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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질서 정권 실세 알리 무르토포(Ali Murtopo) 본문
신질서 정권 실세 알리 무르토포(Ali Murtopo)
알리 무르토포는 수하르토의 신질서 정권 전반기에 가장 눈에 띄는 군 장성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1924년 9월 23일 중부자바 꺼부멘(Kebumen)에서 태어나 중부 자바와 서부 자바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는 청소년 시절 히즈불라에 가담했으나 곧 인도네시아 군에 입대하게 된다.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중 그는 아흐맛 야니가 이끄는 여단의 참모였고 줄곧 아흐맛 야니 위하의 반뗑 레이더스(황소 유격대) 중대장이 되어 다룰이슬람 반군과 싸웠다.
1956년 그는 여전히 반뗑 레이더스 소속 지휘관이면서도 제4지역군 사령관(디포네고로 사단장) 지명전 로비를 위해 뛰어다녔다. 제4지역군은 족자와 중부자바주를 위수지역으로 하는 부대로 육군사령부가 이미 후보를 내정한 상태였지만 제4지역군 디포네고로 사단 내에 요가 수가마(Yoga Sugama)가 이끄는 일단의 장교들은 수하르토 중령을 차기 사령관으로 밀고 있었다. 요가는 디포네고로 사단 내의 많은 장교들을 만나 지지를 요청했고 알리는 그의 편에 서서 수하르토의 지명을 위해 뛰었다. 충분한 지지를 모은 요가가 자카르타의 육군사령부를 찾아가 디포네고로 사단의 병사들이 누구를 사령관으로 원하는지를 알렸고 육군사령부는 이를 전격 수용해 수하르토를 신임사령관으로 지명했다. (사진: 요가 수가마)
그 보상으로 알리는 수하르토의 지역보좌관이 되었고 요가는 정보보좌관의 직위를 얻었다. 금융 부분을 담당한 수조노 후마르다니까지 포함해 이들 네 명은 함께 승진했다. 1959년 알리는 수마트리의 분리주의 반군집단 PRRI 진압에 가담했다. 그는 요가가 이끄는 연대의 참모장으로 수마트라 전장에 나간 것이다.
1959년은 수하르토가 불법행위에 연루되어 제4지역군 사령관직에서 해임되던 때이기도 했다. 알리는 제4지역군(TT-IV)이 이름을 바꾼 제7지역군(KODAM VII)/디포네고로 사단에 계속 근무하다가 1961년 초에 다시 수하르토와 재결합했다. 수하르토는 육군참모총장의 작전참모가 되어 있었고 AH 나수티온 장군은 언제라도 전장에 투입가능한 준비상태를 유지하는 전략자원인 육군일반예비사령부(Caduad) 사령관이 되어 있었다. 알리는 육군일반예비사령부의 부참모장 직을 맡았다. 1963년 Caduad는 그 이름을 육군전략예비사령부, 즉 Kostrad로 이름을 바꿨다.
1963년 시작된 말레이시아 대결정책 국면에서 Kostrad는 말레이시아와의 전쟁목적으로 꾸려져 공군사령관 오마르 다니(Omar Dhani)가 사령탑을 맡은 비상전역사령부(Kolaga)에 수하르토가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므로 그가 뭔가 핵심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되었다. 그러나 수하르토를 포함한 육군 수뇌부는 대체로 이 대결정책에 열의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발목을 잡아 끌었다. 당시 Kostrad의 정보참모직을 맡고 있던 알리는 그 상황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알리는 자신의 특수작전부대(OPSUS)를 통해 대결정책에 대한 인도네시아 육군의 입장을 말레이시아 정부에 비밀리에 전달하면서 대결정책에 대한 평화적 해결책을 검토해 줄 것을 요청했다.
1965년 10월 1일 알리는 새벽부터 득달같이 Kostrad 사령부에 불려가 급속히 전개되는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그날 새벽 6명의 장성들이 대통령궁과 국가기념탑(MONAS)광장, 인도네시아 국영라디오방송(RRI) 건물을 장악한 신원미상의 부대에게 납치된 것이다. 당시 Kostrad사령관이 되어 있던 수하르토가 막 사령부에 들어서자 스스로를 ‘9월 30일 행동’(Gerakan 30 September)라고 부르는 집단의 성명이 마침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왔다. 자신들이 장성위원회의 쿠데타를 저지했다는 내용이었다. 육군사령관 아흐맛 야니를 찾을 수 없었으므로(야니는 그날 새벽 이미 사망) 상황을 장악하기 위해 수하르토는 자신이 육군지휘권을 행사하기로 했다. (사진: 9월 30일 사태로 납치살해되어 유기된 장성들의 시신수습 장면)
첫 번째 한 일은 자카르타 시내 전략요충지를 장악한 부대들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었다. 그들이 중부자바와 동부자바에서 차출된 454대대와 530대대라는 것이 곧 밝혀졌다. 이를 알게 된 수하르토는 알리를 454대대에 보내 협상을 벌였다. 알리는 오후 6시까지 항복하라는 수하르토의 의지를 454대대에게 전달했으나 협상은 사실상 실패해 454대대는 항복하는 대신 9월 30일 행동의 지휘소가 설치되어 있던 할림공군기지로의 철수를 택했다. 하지만 어쨋든 1965년 10월 2일 자카르타 시내 요충지의 통제권을 탈환한 것은 분명 수하르토의 승리였다.
쿠데타가 수습된 후 수하르토가 육군사령관으로 임명되자 알리는 그의 개인 참모단의 일원이 되었고 요가와 함께 정보 분야을 관할했다. 알리는 수하르토가 권좌에 오르는 과정 내내 그의 곁을 지켰다. 1966년 초 육군은 학생 시위대의 수카르노 대통령 반대시위를 부추겼고 알리는 Kostrad 병력을 동원해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부대들로부터 시위대를 호위했다. 정치적 혼란은 1966년 3월 11일 수카르노가 수뻐르스마르(Supersemar) 서한을 통해 전권을 수하르토에게 위임하면서 진정되었다. 전권을 손아귀에 쥔 수하르토는 이제 말레이시아와의 대결정책을 완전히 종식시키려 했다. 알리는 외무상 아담 말릭(Adam Malik)이 공식적인 외교수순을 밟기에 앞서 먼저 말레이시아와의 친선회복을 위한 기초작업을 마쳤다.
1967년 수하르토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지명되고 곧 이어 1968년 임시 국가자문의회 (MPRS)에서 정식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알리의 권한 역시 괄목할 만큼 커졌다. 1967년 알리는 국가정보조정기구(BAKIN)의 부위원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대통령의 개인비서관(아스쁘리-Aspri) 집단의 일원이며 동시에 특수작전부대(OPSUS)의 수장이라는 직책때문이었다. 그와 수요노 후마르다니 같은 아스쁘리 핵심멤버들에게 수하르토는 정기적으로 조언을 구했고 특히 알리의 제안을 쉽게 수용했는데 알리의 권력은 거기에서 나왔다. 그는 이제 대통령 이외의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1969년 그는 사르워 에디 위보워(Sarwo Edjhie Wibowo)와 함께 서부 파푸아인들이 인도네시아와의 합병에 찬성표를 던지도록 만들라는 임무를 받았다. 이를 담보하기 위해 알리는 서부 파푸아인 전체를 대신해 간접투표에 나설 1,025명의 대표자 집단인 ‘자유선택행동을 위한 자문의원회’(Dewan Musyawarah Pepera)에 전력을 집중하여 목표를 달성해 냈다.
물론 그는 신질서 정권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들도 단행했다. 1970년 그는 인도네시아 국민당(PNI)과 인도네시아 이슬람당(Parmusi)의 당내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두 경우 모두 각 당의 지도부가 수하르토 정부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지 못하도록 만들 목적이었다. 1971년 알리는 인도네시아 사회의 정치적 지향성을 제한하고 정당들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해 “겉도는 대중”(Floating Mass)이라는 개념을 대중들에게 주입시키려 했다. (사진: 수하르토 장군 뒤에 선 사르워 에디 위보워 대령)
그중에서도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수하르토가 대통령으로 재선될 수 있는 매커니즘을 구축했다는 점일 것이다. 수하르토는 기능집단들의 연합체인 골카르 당을 자신의 정당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한 후 알리를 시켜 골카르당을 1971년 총선을 위해 준비시킬 것을 명령했다. 알리는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개발, 안정, 질서, 통일 등의 개념을 갈아넣어 당의 기초를 닦았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확실한 선거승리를 담보하기 위해 그는 정부가 뒤에서 골카르당을 지원하게 만들고 골카르당에 투표할 군중들을 동원했다. 또한 그는 정부 하급관리들에게 골카르 당이 얻어야 할 표 숫자를 할당하여 목표를 달성하려 했다. 그의 이러한 조치는 십분 효과를 발휘해 1971년 7월 5일 총선에서 골카르당은 62.5%의 표를 얻었다. 이는 1973년 국민자문의회(MPR)에서의 수하르토 대통령 재선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비록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해도 알리는 기본적으로 인기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정권에 대한 비평가들은 알리와 그의 아스쁘리 동료들은 맡은 바 책무의 불분명성에 비해 그들이 갖게 된 과도한 권력으로 인해 오히려 질시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그는 자신의 채널을 통해 자신의 동료를 주지사 자리에 추천했는데 사실 정식 절차를 밟자면 주지사 지명을 대통령에게 추천하는 것은 내무부 장관이 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권력에 정점에 선 사람에게 타인의 박탈감이나 증오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 법이다.
수하르토가 두 번쨰 대통령 임기를 시작할 때엔 수카르노를 하야시키고 처음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 비해 인기가 형편없이 떨어진 상태였다. 학생들은 인도네시아 경제에 드리운 외국의 그림자, 부패, 아스쁘리가 장악한 권력 등을 비판하며 불만을 표출했고 정치적 라이벌이 등장하기도 했다.
알리는 수하르토의 총애를 입어 승승장구하던 또 다른 육군장성 수미트로 장군을 라이벌로 인식해 물밑 권력투쟁을 벌였다. 알리는 군이 계속 정치에 개입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대체로 수하르토의 생각과 궤를 같이 한 반면, 인도네시아 비밀경찰 조직인 치안질서 복구사령부(Kopkamtib) 사령관으로서 어쩌면 이제 수하르토를 뛰어 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머리가 커버린 수미트로 장군은 군이 정치에서 손을 떼고 본연의 국방의무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미트로는 1973년 말이 다가오면서 정부와 분명한 각을 세우기 시작했고 수하르토의 정적인 AH 나수티온, 사르워 에디 위보워 같은 퇴역장성들에게 새해 인사를 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사진: 수미트로 장군(왼쪽)과 알리 무르토포 장군(오른쪽))
그러다가 1974년 1월 14일 일본 타나카 수상이 인도네시아를 국빈방문할 때에 맞춰 학생들 중심의 시위대가 15일과 16일 그간의 불만을 표출하며 거리로 나섰고 시위는 폭동으로 변질되어 큰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가져왔다. 일견 일차적 책임이 사태를 부추긴 수미트로 장군에게 있는 듯 보였는데 시위가 폭력화된 것이 수미트로 장군이 고의든 실수든 시위를 방치했기 때문이라는 판단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정부의 반대편에 선 수미트로 장군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알리 무르토포가 공작원을 보내 군중을 도발해 폭동으로 비화시킨 것이라 보는 시각도 있다.
타나카 수상이 귀국한 후 수하르토는 수미트로를 치안질서 복구사령관에서 해임하고 두 달 후 전군 부사령관 직에서도 끌어내렸다. 수미트로의 군생활은 결국 거기서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한편 알리로서는 좀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그 역시 이 사태에서 무사하지 못했다. 수하르토는 비평가들의 비판들 중 아스쁘리에게 집중된 권력 등 몇몇 부분에 대해 성의있는 반응을 보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수하르토는 아스쁘리를 해체하고 알리가 쥐고 있던 권력의 대부분을 뺏어 버렸다.
아스쁘리가 해체된 후 무르토포는 정권 초기처럼 권력을 마구 휘두르진 못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수하르토에게 충성을 다했고 수하르토 역시 그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았다. 동티모르가 포루투갈로부터 독립하게 되자 무르토포는 1975년 초 코모도 작전(Operasi Komodo)의 지휘를 맡았다. 이는 인도네시아가 군사작전을 벌이지 않고도 동티모르 내의 친 인도네시아 세력의 도움을 받아 동티모르를 인도네시아에 합병하도록 공작하는 일종의 비밀작전이었다. 그는 외교전에도 뛰어들어 특별 사절단으로 포르투갈에 날아가 동티모르와 포르투갈 식민당국의 의견을 타진한 끝에 1975년 8월, 동티모르에 공산당 계열인 프레틸린(Fretilin) 정권이 세워져 독립국가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경고했다. 하지만 코모도 작전은 대체로 실패했고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를 전격 침공해 군사적으로 점령하게 된다.
1977년 불거진 건강문제에도 불구하고 무르토포는 여전히 미래에 대한 포부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Bakin의 수장이나 내무부 장관이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는 그 두 직책 대신 제3차 개발내각의 공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5년간 장관직을 수행했고 최고자문위원회(DPA)의 부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악화된 건강문제로 그는 1984년 5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참고자료: https://en.wikipedia.org/wiki/Ali_Murtopo)
2019.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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