔리만탄의 방위를 책임졌다. 이때는 말레이시아 대결정책이 진행되며 깔리만탄의 국경에서 영연방군과 실제로 전투가 벌어지던 시기였다. 인도네시아 전투병 주축에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인도네시아 공산당 조직과 연루된 장교들을 체포한 일로 수카르노가 그를 자카르타로 불러들여 징계한 적도 있었는데 이로 인해 그는 반공주의자로서의 평판도 신속히 구축했다.
1965년 9월 30일 사태가 벌어진 후 수미트로는 동부 깔리만탄에서 자카르타로 불려와 육군사령관 수하르토 소장 휘하의 참모가 되었다. 수하르토는 이때 수카르노와 권력투쟁을 시작한 상태였으므로 서로 다른 종족출신의 장교들을 자신의 참모로 기용하면서 군 장교들의 지지를 확보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수미트로는 바수키 라흐맛(Basuki Rahmat) 장군과 함께 동부자바를 대표하는 인물이었고 수하르토를 굳건히 지지했다. (사진: 바수키 라흐맛 장군)
1966년 3월 정치상황은 더욱 팽팽한 긴장을 더해갔다. 수하르토는 수미트로를 포함한 몇몇 육군장교들을 불러모아 가진 회합에서 수카르노를 외무상 수반드리오 같은 내각의 몇몇 장관들로부터 격리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리하여 1966년 3월 11일에 열리는 각료회의를 기해 육군공수연대(RPKAD)를 동원해 이들 각료들을 체포하려는 계획이 수립되었다.
수미트로는 해당 명령서를 만들어 해당 부대에게 내려보내는 역할을 맡았다. 1966년 3월 11일 예정대로 각료회의가 열렸고 신원미상의 부대를 가장한 RPKAD가 기동하기 시작할 무렵 수미트로는 자택에머물고 있었다. 그날 아침 수하르토의 개인 비서관 중 한 명인 알람샤 라뚜 쁘라위라느가라(Alamsya Ratu Prawiranegara)가 수하르토를 대신해 전화를 걸어 수하르토가 각료 체포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으니 즉시 부대를 물리라는 명령을 전달했다. 수미트로는 이미 작전이 시작되었으므로 그 명령을 수행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대답했다. 그 결과 상황은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보고르 궁으로 도피한 수카르노가 그곳까지 찾아온 세 명 장성의 요구를 받고 수하르토에게 전권을 위임한다는 취지의 '수뻐르스마르' 서한을 작성해 주면서 정국 주도권 역시 수하르토에게 함께 넘어가게 된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렇게 굴러갔다.
수하르토는 이제 수카르노의 권력을 더욱 약화시킬 방안을 모색하면서 지역사령관들을 믿을만한 장교들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1966년 중반 수미트로도 제8지역군 브라위자야 사단장으로 선발되어 동부자바로 돌아갔다. 동부자바 전역의 방위를 책임지는 자리였다. 하지만 보자 중요한 임무는 동부자바가 수카르노의 고향이 있는 곳이었으므로 수카르노에 대한 지역의 지지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수미트로는 보란 듯이 1966년 하반기까지 현지 친수카르노 정서를 현저히 역화시켰다.
1967년 수하르토가 대통령 대행으로 지명되자 수미트로는 다시 자카르타 발령을 받았다. 이번엔 육군사령부의 작전참모직이었다. 그는 1969년까지 2년 동안 이 직책을 소화했다. 수미트로는 국방장관의 참모장이 되었는데 당시 수하르토가 국방장관직도 겸임하고 있었다. 1년 후 그는 신질서 정권의 비밀경찰조직인 ‘치안질서 복구사령부 (Komando Pemulihan Keamanan dan Ketertiban-Kopkamtib)의 부사령관이 되었다.
수미트로는 이어 1973년 동 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승진하면서 인도네시아 전군 부사령관의 지위에 오르면서 경력의 정점을 찍었다. 그는 Kopkamtib 사령관으로서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고 그의 등엔 '수하르토의 2인자'라는 꼬리표가 붙은 상태였다. 이때부터 그는 보다 원대한 꿈을 꾸기 시작한 듯하다. 수미트로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Kopkamtib 부사령관에 자기 사람을 앉히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의향을 간파한 수하르토는 자신의 가까운 동료인 수도모 제독(Admiral Sudomo)을 Kopkamtib 부사령관으로 발령했다. 여기서 둘 사이의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사진: 치안질서 복구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되는 수미트로 장군)
이제 수하르토는 두 번째 대통령임기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는데 그의 인기는 수카르노를 하야시키고 처음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 비해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1973년이 되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부패와 인도네시아 경제에서 외국인투자의 비중, 그리고 수하르토의 개인비서관들(Aspri)들이 휘두르는 막강한 권력에 대해 특히 대학가를 중심으로 불만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라이벌 정치 엘리트들이 부상하며 수하르토의 자리를 위협했다. 한편의 수미트로는 정치에 대한 군의 개입을 차단해 군이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기를 원했다. 그의 생각대로 된다면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던 군의 위상은크게 위축될 터였다. 하지만 그의 반대편에 서있던 라이벌이자 앞서 언급한 대통령의 개인비서관 아스쁘리(Aspri)중 한 명이었던 알리 무르토포 장군은 군이 계속 정치에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3년 말이 다가오면서 수미트로는 정부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는 정권에 대한 불만과 비난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었으면서도 이를 방치했고 오히려 대학강연을 통해 새로운 리더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아스쁘리에 대한 보다 강력한 비난을 부추기기도 했다. 1973년 그가 결혼법의 국회통과를 중재하는 모습에서 더욱 강대해진 그의 권력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이 법이 너무 세속적이라 생각하는 무슬림 조직들과 정부, 두 만만찮은 세력 사이에서 수완좋게 중재를 성공시켰던 것이다.
1973년이 저물어갈 무렵 수하르토는 수미트로와 알리 무르토포 사이에 화해를 주선했지만 몇 차례에 걸친 회합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견해 차이만 확인할 뿐이었다. 수미트로는 점점 더 도발적인 자세를 취했고 그 일환으로 1974년 새해 첫날 수하르토가 권좌에 앉는 것을 도왔으나 나중에 거세되고 만 나수티온과 사르워 에디 위보워, 두 퇴역장군들을 공개적으로 방문해 인사하는 모습을 보였다.
수하르토와 독대하는 알리 무르토포
1974년 1월 14일 일본수상 타나카 카쿠에이가 자카르타를 방문했다. 그의 방문은 인도네시아 경제에서 외국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을 비난하던 이들에겐 시위를 통해 불만을 표출할 둘도 없는 기회였다. 그러나 1월 15일과 16일 시위는 폭력적으로 변질되면서 말라리 사태라 불리는 폭동이 되어 자카르타에서 11명이 사망하고 300여명이 다치고 775명이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타나카 수상이 떠난 후 수미트로는 인도네시아 국립대학의 학생회를 찾아가 학생회장 하리만 시레가르(Hariman Siregar)를 협박해 시위를 중단하라는 라디오 방송을 내보냈다. 하지만 너무 때늦은 조치였다. 그는 시위를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번지도록 방치한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 인물로 여겨져 이미 국민적 신용을 잃고 만 것이다. 누군가 공작원을 보내 시위대가 폭도로 변하도록 사주했을 것이란 소문이 파다했고 그건
아마도 알리 무르토포의 소행일 것이 분명해 보였지만 어쨋든 신뢰를 잃은 그는 이제 정권의 반격을 막을 방패를 잃은 셈이었다. (사진: 학창시절의 하리만 시레가르)
말라디 사태 이후 얼마되지 않아 수미트로는 Kopkamtib 사령관직을 사퇴했고 두 달 후 전군 부사령관 직에서도 사퇴했다. 수하르토는 그에게 주미 대사직을 제안하며 위로했다고 알려졌지만 수미트로는 이를 거절하면서 군생활을 완전히 마감하고 말았다.
수미트로는 은퇴 후 골프로 소일하다가 1979년 사업가가 되어 리구나스 그룹(Rigunas Group)을 세우고 자신은 감사가 되었다. 그는 비공식적으로 정치해설가이기도 했는데 무엇보다도 수하르토의 정권승계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한편 수미트로는 알리와 라이벌 관계이면서도 그를 무척 존경해, 알리라면 훌륭한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라고 훗날 말하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1998년 5월 10일 자카르타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때는 동남아 외환위기의 후폭풍이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민주항쟁과 자카르타 폭동의 형태로 터져나오던 와중이었다. 자카르타 폭동은 1998년 5월 12일 절정에 달했고 자카르타가 전쟁터처럼 변하고 수많은 인명피해와 파괴행위가 저질러진 후인 5월 21일 수하르토는 마침내 성명을 발표하고 32년간의 대통령직에서 하야했다. 만약 그가 몇 주 더 살아 수하르토의 하야 장면을 목격했다면 과연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참고자료:https://en.wikipedia.org/wiki/Sumit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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